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전반의 미국에서 노동자의 인권은 사실상 없다시피 했다. 1843년이 되어서야 미국 사법부는 고용주가 피고용인을 때리는 것을 금할 정도였다. 8시간 노동법이 일리노이, 위스콘신, 미주리, 코네티컷, 뉴욕, 펜실베이니아 주 등에서 시행된 것은 1868년부터였다.
당시 노동조합 결성은 꿈도 꾸기 어려웠다. 정부와 기업의 탄압도 문제였지만 민족간 상호 불신과 혐오도 주요 장애 요인이었다. 아일랜드인은 이탈리아인을 미워했고, 독일인은 아일랜드인을 증오했으며, 중국인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사는 식으로 사분오열(四分五裂)돼 있었다.
19세기 중반 거의 유일한 성공 사례는 1860년 매사추세츠주 린(Lynn)에서 구두 제조 노동자들이 워싱턴 탄생일에 맞춰 일으킨 파업이었다. 이 파업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시가지를 행진한 노동자의 수는 1만 명에 육박했는데, 이 중의 태반이 여성이었다. 당시 린에서는 남자 노동자들이 주급으로 3달러, 여성 노동자들은 1달러를 받았다. 공장 소유주들은 노동조합 인정은 거부하면서도 임금 부분에서는 타협을 했는데, 이는 ‘미국 노동사 최초의 진정한 승리’로 기록되고 있다. 이후는 피로 얼룩진 탄압의 연속이었기 때문이다.
1877년 8월 11일 피츠버그에서 유니언 역(Union Depot)을 공격하고 있는 시위대.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1877년의 대규모 철도 파업은 자본의 독과점에 대한 전국 규모의 반란이었으나 언론의 반응은 싸늘했다.
1875년 펜실베이니아에서는 탄광 갱부들이 아일랜드의 한 혁명 조직 이름을 따라 몰리머과이어(Molly Maguires)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그러나 조직에 스파이가 한 명 침투하여 이들을 테러죄로 고발함으로써 조직원 19명이 처형되었다. 1877년 미국 전역에 걸쳐 일어난 대대적인 철도 파업은 그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감행된 것이었다. 경기 침체로 직원 해고, 임금 삭감, 임금 체불 등이 잇따르자 철도 노동자들은 대규모 파업을 감행해 전국 철도화물열차의 절반 가량의 운행을 중단시켰고, 미국 정부는 강력 대응하고 나섰다. 파업이 끝났을 때 100명이 사망했고, 1만 명이 감옥에 갔다.1)
주석 레이어창 닫기
이 철도 파업에 대해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는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에게 보낸 편지에서 “남북전쟁 이후 발달한 자본의 독과점에 대한 최초의 반란”이라고 말했다. 엥겔스는 미국 노동자들에게 적잖은 기대를 걸었지만, 여론은 노동자의 편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여론을 좌지우지하는 언론이 노동자들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예컨대, <뉴욕타임스> 1877년 7월 20일자는 전국적으로 파업을 하고 있는 철도 노동자들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불만 세력, 불량배, 부랑자, 폭도의 무리, 수상쩍은 사람, 나쁜 사람, 도둑, 도박꾼, 방화범, 공산주의자, 노동 개혁 선동가, 위험한 계층, 갱단, 노숙자, 알콜 중독자, 범법자, 협잡꾼, 실업자, 사기꾼, 떠돌이, 비열한 사람, 가치가 없는 사람, 교사자, 사회의 적, 무모한 군중, 반항자, 가난한 사람, 말만 많은 연설가, 깡패, 약탈자, 절도범, 중죄인, 바보들.2)”
미국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사회 개혁론자 헨리 조지. 그는 토지가 빈곤 문제의 핵심이라는 통찰력을 바탕으로 토지의 공동소유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비방에 동의하지 않고 노동자들을 적극 옹호하고 나선 사람들도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땅 한 조각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어떻게 그의 국가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외친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다.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스코틀랜드 복음주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조지는 집안이 너무 가난해 중학교를 마치지도 못하고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노동을 하면서 독학으로 공부를 해 신문기자 겸 경제학자가 되었다. 그는 철도 회사들이 농민들을 총으로 위협해 본래 살던 곳에서 쫓아내는 현실을 보면서 철도 회사를 비롯한 재벌들을 ‘노상강도’라고 비난했으며, 철도 회사에 투자하는 중산층의 탐욕도 꾸짖었다.
