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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의 향기 스크랩 041_전북 완주군 소양면 위봉사
無盡藏 추천 0 조회 70 12.03.04 13: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소양면에 도착한 후 조금 복잡한길을 지나 송광사 이정표에 따라 마수교를 건너 올라가는 길이 정말 아름다웠다. 벚꽃으로 보이는 가로수가 끝이 안보일 정도로 심어져 있어 운치를 더하는게 아마 봄에는 이곳이 섬진강 길모양 차량이 못다닐 정도로 밀릴 것 같은 그런 꽃길일 것이다. 나무들이 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 듯한 것은 무슨 이유인지?... 하천을 끼고 올라가는 기분은 여느 사찰 올라가는 길목보다 고즈넉한 모습은 볼 수가 없어 아쉽다 생각했는데...한참을 올라가니 점점 길이 좁아지며 도로 공사를 하고 있어 차량들이 한 대밖에 다닐 수가 없었다. 이상하다 생각이나 지도를 보니 벌써 한참 전에 송광사를 지나치고 말았다.
 
이쪽길에 있다는 것만 생각하고 나무들과 주위 경치에 취해 송광사 입구 표지판을 못보고 지나친 것이다. 내려오면서 보기로 하고 어차피 들르려 한 위봉사를 먼저 올라가기로 하였다. 외성리 삼거리에 도착하니 이곳은 아주 유원지 분위기가 나는 곳이다. 이곳에서 넘어갈 길을 올려다 보니 새까맣게 높아 보이는 곳에 길이있어 그리 차량이 내려오는 것이 보인다. 외성리를 뒤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물론 차가 힘들 정도로 높은 경사는 아니었지만 꼬불 거리기로 하면 속리산 말티 고개 버금가는 그런 길이다. 중간 중간에서 내려 밑을 내려다 보니 날이 흐려 멋지게 보이진 않았지만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제발 내려오는 길엔 날씨가 개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고개까지 올랐다. 이곳에 위봉산성이라 쓰여있어 차를 세웠다.

[소양면에서 송광사 들어가는 길...]

주차장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지만 양쪽으로 빈 공간이 있어 오가는 차량들이 잠시 세워놓고 산성을 구경하고 또 올랐다 내려올 수 있는 곳이며 위쪽으로는 태조암이라는 암자가 있다고 한다. 산성에서 내려오시는 할머님께서 올라가 보라고 하신다. 시간이 많지를 않아 포기하고 산성을 이곳 저곳에서 바라보며 멋지게 찍으려 돌아다녀 보았으나 아마도 위쪽에서 내려보며 찍어야 구도가 멋질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위봉사를 둘러 쌓듯이 돌을 쌓아 만든 석성이 위봉산성이다. 성안에는 5개의 우물과 9개의 못을 팠고,
 
지금은 일부성벽이 남아있어 복원 중이며 동, 서, 북문으로 이루어진 세 개의 문 중에서 서문 석조물만 남아있고 문 위의 세칸의 문루는 지금은 없어지었다. 조선 숙종 원년(1675년)에 7년간 7개 군민을 동원해 쌓았다는데, 그 길이가 16km에 달한다. 성을 축조한 이유는 전주에서 가까운 험한 지형을 골라 유사시에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영정과 조경묘의 시조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전한다. 그후로 갑오경장때 동학농민봉기로 전주가 함락되었을 때 이곳으로 위패를 피신 시킨 적이 있다고 전한다.

[뱁재 고개라는 위봉재에 복원된 위봉산성...]

[되실봉에서 내려오며 쌓여있는 위봉산성...]

[위봉산성 서문(홍예석문)...]

[위봉산성 서문 터...]

[위봉산성 서문 누각은 언제 복원?...]

[복원하면 서문이 멋지게 위로...]

위봉재라 일컫는 뱁재를 넘어 조금 내려서니 좌측으로 위봉사가 보인다. 앞 쪽에는 밭을 일구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고 스님도 보인다. 밑으로 내려가다 다시 위봉사를 알리는 길로 올라가야 위봉사 주차장에 도달한다. 고개에서 들어서는 길은 폐쇄한 것으로 보인다.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넓게 잘 배치 되어있는 위봉사의 위엄을 만끽한 후 밑을 내려다보는 멋진 기회도 얻을 수 있었다. 단풍이 너무 아름다웠는데 날씨가 흐려서...

