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리편이 57장까지 있는데요.
읽어 오신 분들은, 원리편이 앞부분은 어려운 듯 하다가도, 뒷 부분은 ‘좋은 법문 많구나’하는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제가 일일이 한 장 씩 다 못해드리고요.
먼저 질문이나, 내가 읽었던 것 중에 이것이 나는 제일 좋았다는 의견 표현을 해도 좋습니다.
[문] 양도인
원리편 9장에 나오는, 견성의 다섯 계단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답]
견성이라는 것은 일원상 자리, 우주의 본원 자리, 나의 본래 성품자리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견은 보았다는 것입니다. 알았다는 의미, 깨달았다는 의미입니다.
삼학으로 말하면 연구이지요.
정신수양은 양성이다. 성품을 기른다 입니다.
사리연구는 견성이다. 성품을 안다 깨쳤다 입니다.
작업취사는 성품을 거느리고 쓴다해서, 솔성이라 합니다.
삼학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견성이라 그러면, 사리연구보다는 앎과 깨달음에 의미가 더 있습니다.
견성이라 그러면 초견성, 중견성, 상견성, 이렇게 세단계로 나누기도 하고요, (대산종사법어 제3집 제3편 수행 126.),
견성오단이라고 해서 정산종사님께서는 다섯 단계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견성오단 見性五段).
그런데 둘이 다른 내용이 아닙니다. 견성오단은 견성뿐만 아니라, 솔성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섯 째에서, 견성 성불까지, 제중까지, 대기대용의 활용까지, 솔성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견성오단]
견성오단의 첫째, 둘째가 초견성입니다.
초견성이라 하면,대소유무의 대자리다,혹은 진공자리다 라고 하는데, 이 자리를 깨쳤다 하는것입니다.
견성오단에서 첫째는 “만법귀일의 실체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만법귀일은 의리선(義理禪)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너무 어렵나? 대종사님이 처음에 많이 오면 의두요목으로 만법귀일을 많이 주셨습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 만법이 하나로 돌아간다하니,그 하나는 어느 곳에서 어느 곳으로 돌아간 것이냐.
서중안 선진님 부인 정세월 선진님께도 이것을 주셨고요. 익산에서 동하선 나실 때도 이것으로 문답을 많이 하셨습니다.
견성오단의 둘째는 “진공의 소식을 아는 것”입니다.
견성오단의 셋째가 중견성이라고 하는데요, 소자리까지 즉 묘유자리까지 입니다.
견성오단의 셋째가 “묘유의 진리를 보는 것”인데요.
묘유를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묘유 하나로 설명하면 소 자리이고요, 묘유인과까지 이야기하면 유무자리까지 포함됩니다.
중견성은 묘유 자리까지이고요, 상견성은 유무 자리까지 즉 인과까지 이야기 하는것입니다.
견성오단의 넷째는 “보림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수양을 의미합니다. 견성보다는 삼학 전체를 이야기 합니다.
수양이라는 것은, 마치 육조대사가 한 소리 듣고 깨쳐버렸지요. 오조홍인 밑에 가서 있었는데, 계를 받지요.
그 다음 조를 이어 받아요. 근데 도망갑니다.
산속에서 18년인가를 있어요. 그때를 보림하셨다 라고 합니다.
보림은 보호임지(保護任止)의 준말입니다.
보호임지에서 ①보호는 안으로 보호한다. 무엇을? 나의 본래 성품, 내불방출. 나의 본래성품을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본래성품은 원만구족입니다. 본래성품은 본자구족입니다. 본래성품은 요란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안으로 보호하고요.
보호임지에서 ②임지는 밖으로 경계를 대해서 마음을 멈출 줄 아는 것입니다. 외불방출입니다.
보림은 내가 견성 한 것을 실지 경계에서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명 자성반조라 하기도 합니다.
성품을 보았기 때문에, 성품을 안 본 사람은 어떻게 공부하느냐. 보통 사람은 목적을 반조합니다. 혹은 법문을 대조합니다.
