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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세양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소세양선생 묘역 전경 |
조선 중기의 문신 소세양 소세양의 자는 언겸(彦謙)이고, 호는 양곡(陽谷) 또는 퇴제(退齊)이다. 소세양은 1504년(연산군 10)에 진사가 되었고, 1509년(중종 4)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
▲ 진주소씨 재실 우측으로 소세양선생 묘역을 오르게 됩니다. |
▲ 진주소씨 재실인 경모재 우측 사이길로 묘역을 오르게 됩니다. |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 후 직제학을 거쳐 사성(司成)이 되었으며, 이후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1530년 왜구를 방어하는 데 소홀한 이유로 파직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등용되었다. 1545년(인종 1) 윤임(尹任:1487~1545) 일파의 탄핵으로 사직했으나 을사사화로 윤임 등이 몰락하자 다시 좌찬성을 역임하였다. 또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송설체에 능하였다. 그의 문집으로는 《양곡문집(陽谷文集)》이 있다. |
▲ 묘역을 오르면 우측에 후손들이 묘역이 있습니다. |
소세양과 황진이가 처음 주고받은 편지 이야기가 재미있다. 소세양은 송도 기생 황진이가 재색을 겸비하여 이름을 날린다는 말을 듣고 친구들에게 호언장담을 한다. 내가 황진이를 만나 꼭 한 달만 같이 미련 없이 멋지게 돌아 올 터이니 두고 보라고. 한 달을 넘기면 ‘나는 사람도 아니다.’라고 큰 소리를 친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황진이에게 편지를 전한다. 이 편지에는 석류나무 “류(榴)”, 한 글자만 달랑 적혀 있었다. 황진이가 이 편지를 보자 그녀 역시 한 글자로 답장을 보낸다. 답장은 “어(漁)”이었다. 그러면 류와 어는 어떤 의미일까? 榴(류)는 碩儒那無遊(석류나무류)로 해석된다. “여기 큰 선비가 있는데, 어찌 놀지 않겠는가?”로 풀이할 수 있다. 漁(어)는 高妓自不語(고기자불어-고기잡을어)로 “고상한 기녀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같이 있고 싶으면 당신이 오세요.”이다. 이렇게 화답을 하였으니 조선 천하의 시인 소세양도 황진이에게 마음이 동할 수 밖에. |
▲ 맨 하단의 묘비없는 묘역과 소건(蘇建) 묘역 |
이후, 소세양과 황진이는 한 달을 훨씬 넘겨 진한 사랑을 한다. 소세양은 친구와의 내기에서는 졌지만 사랑은 달콤하였다. 어느 덧 이별이 온다. 중종은 조선 최고의 문장가 소세양을 마냥 송도에 머물게 하지는 않았다. 한양에서 다시 중책을 맡긴 것이다. 이후 황진이는 한양으로 간 소세양이 너무나 그리워서 꿈길에서라도 그를 만나고 싶은 심정으로 <꿈>이라는 시 한 수를 읊는다. 夢(꿈) 想思相見只憑夢(상사상견지빙몽) 보고 싶고 그리워도 만날 길은 꿈속 밖에 없으니 儂訪歡時歡訪儂(농방환시환방농) 제가 반가이 임을 찾을 때, 임도 저를 반가이 찾으소서. 願似遙遙他夜夢(원사요요타야몽) 바라옵건대, 멀고 먼 꿈 길을 서로 달리 오가지만 一時同作路中逢(일시동작로중봉) 일시에 꿈꾸어 같은 꿈 길에서 서로 만나사이다. 이 한시를 읽으면 명기 황진이의 시 작법이 가히 명작임을 느낄 수 있다. 2구의 농방환시환방농(儂訪歡時歡訪儂). 첫 글자가 농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글자가 농으로 끝나고, 앞에서 읽어도 농방환시환방농이고 뒤에서부터 읽어도 농방환시환방농인 글 솜씨. 시제(詩題)가 몽(夢)이요 1,3구의 운 또한 몽(夢)인 작법, 정말 대단한 여류 시인이다. |
▲ 소파자의 아들인 소세공(蘇世恭) 묘역 전경 |
황진이는 소세양에게 夜思何(야사하) 시를 보내고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蕭蓼月下思何事(소요월하사하사) 소슬한 달밤이면 무슨생각 하시나요 |
▲ 소세공 묘역내 장명등과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소세양 신도비(전북 유형문화재 159호) |
▲ 소세양선생 묘역 좌측에 위치한 문화재로 지정된 소세양 신도비(위 사진 우측 신도비) |
