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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역사문화 탐방
유물과 유적들로 가득 차 있는 섬, 지붕없는 역사박물관
강화도는 고려 때부터 대 항몽전 등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 사건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는 등 숱한 국난을 겪은 역사의 현장이며 보고이다. 강화는 한때 약 39년간 나라의 수도역할을 담당하기도 했고, 단군왕검의 역사적 신화가 깃들인 참성단 등 숱한 유물과 유적들로 가득차 있는 곳이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오층석탑과 강화동종, 정수사 법당, 전등사 대웅전, 전등사 약사전, 전등사 범종, 석조여래입상,철아미타불좌상 등 보물이 있으며, 국가지정 사적으로는 삼랑성, 강화산성, 고려궁지, 참성단, 지석묘, 홍릉,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 선원사지, 갑곶돈대,석릉, 가릉, 곤릉, 성공회 강화성당, 강화성 등이 있다. 강화는 왕족과 귀족들의 유배지로도 유명하다. 고려시대 8명, 조선시대 14명 등 22명의 왕족들이 유배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고구려시대 혈구로 불렸던 강화는 신라 경덕왕 때 해구군으로 개칭되었고, 고려전기 강화로 이름이 바꾸었다. 고려 고종은 몽골과의 항전 때 1232년(고종 19) 몽골침입을 당해 강화를 수도로 삼은 뒤 군으로 승격시키고 강도(江都)로 이름지었다. 1895년 강화군으로 개칭되었고, 1915년 교동면과 통합되었다. 1973년 강화면에서 읍으로 승격하였고, 1995년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이처럼 강화도는 섬 전체에 역사의 흔적이 가득하다. 가히 지붕없는 박물관이라 할만하다.
강화읍 관청리에 가면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조선 철종(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처하였던 잠저(潛邸)가 있다. 강화유수 철종 4년(1853)에 지금과 같은 건물을 짓고 용흥궁(龍興宮)이라 하였다. 좁은 골목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두고 있어 창덕궁 낙선재와 같이 소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궁 안에는 철종 잠저임을 기록한 비석과 비각이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이다.
용흥군 바로 위에는 1900년에 축성한 성공회 강화성당이 있다. 성공회(聖公會, The Anglican Domain)는 1890년 9월 조선에 처음 전파되었는데, 강화에는 1893년 봄에 코프(C.J.Corfe)주교가 갑곶에 거점을 마련하면서부터이다.
그후 같은 해 7월 워너(L.O.Warner)신부가 파송되어 본격적으로 강화에서 성공회 선교가 시작되었다. 현재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이 성당은 1900년 트롤로프(M.N.Trollope)주교가 설계, 감독하여 건축한 것이다.
당시 건축공사는 궁궐 도편수가 주도하였고 이후 몇차례 보수가 있었으나 처음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성당터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배의 형상을 따랐다. 성당 건물은 장방형(넓이 4칸, 길이 10칸) 중층구조로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한국전통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배치와 내부구조는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정신을 드러나게 하였다.
성공회 성당에서 조금 내려오면 김상용 순절비(金尙容 殉節碑)가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묘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했으나 청군이 이곳마저 함락하자 남문루 위에 화약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순국한 김상용 선생의 위국충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정조 때 유수(留守)로 부임한 공의 7대손 김매순이 건립한 순절비이다.
이곳에서 다시 우측 큰길로 조금만 올라가면 강화고려궁지(江華高麗宮址)가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 궁궐이 있던 곳이다.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여 1232년(고려 고종 19)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로 옮긴 후 이곳에 궁궐을 건립하고 39년간 사용하였으나 몽골과 화친하여 1270년 환도할 때 몽골의 요구로 궁궐과 성곽 등을 모두 파괴하였다.
그후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왕이 행차시 머무는 행궁을 건립하였고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 장녕전, 만년전 등도 건립하였으나 이 또한 병자호란과 병인양요 때 대부분 소실되었다.
1964년 이곳은 사적 제 133호 '고려궁지'로 지정되었고,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보수 정비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조선시대 유수부 동헌과 이방청, 외규장각(2003년 복원), 강화동종 등만 남아 있다.
강화유수부 동헌(江華留守府 東軒)은 조선시대 강화의 행정책임자인 유수가 업무를 보던 중심건물이다.
1638년(인조 16) 유수 김신국이 수리하였고, 1769년(영조 45)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顯允觀)이라 하였다.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현판은 영조 때 명필인 백하 윤순(尹淳)이 쓴 것이다. 건물구조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단층집으로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정비되었다.
