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오페라 `영웅 이순신` 이탈리아에서 초연
←오페라 `이순신`의 한 장면 한국과 이탈리아의 합작 오페라 `영웅 이순신(L`erioco Yi Sun Sin)`이 2000년 12월 5일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 로마의 `테아트로 델 오페라`에서 막을 올렸다. 이날 극장을 찾은 1400여명의 이탈리아인 초청 관객들은 장면이 바뀔 때마다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성곡오페라단에 의해 이탈리아어로 무대에 올려진 이 작품은 기존의 오페라 `이순신`을 곡 자체를 새로 쓰는 등 재창작에 가까울 정도로 뜯어 고친 것이다. 작곡은 브루크너의 유족들로부터 위촉받아 그의 교향곡 제9번 피날레 부분을 공동으로 재작곡한 바 있는 이탈리아인 작곡가 주세페 마주카와 니콜라 사말레 등 2명이 맡았다. 이날 무대에서 주역은 한국인과 이탈리아인이 고루 맡았다. 첫날 공연에서 이순신역은 클라우디오 디 세니, 부인역은 토리 롬바르도지 클라우디오, 기생 초월역은 카티아 마르티나, 선조역은 류현승, 원균역은 김승철 등이 맡아 호연했다. 오페라 `이순신`은 1998년 이순신 장군 순국 400주년을 기념해 충남 아산시 현충사에서 초연된 이후 1999년 서울 국립극장 등 전국 각지에서 순회 공연됐다.
[1933년] 미국 금주법 14년 만에 해제
← 금주법폐지를 축하하는 여성들이 술집에서 건배하고 있다. 1933년 오늘 미국의 4분의 3에 달하는 주(州)가 금주법을 폐지하는 헌법 제21조 수정안을 비준함으로써 역사상 유례가 없던 ‘금주시대’가 미국에서 막 내렸다. 0.5도 이상 알콜이 함유된 술은 제조도, 운반도, 판매도 안된다는 ‘금주법’이 시행된 것은 14년 전인 1920년 1월 17일. 하지만 구입과 음주는 금지하지 않아 뉴욕의 경우 금주법 시행 전에는 1만5000개이던 술집이 금주시대에는 3만2000개로 증가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판매냐 구입이냐의 숨바꼭질에 해답이 있었다. 금주법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금주운동세력의 입김과 독일계 양조업자에 대한 반감이 작용해 시작됐다. 하지만 그 대상이 유구한 세월 동안 인류와 함께 해온 ‘술’이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실패가 예고됐다. 술을 들고 밖으로만 나가도 초범도 벌금 1000달러에 6개월 금고형에 처해졌다. 평범한 시민들이 범죄자로 내몰렸고 암흑가 조직이 급성장했다. 금주법으로 조성된 막대한 ‘검은 돈’은 정치인과 부패 경찰의 주머니를 채워줬다. 알 카포네로 대표되는 마피아 조직은 밀주(密酒)와 밀수를 통해 밤을 지배했다. 시카고 대학생들은 알 카포네를 간디·포드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걸출한 10인’으로 뽑을 정도였다. 칵테일이 생긴 것도 이때였다. 금주법 폐지는 뉴딜정책의 산물이다. 양조업자들의 불만이 고조되는 가운데 대공황이 몰아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서둘러 금주법을 완화시켰다./조선
[1830년] 영국 여성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 Christina (Georgina) Rossetti 출생
필명은 Ellen Alleyne. 1830. 12. 5 영국 런던~1894. 12. 29 런던. 영국의 여류시인. 오빠 가브리엘 로제티도 유명한 시인이었다. 따뜻한 감정과 자기 억제적인 사랑의 정신을 언어로 표현한 훌륭한 애정시를 썼다. 일생을 어머니와 함께 독신녀로 보냈으며, <내가 죽거든>, <기억해주요>, <행자의 행차> 등의 시집이 있다.
사랑하는 이여 내 죽으면
내가 죽거든, 사랑하는 이여 나를 위해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마세요. 내 머리맡에 장미도 심지 말고 그늘진 삼나무도 심지 마세요.
내 위에 푸른 잔디를 퍼지게 하여 비와 이슬에 젖게 해주세요. 그리고 마음이 내키시면 기억해 주세요. 아니, 잊으셔도 돼요.
