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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ea - 엘리트 글쓰기 논술 교실 원문보기 글쓴이: 김동석
양자택일에서 양자병립의 시대로
도구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와 자연과의 관계에서 있어서도 마찬가집니다. 서양의 자아,나라고 하는 그 개인주의에 토대를 둔 문화는 모두가 그렇게 단절의 양상을 보여줍니다. 짐승들을 보십시오! 특히 인간과 가장 친한 짐승인 개와 고양이를 보십시오! 같은 집에서 키우는 애완 동물인데도 개와 고양이는 전혀 성격이 다른 앙숙입니다. 그런데 개 발바닥에는 털이 없는데, 고양이 발바닥에는 털이 있어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세요? 개들은 집단적으로 사냥을 하니까 발자국소리를 죽일 필요가 없어요. 일부러 짖으면서 공격의 정보를 발신하지요. 그런데 고양이는 혼자서 사냥을 하기 때문에 살금살금 가서 덮쳐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발바닥에는 개와 달리 털이 있어요.
개는 팀워크로 먹이를 잡고, 고양이는 개인 플레이로 먹이 감을 구합니다. 일본과 미국이 싸웠던 2차대전의 전쟁은 꼭 개와 고양이의 싸움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미국사람들은 개인주의 문화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잠수함 (U보트)의 영웅들을 많이 배출했다고 합니다. 케네디 대통령도 U보트 함장이었어요. 몇 사람이 해저에 들어가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적의 수송선을 포착해서 격침시켜야 합니다. 집단이 아니라 완전히 고양이의 전략이지요. 그런데 일본 군인들은 일제히 ‘와!’ 소리를 지르면서 쳐들어가는 돌격전에서 전과를 올렸습니다. 사냥개가 먹이를 몰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고독하게 혼자 망을 보며 외롭게 싸우는 개인전에서는 미국을 당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먹이가 된 동물 쪽에서 생각해 봅시다. 육식동물은 눈이 자동차 헤드라이트처럼 전방에 붙어 있습니다. 먹이 한 마리를 찍어 그것만을 쫓아가야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토끼와 사슴은 눈이 귀밑에, 그러니까 자동차로 비교하면 헤드라이트가 아니라 백 미러 쪽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전후 사방을 다 봐야 도망을 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해요. 공격하는 놈은 외골수로, 그러나 도망치는 놈은 사통팔달 어디로나 도망칩니다. 21세기는 공격형, 외길형이 아니에요. 히틀러․레닌 등이 외골수의 독재자들이었다면, 민주주의의 지도자는 파라노이아(Paranoia, 편집증)형과는 달리 스키조프레니어(Schizophrenia, 정신분열증)형이어야 합니다. 중앙집권에서 지방분권으로, 권력은 집중형에서 분산형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정치만이 아닙니다, 산업주의에서 성공을 한 사람들은 우물을 파도 한 우물만을 파는 전문성 그리고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들면 한 마리 토끼도 얻지 못한다는 속담을 진리로 삼아왔습니다. 하지만 멀티미디어나 정보 네트워크 사회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복합적이고 하이브리드(Hybrid, 혼성)의 기술, 다른 말로 하자면 평범한 기술의 특별한 결합으로 발상을 바꾸는 사람이 성공을 합니다.
