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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방언으로 효과적으로 기도할까요?
방언으로 기도하는데 대해서 아주 실제적인 가르침이 필요해 보이는군요. 이제 '성령 안에서 기도함으로써 당신의 직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건축할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당신을 돕기 위한 몇 가지 기본적인 지침을 주도록 하겠습니다.
※ 얼마나 크게 혹은 작게 기도하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사람들은 항상 내게 와서 "로버슨 형제, 형제는 어떻게 방언으로 기도를 하지요?" 라고 묻습니다.
나는 간단하게 "나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라고 대답하고는 숨을 죽여서 기도함으로 시범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큰 소리로 기도하지 않습니까?"
"아니오, 보통은 크게 하지 않습니다" 라고 나는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못 들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내가 큰 소리로 기도한다고 불안해하시지도 않지요!)
그러면 이렇게 또 묻습니다. "그러면 전투하는 방언은 무엇인가요?"
내가 그에게 묻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 사람은 거의 방언으로 비명을 지르는 듯이 시범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 말하는데 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십니까?" 내가 질문합니다.
"글쎄요, 나는 마귀에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서 방언은 하나님께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이 원하신다면 큰 소리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씀드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신의 편도선은 바하의 제 5 칸타타를 연주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편도선을 다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전투하는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어떤 일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그룹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귀에게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방언으로 비명을 지르고 외칩니다.
그러나 당신이 방언으로 기도할 때 소리를 지르거나 속삭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말을 공급하는 분은 성령님이기 때문에 당신이 방언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숨을 죽여서 기도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여 더 많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말을 만드십니다. 성령님이 방언의 근원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능력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참된 예배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됩니다. 예배를 큰 소리로 드리느냐 작은 소리로 드리느냐가 아니라 경배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당신의 전 존재를 얼마나 쏟아 붓느냐가 중요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어떤 문제를 분석하느라고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으면서 주님을 진실로 예배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처음으로 순회 사역을 시작하였을 때 나는 모텔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왔다 갔다 걷고는 했습니다. 나는 기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어서 가능한 한 큰 소리로 방언 기도를 하였습니다. 나는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나의 기도를 좀 더 능력 있도록 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나님은 귀가 멀지 않으셨기 때문에 내가 어떤 목소리로 기도를 하든지 들으실 수 있다는 것을 그때는 배우지 못했었습니다.
나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언어가 나의 입에서 나오는 그 순간 하나님께로 풀려나간 것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내 영에서 방언으로 나온 그 단어들은 여전히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내가 속삭이든지 외치든지 아무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 기도할 때 열정은 꼭 필요한 것인가?
당신은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 아주 열정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무엇보다도 야고보서 5장 16절은 의인의 효과적이고도 열정적인 기도는 크게 역사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만 야고보는 그 구절에서 믿음의 기도에 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당신의 삶에 나타난 어떤 '산'을 향하여 '산아, 움직여라!'고 말할 때 하는 기도입니다. 산이 움직일 때까지 어떠한 반대나 지옥에 대항하여 당신의 주장을 바꾸지 않을 만큼 충분히 강한 힘이 당신의 성품 속에 있을 때 이런 열정적인 기도는 크게 역사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충분한 성품의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할 때에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당신이 응답을 받을 때까지 당신의 주장을 견고히 잡고 있을 지점에 도달하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방언으로 열정적으로 기도하느냐 않느냐는 실제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 안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때때로 성령 안에서 내 영이 아주 강력해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내가 무엇과 싸우고 있는 것 같은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 강한 감격이 걷히면 나는 걷히도록 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나를 인도하시도록 그분을 신뢰합니다. 성령님은 내가 무엇에 관해 기도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나는 기도를 중단하지 않습니다. 나는 단지 숨을 죽여서 다시 조용히 기도를 계속합니다.
※ 평안한 상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오클라호마 털사에 있는, 내가 목사로 섬기는 교회에서 우리는 교회 전체가 하나의 몸으로서 기도하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모입니다. 이런 기도회에서 나는 자주 모든 사람들을 의자에 풀로 붙이듯이 앉아 있게 합니다. 그들은 거기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방언으로 기도만 합니다.
