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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 칸트 Immanuel Kant (1724~1804)】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
"직관없는 사유는 공허하고 사유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은 ‘이성(Vernunft)'에 의한 ‘이성' 의 비판을 의미한다. 정당한 요구는 보호해 주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 즉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에 대해서는 그 요구를 거절하는 ‘법정(Gerichtshof)'에서 ‘이성'은 자신의 권한과 한계에 관해 스스로 묻는다. 이러한 ‘이성능력' 자체에 대한 비판은 잃어버린 형이상학의 위엄을 되찾고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일이다. 우리 인식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대상인식을 시도한 모든 이전의 이성의 월권에서 벗어나서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밝히는 일은 이제 ‘선험적 종합판단'으로 이루어진 형이상학적 진술의 가능성을 탐구하여 선험적 인식의 원천과 범위, 그리고 그 한계를 규정하는 일로 요약된다. 우리에게 가능한 경험의 대상은 시간, 공간 중에 주어지는 ‘현상'이지 결코 인식 주관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사물자체'일 수 없다는 『순수이성비판』의 핵심 생각을 통해 칸트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다.
비판이라는 말은 더하고 깍는다는 말인데 종교는 깎고 과학은 보태주어 비만의 종교도 구해내고 영향결핍상태의 과학은 살려낸다. 종교세계에 있어 순수이성의 지나친 월권을 제한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성이 경험과 아무 상관없이 자기자신의 필연성에 따라 움직인다고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모든 인식이 경험과 연결되어 있지만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숨님도 이 세상에 우리가 온 이유도 「경험하러 온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경험이 수반되지만 오로지 경험만으로는 안된다. 경험을 넘어서 경험을 가능케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을 칸트는 선험[先驗]이라고 한다. 즉 선험은 경험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감성에게는 직관이라는 형식이 주어지고 오성에게는 범주라는 형식이 주어진다.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은 '이성'(Vernunft)에 의한 '이성' 자신의 비판을 의미합니다. 이 책에서 칸트는 정당한 요구는 보호하되, 자신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에 대해서는 그 요구를 거절하는 '법정'
(Gerichtshof)에서 '이성'이 자신의 권한과 한계에 관해 스스로 묻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이러한 '이성능력' 자체에 대한 비판은 잃어버린 형이상학의 위엄을 되찾고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일입니다.
칸트는 우리 인식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대상 인식을 시도한 모든 이전의 이성의 월권에서 벗어나,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의 가능성을 밝히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이제 '선험적 종합판단'으로 이루어진 형이상학적 진술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선험적 인식의 원천과 범위, 그리고 그 한계를 규정하는 일로 요약됩니다.)
『순수이성비판』
1781년 출판된 칸트의 주저(主著) 『순수이성비판』(재판 1787년)을 하나의 일관된 의도 속에 쓰여진 체계적 작품이라고 본다면 그것의 중심주제는 과연 무엇일까?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의 관심은 한 마디로 말해 ‘형이상학(Metaphysik)'이다. 칸트가 1772년 2월 그의 제자 헤르쯔(M. Herz)에게 보낸 편지에서 『순수이성비판』의 출판을 예고하면서 여기에서 자신의 작업이 “이제껏 숨겨져 왔던 형이상학의 전(全)비밀을 드러내줄 열쇠”이길 기대했던 것도, 또한 『순수이성비판』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초월철학'을 칸트 스스로 ‘형이상학에 관한 형이상학(Metaphysik von der Metaphysik)'이라고 불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한때 ‘만학의 여왕(Königin aller Wissenschaften)'이라고 까지 불렸던 ‘형이상학'은 칸트의 판단에 따르면 이제 ‘끝없는 논쟁의 싸움터(der Kampfplatz dieser endlosen Streitigkeiten)'로 전락해버렸다. 이는 ‘독단론자들(Dogmatiker)'의 ‘전제적인(despotisch)'인 주장과 ‘회의론자들(Skeptiker)'의 ‘극단적인 무관심주의(gänzlicher Idifferentismus)'가 낳은 결과이다. 이제 ‘형이상학'의 잃어버린 이전의 위엄을 되찾고 ‘학'으로서의 가능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이성능력(Vernunftvermögen)' 자체의 비판이 요구되어진다. 이성능력의 비판이란 칸트에 따르면 정당한 요구를 하는 이성은 보호해 주지만 모든 근거 없는 이성의 월권에 대해서는 거절할 수 있는 ‘법정(Gerichtshof)'에 이성 자신을 세우는 일이다. 이러한 이성에 대한 비판, 즉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을 통해 형이상학의 가능성은 탐구되어 질 수 있다. 요컨대 이성의 능력을 비판하는 일은 칸트에게서는 바로 “형이상학 일반의 가능 여부에 대한 결정․가능할 수 있는 형이상학의 원천․범위․한계 등의 규정을 의미한다”
『순수이성비판』의 이해를 위해 쓰여진 입문서 『프로레고메나 Prolegomena』(1783년)에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이러한 과제를 ‘수학'과 ‘자연과학', 그리고 ‘형이상학'에서의 선험적인 인식의 가능성을 밝히는 일로 요약한다. 이상의 학문들의 내용은, 다시 말해 이 학문영역에서의 대상에 관한 인식은 우리가 ‘선험적 종합판단(synthetische Urteile a priori)'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그 내용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험적 종합판단'