나는 사물의 그늘도 보지 못하고 비가 내리는 것도 느끼지 못하리다. 슬픔에 잠긴 양 계속해서 울고 있는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리다.
날이 새거나 날이 저무는 일 없는 희미한 어둠 속에서 꿈꾸며 아마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하겠지요. 아니, 잊을지도 모릅니다.
[1906년] 작곡가 안익태(安益泰) 출생
← 안익태의 초상화 1906. 12. 5 ~ 1965. 9. 16 평양(平壤) 출생.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 재학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퇴학당한 뒤 일본에 건너가 중학을 마치고 구니타치[國立]음악학교에 들어가 첼로를 배웠다. 1932년 미국 필라델피아 커티스음악학교에 입학, 첼로와 작곡을 배우는 한편 신시내티교향악단의 제1첼로 주자로 활약하였다. 그 무렵 스토코프스키와 교분을 맺었으며 필라델피아의 카네기리사이틀홀 등에서 독주회를 열어 호평을 받았다. 1934년 헝가리로 건너가 도야니에게 작곡을 배우며 민족주의정신과 기법에 영향을 받았다. 이듬해 빈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주로 지휘법을 사사하고 1936년에는 몇년 전 미국에서부터 착상해 왔던 《애국가》를 작곡했다. 1940년까지 슈트라우스의 보조지휘자로 있다가 그 이후부터는 독일에서 독자적 지휘활동을 하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에스파냐 여인과 결혼, 에스파냐 국적을 얻고 마드리드 마욜카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며 영국·이탈리아·미국 등의 저명한 교향악단을 객원 지휘하기도 하였다. 1957년 귀국하여 자작곡 《강천성악(降天聖樂)》 《한국환상곡》 등을 지휘하고 61년 다시 귀국하여 국제음악제를 개최토록 하였으며 1963년까지 3회에 걸쳐 주관하였다. 후기낭만파에 속하는 지휘자로서 베토벤, 브람스, 드보르자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의 작품을 즐겨 지휘했다. 1965년 에스파냐에서 병사. 1957년 문화포상을 받았으며 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작품에 《애국선열추도곡》 등 다수가 있다. /naver
[1833년] 의병장 최익현 崔益鉉 출생
1833년 12월 5일 태어남 / 1906년 12월 30일 죽음 최익현은 한말의 애국지사이자 의병장이다.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대원군 하야의 계기를 제공한 바 있다. 그후 민씨 일족의 횡포가 심해지자 호조참판을 사임하고 상소를 올렸는데(1873), 이 상소 내용이 과격하고 방자하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3년간 유배되기도 했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조약이 맺어지자 도끼를 지니고 궐문 앞에 엎드려 일본과의 화의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살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머리털을 자를 것을 거부하여 감금되기도 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을 무효화하고 조약을 승인한 을사오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고, 1906년 1월 충청남도 노성의 궐리사(闕里祠)에서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시국의 절박함을 호소하고 일치단결하여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 전라북도 태인의 임병찬(林炳瓚)과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수립하고, 113명의 지사들과 〈동맹록 同盟錄〉을 작성한 후 호남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동참을 촉구했다. 6월 4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각지의 유생 및 의병들을 집결시킨 가운데 창의구국(倡義救國)을 결의하고, 〈창의토적소 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했으며, 격문을 열읍(列邑)에 보내 호응을 촉구했다. 일본정부에 대한 문죄서인 〈기일본정부 奇日本政府〉에서는 강화도조약 이래 일본이 저지른 기만적 배신행위를 16조목에 걸쳐 열거하면서 조선과 일본, 나아가 동양 전체의 평화를 위해 하루 속히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이어 태인읍을 무혈점령하여 그곳의 무기와 세금을 접수했으며, 이튿날 정읍에 도착해 무기와 병력을 증강했다. 