조각이 매우 뛰어나고 서체가 아름다운 소세양 신도비 소세양 신도비(蘇世讓 神道碑)는 1998년 1월 9일에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59호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王宮面) 용화리 탄곡 용화산(龍華山) 동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1564년(명종 19)에 건립되었다. |
▲ 소세양선생 묘역내 우측 전경과 소세양선생 신도비 하단에 있는 이수 모습 |
비신(碑身)의 높이는 218㎝이며 너비가 103㎝, 두께가 25㎝의 대리석으로 화강암으로 된 직사각형의 대석 위에 세워져 옥개석을 얹었다. 대석은 가로 196㎝, 세로 112㎝, 높이 90㎝의 크기로 전면과 후면은 3개의 정사각형 안에 국화문을, 양측면에는 2개의 정사각형 안에 국화문을 조각하였다. |
▲ 소자파의 5자인 소세양선생 묘역은 정경부인 창평조씨(昌平曺氏)와 쌍분입니다. |
후대에 이수가 파괴되어 도괴의 위험이 따라 현재에는 교체된 옥개석이다. 비의 전액(篆額)은 글씨 크기가 약 12㎝이며, 심전(沈銓)이 전서(篆書)하였다. 비문의 서체는 해서(楷書)로 홍섬(洪暹:1504~85)이 썼으며 비명은 크기가 약 2㎝로 소세양의 아들 수(遂)가 썼다. |
▲ 소세양선생 묘역 좌우로 위치한 헌성비와 소세양선생 시비 |
소세양신도비는 임진왜란 이전에 건립되어 현존하는 비석 중 조성시기가 빠르며, 조선시대의 비석으로서 기본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각이 매우 뛰어나고 서체가 아름다워 신도비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
▲ 소세양선생 묘역 우측 전경. 구 묘비를 우측에 세워 놓았습니다. |
소세양선생 하단 묘역은... |
▲ 숙인이씨의 묘 |
[온누리] 야사하 2011년 12월 29일 (목) 박규만 기자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밤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적 없나요 / 때로는 일기장에 내 얘기도 쓰시나요 /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 나의 사랑을 믿나요 /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게 궁금해요 ~” |
▲ 숙인이씨 묘비 이수와 망주석의 조각이 멋있습니다. |
80년대 혜성처럼 나타나 한국 가요계를 주름잡은 가수 이선희가 불렀던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 ‘알고 싶어요’라는 제목의 노랫말이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사연이 있다. 바로 ‘황진이’와 ‘소세양’의 절절한 사랑이야기다. 즉 황진이가 소세양과 한 달간 동숙(동거)하고 헤어진 뒤 유일하게 사랑했던 남자 소세양을 그리는 애타는 마음을 글로 적어 전하게 했다는 시라는 것이다. 그 시의 제목이 칠언율시 ‘야사하(夜思何)’요 내용은 그 시를 의역했다는 것이다. |
▲ 소세양선생 묘역 후경과 뒤에 위치한 소세온선생 묘역 전경 |
소세온 묘 |
▲ 소자파의 장자인 소세온(蘇世溫)선생 묘역은 숙인 익산임씨(益山林氏)와 쌍분입니다. |
그런데 알고 보니 원작자는 황진이가 아니었다. 사실은 소설가 이재운이 ‘주간조선’이라는 매체에 ‘청사홍사’를 연재하면서 양인자 작사, 김희갑 작곡, 이선희 노래의 ‘알고 싶어요’ 노래가사를 15세기 버전의 한시로 바꿔놓은 것이다. 즉 양인자의 시를 시대를 거꾸로 가서 다시 한시로 번안한 것이다. |
▲ 소세온선생 묘역과 구 묘비는 우측에 있습니다. |
황진이가 그토록 사모했던 미륵산 자락의 선비 소세양은 조선 중종 때 과거에 급제한 뒤 판서와 전라도관찰사 등의 벼슬을 두루 역임한 인물이다. 한 때는 명나라 사신으로 건너가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특히 특히 ‘율시’와 ‘송설체’의 글씨가 뛰어나 문명은 물론 필명을 날리기도 했다. |
▲ 소세온선생 묘역내 장명등의 머릿돌 사각에 진주소씨라고 한 글자씩 새겨져 있습니다. |
소세량 묘 |
▲ 소자파의 2자인 소세량(蘇世良)선생 묘역은 숙부인 남원양씨(南原揚氏)와 쌍분입니다. |