그는 그런 뜨거운 심정으로 2년간 책을 썼는데, 그게 바로 그 유명한 [진보와 빈곤(Progress and Poverty)](1879)이다. 그는 이 책을 쓴 후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을 쏟았지만 책을 내줄 출판사를 찾을 길이 없었다. 노동자 출신으로 학력도 이름도 없는 사람의 책을 누가 출판해 주겠는가. 그는 결국 자비 출판으로 자신의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런데 이 책이 미국과 영국에서 수십 만 부나 팔려 나가는 ‘기적’이 일어났다. 토지가 빈곤 문제의 핵심이라는 그의 통찰력이 호응을 얻었기 때문이다.
“풍요 속에 고난과 궁핍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는 반드시 토지가 독점되어 있고, 토지가 전체 국민의 공동재산이 아니라 개인의 사유재산처럼 취급되며 노동이 토지를 사용할 때 고액의 사용료를 징수당하고 있다. …… 토지가 싼 신개척지에서는 거지도 없고 생활의 불평등도 거의 없다. 토지가 비싼 대도시에서는 극단적인 빈곤과 사치가 병존한다.3)”
조지는 “토지 사유제의 궁극적 결과는 노동자의 노예화”라고 했다. “생산력이 아무리 향상되어도 지대가 꾸준히 상승하여 그 향상분을 또는 향상분 이상을 삼켜버린다. 그리하여 모든 문명국가에서 대중의 생활은 자유라는 형식 하에 사실상의 노예 상태가 되고 있다. 이것은 노예제도 중에서 아마도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한 유형일 것이다. 현대 노동자는 노동 생산물을 강탈당하면서 단순한 생존을 위해 억지로 일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시키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그렇게 시키기 때문이다.4)”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지가 제시한 대안은 토지의 공동소유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적 토지 소유를 주장한 건 아니다. 개인 소유 형태에는 손을 대지 않고 지대만 세금으로 거둬 국가 재원으로 사용하는 한편, 다른 형태의 세금은 폐지하는 방법으로 사회적으로 부를 공유하자는 것이다. 조지는 자신의 비전을 실천하고 널리 퍼뜨리기 위해 죽기 직전까지 뉴욕시장 선거에 계속 출마해 강연에 정열을 쏟았다. 1886년 출마 시엔 패배했을망정 근소한 차이여서 그의 주장에 공감한 이들이 많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은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사상가 톨스토이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윈과 함께 진화론을 연구했던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는 [진보와 빈곤]을 가리켜 “금세기 출간된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격찬했다. [진보와 빈곤]은 러시아의 레프 톨스토이(Lev Tolstoy, 1828~1910)와 페이비언 사회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톨스토이는 [진보와 빈곤]의 출간 4년 후에 나온 조지의 [사회문제의 경제학] 러시아판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유럽인들이, 헨리 조지의 주장이 실천에 옮겨질 경우 전체 기존 질서와 자신들의 기득권이 무너질 것이라 생각하여 그의 정치경제학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그것을 은폐하고자 애쓰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 러시아에서는 인구의 90 퍼센트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고, 헨리 조지의 이론은 러시아 인민들의 정의감에 정확하게 부합한다.5)”
발명왕 에디슨, 백열등을 발명해 미국인들을 열광시키다
그러나 20세기 내내 좌우를 막론하고 사회 개혁 운동가들조차 노동과 자본에만 집착하느라 조지의 메시지는 외면했다. 토지의 문제건 노동과 자본의 문제건 날로 심해져 가는 빈부 격차의 문제를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외면하게 만드는 데엔 기술의 진보도 큰 영향을 미쳤다. 조지는 현대의 모든 발명은 불평등 현상을 심화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6), 그런 점에서 보자면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Thomas Alva Edison, 1847~1931)은 조지의 반대편에 있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지의 [진보와 빈곤]이 출간된 해인 1879년, 에디슨은 백열등을 발명해 미국인들을 열광시켰다. 1870년대에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던 조명 방법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가스등이었으며, 아아크등도 개발되었으나 값이 비싸고 게다가 볼품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백열등은 혁명이었고, 이 혁명을 주도한 에디슨은 미국의 축복이었다.