산업사회에서는 일본사람들이 강했지요! 일본 사람들은 일을 할 때 외골수로 합니다. 꿀벌형입니다. 그러나 한국사람이 일하는 것은 나비형으로 이리저리 춤을 추며 날아다니다가 어느 꽃 한 송이에 앉았다가는 다시 날아오르곤 합니다. 한국말에도 쉬엄쉬엄 일한다는 표현이 있지요.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이 잘 구분이 안 가요. 그러니까 단시간으로 보면 일본사람이 이기는 것 같은데, 장기적으로 하는 것을 보면 쉬엄쉬엄 일하는 쪽이 이기는 경우도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한국사람들은 뽕도 따고 님도 봐야 일하지, 뽕만 따거나 혹은 임만 보는 형이 아닙니다. 정보사회의 일들에는 오락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교육도 오락성을 지녀야 한다고 해서 교육과 오락이라는 말을 합쳐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컴퓨터에는 놀이, 게임이 들어 있습니다. 컴퓨터야말로 뽕도 따고 임도 보는 기계입니다. 산업주의 시대의 기계에는 오락적 요소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철저하게 없애는 데서 시작되어 있습니다. 능률의 기능만을 위해서 고안 된 것이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어떤 공산품에도 디자인이나 색깔이 좋아야 소비자들이 삽니다. 기능만이 아니라 마음에 호소하는 오락성․미학성이 있어야 합니다.
결론을 내자면, 한국문화의 패러다임을 산업주의 패러다임에서 읽지 말고 정보사회의 패러다임으로 읽으면, 지금까지 한국에 대하여 마이너스로 보였던 단점들이 오히려 새로운 문명(文明)의 자원으로 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광수(李光洙) 씨는 개화기(開化期) 때 ‘민족개조론’을 썼지만, 여러분들은 민족성을 어떻게 창조적인 것으로 적용시켜가느냐로 그 시점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지금까지 나빴다고 생각하는 것, 말하자면 모든 면에서 일본․미국에 뒤졌다고 생각하는 것, 그런 것을 정보화시대에 잘 살렸을 때는 엄청난 힘을 가져 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의 반도체(半導體)의 수율은 80 퍼센트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른바 정성이 부족하고 손이 거칠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본사람들은 대단히 집단주의적이고 원칙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반도체 수율이 90%이상을 못 넘긴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여성 근로자들이 만들어내는 반도체는 정성과 융통성과 그리고 끈기가 있어서 100%에 가까운 수율로 세계 제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낡은 패러다임으로 생각하면 한국사람들에게 눈치가, 눈치가 있으면 절간에 가서도 새우젓 먹는다고 하는, 그 눈치가 나쁜 것으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눈치는 수신 지향적 정보문화의 마인드로서 소비자에게 감동을 일으키는 미래 산업과 그 사회에서는 아주 귀중한 보배가 되는 것입니다. 반도체는 조금만 기분이 나빠도, 조금만 정신을 팔아도, 금세 불합격품이 많이 나오거든요. 팀장은 눈치로누가 지금 컨디션이 안 좋은가?누가 생리중인가?를 감으로 찍고, 작업 팀에서 뺀다는 겁니다. 이런 일은 컴퓨터나 지적인 판단만으로는 안 되는 일입니다.
21세기에는 반도체의 경우처럼, 기계제품도 그렇다고 완전히 수공품도 아닌, 인간과 기계가 대화를 하고 협력해서 만들어지는 정보관련 제품들이 많이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반도체처럼, 절대 기계가 끝손질 못하는 하이테크 상품들이 많이 생산될 것입니다. 마지막엔 사람의 손이 가야 돼요. 그게 반도체예요. 산업사회가 기계, 그리고 농업사회가 사람의 손에 의해 지탱되어 왔다면, 앞으로 우리가 누리게 될 정보화 시대의 특색은 기계와 인간의 손이 합쳐진 신체제(新體制) 속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자동차 같으면 불합격이 나와도 부품만 갈아 끼우면 돼요. 그러나 반도체 완제품은 한 공정만 잘못되어도 전 공정이 무효가 되어버리는 것으로 그 전부를 내 버려야 되거든요. 우리가 일본을 젖히고 반도체 산업에서 세계 최고의 수율을 기록하게 된 것은 단순한 산업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 패러다임의 시각에서 봐야 할 것입니다.
