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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가는
<참된 회심>
구원의 마리 헬레나 지음
Ⅱ. 가면 쓴 자아
2. 내가 만든 가면 쓴 자아의 양상들
2) 표출되지 않는 것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표출하지 않고 속으로 가두어두는 것이다. 그래도 간접적으로는 표현이 된다. 우울, 의기소침, 슬픔 등으로 두더지처럼 지하 깊은 땅 밑으로 파고드는 경향이 있다. 이 우울을 두터운 장막처럼 둘러쓰고 있으면 아무리 은총이 쏟아져 내려도 그 사람 영혼 안에는 스며들지 않기에 모든 기도, 성사의 효험을 크게 체험하거나 맛보지 못한다. 기도를 아무리 해도 똑같이 우울하고 기도하나 안 하나 큰 차이를 못 느낀다. 이 우울을 우산처럼 덮어쓰고 있으니 은총의 단비가 밖으로 흘러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 우울 안에서 기도하지 말고 이 우울을 털어 내거나, 이 우산을 걷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단순히 나오면 된다. 바오로 사도 말씀대로 항상 기뻐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고 늘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단순하게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난 안 기쁜데, 왜 안기쁜가? 어둠의 영이 나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대로 하느님의 말씀이니까 기쁘게 지내려고 내 의지(뜻)가 마음먹으면 기뻐진다. 내가 나를 기쁘게 한 것인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나의 기뻐하려는 의지를 보고 성령께서 기쁨의 성령을 부어주시기 때문이다. 나중엔 정말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기쁨에 젖어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우울
자기 뜻대로 (자기가 세워둔 계획대로) 안 될 때, 즉 자기가 왕이나 공주가 되지 못할 때 우울해진다. 우울은 깊은 교만, 좌절된 분노에서 나온다. 하느님의 은총이 내려오는 창문에 덧문을 치고 커튼을 다 내리고 의지적으로 방을 캄캄하게 하듯 스스로 자기 영혼을 어둡고 침침하게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우울 안에도 간간 짭잘한 맛이 있어 그 맛을 즐기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저질스러운 맛을 즐기는 사람은 도대체 나올 생각을 안한다. 그걸 보면 그 맛이 그리 좋을까? 아니면 어떤 찐득이 -짭잘한 우울의 찐득이맛- 에 딱 붙어서 못 떨어질까? 이해는 가지 않지만 주위를 관찰해보면 가장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즐기는 것은 대체로 우울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외로움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리고 음란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인 것 같다. 어쩌면 자신을 그 영에 내어주고 초대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음란의 영은 이게 죄라고 알기에 밀어내려고 싸우기라도 하는데 우울과 외로움은 죄라고 느끼지 않기에 일없고 심심하면 그 속에 들어앉아 마치 안식을 누리는 것처럼 그 안에 들어가 앉아있다. 삼자의 눈엔 그 안에 들어앉아 방문 다 걸어두고 두문불출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물론 악의 영인데도 그게 악이라 말해준 적이 없기에 편안하게 들어앉아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울과 외로움은 고백성사의 대상에 오르지도 않는다. 죄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표출되는 것들은 더 더럽긴 하지만 악한 줄을 본인도 상대도 다 알기에 자신이 고쳐야 된다고 알고 있으므로 조만간 손을 쓰게 되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우울은 단순히 심리적인 병정도로 알고 있지 죄의 수준으로 보지 않기에 빨리 빠져 나오려 하지 않고 자살에 이르도록 방치해 두는 예가 많다. 그걸 보면 악의 속임수임이 뻔한데도 모두가 끌려가면서도 속수무책이다.
우울의 깊은 밑바닥을 보면 사람들이 혹은 세상이 '나'를 공주나 주인공으로 인정해주거나 알아주지도 않으니, 더이상 살 가치가 없다는 태도이다. 우울의 저변엔 대단한 교만의 뱀이 꽈리 틀고 있다. 왜 자신이 공주나 주인공으로 인정받고 대접 받아야 하는가를 생각해보지 않는 것 같다. 인정받고, 남보다 더 낫지 않으면 살 마음이 없다는 태도인데 다른 어떤 영보다 하느님을 떠나 있고 하느님을 바라볼 줄을 모른다.