그것을 보조국사는 자성문전이라 않고, 수상문전이라 표현하셨습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법문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신심이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법문에 대조합니다. 인과를 못 깨쳤어도,인과를 믿어요.
그래서 법문에 대조해요.
그러니까 뻘짓거리 하다가 조절합니다. 수상문전이라 하기도 하고요, 법문대조 공부입니다.
그러나 견성을 하면, 자성의 정혜계를 하는 공부입니다.
자성자리를 깨쳤기 때문에, 그 자리를 지켜보면 그 자리에서 녹일 수 있고,
그 자리에 비추면 밝아지고, 그 자리에 비추면 바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거기는 세운다 만다 할 것이 없습니다. 그냥 세워지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이 “앞으로 견성은 집에서 다 한다고 그랬습니다. 성불하기 위해서 스승을 찾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견성은 에너지로 말하면, 십분의 일도 안됩니다. 성불이 더 어렵습니다.
성불이 구십 이상입니다. 십이 견성이면, 구십이 성불제중입니다. 견성은 인지가 밝아지면 집에서도 하고 온다 하셨습니다.
여러분, 견성을 하시려면, 의두를 걸어야 합니다. 의두를 걸려면, 계속해야지요.
계속하려면 분발심을 내야하고, 분발심을 내려면 신심이 있어야지요.
신심을 내려면 원력이 있어야지요. 그리고 정성이 끊이지 않아야합니다. 계속 하다보면, 밝아진지도 모르게 밝아집니다.
전생에 닦은 사람은 좀 수월합니다. 선을 해도 빨리 진경을 보고요. 의두를 해도, 빨리 밝아집니다.
전생에 안 닦은 사람은 징그럽게 어렵습니다.
선을 하면 왜 이렇게 다리는 아프고 졸리운지. 의두를 걸어도 뭔놈의 소리인지 모르겠고요.
예전에 어떤 원불교 학과 학생이 4학년 때에, 대산종사를 찾아가서 “제가 정남을 할까요, 결혼을 할까요” 질문을 했습니다.
대산종사님이 어떻게 대답하셨을 것 같아요? 정남을 하라 하셨을 것 같아요? 결혼하라 하셨을 것 같아요?
대산종사님이 “견성을 해라, 이놈아.” 대답하셨습니다. “견성을 하고 나면, 결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 상관 없다.”
서가모니 부처님이,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쫓아서 막 달려가는 사람을 불러서 잡았습니다.
부처님이 “어디가시냐”고 묻자, “내가 지금 소를 잃어버려서, 소를 찾고 있소.”라 대답했습니다.
서가모니 부처님이 “진짜 보물은 잊어버린 줄도 모르고, 다른 것을 찾고 있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진짜 보물이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여쭙자, 서가모니 부처님이 “네 안에 있는 자성”이라 답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출가해서 아라한 경지까지 갔다는 법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교무님, 제가 바빠서 수양할 시간이 없습니다."
“교무님, 제가 의두는 며칠하다가 지갑에 넣어놨는데 잃어버렸습니다.”"바빠요 힘들어요.”라고 저에게 말합니다.
가치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었습니다. 진짜 보물을 짊어지고, 빌어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짜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걸 찾아서 빛나게 쓰면 될 것을, 그것을 찾을 생각도 없고요, 찾으려다가 말아버리곤 합니다.
원불교 만나서 견성은 최소한 해야지요. 최소한 견성을 해야, 항마위에 갈 수 있습니다. 견성을 안 하면 항마위에 못갑니다.
왜냐하면, 견성을 못하면, 결국은 신심에 의지하는, 타력에 의지하는 것밖에 안되거든요. 경계가 오면 무너집니다. 견성은 확실한 자력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성반조, 회광반조를 할 수 있는 것이 견성입니다. 자성의 정혜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일상수행의 요법에서 자성의 정혜계를 세우자고 하지만,자성의 정혜계가 아니라, 그냥 정혜계입니다.
왜냐하면 자성자리를 보지도 못했는걸요. 그냥 법문에 의지하는 것입니다.그냥 정혜계입니다.