강화유수뷰 동헌 좌후면에 있는 외규장각(外奎章閣)은 여러차례의 전란으로 강화도가 보장지처(保障之處)로 크게 주목받게 되고 국왕과 왕실 기록물의 중요성이 강조됨에 따라 1782년(정조 6)에 건립되었다. 왕립 도서관 역할
을 하였으며, 왕실과 국가 주요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 등의 서적과 왕실물품을 보관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외규장각과 여러 건물들을 파괴하고 서적을 약탈하였다. 1995년부터 2001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2003년에 건물을 복원하였다. 현재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외규장각 아래쪽에 있는 강화동종(江華銅鐘)은 강화유수 윤지완이 주조한 것을 그 후 1711년(숙종 37) 유수 민진원이 정족산성에서 현재와 같은 형태로 다시 주조한 것이다. 높이 198cm, 입지름 138cm로 조선후기 동종으로는 큰 규모이다. 몸통 중앙에는 굵은 줄이 둘러있고, 그 아래에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이 새겨져 있다. 성문(城門)을 열고 닫는 시간을 알리는 데 사용되었다.
종각(鐘閣)은 당시의 강화산성 남문 주변인 김상용 순절비 자리에 있었던 것을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 때 고려궁지로 이전되었다.1999년 10월 종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타종하지 못하게 되자 강화동종을 복제하여 설치하고, 원래의 종은 강화역사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강화읍 국화리에 가면 사적 제224호인 '고려 고종 홍릉(高麗考宗 洪陵)'이 있다. 이곳은 고려 제23대 고종(1192-1259)의 능이다.
고종이 즉위할 당시에는 최충헌이 세력을 잡고 있었는데 고종 6년(1219)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우가 뒤를 이어 정권을 잡으며 왕은 제 구실을 못하다가 고종 45년(1258)에 유경, 김준 등이 외(우의 손자)를 죽이자 왕에게 대권이 돌아왔다. 왕이 제위시에 북방의 민족들이 침입하여 그 어려움이 컸었는데 고종 3년(1216)에는 거란족이 쳐들어와 김취려, 조충 등이 이를 격파하였다. 그 후 고종 18년(1231) 몽고족이 쳐들어오자 다음 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이곳을 강도(江都)라 하고 몽고족에 대항하였다.
몽고병의 침입으로 대구 부인사에 있던 대장경관이 불타 버리자 고종 23년(1236)부터 고종 38년(1251) 사이에 강화도에서 대장경을 조판하니 이것이 오늘날 합천 해인사에 보존된 8만대장경으로 민족문화의 대표적인 자랑거리이다. 고종은 몽고군의 계속된 침입을 막아내면서 강화를 이룩하려고 고종 46년(1259) 태자 전(뒤에 즉위하여 원종이 됨)을 몽고에 보낸 후 그해에 승하, 개경에 옮기지못하고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
내가면 외포리 해변가에는 적의 해상침입을 감시하고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진지인 '망양돈대(望洋墩臺)'가 있다. 이는 조선 숙종 5년(1679)에 강화유수 윤이제가 경상도 군위 어영군사 4,300명과 황해도, 함경도, 강원도 승군 8,000명을 동원하여 쌓았던 여러 돈대 가운데 하나로 정포보(井浦堡) 관할하에 있었다. 높이 3m, 폭 25m, 둘레 120m에 이르는 원형돈대로서 대포를 올려놓는 포좌 4문, 치첩 40개소가 있었다. 돈대 윗 부분에는 여장(女墻)을 돌린 흔적이 있으나 현재는 무너지고 남아있지 않다.
망양돈대 아래에는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1270년 6월 1일, 삼별초군이 몽고에 대항하여 고려를 지키고자 궐기한 근거지이다.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등 삼별초군은 몽고군에 결사항전, 전라도 진도, 제주도까지 쫒긴 후 끝내 제주도에서 패하였다.
양도면 하밀리 도로변을 지나다 보면 양명학의 사상적 체계를 세운 정제두(정제두(鄭齊斗)의 묘가 보인다.
하곡(霞谷) 정제두(1649-1736) 선생은 조선 영조 때의 학자로 18세기 초 강화도로 옮겨 살면서 양명학 연구와 제자양성에 힘써 일명 '강화학파'라 불리는 하나의 학파를 이루었다. 현종 9년(1668) 별시문과 초시에 급제했으나 정국의 혼란을 통탄하여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나 뒤에 지식과 행동의 통일을 주장하는 양명학(陽明學)을 연구 발전시켜 최초로 사상적 체계를 세웠다. 묘비는 순조 3년(1803)에 세운 것이다.
강화도에 가면 길상면 온수리에 있는 전등사 방문을 빼놓을 수 없다.
전등사 입구에 이르면 우선 삼랑성(三郞城)을 만나게 된다.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보강되었다. 성안에는 전등사는 물론 고려시대에는 가궐(假闕), 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다. 병인양요 때(1866)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 족보인 '선원보'를 지켰다. 1976년에 남문인 종해루를 원형대로 복원했다.
삼랑성문을 지나 전등사로 가는 숲길 중간 우측을 보면 마치 어린이놀이터의 놀이기구처럼 보이는 회전대가 있는데 일명 '윤장대(輪藏臺)'라 부른다.
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전등사 윤장대는 보물 제684호를 똑같이 재현한 것이다. 윤장대를 세운 이유는 부처님 법이 사방에 널리 포지라는 의미와 우리나라에 지세를 고르게 해 난리가 없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풍년이 들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달라는 염원이 들어 있다.
