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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징비록(懲毖錄)』
『징비록』은 류성룡(柳成龍)*이 몸소 겪은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시경(詩經)에 ‘내 지난 잘못을 경계(懲)하여 뒷근심이 없도록 삼가(毖)노라’했으니 이것이 『징비록』을 지은 까닭이다. 나 같이 못난 사람이 난리가 나고 국경의 질서가 무너져 어지러운 때 국가의 중한 책임을 맡아 위태로운 판국을 바로 잡지도 못하고, 넘어지는 형세를 붙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 시골구석에 살아남아서 구차하게 생명을 연장하고 있으니, 이는 임금의 너그러운 은혜가 아니겠는가!”했다. - 『징비록』서문 중에서
*류성룡(1542~1607) : 조선의 정치가ㆍ학자.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16세에 향시에 급제하고, 퇴계 이황 문하에서 공부했다. 25세 때 문과 급제해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되어 당쟁과 전란 속 군무를 총괄했으며, 이순신과 권율을 천거했다. 국방안보 체제확립을 위해 훈련도감을 설치해 군비를 강화하고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정유재란 이듬해인 1598년 삭탈관직 되어 낙향했으나 2년 후 복권되었고,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저술에 몰두했다. 사후에 병산서원을 비롯한 여러 서원에 위패가 모셔졌다. 《징비록(懲毖錄)》,《서애집(西厓集)》,《영모록(永慕錄)》,《운암잡기(雲巖雜記)》등 저서를 남겼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4분 5열 되어 전란이 계속되던 일본을 통일한 뒤에 ‘조선을 넘어 명나라를 칠 것이니, 조선은 길을 빌려줄 것과 통신사를 보내 우호를 쌓자’고 여러 번 전해왔으나 이것을 무시하던 조선은 임란 2년 전, 대마도주 ‘쇼 요시토시’와 승려 ‘겐소’가 국서를 갖고 오자, 예조판서인 유성룡이 이들을 맞아 연회를 베풀었고, 이들은 대궐에서 임금에게 술잔을 올리기도 했으나, 통신사 파견문제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던 중, 대제학(정2품,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부서)에 오른 류성룡이 임금께 “이 일을 서둘러 결정하셔서 두 나라 사이에 공연한 분쟁을 만들지 않도록 하시옵소서”하고 청했다.
그들에게 보답하고 또 그들의 동정도 살필 겸 통신사를 파견키로 하고 1590년(선조 23) 3월에 통신사 일행이 소 요시토시 등과 일본으로 떠났다. 통신사 파견에 대한 보답으로 소 요시토시는 공작 두 마리와 조총, 창, 칼 등을 바쳤는데 공작은 남양 앞바다에 놓아주고, 조총은 군기사(軍器寺-군무를 관장하던 관아)로 보냈는데, 처음 조총을 접한 것이다. 통신사 일행은 일본에 체류 중 왜 수도에 있던 큰 사찰에 머물렀고, 히데요시가 여러 핑계를 대며 만나 주지 않아 국서를 전달하지 못하다가 5개월 만에 국서를 전하고 돌아왔다.
일본 왕으로 국서를 전해왔던 히데요시는 왕이 아니라 ‘관백’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관백’혹은‘박륙후’라고 불린 이것은 ‘모든 정사를 먼저 곽광에게 보고한 뒤에 천자에게 아뢴다’는 《한서》〈곽광전〉에서 따온 호칭이다. 통신사 일행이 만난 히데요시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낯빛이 검고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른 특이한 데는 없었으나, 다만 눈빛만은 번쩍번쩍하여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쏘아보는 것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히데요시는 통신사 상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에게 은 400냥씩을 선물하고, 서장관과 역관에게도 등급에 따라 은을 선물했다. 일행이 지나는 곳에 여러 왜인들이 나와 선물을 주었지만, 김성일은 그것을 모두 받지 않았다. 일행이 부산포에 도착하자 황윤길은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일본의 정세를 시급히 조정에 보고했다. 그러나 조정에 들어와서 김성일은 “신은 그러한 일이 일어날 징조를 보지 못했습니다.”고 하자, 황윤길이 “인심을 동요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이때 조정신하들도 둘로 나뉘었다.
