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성지는....
백지혈인이 나타난 이후에 대종사께서 변산 봉래정사로 들어와 약 4년 동안을 머물면서 장차 펼 새 회상의 교리를 정리하고 제도 등을 연구한 곳으로 원불교의 기본 교리인 일원상의 진리, 사은사요(四恩四要), 삼학팔조(三學八條) 등의 교리 강령을 제정하였으며 <조선불교혁신론>을 초안하여 불교와의 관계정립을 모색한 곳입니다.
또한 월명암에 있던 백학명, 한만허 등의 선사들과도 교유하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원불교교서>의 대종경은 이 시기의 대종사의 행적과 설법이 주가 되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1924년 갑자년 봄에 변산 봉래정사를 나와 익산 보광사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불법연구회'라는 임시 교명을 선포하였다
이번 연휴에 인천교당에서 전교도가 변산반도에 위치한 제법성지를 다녀왔습니다.
변산이 바닷가인데 산이 제법 깊은 편입니다.
오래전에 부평교당에 다닐때 하섬이랑 채석강주변만 보고 왔었는데
이번에는 내변산 주변을 둘러보고 왔다.
사전에 원광선원에 연락하여 점심을 선원에서 먹었는데 여럿이 모여서 먹는 맛도 있고 먼길에 때를 놓쳐 시장기도 있었고 하여 모두가 산나물에 직접 재배한 버섯을 섞어 밥이 모자르게 배부르게 먹었다.
지금부터 30여년전에 월명암 주지 정도전 스님은 월명암 산길이 험하고 불편한지라 인근 부락에 암자를 짓고 선방을 하길 원했다. 도전 스님이 문수보살께 천일기도를 올리고 암자를 지으니 그것이 곧 문수암이었다. 그런데 도전 스님이 스승인 지선스님께 암자를 하나 지었으니 한 번 와 주십사 했더니 문수암에 와서 보고 절 이름은 지형이나 여러 가지를 보고 짓는 것이라며 원래 선방에도 뜻이 있었고 지형을 보니 [원광선원(圓光禪院)] 이라 하면 좋겠다며 현판을 원광선원으로 써 주었다 하는데 지금 원광선원에 걸려 있는 현판이 바로 그것이다.
그 후 원광선원에서 지역주민들 교화에 힘쓰던 도전스님이 사적인 일로 이 곳 원광선원을 원불교에 매각하여, 원기 63년에 정읍교당이 중심이 되어 부속 임야와 함께 사찰을 인수해 현재 '원광선원'이 되었다. 원기 77년에는 수양원에서 변산 원광훈련원으로 개정, 교도들의 훈련에 일임하고 있다.
△변산 성지사업회의 제법성지 장엄공사 1차 사업으로 교강(敎綱)반포 60주년을 기념하여 원기 65년(1980) 7월 17일 교강 반포의 땅 (전북 부안군 변산면 중계리 석두암터)에 세운 기념비다.
석두암터의 좌측 자연석 위에 30cm 높이의 비각을 세우고 이 위에 30cm 두께의 기단 세 개를 얹은 후 180cm의 오석(烏石)을 책 모양으로 조각한 비신을 세웠다. 기념비의 높이는 지상에서 약 3.6m로 전면에는 제법성지를 기념하는 대산종사 휘호[일원대도(一圓大道)]를 음각으로 새겼으며 뒷면에는 제법성지 비문을 적었다.
이 원광선원의 인수는 교단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데 제법성지가 소실된 후 특별한 관리를 해오지 못했던 변산성지의 장엄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 선원뒷편 계곡모습
원광선원 법당 뒤쪽에는 새로운 탑이 하나 조성되었는데 정산종사 추모탑이다. 이 탑은 원래 총부 영모전 옆에 있던 정산종사 성탑으로 원기 73년 11월 대종사 탄생 1백주년 성업봉찬 사업회가 총부 대종사 성탑 옆에 새 탑을 세우면서 해체한 것을 원기 81년 이곳으로 옮겨와 재건한 것이다. 또한 법당도 원기 81년 다시 새 단장을 하였다.
△ 영광선원 정산종사성탑모습 화원이가 찍음
식사후에 제법성지가 있는 내변산으로 향했습니다.
역시 호남의 명산이란 이름에 걸맞게 변산은 멋진 풍경을 갖고 있습니다.