일반인들이 성공하면 대단하다고 하는데요, 의지와 목표의식으로 한 것이지요. 자성의 정혜계로 한 것이 아닙니다.
하버드대 나와서 돈 벌었다고 해도, 자성의 정혜계가 안되면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자기를 모르면 애기입니다.
어떻게 제일 어려운 걸 질문해버리셨네. 영상으로 여러 번 돌려보세요. 공부 좀 한 사람은 내 이야기가 엄청 좋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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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이호원
원리편 7장에 보면, “한 큰 우너상이 돌매 천만 작은 원상이 따라 도나니, 마치 원동기가 돌매 모든 작은 기계 바퀴가 따라 도는 것 같나니라.”하셨는데,
“큰 원상”과 “작은 원상”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요.
[답]
정전에 보면 이 원상은 해서 나오는거 못보셨어요? 어디에 나와요? 일원상 법어에 나오잖아요
제5절 일원상 법어에 보면, 동그라미 큰 것 하나 있고요, 작은 것 여섯 가지 있잖아요. 그것입니다.
진공과 묘유로 설명해도 되고요, 대령과 개령으로 설명해도 되고요, 원만구족 지공무사한 것과 육근으로 나투는 것으로 생각을 해도 됩니다. 그러나 둘이 아닙니다.
51장을 보면, 김흥철 선진님이 “공을 위하여 상극의 업을 지으면 그 과보가 어떻게 되나이까” 여쭈니까,
정산종사께서 “사적으로 상극의 과보는 면할 수 없으나 그 일로 인하여 공중에 큰 공덕이 되었다면 그 공덕으로 인하여 크게 진급이 되므로 그 과가 경하게 받아지나니라.” 하셨는데요.
인과는 호리도 틀림이 없는데, 과가 경하게 받아질 수 있는 것인지요?
[답]
밑에 나오지요. “인과가 무서워서 옳은 일을 못하는 사람은 인과를 모르는 사람만 못하나니라.”라고요.
이 예가 뭐가있냐하면은 총부에 원림농원이라고 복숭아농장이 있었어요. 거기서 벌레를 잡아서 팔았습니다.
또 박물관 뒤쪽에 저수지가 있었는데, 물을 펐더니 가물치, 잉어 같은 게 나오는거예요.
어떤 사람이“인과는 내가 책임질테니까. 걱정 말고 일하라.”고 말하니까, 대종사님이 그 사람을 불러서 혼을 냈습니다.
“네가 인과를 책임진다고?”
또 벌레를 잡으라니까 무서워서 못 잡는 거예요. 인과 받을까봐. 무서워서 어떻게 살생을 하냐고.
그 때 해주신 법문들이 있습니다. 같은 내용입니다.
인과품에도 나오지요. 정업을 경하게 하는 법.
대종사님께 어떤 사람이 질문했지요. “대종사님 같은 분이 왜 아프세요.”
대종사님이 뭐라 하셨어요.
“내가 깨치고 나서는, 죄업을 최대한 안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때로는 중생을 제도하려다보면, 중생이 말을 안 들을 때 혼을 냈다. 그때 당한 중생은 나한테 원한을 품어서 앙갚음을 한다. 원한을 품을 것을 알면서도, 제도하려고 그렇게 했다.”
그게 뭐예요? 인과가 무서워서 옳은 일을 못하시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그 대가로 당신이 종기도 나고 아프기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일을 하면 좋은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억압하는 일이라든가 또는 살생을 하는 일도 공중을 위해서 하면, 업이 경하게 된다 합니다.
예를 들어서 모기가 윙 하고 날아 갔어요. 모기를 때려서 잡아 버렸어요. 모기가 “너 이 새끼 두고보자”하면서 죽었어요.
이때 두 부류가 있는 거예요. 모기가 진급해봤자 얼마나 진급하겠어요. 모기를 죽인 사람이 복을 많이 지었으면, 힘이 있지요.
반면에, 업을 지은 대상이 복을 못 지었으면 강급해요.