다시 순창으로 행군, 많은 주민과 이속들의 환영을 받으며 입성하여 소총과 화약 등 무기를 수합했으며, 각지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여 의병의 수는 500명에 달했다. 이때 전주경무고문지부(全州警務顧問支部) 소속 경찰대가 출동하자 이를 물리쳤다. 6월 8일 곡성에 들어가 일제 관공서를 철거하고 세전과 양곡 등을 접수한 후 순창으로 돌아왔다. 이때의 의병 수는 900명으로 증가했으며 소총 등의 무기를 갖추게 되어 전력이 증강되었다. 6월 11일 광주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고종의 선유조칙을 전하며 해산을 종용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이날 전주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이 이끄는 전라북도지방진위대의 포위공격을 받아 임병찬·고석진(高石鎭) 등 12명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후 일본군사령부로 넘겨져 끈질긴 회유와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임병찬과 함께 쓰시마 섬[對馬島]에 유배되어 엄원위수영(嚴原衛戍營)에 감금되었다. 그곳에서 단발을 강요당하자 단식으로 사절(死節)하기로 결심하고, 임병찬에게 구술(口述)로 유소(遺疏)를 전했다. 유소에서 그는 왕에게 의뢰심을 버리고 자립정신을 굳힐 것을 간청하고, 국제관계에 비추어 볼 때 일본은 반드시 미구에 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단발조치가 철회되자 단식을 중지했으나 그해 11월 병을 얻어 12월 30일 순국했다. 이듬해 1월 유해가 봉환되었다. 문집으로 〈면암집〉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791년]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 요절
← 모차르트, Joseph Lange가 그린 미완성 유화(1789) 1791년 12월 5일 오스트리아의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18세기 빈 고전주의 악파를 대표하는 음악의 천재였다. 작곡가였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천재성을 드러낸 아들을 체계적으로 교육시켜 여러 차례 유럽 연주 여행을 하도록 했다. 모차르트는 대주교의 후원을 받으며 음악 활동을 하다가 대주교와 갈등을 빚은 끝에 자립을 감행했다. 그는 수많은 뛰어난 작품들을 작곡하고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빚에 쪼들리다 불과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는 오페라, 실내악, 교향곡, 협주곡 등 거의 모든 장르의 음악에서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고 오늘날에도 그의 작품이 갖는 아름다움은 청중들의 찬탄을 자아내고 있다./브리태니커
[1926년] 프랑스 화가 모네 사망
← 화가 클로드 모네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가 1926년 12월 6일 사망했다. 86세였다. 식품 잡화상의 맏아들로 태어난 모네는 5세 되던 해 가족과 함께 노르망디 해변 근처의 생트라드레스로 이사해 유년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바다와 함께 지낸 그곳 생활은 그에게 자연에 대한 참신한 통찰력과 자연광선에 대한 그의 재능을 일깨워주었다. 1859년 처음으로 파리를 방문한 모네는 그곳에서 뒷날 ‘인상파’라고 불리게 될 화가들과 교유하며 지내다 1870년 프로이센과 프랑스간에 전쟁이 발발하자 런던으로 피신해 터너, 콘스터블 등 영국 풍경화가들의 작품을 접하고 그들의 명쾌한 색채표현에 반했다. 모네를 포함한 인상파가 지향한 것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 변화하는 색채의 미묘한 질감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1874년 파리에서는 이들의 첫 그룹전인 ‘화가-조각가-판화가-무명예술가협회전’이 열렸는데, 모네의 이 전시회 출품작 가운데 하나인 `해돋이-인상`에서 힌트를 얻어 어느 기자가 ‘인상파 전람회’라는 기사를 쓴 것이 ‘인상파’라는 이름의 기원이 됐다./조선