은 무엇인가? ‘선험적 종합판단(synthetische Urteile a priori)'이란 칸트에 따르면 자신의 술어가 모순율에 따라 그 판단의 주어와 결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주어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술어 개념의 첨가를 통해 대상에 관한 지식이 늘어나게 하는 판단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험적으로(a priori) 근거 지워질 수 있는 판단을 말한다. 칸트는 이러한 ‘선험적 종합판단'의 예를 ‘순수 수학(reine Mathematik)'과 ‘순수 자연과학(reine Naturwissenschaft)'에서 발견한다. 그러나 이러한 순수 수학이나 자연과학은 자신들의 ‘학(學)'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해서나 자신들이 인식의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는 ‘선험적 종합판단'에 관해 더 이상의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 학문은 자신들이 소유한 선험적 종합판단의 참됨을 자신들의 학문의 성격상 이미 ‘구성(Konstruktion)'이나 ‘관찰' 혹은 ‘실험'을 통해 명백히 밝힐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어떻게 선험적 종합판단은 가능한가?(Wie sind synthetische Urteile a priori möglich?)'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그의 관심이 ‘학(學)'으로서의 형이상학의 가능성에 있기 때문이다. 즉 형이상학에서의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탐구함으로써 증명된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이 존재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형이상학이 존재한다면 그 인식의 타당성은 어디까지 미치는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의 중심 과제이고 그 답을 구하기 위해 칸트는 수학과 자연과학의 방법을 원용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자연에서의 모든 사건들은 하나의 원인을 가지고 있다'라는 ‘인과율의 원리(Prinzip der Kausalität)'와 ‘사물의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실체는 변하지 않고 남아있다'는 ‘실체 고정성의 원칙(Prinzip der Beharrlichkeit der Substanz)'은 모두 형이상학의 인식의 대상이다. 그리고 칸트에 따르면 이러한 인식은 결코 ‘독단적으로(dogmatisch)'나 단지 ‘개념에서부터(aus Begriffen)' 증명되어 질 수 도 없고 그렇다고 경험적 지식에 의해, 즉 ‘습관'에 근거한 ‘연상법칙'에 의해서도 결코 그 선험적 타당성이 알려질 수 없는 ‘선험적 종합판단'이다. 이러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검사하는 것은, 즉 이러한 인식의 범위와 한계를 조사하는 것은 결국 선험적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들, 즉 인간의 인식능력 속에서 근거 지워지는 조건들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순수이성비판』은 우리 인식능력들에 관한 연구이기도 하다.
『순수이성비판』의 과제가 우리 인식능력들에 관한 연구이어야 함은 칸트가 자신의 새로운 철학적 태도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회'에 비유한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칸트는 ‘형이상학'이 ‘헤메임(Herumtappen)'의 단계를 벗어나서 ‘학문의 안전한 길(sicherer Gang einer Wissenschaft)'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이미 이러한 단계에 이른 ‘수학'과 ‘물리학'의 성공을 본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형이상학이 이들 학문에서 배워야 할 것은 그들의 학문적 방법론이 아니라 이들이 학문의 안전한 길로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던 ‘사유방식의 혁명(Revolution der Denkart)'이다. 즉 ‘인간의 이성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만을 선험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라는 깨달음이다. 다시 말해 수학에서 개념에 따라 선험적으로 그에 해당하는 직관을 산출하는 ‘구성(Konstruktion)'의 행위나 물리학이 미리 계획된 고안에 따라서 관찰과 실험을 하는 것은 모두 “이성이 자신의 계획에 따라서 산출한 것만을 이성은 통찰한다는 것”과 “항구적 법칙에 따라 판단하는 원리들을 먼저 가지고써 이성 자신의 물음에 자연이 대답하도록 하고, 마치 걸음을 처음 배울 적의 아기가 줄에 끌려 걷듯이 이성은 자연의 인도만을 받지 않는다”(B XIII, 한글판 30)고 하는 깨달음의 결과이다. 칸트가 이제 ‘모방(nachahmen)'하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유방식의 전환의 본질(das wesentliche Stück der Umänderung der Denkart)'이다. 그것은 바로 인식주체의 자발적인 행위에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때문에 칸트는 이러한 사유의 전환을 코페르니쿠스가 자신에 의해 관찰되어지는 천체의 원인을 관찰자 자신에서 찾으려고 한 시도에 비유하고 있다. 철학에서의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적인 시도는 인식이 지금까지와 같이 대상에 의존해서 대상들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들이 우리 인식과 인식능력들에 준거해야 한다고 가정해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가정(假定)'이 “형이상학의 과제들(die Aufgaben der Metaphysik)”을 해결하는데 더 효용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에 칸트는 이제 『순수이성비판』에서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조건들을, 그리고 그 대상을 산출해내는 인식능력들을 검토하게 된다.
