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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소록도지킴이 원문보기 글쓴이: 소록도지킴이
역사적 배경
1882년 5월 22일 한미 조약이 체결되고 한국에도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니 1884년 10월20일 에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알렌(Horace Newton Allen)의사 부부가 개신교 최초의 의료선교사로 들어와 왕실 병원 제중원(1886년)을 세우고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Horace G. Unerwood)선교사와 1885년 6월 아펜젤러(H.G.Appenzeller)의료 선교사 부부가 한국에 와서 의료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때 한국에서 한센 병이 만연되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불쌍한 영혼들을 사랑하셔서 1909년 4월 미국 남장로교 의료선교사 포 사이드(H. W. Forsthe)와 윌슨(R. M. Wilson)의사가 광주지역에서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하였고, 1909년 여름 윌슨(R. M. Wilson)선교사에 의해 최초 한센병 환자 10여명을 전남광주 근처 봉선리에 수용하게 되었다.1925년 현재 여천군 OO리로 옮겨 교회,병원,숙소등을 신축하고 치료하며 발전한 것이 여수 애양원의 시작이다. 1910년 3월 30일에 부산 감만동에서 선교사 어빈(C. H. Irvin)과 맥긴져(J.Mackenzie)목사가 특수병원을 개설하니 이것이 부산 상애원의 시작이다.1913년 3월1일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 프렛처(A. G.Fletcher)의사가 병원을 개설하여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대구 애락원의 시작이였다. 이들 지역에서 복음과 함께 육신의 치료가 시작되고 한국의 한센병 치료는 복음과 함께 시작되었으니 한국의 복음전파는 한센병 치료와 무관하지 않다. 그 당시 한센병에 대한 불안 시대에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랑의 모습이 선교의 효력을 극대화 시켰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병 원 역 사
1910년 8월 22일 한일 합방조약이후 일본의 탄압과 한국인의 원성이 고조될 무렵 여수, 부산, 대구등지에서 한센병 치료에 국민적 반응이 좋았으나 다 수용할 수 없는 환우(患友)들 처우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되었을 때 일본 총독부에서 착안한 것이 한센 병원 개설이었다.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기후가 온화하고 수량이 풍부하며 육지와 가깝고 서달 지역 남쪽에 구릉이 있어 환자 지대와 직원지대로 나누기 용이하여 격리 수용에 적합한 소록도를 선택하고 1915년 2월 섬주민들을 설득하여 소록도를 서북쪽에 19만 7백평과 주민 가옥 10동을 매수하여 동년 7월 에 착공하였고, 1916년 1월에 47동의 병동과 병원 본관을 준공하고 1916년 5월 17일에 전남도립 자혜의원으로 개원하여 처음 100명을 현재 소록도 2번지 구북리 일대에 이주하게 하여 삶을 다시 개척하여 치료받게 되었다. 일본인 아리가와씨가 제 1대 소록도 병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고, 2대 하나이씨가 3대는 미스자와씨가 4대는 수호씨가 5대는 니시기씨가 부임하였다.당시 조선에는 사립 나요양소가 세 군데 있었으나 그 규모가 작아 수용된 인원이 아주 적었으며 대부분의 한센 환자들은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일제에게는 '반 사회인'으로 의학적으로 관리대상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사회적 관리대상으로 보고 일제는 집단격리하는 과정에 정치적 힘을 동원함으로써 조선 통치의 근거가 되는 국가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교 회 창 립