▶ 서기 604년(백제무왕 5년)에 서암대사께서 최초 산문을 열었으며 신라말 최용각이라는 사람이 봉황의 자취를 보고 위봉사를 중창하였다고 전해진다. 고려말 나옹스님께서 중건하시고 조선 세조때는 선석, 석잠 두 스님이 중수하였으며, 조선시대 말엽 포련대사에 의한 60여칸의 건물중수를 거쳐 1912년에는 전국 31본산 중의 하나로 전북 일원의 50여 말사를 관할하기도 하였으나 해방 후 6.25 동란을 거치면서 급속히 퇴락했다.

폐사 직전인 1988년 현재의 주지 법중스님이 부임, 바로 도량정비를 시작하여 퇴락한 보광명전과 관음전을 정부의 협조로 보수하고 여러 시주의 동참으로 100여칸의 건물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년에 걸친 대작 불사로 위봉사는 다시금 중건되고 있으며 현재는 10여동의 건물에 50~60명의 대중이 상주하고 있는 대찰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고 한미르의 뷰티9 사이트에 잘 설명되어있어 빌어왔다.

[넓은 주차장이 덧보이는 위봉사 앞마당...]

[추줄산위봉사라 쓰인 일주문...]

[새로 증축한 사천왕문?...]

[밖에서 올려다본 위봉사 종각...]

[사천왕문?...]

[위봉사 봉서루(鳳棲樓)...]

[보물 608호인 보광명전(普光明殿)...]

보광명전은 다포계 양식으로 건축된 팔작집으로 굵직한 재목들을 사용하여 집이 웅장하게 보이며 귀솟음도 뚜렷하다. 공포는 내.외 모두 3출목이다. 쇠서의 조각 솜씨와 내·외부의 연화를 조각한 솜씨 그리고 귀공포의 간결한 처리수법 및 보의 다듬은 기법등으로 보아 17세기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불단 위에는 석가모니불과 좌우보살을 안치하였고 불상 위에는 낙양각과 운룡으로 장식된 화려한 닫집을 두었으며 가구는 1고주 7량으로 대들보위로는 우물천장을 가설하였다. 별화를 그린 주악비천상이나 후불벽 뒷면에 그린 백의관음보살상등은 색조가 차분하고 아늑한 금단청과 더불어 고식 채화의 우수함을 보여주고 있다. 고 완주군싸이트에 적혀있다.

[새로지은 사천왕문?...]

[위봉사 극락전...]

[위봉사 약수터...]

[위봉사 지장전(地藏殿)...]

[위봉사 관음전(觀音殿)...]

[위봉사 종각...]

[위봉사 나한전(羅漢殿)...]

[쪽문 사이로 돌탑이 보이고...]

[오래되고 멋진 굴뚝...]

[보광명전 안 불상, 뒤 백의 관음벽화...]

[소나무와 지장전...]

[지장전앞뜰 3층석탑과 소나무...]

[관음전 옆 장독대...]

[3층석탑 뒤로 보광명전이...]

[봉서루를 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봉서루 기둥의 각선미?...]

[뱁재에서 내려다본 길...]

[뱁재 중턱에서 외성리가 보이고...]
 
날씨도 안좋고 시간도 촉박하여 서두르며 본 위봉사 이기에 더욱 아쉬움이 많이 남아있다. 뒤에 사이트를 뒤지며 위봉사에 대해 알아보려 했지만 자료가 부진하다. 그리고 정식 공인사이트도 없는 듯하다. 보통 주촬산이라 많이 올라있는데 위봉사 일주문에는 추출산이라 표기되어있어 좀 헛갈린다. 전국에 사찰은 무지하게 많다. 그러나 다시 찾아가고 싶어 서너번씩 가보는 곳은 많지 않다. 이곳의 아쉬움을 달래어 성산과 함께 이달 안에 다시 방문할 것이다. 위봉폭포와 위봉산성에 대해 다시 올리기로 하고 돌아내려올 때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기 자기한 곳이다. 물론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를 한두 번 본 것은 아니지만 이곳같이 무엇인가 올라오는 차들이 힘차 보이는 것은 왜일까?... 어서 내려가 송광사를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바쁜 걸음으로 계곡을 내려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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