인과를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되요. 인과 과 사이에 연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시간이라는 것이 있어요.
인을 짓는 것과 과 사이에는 연이 묘하게 작용합니다.
연이 어떻게 작용하냐하면요. 어떤 사람은 진급하고, 어떤 사람은 강급하는 거예요. 똑같은 갑부인데 달라요.
예를 들어서 내가 어린아이에요. 모기한테 물리면 죽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건강하면, 모기한테 물려도 별 상관 없지요. 받기는 받았는데, 별로 영향을 못끼치는 것이에요. 내가 강자가 되면요.
그러나 시기따라 종합적입니다. 그것이 그걸로만 연결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업이라는 것은 공업과 함께 해져요. 본인 스스로가 나 혼자만 존재하지 않잖아요. 개령이, 대령 속에서 사은의 은혜 속에서 존재하듯이. 내가 어떤 인을 짓더라도, 나 혼자만의 단순한 인이 아니라 엮어진 인입니다.
그래서 공중일을 하면, 왜 업이 경하게 되냐 하면요. 연이 진급해버린 것이에요. 그러니까 업을 지었어도, 업이 경해지는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 그런 사람이 있었어요. 회의 때 말을 안 해요. 인과품에 보면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은 허공에 심어진다는 법문이 있어요. 우리가 왜 말 안햐고 물으니까, 인과품 그 법문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업을 안 짓겠다고 말을 안해요.
그런 사람에게 해준 말이 이 말입니다. “인과가 무서워서 옳은 일을 못하는 사람은 인과를 모르는 사람만 못하나니라.”
인과를 알아서 무얼 하자는 것이지요? 은혜를 심자는 것입니다. 업을 풀자는 것입니다. 세상을 평화세상으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단순하게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어떤 한 사람도 단순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은의 은혜가 똘똘 뭉쳐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여기서 방귀를 빵 뀌어버리면, 그 방귀를 저 혼자만 받는 것이 아니라 별수 없이 다 함께 받습니다. 같은 이치입니다.
어떤 것도 같이 엮어지는 거예요. 인연이 같이 엮어지는 것입니다. 나라이 망하면, 내 회사가 망하잖아요.
우리 교단에 운도 국력과 같이 맞물려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나라가 잘 크면 우리 교단도 잘 커집니다. 우리만 잘 클 수가 없어요.
연의 문제입니다. 인(因), 연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인(因)이랑 연이 묶어서 과가 나옵니다.
팔타원님 계곡에서 물을 함부로 쓰니까, 대종사님이 “너 그러면 물이 부족한 곳에서 태어난다.” 그러셨어요.
인과는 종합적인 것이면서, 반드시 있는 것이면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경감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똑같은 욕을 했는데요. 그 대상이 대통령이거나 거지거나 친한 친구거나. 어떤 대상에 했느냐에 따라 과보가 달라집니다.
“윤회의 승강을 벗어나나니”하셨는데, 윤회의 승강을 벗어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답]
일원상 서원문을 보면, “사생의 심신작용을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켜”라는 말이 나오지요. 사생은 태란습화이고요. 심신작용은 신구의 삼업을 말합니다.
심신작용은 누구나 하지요. 그런데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육도로 변화를 시킨다 하셨습니다.
육도는 선도와 악도, 여섯개로 나누면 천상, 인도, 수라, 아귀, 축생, 지옥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위로 올라가고 아래로 내려가기도 하는 승강이 있어요. 육도를 벗어난다는 말이 있는데, 무슨 뜻이지요? 육도를 안 받는다는 말인가요? 그 말이 아닙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어떤 양반이 지옥에 들어가서 중생을 건지기도 하고, 어떤 양반은 명의가 되려고 소로 태어나서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먹어본다는 이야기요. 그런 사람이 육도윤회의 승강을 벗어난 사람입니다.
보통은 윤회를 하면, 여섯가지에서 천상,인도를 선도라 합니다. 여기서도 달라요. 인도 속에서도 보통급, 특신급, 상전급이 있잖아요. 보통급도 안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이런말도 있잖아요. 사람도 천차만별이잖아요.