김성일은 일본 정세를 잘못 보거나 잘못 판단한 것일까?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그대의 말은 황윤길의 말과 다른데, 만일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김성일이 “저 역시 어찌 왜적이 끝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하겠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지나쳐 조정 안팎이 놀라고 당황할 것이므로 그 점을 우려해 그리 말했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통신사 일행이 가져온 왜의 답서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을 뛰어넘어 명나라로 쳐들어가겠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이런 내용을 명나라에 알리느냐, 마느냐를 두고도 한동안 논란이 있었고, 결국 명나라에 알렸다.
왜가 침략할 것이라는 여론이 높아지자 조정에서는 전국의 성을 보수하고 경상도 등 삼도에 장수들을 이동 배치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했으나 충분치는 못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성들은 모두 넓고 클 뿐 제 기능을 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진주성만 하더라도 본래 험한 지형을 이용해 만든 성이었기 때문에 쉽게 방어할 수 있었으나, 성이 작다고 하여 동쪽에 있는 평지로 옮겨 쌓았고, 후에 왜적이 쳐들어올 때 성을 지키지 못했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라고 류성룡은 회고했다.
이순신은 ‘조산 만호’(함경북도 마을지명-종4품 군직)를 지낼 때 공적이 많았음에도 추천하는 이가 없어 무과에 오른 지 10여 년 동안을 변방을 돌다 겨우 정읍현감이 되어 있었는데, 왜적이 쳐들어올 것이라는 소식에 임금이 비변사(군무를 총괄하던 관아)에 명하여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추천하라고 하여 내가 그를 천거했고, 드디어 정읍현감에서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자 갑작스런 승진에 의아해하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 조정의 무장 중에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신립과 이일, 경상우병사 조대곤 등이었는데 병조판서 홍여순은 나이 많은 조대곤 대신에 이일을 경상우병사로 보내자는 유성룡의 건의에 “뛰어난 장수는 마땅히 한양을 지키게 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이런 논란에 대해 임금은 지켜보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1592년 봄에 이일을 충청도·전라도로, 신립을 경기도·황해도로 보내어 지방의 수비태세를 점검하도록 했으며, 4월 초하루에 신립이 지방순시를 마치고 돌아와 임금께 보고한 뒤에 류성룡을 찾아왔다. 유성룡이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나면 공이 마땅히 군사를 맡아야 할 것이오. 공의 생각에는 오늘날 적의 군사력이 어떻다고 보시오?”하고 묻자, 신립은 매우 가볍게 여기고 대답하기를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류성룡이 “그렇지 않소. 예전에는 왜적이 칼과 창만 믿고 있었지만, 지금은 조총과 같은 좋은 무기도 있으니 가벼이 볼 수는 없을 것이오”라고 하자, 신립은 거침없이 “조총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쏠 때마다 다 맞힐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1591년 여름에 소 요시토시가 또 부산포에 와서 그곳 장수들에게 “일본은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자 하는데, 조선이 뜻을 명나라에 전한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나 그렇지 않다면 두 나라의 우호 관계는 장차 깨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중대한 일이기 때문에 미리 와서 알리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장수들이 그것을 조정에 알렸으나, 조정의 여론은 왜국에 통신사를 파견한 것이 잘못이었다고 하고 그들의 무례함을 탓할 뿐으로, 소 요시토시는 열흘 넘게 배에 머물다 불쾌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그 뒤로는 왜인들이 들어오지 않았고, 부산포와 왜관에 머물던 왜인들도 차츰 제나라로 들아가 왜관이 텅 비게 되자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4월 13일, 왜적의 군함이 대마도로부터 새까맣게 바다를 덮고 몰려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부산 첨사 정발이 절영도에 사냥 나갔다가 그 광경을 보고 허둥지둥 돌아왔으나 왜적은 이미 상륙해 사방에서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삽시간에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달아났고, 서평포와 다대포가 함락되고 다대포 첨사 윤흥신은 싸우다 전사했다. 경상좌병사 이각은 소식을 듣고 당황하여 소산역(선두구동에 있던 역참)으로 물러나 진을 쳤으며, 동래부사 송상현이 자신과 남아서 성을 지키자고 했으나 이각은 듣지 않았다.