1879년 에디슨이 처음으로 개발에 성공한 백열등. <출처: (cc) Alkivar at en.wikipedia.org> |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 그가 만들어낸 새로운 기술들은 빈(貧)보다는 부(富)의 편에 유리하게 작용함으로써 현대사회의 불평등 현상을 심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
에디슨의 이름으로 등록된 특허는 무려 1097개나 되는데, 그의 일생에서 1876년부터 1881년까지가 창조력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였다. 에디슨은 1877년 축음기를 발명해 1878년 특허를 얻었는데, 축음기는 사업상 속기용 기계로 발전되었다가 10년이 지나서야 대중오락으로 사용된다. 이어 에디슨은 1879년 탄소 필라멘트를 사용한 백열전구를 완성해 그해 12월 3일 먼로파크 연구소에서 세상에 공개했다. 그는 백열전구를 보급하기 위해 소켓, 스위치, 안전 퓨즈, 적산전력계 등을 고안하고 효율이 높은 발전기, 배전반도 만들어냈다.
에디슨이 1882년 9월 4일 오후 3시 정각 맨해튼 남부의 펄스트리트 발전소(Pearl Street Station)로부터 고객에게 전기를 공급하기 시작했을 때, 역사가 레이너 배넘(Rayner Banham, 1922~1988)은 이를 가리켜 “인류가 불을 이용하게 된 이래 최대의 환경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에디슨 전기의 최초의 고객은 J.P. 모건(John Pierpont Morgan, 1837~1913)의 월스트리트 사무실이었다. 바로 그해에 <월스트리트저널>도 창간되었다.7)
1883년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보빙(報聘) 사절단’은 발전소와 전신국을 방문하면서 전기의 위력에 감탄했으며, 에디슨 전기회사로 찾아가 전기등에 대한 주문 상담을 벌였다. 그들은 귀국 후 고종에게 전기에 대해 보고를 하고 궁궐에 전등 설치 허가를 받아내 에디슨사에 전등 설비 도입을 발주했다. 이 전등 사업은 갑신정변으로 중단되는 바람에 1887년 4월에서야 경복궁의 건청궁(왕의 침전)에 처음으로 100촉짜리 전구 두 개가 점등되었다. 이는 경복궁 전체에 750개의 16촉짜리 전등을 설치하고 이에 필요한 발전설비를 갖추는 사업의 일환이었다. 유길준이 1883년 미국 뉴욕의 에디슨 전기회사를 관람하고 나서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서가 아니라 마귀의 힘으로 불이 켜진다고 생각했다”고 토로했듯이, 전깃불을 본 사람들은 충격으로 할 말을 잃었다.8)
주석 레이어창 닫기
에디슨이 1890년에 세운 에디슨 제너럴 일렉트릭(Edison General Electric)은 1892년 톰슨-휴스톤사(Thomson-Houston Company)와 합병해 제너릴 일렉트릭(GE)이 되었다. GE는 조지 웨스팅하우스(George Westinghouse, 1846~1914)가 직류가 아닌 교류 전기시스템을 제작ㆍ판매하기 위해 1886년에 세운 웨스팅하우스 전기회사와 더불어 미국 전기 산업의 선두 주자가 된다. 1895년 나이아가라 폭포에 거대한 발전소가 문을 열었으며, 1898년에 나온 한 소설 속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브로드웨이는 황혼 무렵인데도 ‘눈부신 전기’의 물결로 인해 밝게 빛남으로써, 밤이 낮으로 ‘영원토록 변화되는’ 효과가 생겨났다.9)
백열등의 발명은 인류사를 송두리째 바꾸는 이데올로기였다. 백열등으로 인해 인간의 잠이 도둑맞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백열등의 기적’을 가리켜 ‘에디슨의 저주’라고 했지만, 잠을 도둑맞는 것이 점차 문명화와 진보로 여겨지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백열등은 단순한 문명의 이기(利器)가 아니었다. 적어도 에디슨의 관점에선 그건 인류사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는 이데올로기였다. 요즘 우리 텔레비전에 나오는 어느 침대 광고는 “잠은 인생의 사치”라거나 “4시간만 자면 충분하다”는 에디슨의 육성을 들려주는데, 실제로 에디슨의 소원은 ‘비생산적인 잠’을 자느라 쓰는 시간처럼 ‘인간의 잠재 능력을 낭비시키는 것을 뿌리째 뽑아버린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이었다. 