금강산(봉래산)을 옮겨 놓은 축소판이란 말이 있는데
정말 아름다웠으며 예전엔 도인들이 많이 기거 했다고 하는데 무식한 내가 봐도 명산은 명산입니다
동양의 3대거사중 한분인 부설거사가 수도한 곳이라 그런지 풍경은 일품입니다.
성지에서 김원공교무님의 설법과 안내를 받아 주변을 둘러보고 교법의 기초를 다듬었던 그 당시의 모습을 자세히 알수 있는 시간이었다.
봉래정사는 현재 [일원대도비]가 세워져 있는 아래 쪽에 있는 [실상초당터]와 일원대도비가 서 있는 [석두암터]을 합해서 이름붙인 제법성지를 말한다.
석두암은 송적벽, 김남천이 발기하여 친히 제자들과 지은 3간 초옥으로 동향집이다. 방과 방사이에는 칸막이로 되어 있었고 각 방 옆과 앞에 마루가 불어 있었으며 북쪽에는 부엌이 자리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거북바위가 있고 [석두암(石頭庵)]이라는 간판은 검정바위에 흰색 글씨로 새겨졌었다. 이러한 모습을 지닌 석두암은 6.25사변 때 소실되었다
이 집에서 『조선불교 혁신론(朝鮮佛敎 革新論)』과 『수양연구요론(修養硏究要論)』등을 차례로 초안하였다.
이 터는 또한 익산총부 건설의 인연이 된 서중안 형제를 만나게 되고 교단 초기 많은 역할이 되어졌던 제자들을 만나신 곳이다. 이 곳 석두암에서 사산 오창건을 비롯 문정규, 김남천, 송적벽, 이청풍 등이 시봉하였다.
이 터를 기념하기 위하여 변산 성지사업회에서는 교강반포 60주년을 기념하여 교강반포 기념비 [일원대도 비]를 세웠는데 이때 [봉래정사 석두암터 비]도 함께 세웠다.
[일원대도 비]는 뒤에 다시 설명을 하고 [봉래정사 석두암터 비]는 석두암 중앙 산비탈에 박혀 있는 자연석 사이에 30cm의 기석을 놓고 그 위에 120cm의 오석(烏石)에 음각으로 전면에 [봉래정사 석두암 터]를 새기고 뒷면에는 변산 제법성지 사업회 임원명단과 성금 내력 등을 새겼다.
△ 제법성지표석
김원경 교무님 설법후 산행하는 시간을 갖었는데 폭포까지 갔다오는 것도 헉헉거리면서 다녀왔는데 그당시에 그분들은 옆집다녀오는 것처럼 위의 암자를 다니셨다고 하니.....
중계계곡의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직소폭포의 높이는 약 30m가 되고, 예리한 칼날로 잘라낸 듯 육중한 암벽단애를 흰 푯말을 일으키며 뇌성같은 소리를 내면서 쉴새없이 쏟아지는 물은 그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깊고 둥근 소(沼)를 만들면서 떨어지는데 직소폭포는 폭포가 갖추어야할 산세, 절벽, 계곡, 소 등의 필수적인 제반 조건을 그대로 갖추고 있는 전형적인 폭포로 꼽히고 있으며 둥근 소의 이름은 실상용추(實相龍湫)라 한다. 폭포를 받치고 있는 실상용추는 직경이 50m 정도이며, 깊이 헤아리기 어려운 심연(深淵)을 이루고 있다.
직소폭포를 흐른 물이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꺾이고 감돌아 펑퍼짐한 반석위로 흐르는 잔조로운 물줄기를 이루었고, 은반에 옥이 구르듯 몇 굽이 감돌아 반석 아래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머무는 듯 넘나드는 이 곳이 바로 봉래구곡(蓬來九曲)이다
일에 얽메여 있다 땀도 흘리고 산바람 바닷바람으로 그 땀을 다 씻어 내니 그간의 시름이 다 털리는 기분입니다.
내려올때에는 김원공교무님의 안내를 받아 자세한 주변설명과 함게 버스가 주변을 돌아서 내려왔는데 경치가 일품이다.
점심에는 산채밥을 배불리 먹고 저녁에는 바지락죽을 먹었는데....
처음먹어 보는 바지락죽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교당식구들과 어울려서 먹는 것은 왜 이리 맛이 있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