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막 인생: 여주에서 10년
도전리에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2004년 12월31일 부로 회사퇴직을 하고 전원생활 할 곳을 물색했다.
2005년 2월부터 서울에서 가까운 덕소 양평 홍천 등을 알아보았지만
땅 값도 비싸고 물류창고 등이 들어서 있어 서울 외곽지역 같은 느낌을 주었다.
우리가 찾는 조건은
첫째 신앙생활을 하기에 적합(성당이 가까워야 함)하고,
둘째 오염이 덜 되어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이었다.
한 달 이상 찾아보았지만 적당한 곳을 찾지 못하고
서울에서 좀 더 살면서 천천히 찾자고 포기하는 순간 여주가 떠올랐다.
통신성서 연수회에서 같은 그룹이었던 한 수녀님이 나눔시간에
당신이 사는 곳은 가을이면 빨갛게 물든 단풍이 멋있고
사철 자연이 아름답다고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아내와 나는 집으로 돌아가다가 저녁무렵 차를 돌려 여주로 차를 몰았다.
고개를 빙글빙글 몇 번을 돌아 넘어가는데
귀양길 같이 험했고 약간 무서운 느낌도 들었다.
한참 고개를 넘어 바라보니 마을이 보이는데
산속에 호젓이 자리잡은 모습이 무릉도원 같았다.
마을에 가보니 수녀원도 몇 개가 있었고 공소도 있어
신앙생활하기에 적합할 뿐더러 서울에서 가까운 곳 중에서는
가장 오염이 안 된 곳이어서 우리가 찾던 곳이었다.
이런 것을 안성맞춤이라고 하는 걸까?
우리는 이 곳으로 정하고 매물로 나온 집을 찾기 시작했다.
집을 짓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아서…
마침 적당한 집이 나와서 계약 성사가 될 듯 하여 기쁘게 돌아왔는데
전화가 왔다. 그 자매님 자식들이 팔지 않고 별장으로 쓰겠다는 것이다.
실망감이 컸지만 그곳이 마음에 들어 다음날 가서 땅을 알아보니
적당한 땅이 있었다. 어렵지만 신축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수녀원 수리한 사람 중 괜찮은 사람을 소개받아 건축을 의뢰하고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3개월 동안 여주를 방문했다.
앞으로 같이 살 짱구와 친구를 데리고…
조금씩 집이 지어지는 모습을 보며 행복감에 젖었고
어떻게 아름답게 꾸밀까? 생각하며 기대에 찬 생활을 이어갔다.
실내는 아내가 많은 관심을 갖고 꾸몄고
나는 돌축대와 정자 등에 관심을 갖고 건축을 진행해
드디어 7월 말에 이사를 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고 바로 앞에는 공소가 있었으며
거실에 앉아 있으면 앞 산 봉우리 사이로 해가 뜨고 달이 뜨는
정말 아름다움 곳이었고, 새벽마다 수녀원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젊은 부부가 이사를 왔다고 좋아했고(당시 53세)
마을에 초상이 나자 상여꾼으로 뽑혀
내 생애 처음으로 너댓 번 상여를 지기도 했다.
이사온 후 2~3년 동안은
내가 활동하던 사도들의 모후 레지오 팀이 매년 야외행사로 다녀갔고
아내가 활동하던 사랑하올 어머니팀은 가을마다 김장하러 왔다.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면 뒤치닥거리가 만만치 않았지만
손님들이 우리 집을 찾아온다는 기쁨이 더 컸다.
논어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또한 바오로딸 수녀님들이
매년 종신서원 준비로 6개월간 이곳에 와 있을 때
서원예정자들이 우리 집을 방문하여 이야기도 나누고
기타도 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아내와 내 축일에는 수녀님들이 방문하여 함께 축하를 나누기도 했다.
스승예수 수녀회 새벽미사에는 많은 주민이 참례했다.
그 중에서도 하나농산 기도팀과 카시아노 가족이 기억에 남는다.
카시아노 가족(7명)은 우리보다 10년 먼저 이 동네에 이사를 왔는데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 속에 그 집 하나만 있었다.
승용차로는 가기 힘든 산 속 길을 10분 이상 차를 타고 들어가면
손수 판 연못도 있고 손수 지은 소박한 집, 그리고 동물들을 기르고 있었다.
▼ 카시아노 형제댁 친교방문
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온 식구가 미사를 오는데
맨 앞에서 큰 소리로 성가를 부르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한 번은 홍수로 길이 끊겼는데 1시간 가까이 걸리는 다른 길을 통해
미사에 참례하는 열심한 신앙인 가정이었다.