병원에서 5년간은 일본 원장과 직원들이 원생들에게 일본식 복장과 일본식음식으로 생활을 지도했고 매일 일본 천조대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했다. 이때 소록도 병원 제 2대원장으로 부임한 하나이 젠기스(花井善吉.1921.6.23-1929.10.26)원장이 일반 주민들의 의사를 받아들여 신앙의 자유를 주었으니 하나이 원장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앙의 장를 허락한 바사왕 고레스같은 귀한 원장을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것이다.하나이 원장은 외지의 요양소 운영을 시찰하고 소록도에도 기독교를 허락하여 1922년 10월 8일 (음력8월18일) 일본 성결교단 전도목사인 나나까 신사부로(田中道三郞)목사가 총독부의 포교 허가를 받아 포교한 것이 소록도 교회의 창립이 되었는데,최초로 수십명의 신앙을 작성하고 모여 예배 드린 곳이 구북리 1호사였다. 날마다 입원환자는 늘어나고 교인수도 증가 해 갔다. 1923년 11월 경에는 교인 수가 120명에 달 하였으며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니 1923년 11월18일 주일에는 일평생 예수위해 살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최초로 세례식을 거행하였는바 남자 40명,여자 4명이 구북리 서해안 백사장 앞에서 나나까신사부로 목사에게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병실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하나이원장은 일본 천조대신 신당을 예배소로 허락하므로 그 해 12월25일 성탄절은 성대하게 지내게 되니 오전 9시에 성탄축하예배를 시작하여 12시에 폐회하여 소록도 최초의 성탄절예배였다. 1925년 4월 2일 교회 역원을 선출하니 전도원으로 박극순(朴克淳),최병수(崔炳洙),이종일(李鐘一),박우석(朴佑碩)씨였고 집사에 이채권(李彩權), 박학진(朴學珍)씨를 직원으로 세워 교회가 더욱 안정되어 든든히 서가며 1926년 7월3일 다나까신사부로목사는 이임하고 후임으로 대대후지(小出朋治)목사가 부임하d여 1927년 4월7일 부활절을 지키게 되었고 11월 16일에는 새벽기도회를 실시하게 되었다. 1928년 북병사(구북리)를 신축하면서 예배당도 신축하여 7월 20일에 입당예배를 거룩하게 드렸는데 이것이 오늘날 북성교회 예배당이었고,1928년 10월24일 남부 병사(남생리)와 함께 남부 예배당(현 남성교회)이 세워졌다. 예배당과 함께 오르간(풍금),종,시계,등을 하사함으로 온 교회는 기쁨이 충만했다. 외롭고 고독하며 질병의 고난 속에 쌓인 자들에게 복음이 전차되어가면서 불행의 소록도는 감사와 찬송과 기도의 동산으로 변해갔다. 소록도 신앙의 자유를 위해 하나님이 보내주신 하나이 원장은 8년4개월간 경천애인정신으로 병원을 환자중심으로 다스리다가 1929년 10월16일 소천하시니 모든 성도들은 아버님 돌아가신 것처럼 애도했다. 원생들의 뜻을 모아 하나이 원장 공덕비를 세우니 현재 구북리 입구 최초의 자혜의원 동편에 세우고 하나이 원장을 늘 생각하며 추모하면서 그 언덕을 오갈 때 마다 원장에 고마움을 표시하며 감사하는 한센 환자들이 많이 생겼다.일본인 하나이 원장을 위해 추모하며 한국인들이 뜻을 모아 공덕비를 세운 것은 아마도 소록도 동산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귀한 일이었다.
신사참배와 종교탄압
