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한때 고슴도치 엄마였다 / 이동순
오랜 진통 끝에 어느 순간 눈에 불이 번쩍했다. 내 몸을 빠져나가는 뜨거운 덩어리. 그리고 한 생명체의 다급한 소리. 우렁찼다.
“응아! 응아!”
사력을 다해 나온 세상이 두려워서였을까? 아기는 점점 더 크게 소리 질렀다. 애절했다. 나를 찾는 것이 분명했다. 그날, 처음으로 나에게 ‘엄마’라는 위대한 명칭이 주어졌다.
쭉정이가 된 텅 빈 몸과 상반되게 머릿속은 뿌듯함으로 꽉 차 올랐다. 날이 갈수록 아기는 나를 감동시켰다. 아기의 눈동자 속에 세상의 아름다움이 다 들어 있는 듯했다. 고 작은 입으로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조가비처럼 달싹거리는 입술이 경이로웠다.
첫 아기라 친정에서 해산을 했다. 맏딸의 해산 뒷바라지에 엄마는 정성을 다했다. 삼시 세끼에 참이 제 번, 하루 일곱 끼를 챙기면서 엄나가 하시던 말씀.
“아 놓은 속은 석 자 가시도 안 걸린데이.”
“여자는 아 놓고 조리를 잘 해야 평생 건강하데이.”
매끼마다 조기 아니면 달걀이 상에 올라왔다. 외할아버지께서 한 의사여서인지 엄마는 산모 섭생에 대해서 반 의사 수준이었다. 한 생명을 낳기 위해 겪는 진통으로 인해 산모의 뼈 마디마디가 벌어지고 오장육부가 뒤틀린다고 했다. 그걸 잘 아물게 하고 제자리를 찾아가도록 하는 것이 산후조리라 했다. 먹으면 안 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꿰고 있었다. 찬 음식, 자극적인 음식은 물론이고 푹 삶은 미역줄기도 산모 이 다친다고 못 먹게 했다. 또 앉아 있는 것도, 책 보는 것도 안 된다고 했다. 갓난아기와 똑 같이 먹고 자고 먹고 자고만 하라고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산모 바람 든다면서 병풍 치고, 군불 땐 방에서 꼼짝 못하게 했다. 어찌나 군불을 많이 땠는지 산모도, 아기도 겨울에 땀띠가 다 났다. 나무가 자랄 때 태양의 열이 있어야 하듯, 아기가 여무는 데도, 산모의 회복에도 열기는 필수였다.
아기와 함께 49일의 칩거생활을 마쳤다. 시댁인 부산으로 갈 때가 되었다. 칠보단장을 시켰다. 인형처럼 예뻤다. 남편은 첫딸을 보려고 처가인 포항에 서너 번 왔다 갔지만 정작 그날은 회사일이 바쁘다고 우리를 데리러 오지 못했다. 아침부터 서둘러 나섰는데도 한 나절이 지나서야 시댁에 도착했다. 부풀어 오른 가슴에 아기를 안고 대문 앞에 왔을 때였다. 마침 지나가던 이웃 아주머니가 곱게 씌우고 간 케이프를 살짝 들추면서 말했다.
“아이구 새댁이가 왔네, 어디 애기 한번 보자.”
“아이고 이렇게 예쁜 아기가!” 하며 감탄사를 퍼부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구….” 하고는 말이 없었다.
뜸을 좀 들인 후에 한마디 더 했다.
“아들인가 보네.”
뛰던 가슴이 뚝 멈춰버렸다. 섭섭한 마음을 달래며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또 다른 아주머니가 반색을 하며 케이프를 싹 들췄다.
“아이구, 아기가… 엄마 안 닮았네.”
내가 기대했던 예쁘다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두 번에 걸친 강펀치를 맞고 나니 소금뿌린 배추처럼 풀이 죽어버렸다.
그날 저녁, 낮부터 벼르고 있던 말을 기분 나빴던 감정은 놔두고 느낌만 솔직하게 남편에게 늘어놓았다.
“사람들이 와 우리 아기보고 이뿌다고 안 하는에예?”
남편은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돌아앉아 구시렁거렸다.
“참 이상하제, 이래 이뿐 아를 보고 와 이뿌다는 소리를 안 하제.”
“얼라한테는 그런 소리 하는 게 아인가 보지 뭐.”
일리가 있는 말 같기도 했다. 어른들이 잘생긴 사내아기를 보고 “그놈 참 밉상이구나.” 하던 말이 생각났다. 또, 남의 집 귀한 자식을 보고 함부로 호들갑을 떠는 게 아닌가 보다고 섭섭했던 마음을 달랬다.
그 이후로도 아기를 보는 사람마다 “아이고…!” 하고는 내가 기다리는 뒷말은 하지도 않고 핫바지 방귀 새듯이 새 버리거나 아니면 겨우 “그놈 참 실하네.” 하는 말뿐이었다. 그러나 시누이, 시동생만은 예외였다. 막내 시동생은 이렇게 예쁜 아기는 처음 봤다고도 했다. 또 한 명이 있었다. 심부름 하는 순자는 잘 키워서 미스코리아 대회에 내보내자고 했다. 나는 막내 시동생과 순자만 예쁜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고 생각했다. 역시 젊은 사람은 보는 눈이 다르다는 생각도 했다.
딸의 백일이 다가왔다. 첫딸의 첫 잔치 하루 전, 날밤을 새워서 음식을 준비했다. 다음 날, 백일 상 뒤에 아기를 앉혀놓고 사진을 찍었다. 상도 우리 아기도 그득했다. 며칠이 지난 뒤 사진관에서 찾아온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가까이서, 멀리서, 눈을 부미고 보았다. 그런데 우리 딸이 아니었다. 살이 올록볼록한 복스럽고, 애교스럽고, 귀여운 그 딸이 아니었다. 사진 속엔 심술궂게 생긴 ‘금복주 할아버지’가 떡하니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마는 툭 불거져 나왔고 양 볼살은 밑으로 축 늘어졌다. 코도 그랬고 팔, 다리오금의 선도 살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내 딸을 보고 “아이구…!” 소리만 하고 다음 말은 생략하던 그들의 면면이 또렷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깨가 힘없이 내려앉았다.
그날 이후로 우리 딸을 보고 예쁘다는 말을 안 해도 섭섭한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눈을 맞추고, 방긋방긋 웃는 아기를 볼 때마다 그들의 눈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제 눈에 안경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세월이 좀 지난 후였다. 아기가 자라서 초등학교 졸업할 때쯤, 한쪽으로 퍽 기울어버린 편협한 내 생각도 같이 졸업했던 것일까. 내 눈에 쓰인 콩깍지가 벗겨지기 시작하더니 맨 먼저 딸의 피부색이 가무잡잡한 것이 보였고 인형같이 오뚝했던 콧대도 낮아 보였다. 이제 백설 공주라 하기에는 양심에 걸렸다. 그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엄마들도 나같이 눈에 콩깍지가 씌어 객관성을 잃어버렸던 때가 있지 않았을까. 고슴도치도 제 새낀 함함하다고 하지 않던가. 나도 한때 고슴도치 엄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