대상들에 관한 선험적인 인식이 가능하기 위한 인간 인식능력의 조건들을 검사하는 작업으로서의 『순수이성비판』은 따라서 대상을 인식하는 우리 인식능력들에 대한 연구들로 구성되어져 있다. 우선 칸트는 ‘초월적 감성학(Transzendentale Ästhetik)'에서 우리의 수용적인 인식능력, 즉 대상들에 대한 직접적인 표상인 ‘직관(Anschauung)'이 주어지는 ‘감성(Sinnlichkeit)'과 그 두 형식인 시간과 공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칸트가 해명하려는 과제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현상(Erscheinung)'이라고 불리는 ‘감관의 대상에 관한 우리의 선험적 인식'이 어떻게 ‘우리 감성의 형식들'에 의해, 다시 말하자면 ‘우리 감관의 형식적인 소질들'에 근거해서 가능한가를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초월적 감성학'은 우리 감성의 선험적 형식들인 ‘시간'과 ‘공간'이 ‘직관의 주관적 형식'이라는 점을, 그리고 이 주관적 형식이 모든 감관의 대상에 관해 ‘객관적 타당성'을 갖는다는 것을, 따라서 모든 감관의 대상들은 바로 이 주관의 형식을 통해서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대상으로 규정되어 진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를 증명하기 위한 ‘공간과 시간에 관한 논증들'을 통해 얻게되는 ‘초월적 감성학'의 결론들은 이제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transzendentaler Idealismus)'의 핵심적인 생각을 이루게 된다. 즉, 우리 감관의 모든 대상들은, 그들이 선험적으로(a priori) 공간과 시간에 의해 규정되어지는 한, 그것은 한갓 ‘현상(Erscheinung)'일 뿐이지 우리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사물은 아니다. ‘공간'과 ‘시간'이 더 이상 그 자체로 존재하거나 혹은 우리 밖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속성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우리 인식능력의 형식인 ‘주관적인 조건(subjektive Bedingungen)'에 해당한다면, ‘공간'과 ‘시간' 중에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유일한 대상으로서의 ‘현상'은 바로 이러한 우리 인식주관의 조건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사유 속에서 소화가 되어야 지식이 될 수 있다. 쌀을 소화시켜 살을 만들듯이 경험을 소화시켜 지식을 만드는 것이 인식이다. 사람이 밥을 소화시키는 것이지 밥이 사람을 소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를 통해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은 이제 데카르트가 찾아낸 인식주체(cogito )의 능력만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던 ‘우리 밖의 존재'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찾게 된다. 즉, 칸트에게서는 단지 사물의 ‘제2성질(secondary qualities)' 이라고 불리는 색과 맛과 같은 성질만이 우리 감관에 의존적인 현상이 아니다. 흔히 사물의 ‘제1성질(primary qualities)'이라고 불리는 ‘연장(延長)'과 ‘형태'마저도 그것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규정되는 한 우리 감관의 주관적 형식에 의해 조건 지워진 ‘현상'인 것이다. 이로써 1772년 헤르쯔(M. Herz)에게 보낸 편지에서 칸트 스스로 제기했던 ‘초월적 관념론'의 근본 물음, 즉 ‘어떻게 우리의 표상이 대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가'에 대한 첫 번째 해답을 얻게 된다. 대상을 선험적으로 직관하는 것에 관한 이론인 ‘초월적 감성학'은 어떻게 우리의 표상이 선험적으로 ‘직관의 대상들'과 관계 맺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초월적 감성학'에서 다루어진 우리의 인식능력이 ‘감성(Sinnlichkeit)'이었다면 칸트는 이제 ‘초월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에서 우리의 또 다른 인식능력인 ‘지성(Verstand)'에 관해 탐구한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초월적 원리론(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을 이처럼 ‘초월적 감성학'과 ‘초월논리학'으로 구분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의 인식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인식의 원천에서부터 생겨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성을 대상이 어떤 식으로든 촉발하는 한에서 표상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감성(Sinnlichkeit)'이라면 ‘지성(Verstand)'은 표상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발적인 능력이다. 이 두 인식의 원천은 칸트에 따르면 그 기능이 고유하기에 엄격히 구별되어야 할 서로 다른 인식능력이다. 따라서 ‘감성'과 관련된 학문인 ‘감성학(Ästhetik)'이 지성의 규칙들 일반을 다루는 학문인 ‘논리학(Logik)'과 구별되듯이 ‘초월논리학'은 ‘초월적 감성학'과 구별되어진다.
전통적으로 논리학이 넓은 의미에서의 ‘지성(Verstand)'으로 대표되는 ‘사유능력'을 탐구한다고 할 때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유능력을 의미한다. 즉, ‘개념의 능력으로서의 지성(Verstand als Vermögen der Begriffe)', ‘판단(Urteile)'에 관계하는 ‘판단력(Urteilskraft)', 그리고 ‘추론의 능력으로서의 이성(Vernunft als Vermögen der Schlüsse)'이 그것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의 ‘초월논리학'을 이러한 사유능력에 상응해서 ‘초월적 분석론(transzendentale Analytik)'과 ‘초월적 변증론(transzendentale Dialektik)'으로 나눈다.
‘초월논리학'의 첫 번째 부문에 해당하는 ‘초월적 분석론'은 ‘순수 개념(reine Begriffe)'의 원천으로서의 ‘지성능력'을 탐구하는 ‘개념의 분석론(Analytik der Begriffe)'과 ‘규칙아래에 포섭하는 능력'인 ‘판단력(Urteilskraft)'의 ‘이론(Doktrin)'에 해당하는 ‘원칙의 분석론(Analytik der Grundsätze)'으로 구성되어 있다. 칸트는 이러한 ‘지성의 순수한 인식요소들'과 ‘그로 이루어진 원칙들'을 다루는 ‘초월적 분석론'을 ‘진리의 논리학(Logik der Wahrheit)'이라 부른다. ‘초월적 분석론'이 칸트에게서 ‘진리의 논리학'인 이유는 어떻게 개개의 인식이 대상과 일치할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진리의 명목적인 설명(die Namenerklärung der Wahrheit)'을 제공해주기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의 표상들이 그 대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월적 분석론'은 무엇이 우리인식의 대상인지를, 이러한 대상일반에 관해 사유하는 우리 인식능력의 형식들은 무엇인지,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대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 지를 해명해준다. 이것이 칸트가 ‘초월적 분석론'을 전통적인 ‘존재론의 오만한 이름(der stolze Name einer ontologie)'을 대신할 대안으로 제시한 소이(所以)이기도 하다.