그 중에서 심신작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육도로 나누어지는데, 똑같이 육도를 받아도,보통 육도를 받으면 거기 매해집니다.영식이 몸을 받는 순간, 그 거죽을 두르는 순간, 그 거죽에 매어집니다. 사람이 소가 되면, 음메 하고 있는거지요. 개가 되면 왈왈왈왈 하고 있는 거고요.
육도승강을 벗어난 사람은,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은 몸을 받을 때도 늦게 태어납니다. 또 자기가 자유로 해서 태어납니다.
박문수 어사가 죽을 때, “나를 알려거든 어느 마을에서 태어난 아이의 손을 보라.” 육도윤회를 자유로 하는 사람이거든요. 그 마을 가서 보니까, 아이가 징표를 쥐고 있어요.
전설의 고향이 아닙니다. 그런 예는 많아요. 육조대사는 나무꾼이었는데,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한 소리 듣고 깨쳐버리셨거든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렇게 법문을 많이 들어도, 징그럽게 안되는데 말예요. (웃음)
그 육조대사는 문자도 몰랐던 사람이었거든요. 근데 한 소리 듣고 깨쳤어요. 왜? 전생에 닦아서 그렇습니다. 상상근기가 그렇습니다.
근데, 똑같은 거죽을 둘러써도 달라요. 전생에 서원을 세운 사람은,딱 자기 인연을 찾아갑니다. 그런 스승을 찾아갑니다.
그런 스승을 전생부터 만듭니다. 자기가 찾아갈 사람을 만듭니다. 그래서 도가에서 계속 공부하게 됩니다.
서울대 들어간 사람은 전생에 유학자라든가, 훈장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전생에 내내 많이 해먹은 놈들은 서울대 못 들어가지요. 백날 해도 못 들어갑니다. 그게 평등입니다.
자성자리는 원래 지우가 없지요. 그러나 닦은 바에 따라 다릅니다.
그래서 수도원에 계신 퇴임하신 분들은 죽어라 공부합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공부합니다. 내생에서 가장 중요한 복 중 하나가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수도원 계신 분들은 서원을 세우고, 수행을 하고요, 복을 악착같이 짓잖아요.
어제도 수도원 할머니들이 조금씩 모아서 학사에 쓰라고 보내줬어요. 복을 지어야 온다는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든 빼먹을지 연구하는데요. 더 가난해지는 연구하는 것입니다. 전혀 다르지요.
똑같은 사람 몸을 받았어도, 승강을 자유로 하는 사람들은 최소한 항마위 이상입니다.
제대로 항마위라면요. 왜? 그 성품자리는 육도를 초월한 마음자리이거든요. 그래서 그렇습니다.
원불교에서 육도에 대해 이해가 안 된 사람은, 인과에 대해 가늠을 못 잡은 사람입니다. 원불교가 생활종교이지만, 이것은 진리적 사실이고 인과의 이치입니다.
여러분 마음을 나쁘게 쓰면 얼굴이 안 이뻐져요. 얼굴이 못 생겼으니까 마음을 나쁘게 써요? 이쁜 사람이 마음이 착해요, 착하니까 이뻐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중) 둘 다요.
인중과(因中果), 과중인(果中人)입니다. 사과 속에 씨가 있지요. 사과가 결과이지만, 그 안에 씨가 있네요.
원불교적 인과는 현재 이 순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동시에 미래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쁜 것 만이 중요한가, 더 중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이쁜 것도 복이지요.
복 중에 최고 복은 인연복이고, 그 중에 법연의 복입니다. 이쁜 건 복 중에 낮은 복입니다.
최고 복은 지혜와 함께하는 복이고요. 복 중에 인연복이 제일이고요. 인연복 중에 법연이 최고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입교연원이 많이 되어야 합니다. 장학사업 많이 하시고요. 공도자숭배 많이 하시고요. 공적인 것을 많이 해야 합니다. 공적으로 하면 몇 십배의 공덕이 더 있다고요. 지나가는 사람에게 만 원 준 것이랑, 공금에다 만원 준 것은 다릅니다.