1932년에 일제당국은 소록도 전역을 매수하여 병원확장공사를 추진해 나갔는데 1933년 9월에는 조선 나협회 상무이사인 수호 마사히대(周防正李.1933.9.1-1942. 6.20)원장이 부임하여 병원확장공사를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현 신생리 병사와 신생리 교회가 세워졌다. 이 때 대구.부산등지에서 400여명이 입원하게 되니 원생은 3천여명으로 늘어나며 1934년에는 동생리 부락과 예배당이 건립되었는데 처음에는 연합예배당으로 건축했다는 것이다. 1934년 6월7일에는 소록도 성결교회시대가 12년만에 끝나고 소록도 기독교라 개칭하였는데 조선 총독부의 기독교 탄압에 따라 소록도에서도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다.1936년 12월에는 야다분이찌로(矢田文一郞)목사를 축출하고 관목으로 승려를 기용하니 본원사(本原寺) 다게시마(竹島)씨가 부임했고 교회 핍박은 가중되었다. 교회서는 1937년에는 서생리 교회가 구북리 교회에서 분리하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1938년1월에 중앙교회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교회탄압은 더욱 심하여 신사참배가 강요되고 이를 거부하는 교회직원과 성도들을 30여일 동안 구금시키고 형언할 수 없는 곤욕을 가하기 시작했다. 마귀는 더욱 발악하여 수 호마사히대(周防正李)원장의 동상건립을 구실로 하여 성도들의 가진 금품을 몰수당했고 식량을 삭감하고 교회 핍박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악해졌고 필설로 이루 형언 할 수 없었다. 1939년 9월1일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 시작된 전쟁이 1941년 12월에는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일본의 만행은 극에 달하여 정신통일을 해야 한다며 매일 신사참배와 수호 원장 동상 참배가 강요되고 강제노동 원생동원령이 내려져 벽돌과 기와굽기(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의 붉은 벽돌은 그 때 굽은 것)와 가마니 짜기, 바닷가 축대 쌓기,선창 축조공사,도로공사 중앙 공원 조성 공사,솔 굉이 기름짜기,다른 섬으로 가서 화목 벌채작업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노동이 강요되어 병약한 육신은 일에 지치고 감독자들의 몽둥이와 채찍에 피멍이 들고 허기에 시달린 굶주린 배를 허리끈으로 졸라 매고 온종일 일하고 황혼이 지면 집으로 돌아와서 밤이면 고통과 눈물로 밤을 지새고 새벽이면 별을 보고 일터로 끌려가서 죽도록 일을 시키고 조금이라도 서있으면 몽둘이질이요 고개만 들어도 욕설이었다. 주일날이면 더욱 심한 중노동을 시켜 예배를 방해했고 예배당 안에는 우상을 세우고 가마니 공장을 차려놓고 일일 할당량을 정해주고 달성 못하면 태형이니 눈을 감고 입을 막고 귀를 막고 살아야 했으며 입만 열겸 불문곡직하고 감금실로 끌려가서 무차별 구타하니 그때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맞아 죽고 굶어 죽어갔던가! " 아 한 많은 소록도....." 故 김정균 성도가 남겨 놓은 고난의 시 한편이 있다. "아무 죄도 없고 불문곡직하고 가두어놓고 , 왜 말까지 못하게 하고, 어째서 밥도 안주느냐, 억울한 호소는 들을 자가 없으니, 무릎을 꿇고 주께 호소하기를, 주의 말씀따라 내가 참아야 할 줄 아옵니다. 이 속에서 신경통으로 무지한 고통을 당할 때, 하도 괴로워서, 이불 껍질을 뜯어, 목매달아 죽으려고 했지만, 내 주님 위로하시는 은혜로, 참고 살아온 것을 주께 감사하나이다. 저희들을 반성문을 쓰라고, 날마다 요구 받았어도 양심을 속이는 반성문을 쓸 수가 없었노라." 견디다 못해 죽기 살기로 바다를 헤엄쳐 도망 가다가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얼마며 순찰선에 발각되어 곡괭이(바다에서 쓴 연장)에 맞나 죽은 자가 얼마인가. 그래도 살아 남은 자는 재발방지한다고 공개처형했으며 밤마다 문 앞에 불려 나와 점호로 확인하고 한 사람의 이탈자가 생기면 집단 구타를 당해야 하고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자가 되게 했다. 1942년 6월20일 수호원장 동상참배하는 보은 감사날이라 하여 전 원생들이 모였고(원장 동상은 지금 40주년 기념비 자리위치) 수호원장이 훈시하려고 등단할 때 원생중 한 사람 이춘상(李春相)씨가 달려나가 "3천원생의 원수는 칼을 받으라"하고 흉부를 찌르니 수호원장은 자기 동상 앞에서 저주의 죽음으로 최후를 마쳤다. 그러나 일본 관리들은 더욱 악한 방법으로 다스리고 감시를 강화하였다. 성도의 신앙심은 땅에 내려 앉았고 눌린 영혼들의 탄식소리는 하늘에 사무쳤다. 예배당 문은 철장을 했고 하나님은 눈물의 기도 소리를 들으셨을 것이다.