반면에 ‘초월논리학'의 두 번째 부문은 우리 이성의 ‘잘못된 추론'에 관해 다룬다. 만약에 순수 이성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서 ‘형이상학적 심리학'의 인식대상, 혹은 ‘우주론'과 ‘신학'의 인식대상인 ‘무규정자(Unbedingte)'에 이르려고 할 때 순수 이성은 잘못된 추론에 빠지게 된다. 칸트는 이러한 초월논리학의 부문을 ‘초월적 변증론(transzendentale Dialektik)'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이 고대에 ‘변증론(Dialektik)'이 의미했던 ‘가상(Schein)'을 만들어내는 ‘기술(Kunst)'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초월적 변증론'은 순수이성의 잘못된 추론으로부터 생겨나는 ‘형이상학적 가상'들을 폭로하고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초월적 변증론'은 칸트에게서 ‘가상의 논리학(Logik des Scheins)'을 의미한다.
인간의 사유일반을 연구하는 학문, 구체적으로 말해 ‘개념(Begriffe)'과 ‘판단(Urteile)' 그리고 ‘추론(Schlüsse)'에 관해 다루는 학문이 ‘논리학(Logik)'이라는 점에서 칸트는 ‘초월적 분석론'과 ‘초월적 변증론'으로 이루어진 넓은 의미의 사유능력으로서의 ‘지성(Verstand)'에 관한 자신의 이론을 ‘초월논리학(transzendentale Logik)'이라고 부른다. ‘개념'을 통해 무엇이 파악되든지, 혹은 ‘판단'과 ‘추론'을 통해 무엇이 인식되든지 그 내용은 전혀 도외시하는 ‘일반논리학(allgemeinen Logik)'과는 달리 ‘초월논리학'은 우리의 사유형식이 그 대상과 맺는 관계에 관한 이론인 ‘초월적 인식(transzendentale Erkenntnis)'에 관한 것이다. 칸트에게서 ‘초월적 인식'이라는 말은 선험적인 ‘기원(Ursprung)'을 갖는 표상이 어떻게 성립하며 이 선험적으로 성립된 표상이 경험에서 생겨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경험적 대상과 관계 맺을 수 있는가를 인식하는 일이다(A56/B80, 한글판 99 이하 참조). 따라서 ‘초월논리학'은 결국 그 자신 선험적인 기원을 가지면서도 경험의 대상과 선험적으로 관계 맺는 ‘순수 지성개념들'에 관한 체계적 이론이다. 그리고 지성(Verstand)'을 통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초월논리학'의 이러한 ‘학의 이념'은 결국 대상과 선험적으로(a priori) 관계 맺는 ‘순수 지성개념'이 실재로 존재함에 의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 따라서 ‘초월논리학'은 ‘순수 지성개념들(reine Verstandesbegriffe)', 즉 ‘범주(Kategorie)'를 찾아내어 그 ‘기원(Ursprung)'과 ‘범위(Umfang)'를 밝히고 또한 찾아낸 범주들의 ‘객관적 타당성(objektive Gültigkeit)'을 보여주는 ‘순수 지성개념들의 체계'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점에서 칸트는 ‘초월논리학'을 ‘순수 지성인식(reine Verstandeserkenntnis)'의 ‘기원'과 ‘범위', 그 ‘객관적 타당성'을 규정하는 학문이라고 정의(定義)하고 있다.
따라서 ‘초월논리학'의 첫 번째 부문인 ‘초월적 분석론(transzendentale Analytik)'은 먼저 ‘순수 지성개념들', 즉 ‘범주'의 ‘기원'과 ‘범위'에 관해 탐구한다.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인 ‘판단표(Urteilstafel)'에 근거해서 흔히 ‘범주표(Tafel der Kategorien)'라고 불리는 “종합하는 모든 근원적인 개념들의 표(die Verzeichnung aller ursprünglich Begriffe der Synthesis)”를 제시한다. 그러나 칸트가 여기서 찾아낸 ‘순수 지성개념들'은 ‘단지 시험적으로 모아본 개념들을 어림잡아 봄'(A64/B89)에 의해서 생겨나는 비체계적인 지성개념탐구의 결과가 아니다. 이와 같이 귀납적인 추리에 의한 우연적인 발견에 의존하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지성개념의 탐구는 ‘순수 지성개념'을 찾아내는 ‘원칙(Prinzip)'이 결여되어 있기에 결코 하나의 완전한 체계를 보장해주지 못한다.
칸트는 순수 지성개념들의 완전한 체계를 위해 ‘하나의 원칙에 따라(nach einem Prinzip)' 범주들을 찾아낸다. 그 ‘원칙'은 칸트에 의하면 ‘판단에서의 지성의 활동', 다시 말하자면 ‘판단하는 능력으로서의 지성자체(Verstand selbst als Vermögen zu urteilen)'이다. 즉, “판단들에 있어서의 통일의 기능을 우리가 완전히 표시할 수 있다면, 오성[지성]의 기능들은 전부 알려질 수 있다”(A69/B94, 한글판 107; []안 글쓴이), 라는 생각에 근거해서 칸트는 먼저 완성된 체계로서의 ‘판단표'를 제시한다. 그리고 모든 판단들은 이러한 판단형식에 따라 생겨나고, 우리 지성의 기능들에서 유래하는 개념들도 내용상 이러한 판단의 기능에 일치해야 하기에 칸트는 ‘판단의 양(Quantität der Urteile)', ‘판단의 질(Qualität der Urteile)', ‘판단의 관계(Relation der Urteile)', ‘판단의 양상(Modalität der Urteile)'이라는 ‘판단표(Urteilstafel)'로부터 ‘양의 범주(Kategorien der Quantität)', ‘질의 범주(Kategorien der Qualität)', ‘관계의 범주(Kategorien der Relation)', ‘양태의 범주(Kategorien der Modalität)'로 이루어진 ‘범주표(Tafel der Kategorien)'를 이끌어 낸다.