공금에다가 만원 낸 것은 수십 만 원의 가치입니다. 공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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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심하은
8장에 “우주의 분별 없는 자리를 깨쳐 아는 것을 부처의 지견을 얻었다 하고, 우주의 분별 있는 자리를 알아서 천만 경계에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을 부처의 행을 한다 하나니라.” 하셨습니다.
교무님께서 “사람이 깊이 잠들어 꿈도 없는 때에는 그 아는 영지가 어느 곳에 있는가.”
(의두요목 10.)에 대해 자주 말씀하시는데, 꿈도 없이 잠잘 때는 분별 없는 자리로 자는 것인지, 분별 있는 자리로 자는 것인지요?
[답]
성품 - 정신 - 마음 - 뜻 - 육근
마음이 이렇게 나옵니다. 성품은 무분별입니다. 분별이 나오기 전입니다. 그 자리를 깨쳐야 합니다.
그래서, 선을 하지 않고는 견성할 수가 없습니다. 무분별 자리는 분별로써 깨치는 자리가 아닙니다. 분별로 대체하는 것을 마음공부라고 하면 오산입니다.
계교의 세계로 지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세계가 아닙니다. 왜? 무분별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을 통해서 들어가는 세계입니다.
정신은 흔히 기운이라고도 해요. 정신기운이라고 하지요. 정신기운이 딱 동해요. 그러면 정신이라는 것은 적적성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아ㅡ 도솔이구나” 이게 정신입니다. “쟤 오래간만에 왔네” 그러면 마음입니다. 분별이 확실하게 들어간 것이지요.
마음은 희로애락애오욕이 들어가는 것입니다.감정이 들어가는거지요. 이것을 마음이라 합니다.
뜻은 쟤한테 좋은 소리를 해줄지, 척 지는 소리를 해줄지 생각하는 것이고요.
이렇게 해서, 육근으로ㅡ말로 행동으로 눈빛으로ㅡ 나타나는 것이지요.
무분별이라는 것은 성품의 세계이지요. 진공으로 체를 삼는다 하잖아요. 성품으로 체를 삼아요. 그리고 마음으로 용을 삼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마음을 쓸 때, 온전한 정신으로 마음을 안 씁니다. 그냥 동하는 마음으로만 쓰는 것입니다. 희로애락애오욕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희로애락애오욕을 나오게 한, 온전한 정신을 놓치고 살지요. 더 나아가서 정신이 나온 성품자리를 떠나버려요.사람들이.
결국은 진공묘유를 말하고요. 분별 없는 진공의 자리에서 체를 잡아서, 묘유로 용을 써야 해요. 즉 성품을 여의지 않고 마음을 써야합니다.
마음이 선한가 악한가, 밝은가 어두운가,구부러졌나 곧은가에 따라 선악정사가 구분이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마음이 요물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수양한다고 하지 않는 거예요. 요물이니까요. 정신은 수양한다고 합니다. 온전하기 때문에요. 성품은 깨친다고 표현합니다. 단련한다 오득한다고 합니다. 뒷말을 들어보면 이 뜻을 알아요.마음은 뭐라고 하죠?
마음은 대조한다고 합니다. 쓴다고 합니다. 만약 마음을 수양하면 어떡해요? 마음에 죽여버려야지라는 마음을 수양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히틀러는 마음을 그쪽으로 써버린겁니다. 마음은 대조한다고 합니다.
뜻은 서원으로 한다고 합니다.즉 온전한 목적 큰목적으로 하는거죠. 근데 보통사람은 뜻은 욕심의 세계이지요.
그래서 아까 범부라는 것은 이런 성품자리를 깨치지도 못하고, 온전한 정신을 수양하지도 않아요. 그래서 마음을 막 써요. 그래서 뭐가 와요? 정신병이 오고, 우울증이 옵니다.
성품과 정신은 저수지와 같다고 대산종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저수를 하지 않고 막 써버리니까 닳아져버린 것입니다. 이건 무형이니까, 사람들이 육신이 피곤한 건 아는데, 정신이 닳아져버린 줄을 몰라요.