[1968년] 국민교육헌장 반포 1968년 12월 5일 제3공화국 정부는 한국의 교육 지표를 제시하는 국민교육헌장을 공포했다. 국민교육헌장은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자각하는 이상적인 국민상을 제시하고 새로운 국민 윤리를 확립하며, 그와 같은 사회적 이상의 실현이 곧 국민 교육의 새 지표가 되어야 한다는 전제 아래 민족주의의 이상과 협동적 사회 윤리 및 발전지향적 가치관을 강조했다.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은 국민교육헌장을 한 자도 빠짐없이 외워야 했다. 박정희의 추종자들은 남달리 교육에 대한 애착과 열의를 가지고 있던 박정희가 인적 자원 개발을 위한 의지의 표현으로 이 헌장을 발표했다고 주장하지만, 정권 유지 차원에서 일제의 교육에 관한 칙어를 이름만 바꾸어 놓은 것이라는 비판이 줄곧 대두되어왔다. 1978년 전남대학교 교수들이 국민교육헌장으로 대표되는 박정희 정권의 교육정책에 반발하며 '우리의 교육 지표'를 선언하여 투옥되거나 해직당했다. 그뒤 1988년 국회에서 공식적으로 교육헌장개정이나 폐기문제가 대두되기 시작됐으나 곧 흐지부지됐다. 그러다가 1993년 들어 다시 거론됐고 결국 헌장 제정 기념식, 각종 기념식에서의 낭독, 각급학교 교과서 수록이 차례로 중단됐다. 우리나라 국민교육의 지표가 될만한 교육의 이상이 담겨있어야 할 국민교육헌장이 정치권력의 도구화를 위해 순수하지 못한 의도로 무작정 암송되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브리태니커
[1995년] 노태우 전대통령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 1995년 오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1995년 10월 19일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비자금 의혹을 제기한 것이 계기가 됐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해 재임 중 재벌 총수 등으로부터 2,838억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의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뇌물공여 혐의로 재벌총수 7명이 불구속기소됐고 재벌총수 가운데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 구속됐다. 검찰은 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특례법에 따라 모든 재산에 대해 몰수와 추징의 보전청구를 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징역 15년 추징금 2,628억원을 선고받았고 재벌총수 8명을 포함한 기업인 35명은 집행유예와 무죄로 풀려났다. /YTN
[1975년] 영동선 완전 전철화 개통 동서를 관통하는 영동선 전철이 1975년 12월 5일 개통됐다. 철암-북평(61.8km)과 고한-증산(23.7km) 간 전철의 개통으로 산업선인 중앙, 태백, 영동선 320.8km 전구간이 완전전철화되어 무연탄, 시멘트, 철광석 등 각종화물의 신속한 수송에 크게 기여하게 됐다. 영동선은 1972년 12월 6일 내자 24억원과 외자 8백만 달러를 들여 산악지대의 난공사를 극복하고 3년 만에 완공됐다. 영동선의 개통으로 구걸리-북평간의 경우 급행열차는 운행시간이 종전 8시간에서 7시간 10분으로 50분이, 화물열차는 12시간 20분에서 9시간 10분으로 3시간 10분이 각각 단축됐다. 화물수송능력도 하루18회 운행에 연간 187만t이던 것이 28회에 372만t으로 증가, 연간 185만t을 더 수송했다. 철도청은 전국철도화물소송량의 40%를 감당하고 있는 이 선로에 24량의 전기기관차를 더 도입, 모두 90량을 운행했다. /조선
[1964년] 제1회 수출의 날 기념식 거행 (수출의 날 = 11월 30일) 상공부당국자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역사적인 순간이 다가왔다. 연말을 꼭 1개월 앞둔 (1964년) 11월 30일, 우리나라의 수출이 사상 최초로 1억 달러를 돌파한 것이다. 11월말 현재의 수출실적은 1억 139만 2천 달러. 12월 2일, 이 감격적인 순간의 발표는 김정렴 상공부차관이 맡았다. 박충훈장관은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에 앞서 11월 6일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서독에 파견됐기 때문이었다. 상공부는 12월 2일 장관담화를 통해 "수출실적이 1억 달러를 돌파함으로써, 우리가 염원하던 자립경제의 확립과 경제발전의 역사적 기점이 마련됐다"고 밝히고 제1회 수출의 날 기념식을 12월 5일 거행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드디어 12월 5일 제1회 수출의 날 기념식이 상공부 주최, 대한무역진흥공사 주관으로 시민회관(현재의 세종문화회관자리)에서 성대하게 베풀어졌다. 이날 기념식에서는 사상 두번째로 수출유공업체에 대한 대대적인 표창이 이루어졌다. 최초의 수출상사 표창은 58년 건국1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실시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매년 수출의 날을 맞아 유공자를 표창하고, 수출업계 종사자를 위한 잔치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수출의 날」 행사는 범국민적인 행사가 됐고 수출무드의 진작에 큰 힘이 되어갔다.