그는 백열등이 그런 역할을 해주길 원했고, 실제로 세상은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잠이 도둑맞고 있다고 주장하는 스탠리 코렌(Stanley Coren)은 에디슨의 소원을 가리켜 ‘에디슨의 저주’라고 말하지만10),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잠을 도둑맞는 것이 문명화와 진보로 여겨지는 세상이 도래하고 있었고, 이런 원리에 대한 신봉은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백열등의 기적’을 일으킨 에디슨은 1891년 키네토그래프(Kinetograph)라는 카메라와 키네토스코프(Kinetoscope)라는 이름이 붙은 영사기재(관람 상자)를 세상에 공개하면서 ‘영화의 기적’을 일으키기 시작하더니, 1895년엔 기자들에게 “다음번 기적은 말(馬) 없이 탈 수 있는 이동 수단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11)
그즈음 아일랜드 이민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기계를 다루는 데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던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는 찰스 듀리에(Charles Duryea, 1861~1938)와 프랭크 듀리에(Frank Duryea, 1869~1967) 형제의 아이디어를 이용하여 간단한 엔진 하나와 바퀴가 달린 저렴한 자동차를 만들고 있었다. 그는 1896년 초여름 새벽, 디트로이트 집의 창고를 개조한 실험실에서 자신의 발명품인 최초의 포드 자동차를 잠든 도시의 거리로 끌고 나왔다. 자전거 바퀴 4개에 4륜 마차의 차대를 얹고 자신이 직접 만든 2기통짜리 휘발유 엔진을 장착한 자동차였다.
그가 처음으로 만든 자동차를 탄 헨리 포드. 헨리 포드 이후 전개된 자동차의 기적은 미국인들의 이동성을 혁명적으로 높이면서 동시에 빈부 격차에 대한 문제 제기를 차단하는 효과를 내게 되었다.
이후 전개된 자동차의 기적은 넓은 국토의 축복을 누리는 미국인들의 이동성을 혁명적으로 높이면서 빈부 격차에 대한 문제 제기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를 내게 된다. 노동운동이건 사회운동이건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어야 그런 운동의 동력이 되는 지역 공동체 의식을 활용할 수 있을텐데, 미국인들은 수 틀리면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니 무슨 제대로 된 운동이 가능하겠는가. 빈부 격차에 대한 불만은 전기와 영화가 제공해주는 화려한 시각적 스펙터클로 해소하면 되는 일이었다.
‘백열등’으로 대변되는 테크놀로지가 과연 ‘토지’로 대변되는 빈부 격차의 문제를 은폐한 것인가? 그렇게 말하긴 어려울망정, 테크놀로지가 빈(貧)보다는 부(富)의 편에 유리하게 작용한 건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헨리 조지와 토머스 에디슨은 각자 다른 입장에서 그런 문제를 웅변해주는 상징적인 인물들이다. 토머스 에디슨의 계보를 잇는 실리콘밸리의 신진 기업가들은 민주주의를 살찌우는 ‘영웅’으로 등극해 늘 우리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헨리 조지의 계보를 잇는 이들은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이 그걸 말해주는 건 아닐까? 조지가 130여년 전에 던진 다음과 같은 메시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극도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저항에 필요한 정신과 지성이 없고, 극도로 부유한 사람들은 기존 질서에 너무 많은 것이 걸려 있다. 미국에서 가공할 만한 재산이 형성되고, 거대한 부가 기업의 수중에 축적되고 있다는 것은 국민들이 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민주주의의 형식은 유지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형식이 갖춰진 곳에서도 다른 정치체제에서처럼 독재와 실정(失政)이 자행될 수 있다. 사실 형식적 민주주의는 가장 쉽게 독재와 실정으로 전락한다.12)”
자료출처 : 네이버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