그런 소세양과 황진이의 사랑은 각별했다. 그런데 현재는 각각 따로 떨어져 있다. 소세양의 묘소는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숯골 선산에 있다. 황진이의 묘소는 북한의 개성에 있다. 마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처럼 사후에도 그리워할 뿐이다. |
▲ 소세량선생 묘역과 장명등. 진주소씨 묘역내 장명등은 일반 장명등에 비해서 특이한 편입니다. |
왕궁면 용화리는 진주 소(蘇)씨 세거지로 소세양은 그 가문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소세양의 묘소 인근에는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란 본래 임금이나 고관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임금이 내린 비석이다. 신도비에는 그 사람의 행적을 적고 주로 무덤의 동쪽이나 남쪽에 세웠으며 그 자체로 대단한 영예다. |
▲ 소세량선생 묘역내 문인석 뒷편에 글이 새겨져 있는 모습입니다. |
그런 소세양 신도비에는 소세양과 황진이의 사랑이야기가 단 한 글자도 나오지 않는다. 신분과 지역을 초월해 사랑이야기가 무색할 수밖에 없다. 예나 지금이나 역시 풍류는 풍류일 뿐이다. 박규만 기획부장 |
▲ 소세량선생 묘역 후경과 소자파선생 묘역 원경 |
소자파 묘 |
▲ 소세양선생 부친인 소자파(蘇自坡)선생 묘역 전경 |
조선 중기의 문신 소자파 소자파의 자는 미수이고 1451년에 태어났다. 1483년(성종 14)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의빈부(儀賓府) 도사(都事)를 역임하였고, 1524년(중종 19)에 임지인 전라남도 구례에서 사망하였다. 그 후 아들의 벼슬이 올라감에 따라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과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찬성 겸 의금부 부사에 추증되었다. 소자파는 소세양신도비의 주인공 소세양의 아버지이다. |
▲ 소자파선생 묘역 우측에 위치한 석물 모습 |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8호 소자파 묘비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소자파(蘇自坡)의 묘비(墓碑)이며 1999년 7월 9일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48호로 지정되었다. 1526년(중종 21)에 건립되었으며 진주소씨 익산 종중에서 소유·관리한다. |
소자파 묘비(전북 문화재자료 148호) |
▲ 소자파선생 묘역 좌측에 위치한 소자파 묘비(위 사진 우측) |
비신(碑身)은 대리석으로 높이 165㎝, 너비 93㎝, 두께 23㎝이다. 화강암으로 된 대석은 가로 136㎝, 세로 98㎝, 높이 73㎝이며, 전면과 후면은 2개의 정사각형 안에 용화문을, 윗부분은 연판문으로 장식하였다. 4각의 받침돌은 국화무늬를 조각하였다. 머릿돌은 앞·뒷면에 연꽃과 구름무늬를 새겨 넣었는데 그 조각이 매우 섬세하고 뛰어나다. |
▲ 소자파선생 묘역내 석물 모습 |
비의 전액(篆額)은 글씨 크기가 약 10㎝로 김희수(金希壽:1475~1527)가 썼으며 남곤(南袞:1471~1527)의 글이다. 비의 뒷면은 이행(李荇:1478~1534)의 글이고, 글씨는 크기가 약 10㎝의 해서(楷書)로 성세창(成世昌:1487~1548)이 썼다. |
▲ 소자파선생 묘비와 이수 모습 |
비의 모습이 완전하고 비문의 글씨도 선명하며 조각수법도 우수하다. 또한 비의 건립연대가 중종 21년(1526)으로 익산지역에 전해오는 금석문으로서는 가장 빠른 것이어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 익산시 문화관광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소자파 장인 왕석주 묘 |
▲ 소자파선생 묘역 뒤에 위치한 장인 왕석주 묘역 |
▲ 왕석주 묘역 전경 |
소세양선생 묘역 위치도 |
지도 시작 부분의 재실부터 빨간 화살표를 따라가면 됩니다. 소재지 : 전북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 산33 |
지도 중앙 상단의 화살표 지점에 소세양선생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익산IC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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