[1962년] 계엄령 해제 1962년 오늘!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전국에 내려졌던 계엄령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계엄령 해제는 12월 17일 실시될 대통령중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 국민투표를 앞두고 정국의 분위기를 완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비상계엄은 1961년 5월 16일 전국에 선포됐다. /YTN
[1936년] 소련, 스탈린헌법 채택
← 스탈린 옛 소련은 새로운 소비에트 연방헌법을 채택한다. 제8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채택된 이 헌법은 소련사회주의 체제의 성립과 스탈린의 권력장악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스탈린 헌법! 소련에서는 1918년과 1924년에 헌법이 만들어졌지만 사회주의 체제가 안정됨에 따라 새로운 헌법이 필요했다. 1924년 레닌 사망당시 트로츠키, 부하린 등과 권력투쟁을 벌인 스탈린! 특히 트로츠키는 영구혁명론을 주장한 박식한 혁명이론가로 스탈린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됐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스탈린에 의해 1929년 소련에서 추방 당했다. 부하린과 카메네프 등도 스탈린에게 숙청당해 스탈린은 도전받지 않는 지도자로 군림하게 됐다. /YTN
[1917년] 조각가 윤효중(尹孝重) 출생 [1917. 12. 5 ~ 1967. 10. 19] 조각가. 본관 파평(坡平). 호 불재(弗齋). 경기 장단 출생. 배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1년 도쿄미술학교 졸업 윤효중은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시대 선전을 통해 활동했고, 홍익미대에 조각과의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국전에서 오랜 기간 동안 심사위원 겸 추천작가로 활동했기 때문에 조각가로서보다 미술행정가로서의 명망이 더 높았던 조각가이다. 어떤 경우에 이런 세속적 명망이 조각세계를 이해하고 평가하는데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하는데, 윤효중 또한 다른 조각가들과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에는 기념조각에 전념한 사례가 월등히 많은 까닭에 이런 활동들이 오히려 그의 작품에 대한 섬세한 이해를 가로막는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조각작품이 한 조각가의 인생관이 반영된 물건이란 점을 주목할 때 작품 속에 그 작가의 세계관과 예술관이 총체적으로 녹아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을 만든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사회적 활동은 마땅히 주목되어야 할 것이긴 하지만, 때에 따라 그 작가의 사회적 행동방식과 작품의 내용이 서로 모순된 충돌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는데 윤효중이 이 사례에 해당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윤효중의 작품에 대한 지금까지의 평가를 보면 향토적 모티브에 밀착돼 있으면서 일본의 전통적 목조에 서양의 조각양식을 가미하려는 절충적 양식을 보여주거나 사회적으로 미술이라는 위치가 미약 했을 때 특히 같은 미술계에서도 조각이라는 분야가 지극히 왜소한 형편을 못 벗어나고 있을 때 윤효중같은 행동인의 출현은 뭇 사람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거나 그의 관심이 민속적이고 형식적인 것에 있으므로 해서 복고적인 취미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는 등 대체로 긍정과 부정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윤효중은 해방 이후 미술가들의 단체인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설립과정에서 친일파로 낙인찍혀 발기회원으로 참가하지 못했을 만큼 선전을 통해 조각가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보해 나갔으며, 1944년에는 '결전미술전'에서「아버지 영령에 빈다」라는 작품으로 경성일보사장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한국의 토속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현명」(1942년작)과 「물동이 인 여인」(1944년작)같은 작품을 제작하였던 것이다. 