4월 15일 왜적은 동래성으로 다가왔고, 송상현이 남문에 올라 반나절 동안 군사를 지휘했으나 성은 함락되었다. 송상현은 꿋꿋하게 앉은 채 적의 칼에 죽었다. 왜인들도 그의 정신을 높이 사 시체를 관에 넣어 성밖에 묻고 표지를 세워주었다. 동래성이 무너지자 다른 고을들은 풍문만 듣고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양산이 함락되고, 밀양부사 박진은 작원에서 버텨보려고 했으나 산 위에서 개미 떼처럼 밀려오는 왜적을 보고 창고의 병기와 곡식을 불태우고는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이각은 병영으로 돌아와 첩을 먼저 피란시켰으며 성안의 민심이 흉흉해지고 군사들은 하룻밤 사이에 몇 번이나 술렁거렸다. 이각은 결국 새벽에 도망쳤고, 군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4월 17일 이른 아침, 다급한 상황을 알리는 보고가 처음 조정에 도착했다. 경상좌수사 박홍이 올린 장계였다. 대신들이 비변사에 모여 임금께 뵙기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잠시 후 부산포가 함락되었다는 박홍의 장계가 또 들어왔는데 “부산포는 적에게 포위되어 통행할 수 없으므로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붉은 깃발이 성안에 가득했고, 그것을 보고 성이 함락된 줄 알았습니다.”라고 했다.
이일에게 군사를 뽑아 경상도로 가게 했으나 사흘이 지나도록 군사를 모으지 못하자 이일을 먼저 가게하고, 별장 유옥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뒤따라가도록 했다. 류성룡은 병조판서 홍여순은 임무를 다할 수 없으며 또 군사들이 원망이 많으니 바꾸어야 한다고 임금께 아뢰었고, 그를 대신하여 김응남이 병조판사가 되고 심충겸이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정승 중에 체찰사(군무를 총괄하는 임시 벼슬)를 임명해 보내라는 왕명에 따라 영의정 이산해가 류성룡을 추천하자, 류성룡은 김용남을 부체찰사로 임명해 달라고 청했고, 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혀 있던 의주목사 김여물 등을 데려갈 것을 청해 비장이 될 만한 사람 80명을 얻었으나 “계속 위급하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왜군이 조령 아래까지 다가왔다는 소식을 듣고, 류성룡이 김용남과 신립에게 “적이 이미 깊이 쳐들어왔으니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소.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소?”하고 묻자, 신립은 “이일이 전방에 나가 있으나 그를 지원할 후속 부대가 없습니다. 비록 체찰사께서 내려가시더라도 직접 싸우는 장수는 아니십니다. 먼저 용맹한 장수를 내려가게 해서 이일을 지원할 계책을 마련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김성일이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어 임지로 가던 도중, 상주에 이르러 적군이 이미 국경을 침범했다는 말을 들었다. 김성일은 곧바로 밤낮으로 달려 본영으로 갔고, 도중에 전임자 조대곤을 만나 인절(인장과 부절)을 교환했다. 적군은 김해를 함락하고, 경상우도의 여러 고을을 노략질하고 있었다. 김성일이 나아가서 적군과 만나니 부하 장수와 군사들이 달아나려고 했다. 이 광경을 본 김성일이 말에서 내려 호상(승마용 걸상)에 걸터앉아 군관 이종인을 불러 “너는 용사이니 적을 보고 먼저 물러서서는 안 될 것이다”고 했다. 이때 적군 한 명이 쇠로 만든 탈을 쓰고 칼을 휘두르며 뛰어나오자 이종인이 말을 달려나가서 화살 하나를 쏘아 죽이니 적들이 뒤로 물러나 달아나고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김성일은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으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적을 견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임금께서 김성일이 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왜적이 쉽게 올 것 같지 않다’고 말해 인심을 해이하게 하고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하여 의금부 도사를 보내 잡아 오도록 명했으므로 장차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김성일이 체포되어 직산에 이를 무렵, 김성일이 경상도 백성들과 군사들의 신임을 얻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임금이 그의 죄를 용서하고 경상우도 초유사(난리 때에 백성을 타이르고 경계하던 임시 벼슬)로 삼아 적을 토벌하도록 했다. 이때 유승인은 공로가 컸으므로 등급을 뛰어 넘어 군수에서 병마절도사가 되었고, 첨지 김륵은 경상좌도 안집사(백성을 안심시키는 임시 벼슬)로 삼았다. 김륵은 영천 사람으로 양산 황산공원에는 ‘황산강’이라는 그의 시비가 있다.