8 15 해방과 수난
1945년 8월 15일 소록도 성도들의 탄식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은 해방의 축복을 주셨으니 우리 민족해방은 소록도의 해방이었다. 목이 터지도록 만세를 부르며 할렐루야 영광을 부르며 섬 전체는 기쁨과 환호성 속에 연일 기쁨이 충만했고 우상의 조각들을 파괴하고 예배당을 청소하고 애매히 구금,구타하던 감금실과 형무소의 문을 열어 갇힌 종들이 풀려 났고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 찬송을 목청 높여 부르며 감격스런 예배를 드렸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때 소록도의 식량이 떨어져 당장 굶을 지경에 처하게 되었는데 마침 군량미 벼가마니를 싣고 가던 배가 소록도 앞 바다를 지나다 풍량을 못이겨 좌초되었다. 원생들이 생명을 걸고 바다에 들어가 곡식을 건져 연명할 수 있었으니 이 어찌 우연이라 할 수 있겠는가.해방은 되었으나 준비없는 해방이라 병원은 큰 혼란이 발생했으니 일본원장이 물러난 뒤 원장직 주도권싸움이 벌어져 직원끼리 분쟁이 일어났고 원생들은 해방이 되었으니 자치권을 찾자는 주장들이 일어났다, 다음날 협상을 조건으로 모여온 원생대표들을 유인하여 미리 준비한 치안 유지대라는 사람들에 의해 처참하게 대창으로 찌르고 총으로 학살해서 구덩이에다 넣고 원생들이 전쟁용으로 강제 체취한 송탄유(松炭油)를 쏟아 부어 생화장을 시켰고 그 때 살아남은 자들도 함께 화형을 당했으니 그 원한이 얼마나 컸을지 하나님은 아실 것이다. 그 때가 바로 1945년 8월22일이었다. 이 때 희생된 종들이 12명이니 중앙교회 전도원 이경도(李京道), 집사 정수완(鄭守完), 김원식(金元植), 이차하(李且夏), 신성교회 전도원 김학로(金學魯), 집사 김금영(金今永), 북성교회 집사 김칠송(金七松), 강윤형(姜允衡), 서성교회 집사 김이진(金伊辰), 남성교회 전도원 강암우(姜岩佑), 집사 송인범(宋仁範), 동성교회 집사 유유슌(劉裕順) 전도원 3명, 집사9명이요. 그 외에 모두 신실한 성도들 84명이나 희생되었다. 교회는 큰 비탄에 빠졌고 일본통치 30년시대를 마감하면서 소록도교회는 희생과 순교로 역사를 마감하니 일본 직원이 업무를 완전 종결되어 섬을 떠나게 되었는데 때는 1945년 8월 24일. 이 때 원생은 4천 8백명이었다
장로교단 시대
1945년 4월말에 신사참배로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신 애양원 교회 손양원 목사는 고흥 길두 교회 김정복 목사를 모시고 오셔서 교회재건을 위해 역사하시는 중 5월 1일부터 10일간을 공회당에서 부흥 사경회를 실시하고 헌법을 가르치고 대한 예수교 장로회 시대를 열고 김정복 목사를 초대 담임목사로 모시게 되었다. 공동의회를 열고 장로를 피택하고 1946년 6월13일에 역사적인 장로 창립식을 거행하니 중앙교회 김차동 장로, 북성 교회 김민옥 장로, 남성교회 박소도 장로, 서성 교회 서원갑, 이성곤, 황중오 장로, 신성교회 최장식 장로, 동성교회 최병수 장로였다. 손양원 목사가 안수 기도하고 김정복 목사는 공포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록도 교회 당회를 조직하니 초대 당회장에 김정복 목사 당회서기에 김민옥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다. 김정복 목사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종지리에서 1882년 6월10일 출생하여 구한말 전주부를 지키는 장병으로 충실한 군 생활을 하시다 일제 탄압으로 해산되니 생활이 어렵게 되어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지원하였으나 너무나 심한 노동에 못이겨 귀국하여 고향에서 신앙생활하시다 한 . 일 합방 소식을 듣고 민족운동은 기독교를 통해서 이루어 져야 한다고 믿고 평양신학교에 진학(제9회 졸업) 수학하여 전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사역하던 중 1940년 9월에 전국 목사, 장로 193명을 체포하여 구금시키게 되었다.여론이 너무 악화됨으로 모두 석방시키고 그 해 11월 15일 애국심과 재림신앙이 강하고 비판적인 순천지방 15명의 목회자를 재구속하니 그 15명중에 김정복 목사와 오석주 (1937.6.9-1942.10 소록도 교회 시무) 목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15명 목회자에게 1년에서 3년의 형을 확정하고 광주 교도소에 수감 시켰다. 온갖 회유를 물리치고 묵묵히 순교자의 길을 걸어가시던 김정복 목사가 소록도에 오셔서 소록도 교회를 재건하시고 초대 당회장이 되셨으니 하나님의 귀하신 일이 아닐 수 없다. 1946년 6월 15일에 장안리 교회를 설립하니 소록도 7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김목사님은 소록도 교회 당회장으로 부임 하시기전 1915년 4월 제주중앙교회를 시무하셨고 1918년 5월에는 벌교읍 교회, 1920년 9월에는 고흥읍 교회 및 길두 교회를 시무하셨고 소록도에 오셔서 우리 한센병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 말씀과 깊은 영적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목회하셨다.