《12 범 주》
Ⅰ. 양 : ⓐ 전체성 ⓑ다수성 ⓒ단일성
Ⅱ. 성질: ⓐ 실제성 ⓑ부정성 ⓒ제한성
Ⅲ. 관계: ⓐ 실체성 ⓑ인과성 ⓒ상호성
Ⅳ. 양성: ⓐ 가능성 ⓑ현존성 ⓒ필연성
1. 분석판단 : 이성 주시 / 종합판단 : 경험 주시
◈ 선험적 종합판단은 가능한가? 칸트 → 가능하다.
이와 같이 ‘순수 지성개념'의 ‘기원'과 ‘범위'를 밝힌 칸트는 이제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objektive Gültigkeit)'을 문제 삼는다. ‘초월논리학'의 과제였던 ‘순수 지성개념'을 통한 대상에 대한 선험적 인식의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즉 이 ‘범주'가 대상과 선험적으로 관계 맺을 수 있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 순수 지성개념인 ‘범주'들이 우리 직관의 대상들, 즉 ‘현상(Erscheinung)'에 관한 참된 술어로써 타당함이 먼저 밝혀져야 한다. 그런데 ‘범주'가 이처럼 ‘현상'들에 대해 ‘객관적인 타당성(objektive Gültigkeit)'을 갖는다는 것을, 더 나아가 ‘순수 지성의 원칙들(die Grundsätze des reinen Verstandes)'과 같은 현상에 관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진술인 ‘선험적 종합판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현상'과 ‘범주'의 동일성을 설명해야 한다는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즉, 어떻게 사고의 주관적 조건이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느냐, 다시 말하면 대상의 모든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주느냐 하는 곤란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순수 지성개념의 연역(Deduktion der reinen Verstandesbegriffe)'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행해진 칸트의 작업이다. 즉 ‘범주'가 어떻게 우리 직관의 대상들에 대해 ‘객관적 타당성'을 갖는지, 또한 우리에게 단지 ‘지각(Wahrnehmung)'을 통해서만 알려지고, 따라서 ‘지성(Verstand)'과는 무관하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공간, 시간중의 ‘현상'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오직 ‘지성'에만 기원을 둔 ‘범주' 아래에 포섭되어 질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 ‘범주의 초월적 연역'에서의 칸트의 과제인 것이다.
범주의 객관적 타당성은 결국 ‘이 범주를 통해서만 경험일반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에 관해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감관(Sinne)'을 통해서는 결코 주어질 수 없는 ‘하나의 다양들의 결합(eine Verbindung von Mannigfaltigem)'을 우리는 반드시 전제해야 한다. 그런데 ‘감성(Sinnlichkeit)'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표상능력의 자발성의 행위(ein Aktus der Spontaneität der Vorstellungskraft)'에 속하기에 ‘지성 작용(Verstandeshandlung)'이라 불리는 이 ‘결합의 개념(der Begriff der Verbindung)'은 이 개념을 가능하게 하는 두 계기, 즉 결합되어 지는 것으로서의 ‘다양(das Mannigfaltige)'이라는 개념과 이 다양을 결합하는 작용으로서의 ‘다양의 종합(Synthesis des Mannigfaltigen)'이라는 개념 이외에 더 근본적인 개념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바로 이 ‘다양'과 ‘종합'의 근저에 놓여 있는 ‘통일(Einheit)'이라는 개념이다. 그러나 ‘다양의 종합적 통일의 표상(Vorstellung der synthetischen Einheit des Mannigfaltigen)'(B130f., 한글판 144)으로서의 ‘결합(Verbindung)'이라는 개념은 다양하게 주어진 잡다함을 종합함으로서 생겨나게 되는 통일의 표상, 즉 결합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결합의 개념에 선험적으로 선행해야 하는 ‘결합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합적 통일'의 최상의 근거는 ‘자기의식의 통일(Einheit des Selbstbewußtseins)', 즉 ‘통각의 종합적 통일(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이다. ‘나는 생각한다(ich denke)'라는 명제로 표현되는 ‘자기 스스로를 의식함(Bewußtsein meiner selbst)', 즉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은 모든 표상에 반드시 수반되어져야 하고 ‘나의 표상(meine Vorstellung)'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즉 직관 중에 주어진 모든 표상들이 내 속에서 만나져서 ‘나의 표상'으로 여겨지기 위해서는 모든 표상은 반드시 ‘사유하는 나(ich denke)'와 필연적으로 관계 맺음을 통해 이 ‘통각의 통일'에 속해져야만 한다. 이러한 ‘통각의 종합적 통일'은 칸트에 의하면 지성의 논리적 사용에서 판단(Urteile)중에 성립하는 통일, 즉 판단형식들의 근거일 뿐 아니라 직관 중에 주어진 다양의 통일을 완성하는 근거이다. 즉 ‘통각의 종합적 통일'은 지성의 논리적 사용의 최상의 근거까지 포함하는 모든 지성사용의 최상의 원칙인 것이다.