“꿈도 없이 잠잘 때 그 아는 영지가 어딨는가”할 때는, 꿈도 없는 그 성품자리에서는 마음이 어딨는가 연구해보라는 말입니다. 의두요목입니다. 분별없는 자리에 근간해서 분별을 얻는 것이 제대로입니다. 똑같이 분별하지만 달라요. 분별 없는 자리에 체를 잡고 내는 사람과 그런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은 다릅니다.
특히 관계형들은 머리 속에 여우가 아홉 마리 들어있어요. 이생각 저생각 이생각 저생각으로 가득해요.
생각이 텅 빈 데서 온전한 맑은 기운으로 오면 되는데요. 도인은 단순하거든요. 중생일수록 마음이 복잡해요. 자기 스스로 스스로를 괴롭게 합니다. 속이 타들어가요. 그런데,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조금 타는 것은 괜찮아요. 중생을 알아야 하니까요. 나만 단순하다고 되는 건 아니더라고. 쉬운 일이 아니지요.
분별없는 자리를 들어갈 줄 알아야합니다. 최소한 아침에 그 자리에 들어갔다 나와야지, 진공에 체를 삼고 사는 데 보탬이 됩니다. 분별 없는 자리, 대 자리, 자성의 체 자리로 먼저 들어가라고, 법회 시작 때에 그래서 입정을 하는 거예요.
그런 자리를 안 들어가면, 계속 나를 가지고 놀아요. 계교만 하는 거예요. 상대심, 분별심. 계교하고요. 스스로도 머리아파요.
비워버리면 편안해집니다. 쏙쏙 들어옵니다. 비우니까 고요해지고, 고요하니까 맑아지고, 맑으니까 밝아집니다.
27장 보면,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큰 것이며, 유념보다 무념이 더 크나니,”라 하셨습니다.
유념이 실생활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정산종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인지요.
[답]
있는 것 < 없는 것
유념 < 무념
중생은 있는 것을 쌓으려하고, 유념을 많이 합니다. 불보살은 없는 것, 무념을 합니다. 여기서 무념은 무념을 유념한다는 겁니다.
유념공부 그러면, 유념 뿐만 아니라 무념을 유념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여기서의 법문은 유념과 무념 두 가지를 다 각각 나누어서 한 설명이고요.
무념을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27장 법문의 무념은 진공자리에 바탕한 무념이고요.
일기할 때의 유무념에서 무념은 부정적인 의미의 무념입니다. 방심했다는 의미, 주의하지 못했다는 의미, 실수했다는 의미, 빼먹었다는 의미, 멍 때렸다는 의미입니다.
법문에서의 무념은 분별 없는 자리의 체를 놓지 않는 무념, 즉 진공으로 체를 삼는다는 의미입니다. 묘유로 유념을 삼는 것이지요. 그래서 무념이 유념보다 큰 것입니다. 왜? 유념(있는 것)은 유한해요. 무념(없는 것)은 무한합니다. 크기로 말하면 게임이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있는 것, 유념을 무시하면 되냐? 아닙니다.
무념이 크고 중요함을 알면서 있는 것 유념을 활용하는 것과 무념을 모르고 가볍게 알고 유념만 하는 것을 다르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것입니다.
그러니까 좌선을 하라고 해도 안하고요. 법회 보라해도, ‘내가 미쳤냐 그 시간에 돈 벌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있는 것이 없는 것 보다 크다고, 유념이 무념보다 크다고 생각합니다. 진짜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크고요, 유념보다 무념이 더 큰데요.
기업 하는 사람도 두 부류로 나뉩니다. 기업하면서 바쁘다면서 교당 안오고 좌선안해요.
그런데 기업을 해도 견성의 원리를 안 사람은 무결석합니다. 더 큰 기업을 운영하면서도요. 직원이 천 명, 이천 명이어도 무결석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알거든요.