6 25와 김정복복사 순교
날 마다 교회는 부흥되고 은혜가 충만해 갔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이북 공산군이 불법 침략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5일에 16,7세의 인민군 40여명이 소록도까지 침입했다. 원 내는 인민위원회, 청년동맹 위원회가 조직되고 추종자들과 불신자들이 규합하여 교회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세례교인들을 강제 이동시켜 교회간판을 내리고 인민공화국 간판을 달고 찬송과 기도를 중지시키고 인민공화국 노래를 가르치게 되었다. 김정복 목사님은 모든 활동을 중지당했다. 교인들은 잠시라도 피신하시라고 눈물로 청원했으나 목사님은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연약한 양떼를 버리고 버릴 수가 없노라"고 거절하시고 "내 늙은 목숨 살고자 도망 갈 수 없다"시며 평소에 늘 기도하시던 굴날뿌리(신생리 마을 뒤편 바위) 동굴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시다가 평소 그 사실을 알고 있던 원생 청년들의 밀고에 의해 체포되어 강제로 고흥 정치보위부로 끌려 가셨으니 그 날이 1960년 8월20일 이었다. 끌려가는 목사님을 울부짖으며 땅을 치며 통곡하는 성도들을 몇 번이나 뒤돌아 보시며 "사랑하는 소록도 성도들아 신앙절개 굳게 지켜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 하시며 손을 흔들고 가신길이 소록도 마지막 이별의 길이였다. 병원 안에서는 9월말에 교회 장로, 집사들을 처형시키려고 인민재판이 공회당 앞뜰에서 진행되고 있을 때. 머지 않아 인천 상륙작전이 시작되니 안심하라는 전단지가 비행기에서 뿌려졌고, 소록도에서도 그것을 받아보았다. 공회당에서 인민재판을 진행하던 지방 빨갱이와 인민군들은 금방 얼굴이 파래지며 모든 재판을 끝도내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그날이 9월27일이었다. 전의를 상실한 인민군들을 퇴각하면서 고흥 경찰서에 수감 중이던 김정복 목사님을 경찰서 뒷산으로 끌고가서 무차별로 머리에 관통상을 입히니 무릎을 꿇으시며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순교하셨다. 목사님은 그렇게도 사랑하며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며 사랑하던 소록도 성도들을 다시 한번 만나보지 못하고 순교의 제단 위에 붉은 피를 뿌리며 그 분이 늘 즐겨 노래하던 천국을 향하여 떠나 가시니 향년 69세 그날이 1950년 9월30일이었다. 1951년 1월 23일 고대작(高大作)목사님이 부임하여 3월3일에 중앙 예배당에서 김정복 목사님의 순교 추도예배를 드리니 4천여 성도가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고 김정복 목사님의 순교 신앙을 계승할 것을 다짐하고 다짐했다. 1977년 9월 30일 27년만에 김두영 목사님에 의해 김정복 목사님 순교 기념비를 중앙예배당 앞 뜰에 세워 그 높은 순교신앙을 영원토록 기리며 계승하고자 하여 그 분 비에 "샛별"이란 제목의 시문을 기록했다. 1978년 5월 17일에는 병원당국에서 병원입구에 순록탑을 세우고 김정복 목사님과 함께 병원을 지키다 순직한 11분의 이름을 새겨 후세에 남기게 되었으며, 오랜 세월동안 잊혀졌던 김정복 목사님의 유해를 고흥읍 남방 1km도로변 왼편 산 기슭에 김정복 목사님의 순교 묘역을 천대성 목사님을 위원장으로 기독교 십자성선교회가 후원하여 세웠으며 소록도 가는 길목을 오늘도 지키고 있으니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소록도 교회 순교자 김정복 목사님은 오늘까지 이름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묻혀 계시며 교계에서는 이름조차 모르고 이곳 소록도 중앙교회 앞에 순교비만 쓸쓸히 세워져 있는 것이다.
