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 조동화 성주산 장군봉 등산이야기
자유인 조동화는 오늘 장항선을 열차여행과 성주사지 답사, 더불어 성주산 울창한 숲속의 피톤치드를 마시고자 성주산으로 향하다.
성주산은 옛 탄광지역으로 자연휴양림으로 개발했으며, 장군봉까지 등산하는 동안 흙길은 없고 등산로가 자갈길이라 그다지 좋은 등산로는 아니나 발바닥 용천을 자극하여 발바닥에 지압효과는 좋을 것 같았다.
대천역에 도착하니 부슬부슬 비가 내려 우비를 입고 하루종일 등산하다보니 옷이 젖어 감촉이 않 좋았으나 조심히 걷고 걸으며 무사한 산행을 마칠수 있었다.
이런날도 있고 저런날도 있고 하늘의 뜻을 누가 아랴?
큰산을 가려면 동행자가 있어야 하지만 이윤범사장님이 일이 있어 부득이 나홀로 산행을 하게 되었지만 성주산 자연휴양림 울창한 숲을 다시한번 도전할 생각입니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이런 명언을 했지요.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일에 열중하라. 이것이야말로 이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약보다도 강력한 효력을 지닌 영약인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는 ‘걷는 것은 인간에게 최고의 보약’이라고 말했다.
걷자! 또 걷자. 틈나면 걷자.
걷는 것은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의 생성에 도움이 될뿐 아니라 스트레스 호르몬으로 알려진 코티솔의 수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에 음경 발기가 탁월한 효과가 있음을 느낄수 있다.
자유인 조동화는 시간이 나면 산과 들녘 강가를 욕심껏 걷고 또 걸으며 자연이 준 천연 보약 정력제을 많이 섭취함을 자랑하고자 한다.
인생의 삶의 행복이 무엇인가?
자유인의 신조는 “평범한 일상속에서 행복을 느끼자”입니다.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유인 조동화의 오늘 하루는 심연동 깊은 계곡 물소리에 귀가 즐거웠고, 새들의 노래소리를 들으며 세월을 낚으니 기분이 상쾌하고 감개무량하다.
자연에 감사........감사
☛열차 교통편
출발 1554 익산6:45-대천7:55도착, 4,300원
1154 익산8:20-대천9:25 6,300원
1556 익산9:00-대천10:09도착,
귀로 대천역 1561 무궁화16:59-익산 18:08
1157 새마을17:46-익산 18:46
1563 무궁화19:01-익산 20:07
☛대천역에서 성주산가는 교통편
대천역앞 100번버스 승차 보령요양병원 하차, 800대버스 환승 1일 45회 10km 15분 소요 성주삼거리 하차
☛보령의 성주산(680m)
성주산(680.4m)은 보령시 성주면과 청라면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장군봉으로 불리는 성주산의 주봉은 680m이다.
성주산에는 성주산 자연 휴양림이 들어선 화장골과 심원골 계곡이 유명하다.
1980년대 석탄산업 합리화 조치가 진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성주산 일대는 충남 최대의 무연탄 생산지로 전국 무연탄생산량의 약 13%를 차지하면서 지역경제의 큰 축을 담당했다.
☛성주사지
성주 삼거리에서 북쪽 길로 1km 거리에 이르면 도로 왼쪽으로 널찍한 절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유명한 성주사지(사적 제307호)다.
성주사는 신라 말기에 이름을 날렸던 선문 9산중의 하나로 역사적 중요성과 문화재적 다양성을 지닌 사찰이나 폐사되어 현재 절이 세워져 있던 터만 남아 있다.
성주사에는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8호)를 비롯하여 성주사지오층석탑(보물 19호) 등이 우뚝 서 있어 번창했던 신라불교의 웅장함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성주사 유래
백제 법왕이 이곳에 오합사를 세우고 전쟁에서 숨진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려 한 것은 599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약1400여년전의 이야기, 그 때야 말로 성주산 송화가루는 서해까지 흘러갔을 것이고, 백제의 왕실은 관솔불을 대낮처럼 밝힌 채 지성으로 유주무주 고혼들을 달랬을 것이다. 백제의 오합사가 지금의 성주사로 사명이 고쳐진 것은 통일신라의 대표적 고승인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에 의해서이다. 무염국사는 무열왕의 8세손으로 그 시호는 낭혜(郞慧)이다. 그는 25년 간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웅천(보령의 옛 지명)의 호족 김양의 권고로 이곳에 와 크게 선풍을 진작했다. 무염은 당시 사회의 모순을 직시한 몇 안 되는 성인 중의 성인이요, 선지식이었다. 그리하여 이곳은 성인이 머무는곳, 즉 성주사(聖住寺)로 불렀던 것이다. 그가 성주사에 자리를 잡고 ‘무설토론(無說吐論)’을 주창하자 그를 따르는 제자는 수천 여명에 달했고, 전각은 960여 간에 이르러 당시의 선문 가운데 가장 번성했으며, 곧 구산선문의 최대파인 성주산문을 이뤘다.
진성여왕 2년 88세로 무염이 입적하자 왕은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부도비를 세웠다. 이 비가 절 터 서북쪽 전각 안에 남아있는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大郎慧和尙白月寶光塔碑, 국보 제8호)이다. 물론 이 부도비의 재질은 이곳 성주산이 주산지인 남포오석이다. 문장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지었으며, 글씨는 그의 사촌 동생 최인곤이 썼다. 이 비는 신라 부도비 중 규모, 조각, 문장 등 모든 것이 빼어나 신라 하대 부도비 가운데 최고의 것으로 손꼽히는 것이다.
<삼국유사〉 권1 태종춘추공조(太宗春秋公條)에 의하면 백제 법왕이 창건한 절로 처음에는 오합사(烏合寺)라고 불렀으나 신라 문성왕(839~859) 때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 무염(無染:801~888)이 가람을 크게 중창하면서 절 이름도 성주사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백제가 멸망하기 직전에는 적마(赤馬)가 나타나 밤낮으로 울면서 절 주위를 맴돌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 절은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성주산파의 중심 사찰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뒤 지금까지 절터만 남아 있다. 1968, 1974년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해 금당·삼천불전지·회랑·중문 등의 건물지가 밝혀졌으며, 이때 통일신라시대의 소조불두(塑造佛頭)와 백제·통일신라·고려 시대의 와당류가 출토되었다. 현재 중요문화재로는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保寧聖住寺址郎慧和尙塔碑: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5층석탑(보물 제19호), 동서 일렬로 배치된 보령 성주사지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과 보령 성주사지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 성주사지 동 3층석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6호), 성주사지 석등(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 등이 전해지고 있다.
☛성주산자연휴양림
성주산 자연휴양림은 산림청에서 폐광지역을 개발하여 휴양림으로 조성한 곳이다.
대천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15분 정도 지나 성주삼거리에서 하차한 후 15분 정도 걸어가면 휴양림 입구에 다다른다.
화장골에서 심연동계곡까지는 걸어서 약 3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성주산자연휴양림은 차령산맥이 빚어낸 아름다움이 뛰어난 곳으로 성주면 성주리의 화장골계곡은 4km에 이르는 울창한
숲이 장관인 계곡으로 산림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