우울이 우산처럼 하느님을 못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못 보기에 항상 인간적인 기준에서 비교평가한다. 그러다 남이 자신보다 낫거나, 실제로 자신이 더 나은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타인이 하거나 내가 있고 싶은 자리에 딴 사람이 있을 때 더 우울해지고 살맛이 없어진다. 모든 우울은 하느님을 바라보게 해주고 희망을 갖게 하면 끝난다. 신(信) 망(望) 애(愛) 향주삼덕은 악마의 유혹과 덫에 걸려 들지 않게 하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기쁨과 평화를 지니게 해준다.
성령쇄신 은사자와 치유은사 있으신 분에게 들은 바로는 그들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상당히 많은 우울증 환자들이 단순한 심리적인 병리현상이 아니라 악한 영의 영향에서 온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단순한 심리적인 치료만으로는 완쾌가 어렵다고 한다.
자기 스스로가 하느님이 되려는 (주인공이 되려는)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신을 볼 때 치유된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이 우울은 그럼에도 정화작용을 한다고 한다. 세상 모든 것에서 맛이 없어지고 세상의 온갖 좋다는 것이 무덤덤하기 때문에 세상 것에서의 이탈은 도움이 된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하느님을 바라볼 줄 알 때까지는 이 우울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 우울이 심각한 죄가 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빛과 성령의 은총이 스며들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다. 자신이 이런 우울함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으면 미리 주님께 기도하여 이 우울을 걷어가 주시라 간청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우울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 받아들이지 말고 안 따라가면 된다.
그리스도 신자는 어떤 역경 속에서도 생기와 희망을 잃지 않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우울은 생기와 희망을 다 앗아가고 미래에 어떤 좋은 것도 희망도 없는 것처럼 좌절과 절망으로 이끈다. 이것만 보아도 이 우울의 영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또 그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안다면 처음에 이 우울이 시작할 때부터 가지 쳐내듯 쳐내버리고 안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 우울의 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 자기 우울 안에 갇혀서 기도하지 말고 자기 우울을 떠나 예수님 품에 달려들어, 예수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아니면 성모님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성모님 치마폭에 감싸여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이것이 자아 이탈이다. 감히 어떻게? 라고 생각될지 모르나 예수님은 다른 사람보다 더 그들을 마음 아파하시고 품어주시려 기다리고 계신다. 스스로 자기 뜻에 의해 달아났으니 스스로 자기 발로 찾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 갈 힘이 없다면 아기가 엄마! 엄마! 하고 부르듯, 예수님! 예수님! 을 불러보라. 꼭 와 주신다. 부르기만 하면 지체치 않고 오셔서 그 우울에서 빼내주신다.
우울 안으로 들어갈 때는 내 스스로 내 발로 찾아 들어갔지만 나올 때는 혼자 못나올 때가 많다. 너무 깊이 들어가 깊은 물에 빠진 것처럼 헤엄을 쳐도 물가가 나오지 않아 다시 우울에 잠기려 할 때 예수님을 불러 도움을 청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다투거나, 이혼한 가정에서 자랄 경우 자라온 배경이 우울한 분위기여서 자연스럽게 이 우울이 자신의 기본 리듬이 될 수도 있다.
자라온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그 우울 속에 저항감 없이 머무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안타깝게 안쓰럽게 여기고 당신 사랑의 품에 더욱 품어주시려 기다리고 계신다. 내가 익숙해서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이 우울의 끝이 무엇인지 절망과 자살, 삶의 무의미 등임을 깨닫고 지금은 상황이 변했으니 옛날 어릴 때의 우울을 지금도 둘러쓰고 있으려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가진 것을 다 봉헌하라고 하시는 데 내가 지닌 유일한 유산이 우울이라면 태내에서 받았든, 유년시절에 받았든 이 우울을 주님께 선물로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최대의 선물을 받으신 것으로 간주하신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하셨는데 우울한 사람에게 있어 “자기"는 우울이기에 자기를 버리는 것이 우울을 버리는 것이다.