샛별
인생은 가지만 말씀은 계속 흐르고
역사는 바뀌지만 여전하리
고인의 발자국은 순교의 꽃이되고
천시받던 십자가는 승리를 가져오리
핏줄없는 설움보다 더욱 애닲은 볷음사역
후계자를 평생을 그리워
버림받은 병든 양떼 가슴에 안고
말씀으로 가꾸고 기도로 길러
보석보다 귀한 은혜 복음사몀을
이 동산 양떼에게 맡겨주셨네
오직 불구 이 몸 묶여 예수이름을
멀리 가서 사람에게 못 전도하나
별따라 순교의 피여
십자가 제단 앞에 조깨 들려서
산 제물로 주님 뒤를 따라가리라
성경학교개교
숭고한 진리로 5천여 성도를 오직 말씀으로 양육하고 사랑으로 목회하시던 이덕길 목사님은 우리들 중에도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시며 성경고등학교를 세워 지도자를 양성하기로 의논하시고 1957년 4월 17일 연합당회에서 이사회를 조직하고 이사장에 박순하장로, 초대교장에 이덕길목사, 교감에 정명순목사를 정하고 1957년 7월 1일 중앙교회에서 성경고등학교 개교 예배를 드리고 개교하니 학생지원자가 무려 70명이나 입학 신청을 했으나 시험결과 30명이 입학하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한성신학교(여수)와 영광신학교(부산)로 진학하여 수많은 목회자가 나와서 오늘까지 신실한 목회자로 주님위해 일하며 더러는 초대 한국의 정착마을 마다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다가 장로로 시무하는 종들도 많이 생겨서 그 시대에 한센형제들의 지도자로 크게 공헌했으니 너무도 귀하고 아름답다. 이들 중에는 외국 유명한 신학교 교수로 봉직하는 이들도 있으니 감사할 일이다. 1957년 개교하여 1983년 23회로 종결하여 총 151명이 이 학교를 거쳐서 복음을 위해 역사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귀하고 아름다운 역사가 아닐 수 없으며 당시 부교역자로 있던 김명환강도사와 서삼용전도사는 각각 신약과 구약개론을 가르치며 제 23회 성경고등학교의 폐교를 지켜보았다.
5 16혁명과 수난
1961년 5월 16일군사혁명이 일어났다. 민주당정권이 무너지고 군사 정부가 들어서면서 소록도 병원장으로 현역 육군대령인 조창원(趙昌源) 원장이 부임했다. 원장은 부임하여 각 부락의 예배당은 병원 건물이므로 병원으로 반환하고 현 복지관 한 건물만 예배당으로 사용하라고 명령이 내려졌다. 연약한 성도들이 예배당을 반환하고 공회당에 모여 예배드리자니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을까. 그러나 병약한 서러움을 이를 악물고 견디면서 새벽마다 모였고 주일예배와 수요예배에 모였으니 이 또한 신앙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었다. 그 고생이 얼마나 심했으랴. 예배당 없는 서러움을 눈물로 호소하며 기도했다. 혁명 정부아래 군인원장을 바라보면서 오늘은 또 무슨 명령이 떨어질까 불안하고 공포스러웠다. 1962년 1월 3일 수요 연합예배 후 교회 헌금 중지 명령을 내렸고 각 교회장부 일절을 압수당했고 또한 각 교회 종각철거 명령이 내렸다. 이 광경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지 않는 성도가 없었고 원장은 내 뒤에 수십만 군대가 있으므로 거역하면 총살시킨다고 권총을 휘둘렀으니 불안 공포의 나날이었다. 병사지대는 목사님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교회는 어려움에 처했고 성도들의 울부짖는 기도도 끊이지 않았다. 어떤 장로님들은 교회의 형편을 들어 기도했다는 이유로 일주일간 감금당하기도 했으며 이유없는 교회 탄압에 못이겨 불만을 가 진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 하여 1962년1월9일에는 교회장로10명, 집사14명 권찰11명, 주일학교 교사 9명, 교인 4명, 모두 48명이 전주 소생원으로 추방되었으니 그 날은 눈보라가 무섭게 몰아쳤고, 이른 새벽에 추방시키니 4천여 성도는 통곡하며 이별했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든 죄밖에 없고 예수 믿는 죄밖에 없는데 강제로 추방당했으니 섬 전체는 불안하여 살수 없는 공포분위기의 먹구름에 쌓여 있게 되었다. 1962년 1월10일에는 교회기관을 해체하고 대한 예수교 장로교 간판을 내리고 소록도국립병원 장로교회로 개정할 것을 명령했다. 1월17일에는 9일 추방당한 가족등 교회역원 83명을 추방 시켰다. 교회지도자들을 잃은 연약한 성도들은 입을 다물었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할 뿐이었다. 신앙은 침체되었으나 성도들은 숨어서 눈물로 기도하면 교회사수를 위해 목숨 걸고 신앙의 절개를 지켜나갔다