수년 동안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육신이 아직도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을 매우 힘들어했습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 성령으로 두 시간 기도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나 성령님을 잘 모르고 지내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기도하다가 나는 가끔 대단히 평안한 가운데 들어가게 되어 바닥에 두 세 시간씩 그냥 누워 있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그렇게 조용해지고 나는 조금도 움직이기를 원하지 않게 됩니다. 그럴 때에 성령님은 그분의 말씀으로부터 나를 가르치기 시작하시고 그러면 그분이 계시하는 진리는 마치 수정처럼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이곳은 영 안에서 얼마나 놀라운 곳인지요!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방언 기도로 도달할 수 있는 지극히 평안한 장소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곳을 잘 알게 될 때까지 잠잠히 기도하면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 본 적이 결코 없습니다. "로버슨 형제, 형제는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걷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십니까?"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걷는 것에 대해서 나는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과 친숙하게 잘 알게 되는 것과 기도의 훈련을 배우기 위해 잠잠히 기도하면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시기가 옵니다. 당신의 영이 방언으로 그리스도의 비밀을 기도하는 동안 당신의 몸이 가능한 한 가장 조용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지극히 평안한 장소에 도달하거나 머무는 것에 더할 나위 없는 도움이 됩니다.
※ 세움은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방언으로 기도할 때 어떤 느낌을 기대하며 찾습니다. 그래서 나는 교회 전체가 한 몸으로서 기도할 때 사람들이 감각을 초월하도록 의자에 못 박아 둡니다.
"로버슨 형제, 형제는 방언으로 기도할 때 어떤 것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까?" 오, 물론 있지요. 나를 오해하지 마십시오. 감정으로 느껴질 때는 나는 감정을 환영합니다. 때때로 어떤 것이 내 영에 쌓이고 쌓여서 마침내 내 혼에게 전달이 되고 그러면 내 감정이 움직입니다. "와!" 그러나 나는 내가 느끼는 것에 근거해서 내가 어떤 것을 받고 있는지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방언이 나를 세우고 있다는 말씀을 믿으면서 방언으로 기도를 계속할 뿐입니다.
방언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 우리의 영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감정은 방언이 당신의 혼을 통과할 때 추가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을 더하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당신이 소리를 치든지 속삭이든지 당신의 기도의 결과에는 조금도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초기에 성령 안에서 기도할 때는 손가락에 어떤 간지러움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하거나 어떤 감정적인 '높이'까지 오르지 못하면 나는 효과적으로 기도를 하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나는 방언으로 기도를 하기만 하면 내 안에서 감정적인 싸움이 일어나곤 하는 시기를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내게 향하여 닫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거의 기도하기를 그만 둘 뻔하였습니다. 나는 기도하면서 내가 경험하거나 경험하지 못하는 감정에 근거해서 내가 하늘까지 닿고 있는지 않는지를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세움은 감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감정보다 한 단계 더 깊은 것입니다. 감각은 우리의 혼의 영역에 속해 있지만 능력과 세움은 영적인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방언으로 기도하는데 심지어 우리의 지성도 제외시키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육신적인 자존심을 세게 강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세 시간을 기도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에 관해서 기도하고 있는지 전혀 끼어들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 번은 옛 멕시코에 대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비전이 언제 이루어지는지 알아내려고 나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나는 환상 가운데서 보았던 다가오는 부흥에 대해 하나님이 왜 좀 더 보여주시지 않는지 물으면서 이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내가 본 것이 어느 집회의 모습인지 제발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나는 기도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게 보여주십시오."