나아가 칸트는 ‘범주의 초월적 연역'의 두 번째 부문과 ‘순수 지성개념의 도식론'에서 어떻게 대상에 관한 직관인 ‘현상'이 순수 지성에 기원을 둔 ‘판단 형식들'에 따라 규정되어 지는 것이 가능한지를 다룬다. 그 가능성은, 공간 시간 중에서 주어지는 대상인 현상들이 ‘사유의 종합적인 통일'의 기능과 일치해야 함을 보여줌으로써 성립한다. 즉 ‘형식적 직관'으로서의 공간과 시간 자체가 이미 ‘사유의 종합적인 통일'을 통해서만 가능하기에, 달리 말해 우리 지성이 자신의 동일성을 의식할 수 있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우리 직관의 종합적 통일이 바로 이 ‘사유의 종합적 통일'이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기에 단지 ‘범주에서 생각되어지는 직관일반의 다양의 종합(die in der Kategorie gedachte Synthesis des Mannigfaltigen einer Anschauung überhaupt)', 즉 ‘지성적 종합(synthesis intellectualis)'이외에 ‘감각적인 직관의 다양을 종합하는 것(Synthesis des Mannigfaltigen der sinnlichen Anschauung)'인 ‘형상적 종합(synthesis speciosa)'이 요구되어 진다. 결국 범주가 단지 사유의 형식임을 넘어서서 객관적 실재성을 갖기 위해서는 ‘내감을 규정하는 것(die Bestimmung des inneren Sinnes)', 즉 ‘감각적인 직관의 다양을 종합하는 통각의 통일(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 des Mannigfaltigen der sinnlichen Anschauung)'이 필요하다. 결국 칸트는 ‘범주의 초월적 연역'을 통해 ‘근원적인 통각의 종합적 통일(die ursprünglich synthetische Einheit der Apperzeption)'을 ‘사유'와 ‘존재'의 최상의 원칙으로 제시한다. 즉 이 통각의 종합적 통일이 지성의 논리적 사용을 포함하는 모든 지성사용의 근거이자 동시에 현상으로서만 우리에게 나타나는 모든 존재의 ‘대상성(Objektivität)'의 근거인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의 체계를 우리의 인식능력들에 관한 이론들의 구성으로 파악해 볼 때, 지금까지 살펴본 ‘초월적 분석론(transzendentale Analytik)'의 첫 번째 부분인 ‘개념의 분석론(Analytik der Begriffe)'은 우리 인식능력으로서의 좁은 의미의 ‘지성(Verstand)'에 관한 연구이었다. 이제 ‘초월적 분석론'의 두 번째 부분인 ‘원칙의 분석론(Analytik der Grundsätze)'에서 칸트는 ‘규칙아래에 포섭하는 능력'으로서의 ‘판단력(Urteilskraft)'에 관해 다룬다. 칸트는 이제 우리 경험인식의 근저에 놓여있는 선험적 종합판단을 찾아내어 정식화시키고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우선 이러한 선험적 종합판단이 생겨날 수 있는 조건, 즉 순수 지성개념들이 감성에 적용되어질 수 있는 조건들을 탐구한다. 그리고 ‘판단력'은 순수 규칙의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는 ‘지성의 개념'을 ‘현상'에 적용시키는 것을 가르쳐준다는 점에서 이 ‘원칙의 분석론'은 “판단력에 대한 규준(ein Kanon für die Urteilskraft)”이라 여겨진다.
이러한 ‘판단력의 초월적 이설(die transzendentale Donktrin der Urteilskraft)'로서의 ‘원칙의 분석론'은 순수 지성개념이 사용될 수 있는 감성적 조건을 다루는 ‘순수 지성의 도식론(Schematismus des reinen Verstandes)'과 이런 조건에 의해 선험적으로 생겨나는 선험적 종합판단들에 관해 다루는 ‘순수 지성의 원칙론(Grundsätze des reinen Verstandes)'으로 이루어진다. ‘순수 지성의 도식론'에서의 핵심문제는 어떻게 서로 다른 기원을 갖고 있는, 따라서 “전적으로 이종적인(ganz ungleichartig)”인 것으로 여겨지는, ‘현상'과 ‘범주'가 서로 일치할 수 있느냐이다. 즉, 칸트의 의문은 “어떻게 오성[지성]의 순수한 개념 속에 경험적 직관이 포섭될 수 있는가? 따라서 현상에다 범주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이다. 칸트가 발견한 이 문제의 해결책은 바로 이질적인 양자를 ‘매개하는 표상(die vermittelnde Vorstellung)'을 발견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감성적(sinnlich)'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지성적(intellecktuell)'인 ‘제삼자(ein Drittes)'의 매개를 통해 ‘범주'가 감성화 되어진다면 감성적인 현상들이 범주 아래에 포섭되어 지는 것, 달리 말해 범주를 현상에 적용하는 것은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매개하는 표상'이 칸트에 따르면 바로 ‘초월적 도식(das transzendentale Schema)'이다. ‘시간(Zeit)'만이 우리 감성의 형식이면서 동시에 모든 표상들의 결합의 조건이기에 ‘초월적 도식'은 다름 아닌 ‘초월적 시간규정(transzendental Zeitbestimmung)'이다. 이러한 초월적 시간규정으로서의 ‘도식'들은 서로 다른 인식능력인 ‘감성'과 ‘지성'을 매개할 수 있는 ‘구상력(Einbildungskraft)'의 산물이다. 즉 그 자신 ‘종합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지성'에 속하는 ‘구상력'은 ‘범주'에 상응해서 ‘감각적 직관의 다양(das Mannigfaltigen der sinnlichen Anschauung)'을 결합함으로써 ‘순수 개념의 도식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처럼 ‘매개하는 표상'으로서의 ‘순수 지성개념들의 도식'을 통해서 이제 범주를 현상에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면, 이러한 범주를 현상에 적용함에 의해 생겨나게 되는 ‘선험적 종합판단들(synthetische Urteile a priori)'이 바로 ‘원칙의 분석론(Analytik der Grundsätze)'의 두 번째 장(場)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순수 지성의 원칙들(die Grundsätze des reinen Verstandes)'이다. 칸트는 ‘선험적 종합판단'으로 이루어진 ‘순수 지성의 원칙들'의 참됨을 증명하기 위해 먼저 모든 ‘종합판단들(synthetische Urteile)'의 진리의 기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최상의 원칙(das oberste Prinzip)'에 관해 묻는다. 모든 ‘분석적 판단(analytische Urteile)'은 ‘모순율(der Satz des Widerspruchs)'에 의해 그 명제의 참과 거짓을 결정할 수 있다. ‘모순율'은 모든 분석판단의 참됨을 결정하는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이 된다는 점에서 모든 분석판단의 “보편적이고 완전히 충분한 원리(das allgemeine und völlig hinreichende Prinzipium)”에 해당한다.