윤효중의 토속성에 대한 관심이 복고취향으로 머무는 한계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현명」을 보면, 이 작품이 일단 나무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석고나 청동으로 주조한 조각과는 다른 정서를 풍기고 있다는 점을 우선 주목하여야 한다. 재료가 제공하는 심리적 반응과 더불어 제작방식에 있어서도 특별한 기술을 요구하는 것이 목조이다. 나무를 깍는 과정에서 형태를 만들어간 것이긴 하나 이 작품은 전통 목조각이나 목공예의 질박함과는 거리가 먼 매우 세련된 기술과 서구적 비례를 보여준다. 즉 그의 작품은 외양에 있어서 한국적 인물을 보여주지만 표현방식에 있어서는 서구적인 것, 바를라흐의 작품이 인체의 단순한 처리와 극적인 운동감을 통해 긴장된 동세를 보여주고 있다면「현명」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여성의 동세를 통해 작품의 운동감을 고양시키고 있다. 물론 40년대에 윤효중이 독일 표현주의 조각을 보았다는 증거는 없으며, 따라서 운동하고 있는 인물의 동세를 목조로 표현했다는 점 외의 이 두 조각가를 연결시킬 수 있는 고리는 없다. 그러나 윤효중의 이 작품을 통해 인체조각에 비로소 극적인 동세가 표현될 수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특징은 인물이 단지 한복을 입고 있었다는 점에서 향토성이나 토속성을 드러낸다거나 복고취향을 자극한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비례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역동적인 운동감과 세련된 기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작가의 현실타협적이고 시대흐름에 영합하는 면모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작품은 한국근대조각사에서 기념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윤효중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토속성이란 전통적인 물건에 대한 재해석 이라는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인데, 1954년에 제작한「십자가」가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이 작품이 국전을 통해 발표되었을 때, 마침 전시를 관람한 한 카토릭 신부가 이것은 종교를 모독하는 행위라고 매우 격렬하게 비판하는 관람기를 발표했고 여기에 맞서 작가 또한 특정종교를 모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통의 창조적 해석의 결과라는 반론을 제기하여 해방이후 작품의 창작 및 수용과 관련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 논쟁은 조각의 다양한 표현가능성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윤효중이 장승이란 전통적인 샤머니즘의 우상을 직접적으로 차용하여 십자가와 결부시켜 놓았다는 것에서 발단이 되었다. 이 작품은 윤효중이 지금껏 보여준 세속적인 삶의 자세와는 다른 맥락에서 작가로서 그의 진보성을 보여주었다. 진보성이란 서구적인 맥락에서의 근대성의 획득이란 것과 다른 차원이다. 즉 서구적인 것을 근대의 모범으로 상정한다면 전통적인 것은 언제나 그것에 도달하지 못한 전근대적인 것으로 폄하하는 오류를 범하기 쉬우며 서구 추종을 진보로 오해하는 잘못된 도식에 사로잡히기 쉽다. 물론 그가 장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데 성공하진 않았다. 다만 당시 조각가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전통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고 그것에서 자신의 표현가능성을 찾고자 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1958년에 제작한「합창」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전통적인 토우에서 진부한 사실주의 조각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애를 돌이켜 볼 때, 그의 이러한 태도를 '민족적인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즉 그는 전통적인 물건을 단지 형식적으로 차용하거나 혹은 직역한 것에 불과했지 그것을 보다 심화된 차원에서 자신의 작업을 위해 연구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윤효중의 이러한 절충적인 상태의 어정쩡함과 자기모순이 근대기의 한국조각가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며 비단 윤효중에게만 두드러진 것은 아닐 것이다./우동희(카페 좋은 정보 올리기) 작품으로 <아침>, <현명(弦鳴)>, <피리 부는 사람>, <이충무공 동상>, <민충정공 동상> 등이 있다.