어느 날 아침 기도 중에 주님은 마침내 나의 기도를 중단시키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계획하고 있는 것을 영어로 말한다면 너는 그냥 그 계획을 망쳐 놓을 것이다!" 주님이 옳았습니다. 왜냐하면 멕시코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얼마나 큰 비용이 드는지를 나중에 알았을 때 나는 그것을 다루는데 만도 추가적인 많은 세움이 필요로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 기도는 당신의 감정적인 영역보다 더 깊은 것입니다. 방언은 당신의 생명이 그 위에 쉬고 있는 기초이자, 성령께서 양육하고 가르치고 세워주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은 부분인 당신의 영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항상 놀라운 기분을 즐기리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의 삶에 표준을 세우는 말씀, 즉 들은 그 말씀대로 당신이 그렇게 변화되는데 이 세움의 과정은 필요한 것입니다.
※ 경배의 역할
그러므로 세움의 과정에 나의 감정을 꼭 포함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느낌을 원하면 나는 경배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경배는 나의 혼의 영역을 강화하는데 필요한 경건한 감정을 자아내도록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시련의 한 가운데 있을 때 경배를 드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경배는 당신을 붙들어 주며 그 시련을 승리하면서 통과할 수 있도록 당신의 감정을 안정시켜 줍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단지 문제를 현상유지 하기만을 원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은 하나님 안에서 더 멀리 나아가 그 문제로부터 놓여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며 여기서 방언기도가 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영구적인 변화는 안에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당신이 유혹이나 시험이나 시련을 만나거든 매우 기쁘게 여기라고 말했습니다. 고난이나 연약함이나 혼란의 한 가운데서 기뻐하십시오. 그것을 큰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당신의 아버지를 경배하며 흠모하며 당신의 감정을 풀어 놓으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집중하면 기쁨은 마귀가 대항하여 활동하기 좋아하는 당신의 혼의 영역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해 줄 것입니다.
※ 경배를 통한 개인적인 돌파
나의 친한 친구이며 유명한 복음 전도자인 노블 헤이즈(Norvel Hayes)가 한 번은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거기 있는 동안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백성들이 나를 충분히 경배하지 않는다."
우리가 찬양과 경배를 드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는 흔히 교회에서 뿐입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변화를 주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눈 먼 사람과 귀 먹은 사람을 고치는 것을 본 것 외에 내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과 함께 했던 가장 위대한 경험은 내가 몇 몇 사람들과 함께 있는 가운데 개인적으로 그분을 경배하는 도중에 일어났습니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교회에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고 '더듬는 입술로' 말을 하고 난 후 곧 나는 집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동안에 하나의 영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강한 영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는데, 나의 육신적인 본성이 살며시 되돌아와서 나를 압도하려고 하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로잘리와 함께 기도하는 동안 나는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면서 거실을 계속 왔다 갔다 하였습니다. 나는 육신에게 지고 싶지 않았지만 나의 힘은 거의 소진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정말 어떻게 기도하는지도 몰랐습니다. 나는 구원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거듭난 뒤에도 교회를 가다 말다 했습니다. 교회에 가지 않을 때는 나는 별로 좋지 않은 장소에 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한 최고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육신의 유혹을 거절하면서 왔다 갔다 걸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서 '할렐루야'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를 반복해서 하는 것 외에 나는 어떻게 할 줄을 몰랐습니다.
위로 높이 쳐든 내 손에서 시작하여 갑자기 따뜻한 느낌이 내 위에 내려왔습니다. 그 느낌은 나의 팔과 어깨를 통과해서 흘러내리더니 내 가슴으로 들어와 나의 마음속까지 이르는 듯했습니다.
이 느낌이 내 다리로 흘러 들어가자마자 나는 뒤로 넘어졌습니다. 나는 숨이 차서 넘어졌지만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나는 힘도 안들이고 즉시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시간 동안 나는 성령님께 계속해서 양보를 해드리자 그 초자연적인 언어는 하나의 완전하고 유창한 기도 언어가 될 때까지 증가하였습니다.
거의 한 밤중에 시작된 성령의 강한 기름부음은 새벽 네 시까지 내 위에 임하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나의 갈급한 심령에 삶을 바꾸는 경험이었습니다.
두 번째 내가 성령의 강력한 활동을 경험한 것도 역시 내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나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오레곤에서 나무를 솎아내고 있었습니다.