이곳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 약 1600년전 아도화상이 최초로 창건한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고찰로서, 사적 제130호인 삼랑성(2,944m)으로 둘러쌓여 있다.
경내에는 보물 제178호 대웅보전, 보물 제179호 약사전, 보물 제393호 범종, 유형문화재 제26호 양헌수장군 승전비, 향토유적 제11호 정족산가궐지, 향토유적 제12호 선원보각지 등이 있으며, 특히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사고지(史庫址)가 있고, 팔만대장경 일부인 '묘법연화경', 고려충렬왕비 정화공주가 부처님전에 불을 밝힌 옥등 1점, 청동수기 1점, 약수등이 있으며, 전설이 있는 나녀상, 열지않는 은행나무, 울나무, 고령의 나무들이 많다.
전등사 대웅전은 조선 광해군 13년(1621)에 다시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로,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인 공포가 기둥 위 뿐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기둥은 가운데 부분을 둥글게 처리하여 안정감을 주었으며, 네 모서리
기둥 뒷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것은 절을 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 것으로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 위해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천장은 용, 극락조, 연꽃 등으로 화려하게 채색하였고, 부처를 모신 불단과 당집의 장식 또한 화려하다.
전등사 범종은 중국 송나라 때(1097) 회주 숭명사(崇明寺)에서 무쇠로 만든 중국종이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병기를 만들려고 부평 병기장에 갖다놓은 것을 광복 후에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종의 정상부에는 두 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종고리가 있으며, 종의 정사각형 안에는 중국 하남성 벽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 철종 4년(1097)에 주조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약사전 뒤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조선왕조실록 보관장소인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가 있다.
임진왜란(1592) 전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는 내사고(內史庫)인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등 3개의 외사고(外史庫)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 화를 면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후 임진왜란의 병화를 피한 전주사고본이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로 옮겨져 선조 39년(1606) 4월 복인(復印)작업을 완료하고 전주사고본인 원본은 마니산사고에, 나머지 4부는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사고에 이안(移安)되었다.
마니산 사고는 병자호란의 피해와 효종 4년(1653) 11월 사각(史閣)의 실화사건으로 삼랑성 내 정족산 사고가 건립되어 이안(移安), 봉안되어 왔으나, 1918년 일제에 의해 국토가 강점되면서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 및 규장각의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후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정족산사고는 1931년 전후에 파손되어 빈터에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을 1999년 강화문화권 사업으로 복원정비되었다.
선원면 연리에는 현대문학의 생생한 현장을 직접 볼 수 있는 육필문학관도 있다. 노희정 시인이 운영하고 있는 육필문학관에는 유명문인들의 자필원고와 글, 문학서적 1만여권, 세계각국의 소품 등을 전시하고 있다. 관장인 노희정 시인은 '거리시화전'을 주관하던 고 임찬일 시인에게서 물려받은 40여점의 육필 시화액자와 자신이 직접 유명문인들로부터 받은 육필원고를 보관해 오다 5년전 외가가 있는 강화도에서 육필문학관을 개관했다고 한다.
육필문학관은 본관 건물, 사인당이라고 이름붙인 정자, 야외 잔디마당 등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건물 뒤는 산, 앞은 강화들판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어 경관도 매우 좋다. 1층 본관 전시방에는 서정주의 '난초', 조병화의 '나의 자화상', 김춘수의 '꽃' 등 육필원고와, 이생진, 박희진, 성찬경, 김명인 시인 등 현존하는 유명시인들의 육필원고가 수백점 전시돼 있다. 악필이어서 절대 남에게 자필을 남기지않는다는 수필가 피천득 선생은 '노희정 시인에게'라는 짤막한 글을 적어 노희정 관장에게 선물했는데 그 피천득 선생의 육필도 구경할 수 있다. 박범신, 조정래, 이어령,이호철 씨 등이 쓴 '서로 아끼고 나누며', '목소리 하늘에 닿고'라는 좋은 글귀도 음미할 수 있다. 노 관장은 해외여행을 통해 모았던 향토민속품 200여점도 현관입구에 전시해 놓고 있다.
1층 본관 전시방 옆에는 '시예랑'이란 이름의 제법 넓고 아담한 카페형 방이 있는데 이곳에는 노관장이 모아놓은 각종 문학도서와 함께 시낭송회, 문학강연 등 각종 행사를 할 수 있는 무대도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매월 셋째주 토요일 오후 6시에 정기 시낭송회가 열린다. 또, 2층 다락방에서는 자연을 보면서 시를 짓도록 하는 어린이 대상의 '동시교실'도 수시로 열린다. 5명 이상이 예약을 하면 노관장의 강의를 들은 뒤 자작시를 낭송하는 프로그램이다. 지난 5월 23일에는 이곳 육필문학관에서 '전국 백일장'도 개최한 바 있다.
잔디마당에는 황진이, 허난설헌, 홍랑, 신사임당, 매창 등 조선시대 여류 문학가 5명의 대표 작품을 돌에 새긴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글,사진/임윤식)
*위 글은 2009.5.30에 쓴 필자의 여행기를 일부 수정하여 다시 올린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