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돈 주세요." 흑돼지면 전부 토종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제주 흑돼지등등으로 널리 알려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흑도돼지의 원조는 지릿돼지다. 흑돼지의 인기가 높아지자 여기 저기서 흑돼지고기를 판다 그리고 '한돈(우리 토종 돼지를 의미하는 조사)'으로 판매가 된다.
정부 문서에도 한돈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으로 보아 한돈은 국산 돼지 또는 국산 돼지고기의 이름으로 공식화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기왕이면 국산 농수축산물을 먹자는 것이다.
한돈은 한우의 이미지를 돼지고기에 연결 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키우는 소가 한우이니 한국에서 키우는 돼지는 한돈이다' 라고하는 주장은 맞을까? 소고기는 젖소도 있고, 육우도 있다. 표기를 잘 못하면 법에 따라 처벌을 받는다. 반면에, 한돈은 돼지 품종을 따지지 않는다. 요크셔건 버크셔건 랜드레이스건 두록이건 한국에서 키우고 도축만 하면 한돈이다. 국산 돼지나 돼지고기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름만의 한돈은 엉뚱하게도 한우의 가치를 훼손할 수도 있다는 점을 축산인들은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한우가 토종 소인것 처럼 한국 토종 돼지를 흑돼지로 생각한다. 흰 돼지는 근대 이후 서양에서 온 품종이고, 흑돼지는 한반도에서 우리 조상이 오랫동안 키워왔던 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생각이 일부 맞기는 맞는다. 한반도의 토종 돼지는 흑돼지였다. 그러나 지금 흑돼지는 한반도 토종 흑돼지가 아니다.
"돼지는 대개 흑색으로 마른 것은 적으며 복부가 부풀어 늘어진 열등종인데 대개 사양되는 소와 마찬가지로 도처에 없는 곳이 없다. 그 수는 일본 이상이고, 매우 불결하다. 우리에서 사육되는 것이 보통인데 도로에 방양(放養)되는 일도 드물지 않다. 또한 드물게는 귀를 새끼줄로 매어 말뚝이나 나무 막대기에 매달기도 한다. 잔반, 겨, 간장 찌꺼기, 술지게미, 두부 찌꺼기, 채소 부스러기 등을 주어 기른다."(1905년 '조선토지농산조사보고')
제국이 식민지 경영에서 처음 하는 일은 식민지 자원에 대한 조사이다.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에서 무엇을 빼먹을 것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일제도 한반도의 자원에 대해 조사를 하였고, 그 기록이 '조선토지농산조사보고'에 남아 있다. 이 조사에서 그 당시 한반도의 토종 돼지는 흑색이며 복부가 부풀어 늘어진 열등종이라 하였다. 그다음으로 제국주의자가 하는 일은 우등한 자원은 확대 생산하게 하고 열등한 자원은 개량하는 것이다. 일제가 한반도의 가축 중에서 우등한 자원으로 꼽은 것은 딱 하나 소였다. 돼지는 개량 대상이었다.
"조선의 재래종 돼지를 사양하고 비육 시험을 실시한 바 마른 체구를 기름지게 살찌우는 특성이 모자라서 비육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려웠다. 그 결과는 도저히 육용 동물로서 경제상 가치가 없음이 증명되었다."(1907년 '권업모범장 보고')
일제는 한반도의 토종 돼지가 열등하여 경제적 가치가 없다고 보았다. 그 열등함을 1918~1919년 '권업모범장 보고'에 수치로 기록해 놓았는데, 2년을 키운 조선 돼지의 무게가 겨우 30~37.5㎏이다. 비교군인 만주 돼지에 비하면 4분의 1, 버크셔에 비해서는 6분의 1 크기이다. 이 정도이면 경제적 가치는 제로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식민지 한반도의 농업 생산성 증대를 위해 돼지 종자를 개량하였다. 일제강점기엔 버크셔와 버크셔 잡종, 만주 돼지, 버크셔·만주 잡종 등이 많았다.
지금의 흑돼지는 1970년대 이후 크게 번진 요크셔가 외래종이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풍기면서 반사적으로 검기만 하면 토종이라는 관념이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록을 보면 일제가 한반도에 퍼뜨린 주요 돼지 품종은 버크셔이다. 버크셔는 환경 적응 능력이 뛰어나고 고기가 맛있어 지구상에 널리 퍼져 있는 고품질 돼지이다. 버크셔의 특징은 몸통 털은 검으나 코와 네 발, 그리고 꼬리 끝에 하얀 털이 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키우는 흑돼지를 보면 대부분 이 흰 털이 사라졌다. 버크셔의 피를 가지고 있음에도 종자가 관리되지 않아 잡종이 된 것이다. 이런 버크셔 돼지를 '먹통'이라 한다. 맛도 버크셔 고유의 것을 기대하기가 어렵다.
현재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먹는 돼지 품종은 흰 돼지인 요크셔이다. 요크셔는 버크셔에 비해 그렇게 맛있는 돼지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사료 효율에서 요크셔만 한 돼지가 없다. 수입 사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실정을 생각하면 요크셔 나름의 미덕을 인정하여야 한다.
한국인은 국산 또는 토종이기만 하면 다들 맛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한반도 것이라 하여도 세계 여러 지역 것보다 열등할 수 있다. 한국 농수축산물을 수입 농수축산물로부터 지켜야 한다는 강박이 만들어놓은 '신토불이' 정신은 일부 긍정적 작용도 하였으나 과도한 민족주의를 부추겨 이성적 판단을 방해하고 있음도 이제는 고백할 필요가 있다.
국산이면 한돈, 검기만 하면 토종, 이런 분류 방식으로는 소비자가 자기 입맛에 맞는 돼지고기를 선택할 수 없다. 돼지고기 맛을 결정하는 첫째 요소는 품종이다. 요크셔는 살이 연하여 두툼한 고기의 요리에 어울린다. 버크셔는 육질이 단단하고 기름에 수분이 적어 얇게 썰어 요리하는 것이 좋다. '먹통'은 버크셔와 비슷한 맛은 있으나 관리된 품종이 아니라 한결같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