그림을 왜 그리느냐고 묻는다면
그림을 왜 그리느냐고 묻는다면, 가장 먼저 튀어나올 나의 말은 ‘즐거움’이다. 그리는 즐거움! 생각만 해도 입꼬리가 조용히 귀에 걸린다. 행복했던, 그리고 다시 행복할 생각에 코끝이 찡해진다. 눈 주위에 벌써 열이 오르고, 눈알이 촉촉해진다. 온몸의 근육과 세포가 심장 쪽으로 조용히 당겨지고, 심장은 온몸을 위해 탄력 있게 움직인다. 생각만으로도 내 존재가 이렇게 선명해진다. 이것은 지난 그렸던 경험들에 대한 내 ‘몸’의 기억이다. (내 욕망과 함께 내 몸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던가!)
‘즐거움’으로 대표되는 그리기에 대한 내 감정과 기억, 그 이상의 것들은 사실 자랑할 만한 ‘즐거움’만으로 가득한 것은 아니다. 두려움, 부끄러움, 어색함과 불편함, 곤란.. 이 모든 것들로 이루어진 지극한, 있음 그 자체의 자연이다. ‘즐거움’을 ‘즐겁지 않은’ 다른 것들과 분리하여 담아놓을 수 없기 때문에 더 온전한 내 것으로 느껴진다. 덕분에 오늘도, ‘그리기’를 생각만 해도 행복해진다.
호크니는 바우하우스를 설립한 발터 그로피우스와 마찬가지로 기쁨이 예술의 필요조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잉글랜드 사람의 으스대는 태도만큼이나 즐거움에 대한 예술계의 금욕주의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개탄한다.
호크니 “한때 샌프란시스코에 있었습니다. 한 큐레이터가 내게 오귀스트 르누아르를 증오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당신의 감정은 무슨 단어로 묘사하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불쌍한 옛사람 르느아르. 그는 결코 끔찍한 일을 벌인 적이 없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그림을 그렸죠. 그런 일을 했다는 이유로 그를 증오한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끔찍합니다!”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 P_68 / 데이비드 호크니, 마틴 게이퍼드
내 가방 안에는 항상 작은 드로잉북과 철제 필통이 있다. 필통 안에는 종류가 다른 연필 4자루가 있고, 가방 안 펜을 수납하는 주머니에는 커터칼과 만년필 두 자루가 꽂혀있다. 하나는 검은색 잉크가 다른 하나에는 파란색 잉크가 담겨있다. 매일 그리지는 않지만, 항상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은, 하루를 보내는 나의 시공간을 조금 다르게 만든다. 시선과 걸음걸이, 앉아있는 자세가 달라진다.
하루에 몇 번 그릴 만한 대상을 만나고 그릴 수 있는 순간을 맞이한다.
주변을 살펴본다. 드로잉북을 꺼내놓은 내 시선은 이미 달라져 있다. 내 눈은 ‘지금’을 살핀다. 과거의 일이든 내일의 일이든 지금 이 순간을 방해할 수 없다.
첫 번째 드로잉
그저 바라보며 내 시선에 따라 몸을 움직여 선을 그어간다. 놓아둔다. 무엇이 어떻게 어디까지 그려지든 간섭하지 않는다. 내 감각이 대상과 충분히 관계할 수 있도록 어떤 명령도 내리지 않는다. 그리지 않고 그려지도록 내버려 둔다. 시선은 자유롭다. 내 의지로부터 멀어진 시선은 그 시선이 닿는 곳을 마음껏 다닌다. 대상에게서 많은 사실들과 소문들을 듣고 가끔은 되묻기를 반복한다. 그림은 그렇게 그려진다.
두 번째 드로잉
다시 주변을 살피는 내 시선은 조금 더 적극적이 된다. 두 번째 ‘그리기’에서는 눈에 보이는 요소요소와 더불어 ‘작고 미세한 충동’을 더욱 느끼게 된다. 몸을 움직여 선을 그어갈 때 그 충동을 반영한다. 어떤 선은 더 강해지고, 어떤 선은 한없이 가녀려지고, 어떤 선은 더 감정적이 된다. 대상과 관계하는 작고 미세한 충동은 몸으로 하여금 종이 위에 다양한 동작을 만들게 한다. 나는 더욱 이 행위에 몰두한다. 문뜩문뜩 황홀함을 느낀다.
대상과의 충분한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작고 미세한 충동’(시각 대상에 대한 감각적, 감정적 반응)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새로운 발견의 순간이다. 그러나 ‘그리기’에 대해 지나치게 완고하거나 경직된 경우에는 이러한 충동은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충동’을, 제대로 그리려는 노력을 망치는 불안 요소라 생각한다. 때에 따라 과도한 노력을 불러오는 ‘긴장과 조심’이 그림을 그리는 줄기가 되어버린다. 긴장과 조심, 대상과의 거리(관계)는 이미 멀어졌고, 멀어진 만큼의 공백은 모든 문을 닫아 버린 성실한 그리기로. 예술을 대신한 도덕.
세 번째 드로잉
첫 번째에 이어진 두 번째, 종이 위에는 대상과 나 사이에 탄생한 흥미로운 요소들로 가득하다. 잠깐 ‘드로잉’이라는 도구에 감탄하게 된다. 그렇게 그려진 나의 그림을 볼 때, 그것을 그렸던 몸의 경험, 감각의 여운은 자연스럽게 세 번째 그림을 그리게 한다. 세 번째 드로잉에서 나는 조금 더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된다. ‘이번엔 이걸 이렇게 해보면 또 어떻게 될까?’
충분히 몰입한 상태에서 느껴지는 ‘작고 미세한 충동’, 이것을 따라가 보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아니며, 그림도 더 이상 내 그림이 아니다.
사전적 정의는 첫 번째 벽돌일 뿐이다. 정답은 없고, 궁금해하고, 욕망하고, 사랑하는 많은 다른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 드로잉 _ 75JEROME
제롬 (www.75jerom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