나는 사장과 '요새(Fort)' 라는 별명을 가진 동료 직원을 구원하려고 작전을 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포트는 마약으로 몸이 상해서 메마르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젊은이였습니다. 나는 내 상관과 그에게 밤낮으로 간증을 했습니다.
나중에 사장은 내게 지불할 돈이 모자라서 더 이상 봉급을 줄 수 없게 되었지만 나는 이 두 사람에게 계속적으로 증거하기 위해서 임금을 받지 않고 일을 계속했습니다. 나는 봉급을 받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장은 어디 가서 나무를 베라고 나에게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이것은 내게 유익이 되었는데 왜냐하면 나는 내 마음대로 포트 옆에서 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깐 쉬려고 포트가 그의 전기톱을 끄기만 하면 나는 열정을 가지고 그에게 설교를 하기 시작하곤 했습니다. 그가 나를 피하려고 얼마나 빨리 톱을 다시 켰던지 당신도 보았어야만 했습니다!
마침내 나는 포트를 거듭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클래머쓰 폭포(Klamath Falls) 바깥에 있는 숲의 호수(Lake of the Woods)로부터 사분지 일마일 쯤 떨어진 벌목공들의 천막 안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포트가 천막 안에 앉아 있는 동안 나와 또 한 명의 다른 그리스도인 벌목공은 손을 위로 쳐들고 주위를 돌면서 주님을 경배하면서 포트가 구원받도록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느끼지 않으면 진짜 구원을 받은 것으로 믿지 않았습니다.) 몇 분 간격으로 나는 포트에게 손을 얹고 성령으로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른 새벽쯤 되었을 때 갑자기 하나님의 임재가 그 천막 안에 임하였습니다. 오늘날 까지도 나는 그것이 성령님이었는지 천사였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간이침대 위에 넘어져서 성령 안에서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성령 안에서 얼마나 취했는지 그 간이침대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중에 포트는 구원받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모두 새벽까지 성령 안에서 소리 내어 웃으며 낄낄거리고 방언으로 기도하며 기뻐했습니다. 이 소리가 들리는 곳에 있던 사람들이 우리가 미쳤다고 생각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다음날 사장은 그 전날 밤 천막 안에서 일어났던 일 때문에 내게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돈도 받지 않고 일을 해 주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장은 그날 밤 다시 나에게 와서 "내 안에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네"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왜 그런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신 문제를 기도로 끝장내겠습니다" 라고 나는 대답했습니다.
"좋아, 그렇지만 우리 사람들이 하나도 없는 호수 반대편으로 가서 하면 안 되겠어?"
"물론 갈 수 있지요." 이렇게 해서 다른 그리스도인 벌목공과 나는 사장을 데리고 호수 건너편으로 가서 그도 역시 하나님 나라에 이르도록 기도로 끝장을 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곧 포트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봉급을 받으려고 며칠 후에 다시 나타났을 때 그는 술에 취해 있었고 마약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전임 사역에 들어간 후에 캘머스 폭포에서 집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집회를 마친 후 뒤에 방에 앉아 있는데 살이 적당히 찌고 단정한 한 젊은 남자가 걸어들어 왔습니다.
"나를 기억하겠나?" 그가 물었습니다.
"아니, 기억이 나지 않는데." 내가 대답했습니다.
"자네 나와 함께 숲에서 일하지 않았나. 내 이름은 아무개라네." 그 이름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나를 포트라고 불렀었지."
"내가 아는 포트란 이름을 가진 유일한 사람은 상습적인 거짓말쟁이이고 마약 환자였는데!"
그 젊은이는 금방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게 나야!"
나는 놀라면서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네가 맞아? 그런데 자네 이 집회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아직 못 들었나? 나는 이 집회를 후원하는 협력 목사 중에 한 사람이지!" 나는 거의 기절할 뻔 했습니다! 수년 전 벌목공 천막 안에서 밤새 가졌던 우리가 체험한 성령의 부흥이 마침내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좋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두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운데 일어났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