『징비록』을 읽다 보면 배운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하지만, 언제나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안타까움은 남는다. “문경 남쪽 10여 리 경상우도와 좌도의 경계에 ‘고모성’이라는 고성이 있다. 주변의 지형은 두 산골짜기가 마치 가운데를 잘라 묶은 듯하고 골짜기 가운데로는 큰 시내가 굽이쳐 흐르며, 길은 산성 아래로 골짜기를 따라 뚫려 있는 곳이다. 적은 이곳을 지키는 군사가 있을까 두려워 두 번, 세 번 탐지해본 뒤에 수비병이 없음을 알고, 노래 부르고 춤 추면서 이곳을 지나갔다고 한다”여기를 미리 막고 대비했더라면 적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 때문에 그렇다.
4월 30일 새벽에 임금이 서쪽을 향해 피난 길에 오르셨다. 전날 밤 신립을 모시던 군관 3명이 숭인문으로 들어와 “어제 도순변사께서는 충주에서 패전하여 전사하시고, 우리 아군이 크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임금께서 근신들을 모아 피난 문제를 의논했는데, 장령 권협이 끝까지 한양을 지켜야 한다고 큰소리로 외치자, 좌상이던 류성룡이 “군신간 예의가 있으니 아무리 위급해도 조금 물러나서 장계로서 아뢰시오”라고 하자, 권협은 “그러면 좌상께서는 한양을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까?”라고 했다. 류성룡은 임금에게 “권협의 말은 매우 충성스럽지만 사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왕자들을 여러 도로 보내 군사를 모집하도록 하고 세자는 임금을 모시고 함께 가도록 하시지요”라고 해 임금이 받아들였다.
“어가 행렬이 경복궁 앞을 지나가는데 갈가의 민가에서는 사람들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숭문원(외교문서를 맡아보던 관아) 서원(書員) 이수겸이 내 말고삐를 잡고 “숭문원 안에 있는 문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하여, “내가 그 가운데 특별히 중요한 것만 챙겨서 뒤쫓아 오라고 하자, 이수겸은 울면서 떠났다”돈의문을 나와 사현(모화관 - 독립문 근처)에 이르니 동쪽 하늘이 점점 밝아왔다. 사현을 넘어 석교에 이르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경기 감사 권장이 뒤따라 와 호종했다. 백제(고양 동쪽)에 이르니 비가 더욱 심해져서 옷이 모두 젖었다. 해음령(고양 북쪽)을 지날 무렵에 비가 쏟아붓듯이 내리니 물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큰 소리로 울면서 따라갔다.
마산역(파주 남쪽)을 지나는데, 들에 있던 사람들이 행차를 바라보고 통곡하며 “나라가 우리를 버리고 떠나니 우리들은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하고 울었다. 임진강에 이를 때까지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임진강을 건너니 해가 지고 어둑어둑하여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임진강 남쪽 기슭에 옛날에 세운 승청(나루터를 관리하는 청사)이 있었는데, 적군이 이르면 이를 헐어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너올까 염려된다며 불사르라고 임금이 영의정과 나를 불러 명했다”
5월 초하룻날 아침에 임금께서는 대신들을 부르시고 “남쪽에 내려가 있는 순찰사 중에 나라를 위해 기꺼이 힘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가? 라고 물으셨다. 날이 어두워 임금께서 수레에 올라 개성으로 향하여 떠나려 하셨는데 아전들과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할 사람이 없었다. 마침 황해감사 조인득과 서흥 부사 남억이 도착하여, 군사들과 말 오륙십 필을 가져와 같이 길을 떠날 수 있었다. 떠날 때 사약(대전의 열쇠를 관리하던 정6품 잡직) 최언중이 “궁중 사람들이 어제도 먹지 못하고, 오늘도 먹지 못했으니 좁쌀이라도 구해서 시장기를 면해야만 떠날 수 있겠습니다”고 말해 남억의 군사들이 가지고 있던 쌀과 좁쌀을 섞어 밥을 지었다.
개성에 이르러 임금께서 남문 밖 공서(公署)에 거쳐 하셨다. 대간들이 글을 번갈아 올려 영의정 이산해가 당파를 만들어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탄핵하여 파직을 주장했으나, 임금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다음날도 또 글을 올려 영의정의 파직을 청하자, 이산해를 파직시키고 좌의정 유성룡을 영의정으로 승진시켰다. 최홍원을 좌의정, 윤두수를 우의정으로 삼았으며, 함경북도 병사 신할은 해임되었다.