자연에 지배되지도 않고 자연을 지배하지도 않는 자연과의 협력, 그리고 조화를 하는 한국문화의신라(新羅)의 원융회통(圓融會通)그리고 하늘․땅․사람이 하나가 되는삼재사상(三才思想)은 정보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잘 어울릴 수 있는 문화자원(文化資源)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깨닫게 된다면, 21세기는 바로 여러분들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산업자원은 부족하지만, 문화자원은 어느 나라보다도 풍부합니다. 지금 세계에는 인도와 유태인의 경우처럼 산업국가를 건너 뛴 새로운 세력들이 밀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새천년준비위원회에서는 이 같은 문명의 패러다임의 변화에 맞추어새 천년의 꿈, 두 손으로 잡으면 현실이 됩니다!라는 캐치 프레이즈(Catch Phrase)를 내 걸었던 것입니다. 종래의 획일적 구호와는 달리 사용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자기에 맞춰 응용할 수 있도록 된 것이 그 특성이기도 합니다. 꿈은 사람에 따라 그리고 분야에 따라 서로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새 천년의 꿈」이, 국민 전체로 나타나면 ‘남․북통일과 평화’라 할 수 있고, 기업에서는 ‘노사가 함께 하는 번영의 꿈’, 그리고 정치에서는 ‘여(與)와 야(野)’, 그리고 문화예술계에서는 ‘감성(感性)과 이성(理性)이 서로 어울리는 창조의 꿈’으로, 각기 달리 나타날 수가 있다.
상극인물과불사이에 솥을 놓으면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대립과 갈등하는 힘이 융합하면 오히려 창조의 에너지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능률화하고 효율화하기 위해서는 두 개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여 그것을 극단화하는 것이 지난 20세기의 정책이었습니다. 이러한 배제의 관념 속에 살아온 우리들은, 아이들을 보아도엄마가 좋으냐?아빠가 좋으냐?의 양자택일적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선택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 둘이 동시에 있을 때 완전한 삶을 이루는 짝의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비교하고 선별하고 그중 하나를 배제하려고 한 것이 지난 세기의 이합․대립적 패러다임이었고, 그것이 확대된 것이 20세기의 전쟁이요, 냉전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한 손 원리와 정책’을 넘어서 모순 하거나 대립하는 것을 병합하여 두 손으로 잡으려고 하는 것이 이른바 새 천년을 맞는 21세기의 새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 상반하는 모순된 사고를 동시에 수행하는 양자 병합적인 특성을 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업의 경우, 양자 병존의 두 손 전략으로 성공한 것이 바로 21세기형 기업이라는 3M입니다. 보통 기업에서는 어떤 목표와 전략을 세울 때,그 이익추구를 단기적으로 설정하느냐? 장기적으로 설정하느냐?하는 문제를 놓고 그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3M의 기업문화는 양자 병존의 전략으로 장기․단기 모두를 충족하는 두 마리의 토끼를 좇는 포괄적 전략을 사용합니다. 경영목표만이 아니라 기술개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른바 3M의 인간공학을 토대로 한 제품개발가운데 신제품으로 내 놓은 마우스 매트는 의료용 기술과 불소수지기술․마이크로 복제기술 그리고 부직포기술(不織布技術) 등이 복합적으로 이용된 산물입니다.
3M 만이 아닙니다. 반도체 생산에서도, 지금까지는 서로 다른 제조라인에서 만들어진 메모리분야와 논리분야를 양자 병존시킴으로서 코스트를 절감하고 생산성도 높이는 예가 그것입니다. 옛날에는 멸시의 대상이었던잡동사니란 말이 오히려 이제는 창조의 힘을 낳는 원동력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말하자면 치즈형태의 기업보다 샐러드 포트의 기업형이 더 바람직한 모델로 등장하고 있는 세상인 것입니다.