우울이지만 막상 버리려면 친숙하게 함께 살아왔기에 정이 들어서 아니면 한 몸이 되어서 힘이 드는 것이다. 다 버리고 나면 허전해져서 처음 버린 순간에는 (가면 쓴 자아 편에서 볼 때는) 그 우울이라도 붙잡고 함께 사는 것이 낫다고 여겨질 정도이다. 그래서 다시 붙들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면 쓴 자아는 우울이라도 덮어 쓰는 것이 아무것도 안 걸치고 있는 것보다 낫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가면을 떼내는 것이 죽음이고 희생이고 십자가로 느껴진다. 그러나 십자가 지시고 옷 벗김 당하신 예수님과 깊이 일치하여 우울을 벗고 허전해진 마음을 온전히 주님과 일치시키자 마자 새로운 빛의 옷이 입혀짐을 체험하게 된다.
이 때 영혼은 이 우울이라는 자기 감옥에 갇혀 있다가 자아에서 해방이 어떤 것인지 맛보고 체험한다.
영혼이 이 자유와 기쁨을 느끼는 것을 깨달으면 어떠한 쓰레기를 버리고 이런 귀중한 것과 맞바꿨는지 알고 놀라게 된다. 주님은 '다 바치라' 하시는데 그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다. 자기가 만들어 가졌던 쓰레기들을 다 바치고 나면 투명하고 맑은 영혼이 된다는 것을… 그러면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의 그 맑은 영혼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시면서 처음에 꿈꾸었던, 인간이 하느님과 똑같게 되는 계획을 이 맑게 된 영혼 안에서 실현해 가신다.
슬픔
이 슬픔 역시 어렸을 때의 상실감의 상처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일찍 부모를 여의었다던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충격에서 아직도 못 벗어나고 있을 때 슬픈 감정이 일어난다. 슬픔의 원인이 된 것을 찾아내어 지나간 것일지라도 주님께 다 봉헌하고 맡길 때 치유되고 해방된다.
거의 50세가 된 한 수녀님의 이야기다.
자신이 일이 없거나 한가하면 슬픔 안에 자신이 잠기는 것을 보고 의식이 되면 빠져 나오려 얘기하고 떠들고 하는데 왜 자기는 일이 없거나 좀 여유가 있는 시간이면 슬퍼질까?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그런데 어느날 내적 치유 은사를 받은 수녀님의 말씀이 엄마를 잃은 슬픔의 상처에서 아직 회복이 안 된것 같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3살 때 엄마를 잃고 그땐 울지도 못했던 기억이 나고 상황판단을 못할 나이니까 한쪽에 가서 뭘 먹고 있었던 기억이 있기에 자신이 엄마를 잃은 슬픔을 지니고 있다고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울지도 못했던 슬픔이 차라리 울었더라면 슬픔이 표출 되었을 텐데 마음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가 조용하면 올라오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왜 슬픈지 슬퍼하는 이유를 깨달아 기쁘다고 했다. 어쨌든 이런 슬픔이 어디서 오던 간에 슬픔을 봉헌한 뒤 기쁨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원인을 알면 더 이상 그 슬픔에 사로잡히지 않게 된다. 만일 슬픔이 오면 이유야 어쨌든 안 따라 가면 된다.
의기소침과 침체
자기가 원하는 바가 거꾸로 갈때 가면 쓴 자아는 더 이상 하느님께 기대할 줄을 모르기에 시무룩해지고 풀이 꺾인다. 특히 자기가 만든 자아만 믿고 살던 사람일수록 하던 일이 순조롭게 돌아가지 않을 때 맥이 빠지고 의기소침해진다.