낮에 임금께서 개성 남성 문루에 올라 백성들을 위무했는데, 한 사람이 “청컨대 정정승(정철)을 불러들이십시오”라고 했다. 정철은 이때 평안도 강계로 귀양 가 있었다. 임금이 청철을 불러 행제소로 오도록 명했고, 저녁때 임금이 행궁으로 돌아오셔서 나랏일을 그르쳤다는 죄로 유성룡을 영의정에서 파면시키고, 유홍을 우의정으로, 최홍원과 윤두수를 영의정과 좌의정에 올렸다. 이때까지 적군이 한양에 오지 않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두 한양을 버리고 떠난 것은 실수였다고 나무랐다. 승지 신잡을 한양으로 보내 형세를 살피게 했다.
5월 3일 적군이 한양에 들어오니, 유도대장 이양원과 원수 김명원이 모두 달아났다. 도원수 김명원은 제천정(한강 북쪽의 정자)에 있다가 적군이 오는 것을 보고 감히 나가 싸우지 못하고, 병기와 화포와 기계(器械)를 모두 강물에 집어넣고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도망치려 했다. 종사관 심유정이 완강하게 말렸으나 김명원은 듣지 않았다. 이양원은 성안에 있다가 한강을 수비하던 부대가 이미 흩어져 달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을 지키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역시 양주로 달아났다.
5월 4일 임금께서 홍의·금암·평상부를 지나, 보산역(평산부 북쪽20리에 있는 역)에 머물렀다. 5월 6일 황주에 머물고, 7일에는 중화군을 지나 평양에 들어갔다. “나는 비록 파직되어 하는 일이 없었지만, 감히 뒤떨어질 수 없어서 함께 따라갔다”
신각은 김명원을 따라 부원수가 되었으나, 한강 싸움에서 패한 후, 김명원을 따라가지 않고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갔다. 그때 함경남도 병사 이흔의 부대가 도착하면서 신각은 함경도 군사들과 힘을 합쳐 적군 60여 명을 베어 죽였다. 적은 민가를 노략질하다가 신각과 맞닥뜨렸는데 신각이 크게 승리한 것이다. 왜군과 싸움에서 처음으로 거둔 승리여서 소식을 듣고 모두들 기뻐했다. 그런데 김명원이 임진강에서 ‘신각은 지휘에 복종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다른 곳으로 떠났습니다’라고 장계를 올렸고, 영의정 유홍은 그가 군율을 어겼다 하여 사형에 처하도록 임금께 청해 선전관을 보내 목 베게 했다. 선전관이 떠나고 신각이 이겼다는 보고가 올라왔으므로 사람을 보내 사형집행을 중지시켰으나 사자가 도착하기 전에 신각은 목 베이고 말았다. - 이런 드라마 같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6월 11일 견고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평양성마저 버리고 임금께서 평양을 떠나 영변으로 갔다. 최홍원, 유홍, 정철이 뒤따랐다. 좌의정 윤두수, 원수 김명원, 순찰사 이원익은 평양에 남아서 지키도록 했다. 류성룡도 명나라 장수가 오면 대접하기 위해 남았다. 이날 왜군이 평양성을 공격했다. 허나 대동강 모래사장에서 허세를 부리고 칼을 번쩍이기도 했으나 강을 건너오지는 않았다. 적이 연광정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장수인 줄 알고 조총을 쏘아 두 사람을 맞혔다. 그러나 거리가 멀어 심한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임금이 의주에 도착하고 평양성이 함락되었는데 ‘그 형세가 마치 높은 곳에서 병을 세워 물을 쏟아붓는 것과 같아서 아침이 아니면 저녁에 압록강까지 쳐들어올 것이라 여겼다’고 한다. 사정이 위급하므로 명나라에 합병할 궁리까지 했다는데, 그것은 류성룡의 생각인지, 조정 중론이었는지 설명하지는 않았다. 7월에 명나라 요동의 부총병 조승훈이 군사 5천을 거느니고 구원하러 왔다. 7월 19일 조승훈이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후퇴했는데, 이 전투에서 명나라 선봉대장 유격장군 사유가 전사했다.
