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국민학교 들어가기 이전에 한글을 스스로 깨쳐서 뜻도 모르면서 읽을줄 알았는데 그 사연은 이렇답니다.
나는 세간에서 말하는 마흔둥이 막내라 다른 학우들 아버지뻘 나이되는 형님들이 계셨는데 대구 사범학교를 나와 박대통령이 문경에서 교편잡던 그시절에 애숭이 총각선생으로 선산에서 교편을 잡았던 형님이 한분 있었지요. 내가 태어 났을땐 교직도 그만두시고 어떤 회사에 근무하셨고요...
그런데 이 형님이 내가 어릴때 시조를 읽어 주시면서 너도 한번 외어봐라고 하셨는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시조란 글자 마흔두자 내외의 짧은것이어서 한두번 들으면 금방 외우게 되지요. 그래서 몇번듣고 외워보여 드렸드니 참 기특하게 생각 하셨던지 다음날 다른 시조를 또 하나 읽어 주시면서 외워보라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외워보여 드렸고...
처음엔 며칠만에나 어쩌다가 한수씩 배웠는데 나중엔 차츰 자주 배웠는데 처음엔 재미있던것이 자꾸 물어보니깐 그때도 귀찮아 지더군요.
형님이 시조를 들려주실때는 어떤 책을들고 읽으셨는데 그땐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청구영언이나 해동가요같은 시조집인것 같네요.
나중엔 새로운 시조만 외우라고 하시는게 아니라 그때까지 배운걸 무작위로 느닷없이 외워보라 하셨는데 어떤건 금방 생각이 나지만 어떤건 기억이 아물거리고 모르겠는것도 많고... 어떤 시조를 읽으시고 작자가 누구냐고 묻는가 하면 어떨때는 누구의 시조를 외워보라는 식으로 질문도 자꾸 다양하게 되고... 그래서 황진이, 정몽주, 성삼문, 이색, 노가제,목은,야은, 포은,도은,태종(이방원)... 등 이름과 호를 익히게 되었지요.
그게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전에 있었던 일인데 형님께선 저녁만 되면 나를 불러 앉혀서 자꾸물어서 귀찮아 졌는데 한가지 꾀가 생겼답니다.
한번은 형님이 그날 읽으시던 곳을 잘 보아 두었다가 나중에 글자를 그려서(쓸줄을 모르니까) 어머님께 물어보았지요. 그래서 한자 한자 물었는데 서너자를 묻고나니 그 다음엔 물을 필요도 없게 되었지요.
지난 밤에 기념문집에서 김종진 선생님이 쓰신 글을 읽었습니다.
선생님은 아마 지금도 살아 계실테니 몇가지 선생님의 기억을 바로잡아 드릴께요. 나는 강수균교수께서 학급문집 구송을 여경우교수가 갖고있다는 얘길듣고 당장 거기에 내글 토끼사냥이 있을테니 보시라고 해서 여경우 교수께서 우리 대구 사랑방에 그 글을 올린적이 있었지요.
김종진 선생님께,
선생님 안녕하셨습니까?
선생님은 저를 당장 기억을 못하실지 모르지만 이글을 읽으시면 옛날 기억이 되살아 나실지... 얼굴을 기억이 안나드라도 그 사건은 기억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선생님이 교정에서 인삿말을 하신건 별로 기억에 없지만 첫 수업시간에 우리반에 들어 오신건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요.
우리반에 선생님과 똑 같은 이름을 가진 김종진이가 있었는데 얼굴도 넙적하고 생긴것도 선생님을 좀 닯은 그런 친구였지요.
선생님이 칠판에 이름을 쓰시고 돌아 섰을때 깔깔웃는 우리를 보시고는 영문도 몰라 어리둥절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김종진이는 나중에 우리가 선생님 성함을 부를수 없으니 너는 소진이 해라고 우리가 소진이라고 불렀답니다.
그 김종진이는 그 당시 참 순진한 친구였는데 양키시장(교동시장)부근에 당수(태권도)를 배우러 다니기도 했지요.
그런데 선생님 생각을 하니 갑자기 박무진이 생각이 나는데 왜? 무엇때문데? 알수가 없는데 선생님은 생각이 나시는게 있는지... 시골출신 학우였는데 특히 드러나지 않는 조용한 친구였던게 기억이 납니다만...
단 한번도 생각지도 않았던 박무진이란 이름, 섬광처럼 번뜩 생각이 나는데... 얼굴도 생각나고 말씨도 약간 어눌한 그 친구가 왜?...
선생님 그 시조가 선생님이 쓰신대로 두어도 괜찮겠습니다만
원작자의 자격으로 종장을 50여년전의 원문으로 고치겠습니다
가슴 달막 달막 하여라를 가슴 덜컹 하여라로 바로 잡습니다.
한산섬 달밝은 밤에 고구마 밭에 홀로앉아
큰 고구마 주머니넣고 작은 고구마 깍아 먹으니
어디서 이놈소리에 가슴덜컹 하여라 본도사
그날 선생님께 따귀맞고 벌을받은 바로 그놈이 바로 나랍니다
그 당시엔 선생님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왜 몇대라도 더 때려 주시지 않고 싶을 정도로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선생님, 그리고 종직이,재직이,꽃선생은 우리들이 붙인 별명이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 께서 선생님을 부를때 쓰시던 이름 이지요.
종직이는 영남학파의 거두였던 선비요 유학자인 김종직선생의 이름에서 따온것이니 선생님께서는 다른 선생님들 께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이지요.
선생님,
이국생활이 33년째 입니다만 한국글과 말 잊지 않으려고 계속 한국의 일간신문을 구독하여 한국의 소식도 조금은 알고 있는데 경북대학교의 옥수수박사 김순권 교수의 기사를 읽으면서 언제나 선생님을 생각하곤 했답니다. 선생님, 이제 솔직히 고백합니다만 그 당시 선생님께서 가르침을 받을땐 농업은 내가 농사지을것도 아닌데 싶어서 시간중에 엉뚱한 짓도 많이했고(말씀 맞다나 한문숙제를 하던가) 그 열성으로 칠판가득히 자꾸 쓰시던 선생님의 열성에 질렸답니다. 그리운 시절 입니다.
선생님께서도 우리 학교에 특별회원 이신지?
이을기 선생님은 서울 사셨기 때문에 재경 동창회 특별회원이 되셨다던데 만약 선생님께서 우리 동문회특별회원이 아니시라면 선생님께서는 우리 42회와 같이 입학하고 졸업하신 사연이 있는 진짜동기 특별회원이니 우리 동기회장님이나 다른 동분들도 생각해 보심이...선생님이야 말로 자랑스런 특별회원자격을 갖추신걸로 사료됩니다.
선생님,
내가 읽은 이글을 쓰신지도 또 11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근황은 어떠신지... 건강하시고 편한 여생이 되시길 엎드려 바라나이다.
만수무강 하옵소서.
독일에서 김경욱(金景郁) 拜上
추기> 선생님 제가 깜빡 잊었네요
김종진이와의 첫시간은 1학년 3반에서 있은일이고 노트를 쭉 찢어서 충무공의 그 유명한 시조에 고구마 가사를 부쳐쓴 그 사건은 2학년 6반에서 있은 일이랍니다. 무슨 인연으로 그 두사건에 제가 가담하고 하나는 주범으로 벌까지 닫았으니...
일간 이길우 선생님을 회상하는 글을 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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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인터넷①』
(≫≪) 미군 희생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