김두영목사 부임과 교회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4천여명 성도가 밤낮으로 부르짖는 간구를 하나님이 어찌 무심하시랴. 1962년 2월10일에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났으니 김두영(金斗英) 목사님을 소록도 교회로 보내주신 것이다 그 날에 4천여명의 성도가 모여 연합예배를 드렸고 김목사님은 찾아오신 예수님이란 제목의 설교를 하셨는데 온 교회는 은혜가 충만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1962년 6월3일에는 연합당회에서 일곱 교회예배당 건축을 결의하고 병원당국과 예배당 부지 절충을 하기로 했다. 1962년 8월8일 김두영 목사 위임예배를 드렸다. 그 때 성도가 4천 6백명 이었다. 1962년 11월 26일 신생리 교회 착공을 시작으로 28일 남생리 교회와 장안리 교회 30일 구북리 교회가 착공예배를 드렸다. 이때를 맞추어 병원에서는 오마도 간척사업을 시작하여 건장한 일군들을 공사장에 다 동원시키고 남은 자들은 병약한 노약자들뿐이었고 예배당 공사는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처음 예배당 건축을 결의하고 준비된 건축비는 일곱 교회가 겨우 7만원밖에 없었으나 그러나 4천여성도들이 밤낮으로 기도했고 1963년 8월14일에 중앙교회가 착공되었고 1963년 12월24일에는 신성교회,남성교회, 북성교회, 장성교회가 준공되고 감격 속에 입당예배를 드리니 감개 무량했다.1964년 1월3일에 서성교회 6월15일 동성교회가 준공되었고, 1964년 11월15일에 중앙교회가 완공되어 준공예배를 드리니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아닐 수없다. 살아 계신 우리 하나님이 소록도를 사랑하셔서 일곱교회를 허락하신 것은 이적이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40여년을 지켜오던 예배당을 몰수 당한 성도들의 눈물 기도를 들어주시고 김두영 목사님을 보내사 일시에 일곱교회를 건축할 수 있게 되었으니 병약한 몸으로 건축에 참여했으며 금식하며 식량을 절제하여 건축비를 만들고 부인들은 머리를 잘라 팔았으며, 눈 밝은 성도는 안내하고 눈 어두운 성도는 손수레를 끌었으며 부인들은 세수대야로 자갈을 운반하고 손없는 분들은 숫가락으로 자갈을 주워 담았으며 예배당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성도들의 눈물과 피가 묻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하나님은 기도의 섬 소록도에 기적을 이루어 주신 것이다.예배당 건축을 위해 의논할 때 소록도 일곱교회가 가진 건축기금이란 고작 7만원 뿐이었으나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는 소록도 동산에 보리떡 다섯 개의 기적을 허락하셨고 일곱교회를 다 짓고 나니 남은 돈이 367,500원이었다. 1966년 11월23일-24일 양일에 소록도 일곱교회의 헌당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니 23일 오전 9시에 북성교회 10시에 서성교회 오후2시에는 동성교회 오후4시에 소록직원 교회가 헌당예배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드리게 되었으니 이 또한 세계기독교 역사 속에 전무후무 한 기적의 역사라 아니 할 수 없다. 소록도 여덟교회(직원교회포함)는 하나님의 은혜와 김두영 목사님의 위대한 능력과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와 헌신으로 생겨난 하나님의 교회로 주님 오실 때까지 시은소가 될 것이다. 1966년 11월 24일 소록도 여덟교회의 역사적 봉헌예배를 마치고 그 날 밤에 전국에서 모인 목사님, 장로님, 전도사님들이 모여 연합체를 구성하니 그것이 한국 한성 장로회 모체가 된 것이다. 