조승훈은 이날 삼경 순안에서 군사를 출발시켜 평양성을 쳤다. 마침 큰 비가 와서 성을 수비하는 적군이 보이지 않으므로 명나라 군사는 북문인 칠성문으로 들어갔다. 성안은 길이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이 많아 말이 제대로 달릴 수 없었고, 적병이 험준한 곳에 의지해 조총을 난사해 사유가 총탄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숨졌으며, 많은 군사와 말이 죽음을 당했다. 조승훈은 결국 군사를 후퇴시키고 말았다.
조승훈은 후퇴하고도 “우리 군사가 오늘 싸움에서 적병을 많이 죽이기는 했으나, 불행히 사유가 상처를 입고 죽었으며, 게다가 날씨 또한 좋지 않아 진흙투성이가 되어 적군을 섬멸하지 못했으나 군사를 더 보충하여 다시 올 것이다. 너희 재상(류성룡)에게 동요하지 말도록 이르고, 부교도 또한 철거하지 말도록 하라고 전하라”고 통역관에게 말했다 한다. 조승훈이 공강정(청천강과 대정강 사이 정자)에 머문 이틀 동안에도 밤낮 큰비가 내렸는데 군사들은 들 가운데 노숙하고 있었으므로 옷과 갑옷이 젖어 모두 조승훈을 원망했으며, 얼마 후에 요동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이순신에 대하여는 이 책 『징비록』의 저자 류성룡이 추천했으니 우호적으로 기술했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그를 감안하더라도 임진왜란의 영웅이자 구국의 영웅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순신과 관련된 이야기 중에서 처음 듣는 것들을 옮긴다.
처음에 원균은 적의 형세가 큰 것을 보고 감히 나가 치지 못하고 전선 백여 척과 화포, 병기 등을 모조리 바닷속에 가라앉힌 다음, 비장 이영남과 이운룡 등을 데리고 배 네 척에 나누어 타고 곤양으로 달아나 적을 피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수군 1만여 명이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이에 이영남이 “공은 임금의 명을 받아 수군절도사가 되었는데, 지금 군사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게 되면 후일 조정에서 죄를 물을 때 무슨 말로 해명하겠습니까? 전라도 수군을 구원병으로 청하여 한번 싸운 다음 이기지 못하거든 그때 도망치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고 했다. 원균도 옳다고 생각해 이영남을 전라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에게 보내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각자가 맡은 경계가 있으니 조정의 명령이 아니고서는 마음대로 경계를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하고 응하지 않았다. 대여섯 차례 지원요청에 이순신이 판옥선 40여 척을 거느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거제로 왔다. 견내량에서 왜적을 만난 이순신은 “이곳은 목이 좁고 물이 얕아서 배를 돌리기 어렵겠으나, 우리가 거짓으로 물러가는 체하여 적을 유인하고 넓은 곳으로 나가 싸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고 했다. 그러나 원균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바로 나가 싸우자고 했다.
이순신이 만류한 뒤에 자신이 끌고 온 배를 모두 물러나게 했다. 그러자 적은 크게 기뻐하며 앞다투어 따라왔는데, 이미 좁은 목을 다 나올 즈음 이순신이 북을 쳐 배들이 노를 돌려 정면으로 적의 배와 맞부딪치니 적선과 수십 보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아군의 배가 합세하여 대포를 쏘니, 적은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배는 부수어졌다. 왜군은 도망쳐 간 뒤로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어느 때 이순신이 싸움을 지휘하던 중에 날아온 탄환이 왼쪽 어깨에 맞아 피가 팔꿈치까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는 말하지 않다가 싸움이 끝난 후에야 비로소 칼로 살을 도려내고 탄환을 뽑아냈다. 보는 사람이 얼굴빛이 새파랗게 변했으나, 이순신은 웃으며 이야기하는 것이 평상시와 같이 태연했다고 한다.
수전에서 승리했다는 보고에 이순신의 품계를 1품으로 올려주라고 했으나 너무 지나친 승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 정2품 정헌대부로 올려주고, 이억기와 원균은 종2품 가선대부에 올랐다.