그러나 ‘종합판단들'은 ‘모순율'을 통해서는 그 참됨과 거짓을 결정할 수 없다. “경험이 가능하다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선천적[선험적] 인식에다 객관적 실재성”을 주기에 ‘종합판단들'의 진위를 결정하는 최상의 원리는 ‘경험의 가능성(die Möglichkeit der Erfahrung)'과 관계가 있다. 따라서 ‘모든 종합판단의 최상의 원리(das oberste Principium aller synthetischen Urteile)'는 칸트에 따르면 “모든 대상은 가능한 경험에 있어서 직관의 다양을 종합적으로 통일할 무렵의 필연적 조건에 종속한다”는 것이다. 즉, ‘선험적 종합판단'이 참된 인식으로서 ‘객관적 타당성(objeitive Gültigkeit)'을 갖게 되는 것은 인식의 구성요소들인 ‘선험적 직관의 형식적 조건들(die formalen Bedingungen der Anschauung a priori)'과 ‘구상력의 종합(die Synthesis der Einbildungskraft)', 그리고 ‘초월적 통각의 필연적인 통일(die notwendige Einheit der transzendentalen Apperzeption)'이 ‘가능한 경험'과 관계 맺는 것, 말하자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의 충족을 통해서이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경험일반의 가능조건이 동시에 경험의 대상 가능의 조건이다(die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er Erfahrung überhaupt sind zugleich Bedingungen der Möglichkeit der Gegenstände der Erfahrung)”, 라고 말하고 있다.
칸트는 이제 모든 경험의 근저에 놓여있는 경험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이러한 ‘순수 지성의 원칙들'을 ‘범주표'의 ‘안내(Anweisung)'에 따라서 제시한다. ‘모든 현상들은 그것이 직관이라는 점에서 외연양(extensive Größe)을 갖는다' 고하는 ‘직관의 공리(Axiome der Anschauung)'의 원칙, ‘모든 현상 중에서 실재적인 것(das Reale)은 내포량(intenive Größe)을 갖는다'는 ‘지각의 선취(Antizipationen der Wahrnehmung)'의 원칙, 그리고 ‘경험의 유추들(Analogien der Erfahrung)'이라는 이름의 원칙들인 ‘실체고정성의 원칙(Grundsatz der Beharrlichkeit der Substanz)', ‘인과율의 법칙에 따른 시간후속의 원칙(Grundsatz der Zeitfolge nach dem Gesetze der Kausalität)', ‘상호작용 혹은 상호성의 법칙에 따른 동시존재의 원칙(Grundsatz des Zugleichseins nach dem Gesetz der Wechselwirkung oder Gemeinschaft)',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태(Modalität)의 범주를 통해 생겨나는 원칙인 ‘경험적 사고 일반의 요청(Postulate des empirischen Denkens überhaupt)'이 그것들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원칙의 분석론(Analytik der Grundsätze)', 즉 ‘판단력의 초월적 이설(die transzendentale Doktrin der Urteilskraft)'의 마지막 장에서 칸트는 “모든 대상일반을 현상체와 가상체로 구별하는 근거에 관하여”라는 제목 아래에서 ‘초월논리학'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초월적 분석론(transzendentale Analytik)' 전체의 결론을 정리하고 있다. 즉, ‘지성(Verstand)'은 우리에게 대상이 주어질 수 있는 ‘감성(Sinnlichkeit)'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여기서 밝혀진 ‘지성의 원칙들'은 단지 ‘현상을 해명하는 원리들(Prinzipien der Exposition der Erscheinungen)'일 뿐이라는 것이다. 칸트가 알 수 있다는 인식의 세계는 현상의 세계뿐이다. 따라서 이론적 인식으로서의 형이상학에서는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 -현상들-이 아닌 것들에 관한 인식은 불가능하기에 ‘감각적 대상(sinnliche Gegenstände)'이 아닌 ‘사물자체(Dinge an sich)'나 혹은 경험대상의 속성이 아닌 ‘의지의 자유'와 같은 것은 적어도 경험을 통해서 인식되어 질 수 있는 영역에서 제외되어져야 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세계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칸트는 이제 ‘초월논리학'의 후반부, 즉 ‘가상의 논리학(Logik des Scheins)'이라 부른 ‘초월적 변증론(transzendentale Dialektik)'에서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는 결코 인식할 수 없는 대상들에 대한 ‘이성(Vernunft)'을 통한 잘못된 인식들을 폭로하고 그러한 인식의 시도는 결국 ‘가상(Schein)'에 빠질 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의 ‘초월적 분석론'의 결과, 즉 가능한 경험의 대상들의 조건과 그 총체로 구성되는 자연에 대한 칸트의 이론은 전통적 형이상학의 분류에 의하면 ‘일반형이상학(metaphysica generalis)'에 해당하는 ‘존재론(Ontologie)'의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하게 된다. 반면에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형이상학, 즉 ‘특수형이상학(metaphysica specialis)'은 ‘초월적 분석론'의 결과에 근거해서 비판을 받게 된다. ‘순수이성의 오류추리', ‘순수이성의 이율배반', ‘순수이성의 이상'으로 이루어져 있는 ‘초월적 변증론'은 바로 이 ‘특수형이상학'의 전통적인 탐구 대상이었던 ‘영혼(Seele)', ‘세계(Welt)', ‘신(Gott)'에 관한 전통적인 이론들 각각에 대한 칸트의 비판을 담고 있다.