이제 소록도 교회는 만세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든든히 서가는 교회로 날마다 감사하며 찬송하고 기도하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교회로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되었다. 김두영 목사님은 소록도교회의 멋 훗날의 운영을 염려하며 기도하던 중 3차 세계 전도여행을 하시면서 소록도 교회 후원자들을 찾아 자립 못하는 교회의 앞날의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시는 선견자적인 종이되신 것이다. 그들 중에 오늘날까지 후원을 계속하여 소록도 교회 운영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목사님은 소록도 일곱교회를 노심초사 애타는 마음으로 돌보시다가 1993년 4월22일원로목사로 추대되니 1962년 2월10일 부임하여 1993년4월22일 원로목사로 추대되기까지 31년2개월 12일동안 그 어려운 시절 약한 성도들과 함께 애환을 같이 겪으며 청춘을 바치며 불철주야 국내외 일하는 기계처럼 오직 소록도를 위해서 멋 훗날 늙고 나약해질 때의 소록도 교회를 염려하시며 사랑하신 신실한 종으로 기독교 역사에 아름다운 큰 빛을 남기시고 1995년 1월17일 향년 78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으로 떠나시니 소록도와 함께 성도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순교자 김정복 목사님과 고인이 되신 김두영 목사님의 신앙을 계승하고 하나님 중심, 말씀중심, 교회 중심으로 소록도 교회를 이끌어 나가며 예수 그리스도 의 사랑으로 온 성도들과 한 식구가 되어 날로 새롭게 부흥하고 있다. 소록직원 교회는 정임묵목사님을 중심으로 병원직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소록도교회 사명과 현재
이제 소록도 교회는 외로운 사람들의 교회가 아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도다 하였느니라"(마4:16)소록도 병원 85년 역사 뒤안길에 소록도 교회 80년 역사 속에 순수한 성경적인 신앙을 고수하며 주님 오실 때 까지 변질되지 않는 재림신앙을 고수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할 것이다. 한국 한센가족들의 모 교회로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신앙의 생명들을 해산했던가. 기도의 동산인 이곳을 거쳐 나간 목사님들과 장로님들과 또한 선교사들이 아마 수백명은 될 것이다. 주님 재림이 임박한 이때에 선지자 사명을 감당하면서 세계선교와 한국 복음화를 위해 수많은 방문자들과 후원교회들을 위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쉬지 않고 힘있게 기도하는 것이 우리 소록도 교회에 최후 사명으로 여기고 소록도 다섯교회는 수십명이 철야하며 기도하고 새벽마다 기도하며 낮12시에는 교회마다 종을 울리고 교회에서는 정오 기도회로 모이고 기적과 능력으로 기도하는 교회가 된 것이다. 소록도교회가 선교사들을 통해 받은 은혜와 한국 교회를 통해 받은 은혜와 사랑이 너무너무 많기에 사랑에 빚진자들로서 기도로 보답하고져 하는 것이 우리들의 간절한 소원이며 소망인 것이다. 그래서 모두들 생명 다하는 그 날까지 기도하다가 천국가고자 하는 각오들이다. 현재 소록도 교회는 당회장으로 박주천목사님과 천우열전도사님, 박대철전도님을 모시고 550여명 성도가 기쁨과 넘치는 즐거움으로 감사하면서 마지막 때 선지자 사명을 감당하고자 한다. 오직 우리 소록도 성도들은 천국 소망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현재 소록도 섬 안에는 신성교회, 중앙. 동성, 남성, 북성교회등 5개 교회가 있으며 정임묵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소록(직원)교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