환경과 경제는 어떤가? 얼마 전만 해도 산업개발과 환경보호는 서로 대립하는 상극관계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환경을 보존하려면 기업을 희생시켜야 하고, 경제를 살리려면 어쩔 수 없이 환경을 파괴하는 길을 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유행하고 있는 환경경제학은 오히려 환경을 보존하는 것이 경제성장과 회사의 발전이라는 두 손의 원리를 사용합니다. 산업 하면 공해를 연상했지만, 이제는 산업이 바로 그린(Green)운동이며 경제적 활력을 불러들이는데서 이익을 가져옵니다. 독일에서도 가장 유망한 업종과 성장이 빠른 기업들은 대개가 다 환경산업과 관련을 맺은 회사들입니다. 재생지의 차원을 넘어서 공해를 일으키는 표백제를 사용하지 않고, 갈색 화장지를 만들어 낸 제조업체가 생산 코스트의 절감과 판매의 양면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는 것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환경론자는 성장을 반대하지만 요즘엔 그렇지가 않습니다. 성장의 알맹이가 자동차 중심의 자기 파괴적인 성장인가, 순환 지속형 성장인가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환경은 새로운 시장과 투자의 기회라는 점에서 환경보호와 경제성장은 대립관계가 아닌 것이다.
1990년에서 에너지 관련 산업의 성장율을 보면, 석탄이 1.2%, 석유 -1.4%, 원자력 0.7%, 풍력 26% 그리고 태양전지는 97년까지는 15% 이었으나 97년에 들어와서는 45%나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세계의 기업들이 새 틀을 짜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공해의 주범으로 알려진 자동차 산업도 예외는 아닙니다. 2000년부터는 자동차의 배기 가스를 줄이는 환경차(環境車)가 아니면 시장에서 퇴출 될 위기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하이브리드 엔진의 환경차를 만들면 오히려 시장의 쉐어(Share)를 더 늘릴 수 있는 호기입니다.휘발유 차(車)냐? 밧데리 차(車)냐?의 양자 택일이 아니라, 두 가지 특성을 병존시켜 시내에서 저속으로 달릴 때에는 바테리를, 고속도로에서 달릴 때에는 휘발유를 사용하는, 문자그대로 양자를 병존시킨 두 손 원리의 하이브리드 엔진이 벌써 등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배기 가스의 규제가 심해지면 기술개발을 위한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고 자동차 값도 상대적으로 높아져 산업전체가 위축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개념이 다른 새 엔진을 개발하게 되면 예기치 않던 새로운 시장이 생겨나게 되고, 자동차 회사들도 경쟁이 아니라 협력체제로 바뀌어 과다경쟁을 면할 수 있게됩니다. 도요타와 GM, 벤츠와 크라이슬러 그리고 피아트와 롤스로이스가 국가 간의 자동차 벽을 허물고, 경쟁에서 협력으로, 대립에서 합병으로 그 패러다임을 바꾸어 가고 있습니다. 환경과 자동차산업의 두 손 원리가, 포드주의로 상징되던 산업 패러다임을 바꾸고, 경쟁에서 협력으로 향한 새 기업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소련의 붕괴를 예언 한 것으로 유명해진 프란시스 후꾸야마는 문화를사회자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같은 자본주의라고 해도 미국이나 일본같이 트러스트(Trust, 신뢰)의 문화가 있는 나라에서는 글로벌 기업이 생겨나 21세기의 국경 없는 경제발전을 실현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태리나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처럼 가족밖에는 믿지 않은 곳에서는 패밀리 비즈니스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은 21세기형 기업을 만들어 가는데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것이 후꾸야마의 주장입니다.