[1901년] 미국의 만화영화 제작자 디즈니(Disney, Walt, 1901~1966.12.15) 출생
시카고 출생. 19세 때 캔자스에서 친구와 종이 애니메이션 영화를 제작하여 파산한 후 1923년 할리우드로 나가 형 로이와 손잡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토끼와 오즈월드》 등의 시리즈를 만들었다. 그 뒤 《미키 마우스》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 《증기선 윌리호(號)》(1928)를 최초의 유성만화영화로 발표하여 크게 성공하였다. 이어서 《실리 심포니》 시리즈 가운데서는 최초의 3원색 테크닉 컬러에 의한 색채만화 《숲의 아침》(1932)으로 아카데미상(賞)을 획득, 이후 1930년대 만화영화 부문의 상을 독점했다. 이 시기에는 《미키의 도깨비 고양이 재판》(1935) 《미키의 시계방》(1937) 《언덕의 풍차》(1937) 《어린이의 꿈》(1938) 등 유머와 개그, 악몽의 공포, 자연의 횡포와 환상 넘치는 걸작이 많이 나왔고, 1937년 말에는 최초의 장편만화 《백설공주》를 완성하여, 흥행면으로도 크게 성공하였다. 이어서 《피노키오》(1938) 《판타지아》(1940) 《덤보》(1941) 《밤비》(1942) 등의 장편을 발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신데렐라 공주》(1950)로부터 《정글북》(1965)에 이르는 일련의 장편만화 이외에 《보물섬》(1950)으로 시작된 극영화와 《사막은 살아 있다》(1953) 등의 기록영화에서, 차차 동물실사(動物實寫) 필름에 의한 드라마 구성으로 옮겨 가고, 나아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진출하였다. 특히 《메리 포핀스》(1964)는 디즈니 생애 최고 성공작이었다. 1955년 대규모 유원지 ‘디즈니랜드’를 완성하였으며, 1964년 뉴욕 세계박람회에서 어트랙션을 담당하였다. /naver
[1901년]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Werner, 1901~1976.2.1) 출생
1901년 12월 5일 뷔르츠부르크에서 출생하였다. 뮌헨대학교와 괴팅겐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24년 코펜하겐대학교에서 N.보어의 지도 아래 원자구조론을 검토하였는데, 관측에 관계되는 양(量)을 출발점으로 한다는 견지에서 원자의 복사(輻射)를 직접 주는 전이진동(轉移振動)의 계산규칙을 문제로 하여 그 법칙을 만들었다. 이는 양자역학(量子力學)의 시초가 되는 일이었고(1925), 얼마 후 체계적인 이론이 정리되어 행렬역학(行列力學)이 이루어졌다. 1926년 코펜하겐대학교 강사를 거쳐 이듬해에 라이프치히대학교 교수가 되었는데, 그 해에 실증적인 입장에서 선 현미경의 사고실험(思考實驗)을 고찰하여 불확정성관계(不確定性關係)를 제창, 양자량에서의 관측문제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새로운 이론의 개념을 명확하게 하였다. 그 후 수소분자의 문제, 다체문제(多體問題), 강자성(强磁性)의 연구 등으로 나아가, 1929년 W.파울리와 함께 장(場)의 양자론을 발표하여 양자역학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1932년 원자핵 분야에서는 핵이 중성자와 양성자로 구성된다는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였다. 우주선(宇宙線) 분석에서 중요한 공헌을 하였으며, 장(場)의 양자론의 한계를 논하는 등 양자론의 진보에서 항상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불확정성원리의 연구와, 양자역학 창시의 업적으로 193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1941년 베를린대학 교수가 되었고,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장을 겸하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군에 의하여 한때 영국으로 보내지기도 하였다. 1949년 귀국하여 괴팅겐의 막스플랑크 연구소로 들어갔고, 후에 소장이 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강의를 한 후 1958년 귀국, 뮌헨대학 교수가 되었다. 후기 연구로는 플라스마물리학·열핵반응 등이 있으며, 1953년 비선형이론(非線型理論)은 소립자의 통일이론을 지향하는 야심적인 것으로 주목을 끌었다. /naver
[1870년] 프랑스의 극작가, 소설가 뒤마(Dumas, Alexandre,) 사망 1802. 7. 24 ~ 1870. 12. 5