자기가 지닌 힘으로는 그 상황을 바꾸거나 해결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하느님을 믿고 신뢰했던 사람이라면 똑같은 상황이 될 때 더 주님께 달아들어 기도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다. 이런 것에서 더 큰 선을 꺼내실 줄을 잘 알고 있고 지금은 이유를 모르지만 끝내는 잘되리라 확신하고 있기에 현재의 불 리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아무 까닭 없이 갑자기 의기소침해질 수도 있는데 악의 직접적인 유혹이나 공격일 수도 있다. 이런 때는 잠깐 성찰 한 뒤 그럴만한 사유가 발견되지 않으면 (사실 사유가 있어도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 감정을 받아들여 따라가지 말고 즐거운 성가를 하거나 애덕을 하거나 기쁘고 즐거운 일 건전한 일을 찾아서 하면 어느 틈에 벗어나게 된다. 의기소침과 침체의 악한 영도 뭔가 끌어당기는 힘과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 그 안에 잠기고 싶고 머물고 싶은 데 이것이 유혹이다. 이 어둠 안에 머물고 싶은 그 이끌림(유혹)을 끊는 것이 중요하다. 그 끝은 실망과 좌절이기 때문이다. 슬프고 침체되어 있는 가냘픈 소녀에게 이끌려 사랑과 연민을 느끼는 것은 자신에게도 같은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끝은 불행한 결혼으로 끝날 수가 있다.
원망
자신이 잘못해서 유혹에 빠져서, 함정에 빠지거나 곤경에 처하게 된 것을 나중에는 이웃이나 예수님이 자신을 그 상태에 두었다고 예수님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이다. 이 원망의 영은 모든 것을 남의 탓하고,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고치려 하는 대신 원망과 불평하느라 시간을 낭비한다.
어떤 때는 자신이 곤경에 처한 것에 대해 정말 자기 잘못이 안 보일 때도 있을 것이나 만일 마음 안에서 원망이나 불평이 올라오면 이건 악한 영이 나에게 예수님을 탓하고 원망하라 불어넣는 것임을 감지하고 거기에 귀 기울이거나 따라가서 남을 원망하거나 하느님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 만일 암시를 따라서 그렇게 하기 시작하면 악의 세력이 그 사람 안에 점점 커져서 자신을 불행에서 건져줄 하느님께 가는 길을 딱 가로막고 서서 하느님과 등지게 하기 때문에 점점 절망과 자포자기로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악은 어떻든 인간을 불행하게 하고 하느님께 영광 되는 것을 막기에 그 속임수에 넘어가면 불행해진다. 전에도 말했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뜻)를 선물로 주셨기에, 우리가 악을 선택하면 그 사람이 불행할 것을 알기에 고통스러워 하신 다. 그 사람 뒤를 뒤따라가시며 돌아와서 도와 달라 하기를 (자유의지로 하느님께 도움 청하기를 기다리며 지켜보고 그림자처럼 뒤쫓고 계신다.
그러다 '주님 도와 주십시오' 하자마자 주님은 개입하신다. 이것이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신 하느님의 고충이고 또한 인간의 고충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하면 그 공로는 우리게 돌리신다.
-다음에 계속
(참된 회심/ 구원의 마리 헬레나 지음/ 기쁜소식) 93~97p
도서 구입처: 가톨릭출판사 (catholicbook.kr)
첫댓글 + 하느님 뜻 안에서
'자기 뜻대로 (자기가 세워둔 계획대로) 안 될 때, 즉 자기가 왕이나 공주가 되지 못할 때 우울해진다.'
하느님 뜻 영성을 알게 이끌어주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 뜻 영성으로 자신을 비우는 작업과 '저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느님은 모든 것이옵니다.' 라는 기도를 드리면서 자신의 뜻을 버리는 작업을 하고 있으니 우을해질 일이 없는, 하느님 뜻 영성을 많은 사람들이 알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사랑과 흠숭, 찬미와 감사, 기쁨과 모든 영광을 이제와 영원히 드리게 되기를 봉헌합니다
하느님 뜻 안에서 복되신 어머니의 특별한 축복을 건네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