그 이론이 옳으냐 그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죠. 숫자와 기술이 지배하는 냉혹한 경제계에도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은 문화의 힘이 어느 자본이나 기술 못지 않게 중요한 변화의 인자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을 해야할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지금까지 한국을 지배해 온 것은 한 손의 원리였습니다. 정치․경제․문화도, 국토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분단현상과 양극화의 징후가 일어났습니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나 나와 출신고향이나 배경이 다른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 생겨난 것이, 그러면서도별 것 아니다. 너는 별 것이냐?라는 평등(平等)이라기보다 무등사상(無等思想)이 사회를 지배해 왔습니다. 남의 성과와 노력을 생각하지 않은결과의 평등주의가 여러 곳에서 사회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동시에 무한 경쟁이라는일방적인 자유의식때문에 소외층이 생기고 있고, 한번 패배하면 사회복귀가 어려워지는 불평등의 사회현상이 심화하고 있습니다. 무한 경쟁에서의 소외와 전락은 결국 장기적으로 보면 자유경제체제 자체의 위기를 가져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가불 무한경쟁의 경제원리인자유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정치 원리인평등이 서로 균형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두 손의 정책이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손으로 때리지 안는다.’는 오래된 속담처럼 한 손으로는 죄를 징벌하면서도 또 한 손으로는 구제의 사랑을 베푸십니다. 사회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문화(文化)란 말은 문치교화의 준말로서형벌을 가하기 전에 먼저 교화(敎化)를 하라!는 뜻이지요. 그것이 문화요, 덕의 힘입니다. 이론적으로는 무한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탈락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래야만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고 창의성을 발휘하여 개인은 물론 사회와 기업 전체를 발전시킵니다.
그러나 생태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약육강식의 일방적인 논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좀더 자세히 더 깊이 자연 생태계를 바라보면 악어와 악어새 같은 직접적인 공생관계가 아니라고 해도 약자와 강자가 오묘하게도 생태계의 밸런스(Balance)를 지켜 가는 상호보완․협력적인 상생의 원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심지어 사슴을 잡아먹는 늑대라고 할 지라도 더 깊이 파고 들어가면 사슴들의 생존환경인 초원을 지켜주는 파수군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사슴의 번식을 조종함으로서 초원의 황폐를 방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수십 년 전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애리조나 케이스에서 밝혀진바 있습니다. 강자가 아니라 적자 폭력자가 아니라,상생(相生)의 협력자(協力者)가 살아나는 것이 생태계의 오묘한 질서입니다.
그렇다고 평등 일변도의 사회․정치원리가 지배하게 되면, 구 소련과 같이 천국 아닌 지옥이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복지사회는 일하는 사람에게 과중한 세금의 부하가 걸리게 됩니다. 북 구라파의 경우를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국보라고 일컬어지던 베르히만 감독이 세금을 견디다 못해 미국으로 이민해 버린 것 같은 예가 벌어집니다. 사회 전체가 경쟁력을 잃게 됩니다. 경쟁의 자유가 없으면 그 사회는 늪처럼 고여 침체해 버립니다. 그래서 바를 정(正)자의 풀이처럼, 일정한 한계선인 일(一)에서 지(止), 멈춰 설 줄 아는 힘이 옳은 것이라는 옛 선현의 말이 결코 낡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중정(中正)이라는 중용성(中庸性)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 새 천년을 맞는 21세기의 덕목이 되는 것이지요! 20세기의 역사는 극단주의의 세기였습니다. 극한과 양극화 그리고 대립과 갈등의 긴장 속에서 사회를 발전시켜간 이른바 파라노이아(편집광)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파라노이아의 병을 고치지 않고서는 건강한 새 천년을 마지 할 수가 없습니다. 기업도 정치도 문화도 모든 원리가 그렇습니다. 평등과 자유를 대립이 아니라 균형과 조화로 이끌어 가듯이, 21세기는 단순히 정보혁명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클릭(Click, On-Line)과 블록(Block, Off-Line)의 두 손으로, 즉 정보기술과 산업기술의 통합력(統合力)으로 구축되는 세기가 될 것입니다. 부국 강병의 ‘20세기 정치․경제 패러다임’이 평화와 행복(삶의 질)의 ‘21세기 문명․문화의 패러다임’으로 바뀌어 가는 중심적 파워는 군사력 경제력 다음을 있는 통합력이라는 것이 이 강연을 맺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이 통합력(統合力)이야말로 ‘너 죽고 나 죽자!’는「공멸의 갈등」에서 ‘너 살고 나 살자!’는「공생의 역사」를 만들어내는 가장 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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