이 무렵 평양에 진주해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 우리 조정에 보낸 편지를 보면 왜 수군이 서쪽 바다로 진격해 육군과 만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순신의 이 한 번의 승리로 적의 계획은 차질이 생겼고, 우리는 전라, 충청, 황해, 평안도 연안 지역을 연결하는 해안선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군량 보급은 물론 조정의 명령이 전달되고 명나라의 지원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금강산 표훈사에 있던 유정이 승병을 모집하며 평양에 왔을 때는 승군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12월에 이여송을 대장으로 하는 명군 4만여 명이 안주에 도착했다. 이때 이여송과 류성룡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내가 만남을 청했더니 제독이 동헌에 앉아서 들어오라 했다. 의자에 마주 앉은 후, 나는 소매 속에서 평양 지도를 꺼내놓고 지세와 군사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가리켜 보였다. 제독은 귀를 기울여 내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내가 가리키는 곳마다 붉은색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나를 보고는 ‘왜병들이 믿고 있는 것은 다만 조총뿐인데, 우리는 대포를 쓰고 있으니 대포는 모두 5∼6리 정도를 날아갑니다. 왜적들이 어찌 당하겠습니까?’라고 했다.
내가 물러 나오자 제독은 부채 앞면에 시 한 편을 써서 나에게 보내왔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삼한의 국사가 불안하기에
군병을 이끌고 밤길도 쉼 없이 강을 건너왔다오
황제님은 날마다 승전 소식기다리시고
하찮은 이 신하는 술잔도 그만두었다오
봄이 와도 살벌한 가운데 마음은 오히려 장렬해 가나니
요사한 왜적들 뼈가 이미 서늘하리
농담인들 어찌 승산 아닌 것을 말하리오
꿈속에도 항상 싸움터로 말을 달린다오
이튿날 벌어진 평양성 전투에서 명나라 군사는 보통문으로 공격해 들어가고 이일과 김응서 등은 함구문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적이 평양에서 도주한 사실은 그 이튿날 아침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여송은 우리 군사가 경비하여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적군이 도망쳐 가도 몰랐다고 허물을 우리에게 돌렸다.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자 전에 순안을 왕래하면서 이빈과 서로 친한 사람이 ‘이일은 장수가 될 만한 자격이 없으며, 이빈이 적임자입니다’라고 했고, 제독이 우리 조정에 이 내용을 공문으로 보내왔다. 평양에 내려온 좌의정 윤두수는 이일의 죄를 심문하고 군법에 따라 참형을 시행하려고 했으나 얼마 후 석방했다. 그리고 이일을 대신해 이빈에게 기병 3천을 주어 제독을 따라 남쪽으로 가도록 했다.
왜적이 쳐들어온 지 1년이 지난 4월 20일 명군과 함께 우리 군사들이 한양으로 돌아왔다 (임금은 이듬해 10월에야 도성으로 돌아왔다). 이때 성안에는 죽은 사람과 말들의 시체가 곳곳에 그대로 더러 나 있고 썩은 냄새와 더러움이 가득 찼기 때문에 사람들이 코를 막고 지나갔다. “나는 종묘에 나아가 통곡한 뒤에 제독의 처소로 가서 문안드리고 ‘적병이 물러갔으나 아직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원컨대 군사를 출동시켜 급히 추격하도록 하십시오’라고 하자, 제독도 ‘나의 생각도 진실로 그러하나, 한강에 배가 없기 때문에 추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내가 ‘만약 대인께서 적군을 추격하고자 하신다면 제가 먼저 강가에 나가서 배를 정비하도록 하겠습니다’고 하자 제독은 ‘매우 좋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한강으로 나갔다”
그러나 이여송은 적군을 추격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거짓말로 승낙했을 뿐이었다. 5월이 되어서 이여송은 적병을 추격하여 문경까지 갔으나 되돌아왔다. 이때는 이미 적이 한양을 떠나간 지 수십 일이 지난 때였다. 적은 천천히 남쪽으로 내려갔다. 쉬엄쉬엄 느리게 떠나갔는데, 연도에 있던 우리 군사들은 모두 길 좌우에서 자취를 감추어 숨었고, 나와서 싸우려는 자가 없었다. 적군은 남쪽 해안지방에 주둔했다.