55장을 보면 좋은 인연과 낮은 인연이 나오는데, 낮은 인연은 질이 낮은 인연이므로 끊어야 하는 것인지요.
[답]
56장 보세요. 인연에는 선연과 악연이 있어요. 선연이 악연일 수도 있고요, 악연이 선연일 수도 있습니다. 고정돼있지 않습니다.
자식으로 태어나서 부모가 기뻐했어요. 그런데 그 자식이 가장 이쁠 때 죽어버려요. 그 자식이“시원하게 갚아 버렸다”하면서 죽어요. 전생에 악연이었던 것이지요. 상대가 엄청 괴로울 때, 자기는 시원하다 그래요. 그건 악연입니다.
그런데, 악연이었다가도 풀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내 마음의 힘입니다. 악연이 갚을 때 인과로 알면,선연으로 바뀝니다.
악연을 만났을 때, 삼세를 생각하지 못하고, 지은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되갚아요. 그러면 악순환의 고리가 더 커집니다.
이 법문은 뭐냐하면 선연과 악연이 있는데, 선연과 악연을 구분한 것입니다.
선연은 “내 마음에 항상심을 주고 각성을 주는 사람 앞길을 열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낮은 인연은 반대입니다. "나의 전로를 막고 나태심과 타락심을 조장하며 선연을 이간하는 인연“입니다.
제가 전농에 있을 때, 내가 담배피는 걸 봤다고 말하고 다니는 청년이 있었어요. 출가하고 담배핀 적 없거든요.
교무님과 청년들을 이간질시키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은 낮은 인연입니다. 부정적인 것은 아홉 단계까지 거쳐 간다고 합니다.
전혀 모르는 아홉 사람에게까지도 내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선근자와 친근하라”하셨습니다. 큰 스승, 지혜 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과 가까이 하라는 의미입니다.
전략적으로 악심을 품고서가 아니라, 내가 보다 지혜를 갖추기 위해서, 내가 보다 진급하기 위해서, 내가 보다 마음의 힘을 갖추기 위해서 그러라는 것이지요.
선연/악연도 고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좋은 인연으로 만났다가도, 내가 신구의 삼업을 못 쓰면 낮은 인연으로 됩니다. 내가 만드는 것입니다. 내 행동, 내 말, 내 생각들이 결국 나를 만들어갑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말이나 행동 뜻도 기분 좋을 때는 좋지만, 안 좋을 때는 안 좋잖아요.
공부의 기준을 다른 사람을 보면서 생각하는게 아니라, 내 마음을 보면서 생각하는게 중요합니다.. 계문 새길 때도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어요. 내 마음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55장 읽을 때도 그렇습니다. 내가 낮은 인연으로 행위를 했는가,내가 다른사람 앞길을 막진 않았는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태심이나 타락심을 주었는가가 중요합니다.
누가 이렇더라, 저렇더라 생각하는 것은 마음공부가 아닙니다. 죄업만 짓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힘이 약할 때는 선연을 가까이 하는 것이 좋고요. 특히 선근자, 선지식을 가까이 하는 것이 더 큽니다. 책 몇 권 읽는 것보다는 선근자 가까이하는 것이 더 큽니다, 사실은.
첫댓글 초벌해 주신 배성해교우님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수월하게 끝났어요 ㅎㅎ
인덕교우님~ 새벽까지 고생많으셨습니다 ㅠ
동영상 새로 돌려보시면서, 제가 안 쓴 부분도 추가하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ㅎㅎ
우왕~!! 두분모두 감사합니다. ^^
와우 와우 짝짝짝짝.............
감사합니다~ 공부에 큰 도움됩니다~~
꺄 >ㅁ< 인덕 교우님 성해교우님 덕분에 이렇게 좋은 공부 할 수 있네요~! 바탕은 대종사님과 굠님이지만 키키 넘넘 감사합니당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부모님과 대화하다가 지난 설법 내용이 떠올라 카페에 왔는데 역시나.. 완벽하게 정리되어있네요~ 감사합니다^^!!
와.. 제 필기에 빠진게 너무 많았네요.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