Alexandre Dumas, père. 대(大)뒤마라고도 한다. 북프랑스 엔현(縣)의 빌레르 코트레 출생. 어려서 나폴레옹 1세 휘하의 장군이었던 아버지를 잃고, 파리에 가서 오를레앙공(公)의 필경직(筆耕職)을 지내면서 몇 편의 작품을 쓰는 동안, 사극 《앙리 3세와 그 궁정》(1829)이 대성공을 거두게 되어, 새로 일어난 로망파극(派劇)의 선구자 구실을 하였다. 1830년 7월혁명 때는 루이필리프를 지지하여 크게 활약했으며, 그 후로는 로맨틱한 대상이 풍부한 정열적인 주제를 솜씨 있게 구사한 작극법(作劇法)으로, 《앙토니 Antony》(1831) 《La Tour de Nesle》(1832) 《킹》(1836) 등을 상연하여, 분방한 상상력과 교묘한 작극술을 보여 줌으로써, 파리 극단의 인기를 휩쓸었다. 그 후 소설에도 손을 대어 통쾌한 검사(劍士) 이야기인 《삼총사》(1844)를 써서 대호평을 받았으며, 그 후편으로 《20년 후》(1845) 및 《브라질론 자작(철가면)》(1848)을 썼다. 그의 작품 수는 무려 250편이 넘었으며,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장면전환과 등장인물들의 활기찬 성격묘사 등 작가로서의 수완은 천부적인 것이었다. 그 중 특히 파란만장한 장편 모험소설 《몽테크리스토백작》(1844∼1845)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naver
[1443년] 로마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 1443~1513.2.21) 출생 델라 로베르가(家) 출신으로 원 이름은 줄리아노 델라로베레(Giuliano della Rovere).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로, 아비뇽의 대주교 ·추기경 등을 거쳐, 비오 3세의 짧은 재임 뒤에 교황이 되어 교회국가의 재건과 확대에 노력하였다. 베네치아로부터 영토를 빼앗기 위하여 1508년 프랑스 ·독일과 캉브레동맹을 맺고, 프랑스 루이 12세의 세력이 증대하자 베네치아 ·에스파냐 등과 신성동맹(神聖同盟)을 맺었다. 이 동맹이 성공하여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 세력은 쇠퇴하고 그 뒤로는 에스파냐의 세력이 증대되었다. 그는 정치 외에 학문 ·예술의 진흥 ·보호에도 힘써 로마를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특히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를 보호하고, 성베드로대성당을 재건한 것은 유명하다. /naver
그밖에 2000 탤런트 최진실과 프로야구선수 조성민 선수 결혼 2000 오페라 `영웅 이순신` 이탈리아에서 초연 1997 고려증권 영업 정지 1994 유럽안보협력회의, 헝가리 부다페스트서 개막 1993 라파엘 칼데라,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당선 1991 부시 미국 대통령, 국방부에 미사일방위체제 개발 위임하는 법안 서명 1988 강영훈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88 금리자유화 실시 1984 대만 이쿤 탄광에서 가스 폭발. 95명 사망 1983 금강 하구 둑공사 착공 1982 아랍연맹 사절단 중국방문 1981 루마니아에 동구권서 첫 반핵시위 1981 한국 최초의 TV 공익광고 방송 1980 바르샤바조약국 모스크바서 정상회담. 동맹국의 결속 강화 1970 소련 지식인 30여명, 제헌 34주년 맞아 침묵데모 1965 미국의 생리학자 조셉 얼랜저 사망 1961 주(駐)콩고 유엔군, 카탕카군과 충돌 1961 미국 새 대외원조기관(AID) 발족 1961 청계천 복개도로 개통 1957 국회 동성동본금혼안 통과 1957 소련, 최초의 원자력 쇄빙선(碎氷船) 레닌호 진수 1946 북한 북조선통신사(조선중앙통신사 전신) 설립 1945 군사영어학교 설치 1940 영국-터키 통상협정 조인 1930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 독일에서 개봉 1925 니카라과 독재자 데바일레 소모사 출생 1917 러시아-루마니아 휴전 1916 헝가리 지휘자 리히터 사망 1911 청(淸) 위안 스카이, 북경정부 전권 장악 1909 대한협회 등의 단체, 원각사에서 한일합방론을 통박 1876 미국 브루클린 극장 화재. 295명 사망 1867 폴란드의 초대 대통령 파우수트스키 출생 1820 페트 출생 진지하고 열정적인 서정시를 통해 후대의 러시아 시인들에게 영향을 미친 러시아의 시인·번역가 1803 튜체프 출생 매우 독창적인 철학적 시를 쓴 러시아의 시인이자 슬라브주의를 열렬히 옹호한 투사 1786 드러먼드 출생 가톨릭 사도교회 설립에 힘쓴 영국의 은행가·작가·의회의원 1782 밴 뷰런 출생 민주당을 세운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며 정치가로서 문제 해결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작은 마술가'로 알려져 있는 미국의 제8대 대통령 1661 옥스퍼드 출생 영국의 정치가 1539 소키누스 출생 반(反)삼위일체 학설로 소키누스 분파를 탄생시켰고, 후에 유니테리언 신학 발전에 영향을 끼친 신학자 1537 아시카가 요시아키 출생 일본의 마지막 무로마치 바쿠후 15대 쇼군 1377 건문제 출생 통치 기간에 내란을 거의 모두 진압하여 왕조의 기초를 새롭게 다진 중국 명조(明朝)의 제2대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