1593년 6월 28일에 있은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군사와 백성 6만 명 이상이 죽도록 치열하게 싸웠으나,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는 많이 그리고 잘 알려져 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고향의 강’인 기강과 관련한 이야기를 살펴본다. “처음 조정에서는 적군이 남쪽으로 내려간다는 말을 듣고 잇따라 교지를 내려 여러 장수들을 독려해 적군을 추격하도록 했는데,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권율 이하의 관군·의병들이 모두 의령에 모였다. 권율은 행주성 싸움의 승리로 지나치게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터라 당장 기강*을 건너 전진하고자 했으나 곽재우와 고언백이 “적군의 형세가 한창 올라가고 있는데, 우리 군사는 오합지졸로 싸울만한 사람은 적을 뿐만 아니라, 앞길에는 군량도 없으니 경솔히 전진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기강 : 남강 하류로 낙동강과 접해 있다. 의령,창녕,함안을 잇는 나루터가 있었고, ‘거룬강’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빈의 종사관인 성호선은 여러 장수들이 머뭇거린다고 책망했다. 그러면서 권율과 의논이 맞아 마침내 기강을 건너 함안에 이르렀다. 그러나 성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군사들이 풋감을 따서 먹을 지경에 이르렀고, 다시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 이튿날 첩자가 적이 김해에서 크게 몰려 온다고 보고했다. 사람들은 함안을 지켜야 한다느니 혹은 의령 정암진을 지켜야 한다느니 하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진주성이 함락됐다.
이순신의 백의종군, 울돌목 전투에 대해서도 생략한다. 영화 ‘명랑’에서 자세히 설명했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내려온 고니시 유키나가는 순천예교에 성을 쌓고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았다. 명나라 유정이 많은 군사로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 대장 진린과 함께 바다를 제압하고 적을 위협했다. 고니시는 사천에 주둔하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에 구원을 요청했는데, 시마즈가 구원하러 오던 배 200여 척을 이순신이 크게 쳐부수고 적을 뒤쫓아 남해 바다까지 갔다.
남해 노량에서 화살과 탄환이 쏟아지는 가운데 이순신은 싸움을 지휘하다 적의 탄환을 맞았으며, 탄환은 가슴을 뚫고 등 뒤로 나갔다. 곁에 있던 부하들이 장막 안으로 옮겼는데,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 치열하니 절대로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한 뒤 숨을 거두었다. 조카인 완이 숙부의 죽음을 숨긴 채 이순신의 명이라 하여 싸움을 더욱 독려하니 군중에서는 이순신이 전사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나중에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전해들은 진린은 땅바닥에 몸을 던지면서 “나는 노야(이순신)께서 살아 있는 몸으로 오셔서 나를 구해준 줄 알았는데 어찌하여 돌아가셨습니까?”라고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그 모습을 본 군사들이 통곡해 울음소리가 바다를 진동시켰다.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의정부 우의정으로 증직했다. 군무가 바닷가에 사당을 세워 충혼을 기려야 한다고 제안했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그러자 바닷가의 백성들이 뜻을 모아 사당을 세웠다. 그것을 민충사(愍忠寺)라고 부르며 해마다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또한 사당 앞을 지나는 상인들과 어부들도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전쟁의 판도는 일정한 형세가 없으며, 전투에는 일정한 방법이 없다. 시기에 따라 알맞은 전법을 구사해 때로는 나아가고, 때로는 물러가며,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해야 한다. 그것은 장수의 능력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때문에 온갖 말과 계획도 소용이 없으며 오직 뛰어난 장수를 얻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조조가 말한 세 가지 요소*가 더해진다면 다른 것들이 필요가 있겠는가!
*조조의 세 가지 요소 1) 유리한 지형, 2) 기강확립, 3) 좋은 무기
무릇 국가에서는 평소에 훌륭한 장수를 선발해 두었다가 사변이 생기면 활용해야 한다. 따라서 장수를 선발할 때는 마땅히 꼼꼼해야 하고, 임무를 맡길 때에는 빈틈이 없어야 한다. 경상도의 방어를 맡은 수군 장수는 박홍과 원균이었고, 육군 장수는 이각과 조대근이었다. 그들은 애당초 장수가 될 만한 인재가 아니었다. 사변이 일어나 순변사·방어사·조방장 등이 내려가 보니 모두 조정에서 저마다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각기 마음대로 결단했고, 군사들을 제멋대로 통솔해 작전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여러 사람이 주관하면 패전하다’는 금기사항을 어기고 말았으니 일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어째서 앞 수레가 엎어졌는데 고치지도 않고 오히려 엎어진 수레바퀴 자국을 따르고 있단 말인가! 그러고도 무사하기를 바란다면 요행을 바라는 것일 뿐이다”-『징비록』「녹후집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