‘순수이성의 오류추리(Paralogismus der reinen Vernunft)'장(場)에서 칸트는 영혼의 실체성(Substantialität), 즉 영혼의 ‘단순성(Einfachheit)', ‘인격성(Personalität)', ‘불멸성(Immortalität) 등을 증명하려는 ‘이성적 심리학(rationale Psychologie)'의 시도가 ‘잘못된 추론들(Paralogismen)'에 이르게 됨을 보여준다. ‘순수이성의 이율배반(Antinomie der reinen Vernunft)'장(場)은 전통적인 ‘이성론적 우주론(rationale Kosmologie)'에 관한 비판이다. 칸트는 여기서 ‘무제약적인 전체로서의 세계'에 관한 이념을 만들어내는 이성은 자기 자신과 모순에 빠진다는 것을 제시한다. 즉, 공간, 시간상에서의 세계의 분량을, 현상에서 주어진 전체의 요소들의 성질을, 현상일반의 전체의 인과율에 따른 결합들의 관계를, 그리고 자연에서의 모든 사물과 사건들의 신 혹은 물질과 같은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의존성을 이성을 통해 인식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에서부터 각각 ‘정립(These)'과 ‘반정립(Antithese)'이라는 ‘순수 이성의 이율배반'은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이율배반'은 칸트에 의하면 ‘현상(Erscheinung)'과 ‘사물자체(Dinge an sich)'를 분명하게 구별하여 주는 ‘초월적 관념론(der transzendentale Idealismus)'의 가르침에 의해 해결되어 질 수 있다.
‘초월적 변증론'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장(場)인 ‘순수이성의 이상(das Ideal der reinen Vernunft)'은 ‘존재론적인 신 존재 증명', ‘우주론적인 신 존재 증명' 그리고 ‘자연신학적인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하는 ‘이성적 신학(rationale Theologie)'에 대한 칸트의 비판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사유에 대한 칸트의 비판의 핵심은 어떤 사물의 ‘현존(Existenz)'이란 결코 ‘개념(Begriff)'으로부터 도출될 수 없는 ‘종합적 인식(synthetische Erkenntnis)'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가능한 경험의 대상에만 타당한 ‘실재함(Wirklichkeit)'의 범주를 어떠한 경험적 직관 중에도 주어질 수 없는 신에게 적용시키고 이에 근거해서 존재함을 증명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초월적 감성학'과 ‘초월논리학'으로 이루어진 ‘초월적 원리론(transzendentale Elementarlehre)'이 순수이성에서부터 생겨나는 철학적 이론이라는 ‘하나의 건축물(ein Gebäude)'의 재료와 요소들을 제공해주고 그로 인해 이론적 이성사용의 경계를 한정지을 수 있었다면 이제 ‘초월적 방법론(transzendentale Methodenlehre)'에서 칸트는 마지막으로 그러한 순수이성의 이론적 건축물을 건축하기 위한 설계도를 그리려고 한다. 즉 칸트가 ‘초월적 방법론'에서 원하는 바는 한마디로 “순수이성의 완전한 체계를 위한 형식적인 조건들을 규정”하는 것이다. 이런 의도에서 ‘순수이성의 훈련(Disziplin der reinen Vernunft)'에서는 철학과 수학의 방법을 비교하는 것이, ‘순수 이성의 규준(Kanon der reinen Vernunft)'에서는 이성의 순수사용의 궁극적인 목적을 규정하는 것이, ‘순수 이성의 건축술(Architektonik der reinen Vernunft)'에서는 순수이성인식의 체계를 해명하는 것이, 그리고 ‘순수이성의 역사(Geschichte der reinen Vernunft)'에서는 철학의 역사에 등장한 철학적 체계와 입장들을 유형적으로 나누어 체계화시키는 것이 다루어지게 된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순수이성비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실천이성비판
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 판단력 비판
생각하면 할 수록 새로운 감탄과 함께 공경심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가 있다.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 별이 빛나는 '하늘'이란 자연(순수이성)이고
내 안의 도덕 법칙이란 자유(실천이성)이다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은 전혀 다른 개념인가?
아니면 상관관계가 있는 개념인가?
첫댓글 칸트 철학의 정수가 잘 정리 되어 있습니다. 그 전체를 관통하는 개념인 인식 대상으로서의 물자체와 인식주체인 이성,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식의 과정 중 표상과 현상, 현상의 개념화와 범주화, 개념화 되고 범주화 된 인식 대상에 대한 분석적 사고와 종합적 사고, 외적 대상이 아닌 내적 대상의 인식 주체인 지성 등의 큰 그림을 토대로 접근하지 않으면 ' 이성으로서 물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명제와 '우리가 가지는 사물들의 개념은 물자체가 아니라 이성적 해석이며 세계 또한 표상과 현상으로서의 해석이다'라는 명제를 설명할 수 없다.
장로님의 학문의 깊이는 오묘하고 정교합니다 귀한 말씀으로 해석과 절묘한 답글로 성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순수이성비판 정리및요약
감사합니다.
3대비판철학인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도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