저녁식사 초대를 받아 그 집에 간 적이 있는데
석양이 지는 6시경 도착해보니 온 식구가 연못가에서
석양을 바라보며 삼종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흡사 밀레의 만종처럼…
이후 우리집에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을 아내가 제공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카시아노씨 가족을 보내며
매일 일곱 식구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미사에 참례하여 꾀고리 같은 목소리로 성가를 불러
미사 참례한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을 감동시켰던 우리 마을의 마스코트
카시아노, 마틸다 가족이 오늘 이곳 도전리를 떠났습니다.
멀리 미국으로...
어제 미사시간에 떠난다는 이야기를 신부님께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후
마을주민들과 수녀님들은 못내 아쉬워 눈시울을 붉히는 분도 많았습니다.
카시아노 형제님!
이제 매일아침 형제님 가족을 뵐수 없다는 것이 무척 섭섭합니다.
그러나 '회자정리'란 말처럼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는 것" 이라지요.
야고버, 리디아, 레오, 요안나, 필립보, 그리고 마틸다 자매님!
불러보면 정겨운 이름입니다.
저희 가족은 형제님 가족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님 가족과의 만남이 우리 가족을 더 좋은 가족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스코트 니어링이 죽기 전 마을사람들이
"당신이 살아서 세상은 조금 나아졌습니다" 라는 플랭카드를 걸었듯이
카시아노 형제님 가족의 삶을 배울 수 있도록 어디에 계시든 잘 사시기 바랍니다
'안보면 멀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는 기도 중에 자주 만날 것을 다짐합니다.
건강하시고 행복 하기길 빕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어느 곳에서든지 너를 내게로 이끌겠다
행복한 2년의 세월이 지나자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왔다.
그동안 부여 요양원에 모셨던 큰 처남이 우리 집으로 오시고 얼마 후 돌아가셨고,
퇴직금 받은 여유자금이 곶감 빼먹듯 줄어들자 걱정이 앞섰다.
농사를 지어봐야 우리 먹고 연 300만원 정도의 수입밖에 안되었기에
부부싸움이 잦았고 급기야 딸 유나를 불러 가족회의를 하게 되었다.
현대 아파트 매매는 일단 보류하고,
유나(대학생)에게 주는 용돈은 중단하고 유나가 충당하기로 하고,
나는 도자기 회사에 취업을 했다.
바울리나는 요양병원에서 간병인으로 근무했다.
오래 전(1988년) 기업은행 다니는 친구의 부탁으로
기업은행에 개인연금 들은 것을 타게 되었다.
매월 40만원씩 5년 동안이었는데 이것 또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직장에서 든 국민연금이 5년 후에는 2년 조기 수령하면 받을 수 있었기에
경제적인 고비는 넘기면서 도전리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도전리에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을 창설하여 레지오 활동을 하고,
반모임을 하고 성당에서는 봉사직을 맡아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다.
하루하루가 천국과도 같은 생활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후에는 별 어려움도 없었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직장생활 할 때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내 자유로 생활한다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었기에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카페에 글을 올리면서 하루를 보람있게 보내게 되었다.
이 글은 서울을 떠나 5년 째인
2010년 여주에서 생활할 즈음 썼던 글입니다.
▼ 해발 400미터에 자리잡은 도전리는 서울보다 5~6도 기온이 낮아
춥고 눈이 많이 옵니다.
그래서 설경이 아름답지요.
이렇게 고비를 넘기면서
천국과 같은 여주에서의 생활에 맛들이고 10년을 살다가
제주로 이사를 해서 6년째 살고 있습니다.
지나고보니 내가 걸어온 발자국마다 주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여주를 떠날 때
10년간 정성스럽게 가꾸었던 정원과 집, 그리고 고양이들
헤어지기가 섭섭했지요.
하지만 우리 집을 사신 분들 특히 자매님이
정원과 실내 디자인등이 마음에 드신다고 하여
정원에 있는 야생화를 비롯한 모든 것들
고양이 집과 사료
겨울 벽난로 땔감하시라고 전동톱
정원 잔디깎는 기계등을 흔쾌히 드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남의 밭이지만 제가 농사짓던 밭 300여평도
서울에 사시는 밭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물려줬습니다.
잘 가꾸시라는 말을 전하며...
떠난지 5년이 지났지만
그분들과 가끔 안부전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여주 도전리의 소식을 전해 받지요.
떠난 후 도전리에서 10여 분 이상이 돌아가셨다고 하네요.
▼ 제주로 이사오기전 아름다운 우리집 모습(2015.5)
너무 장황하지요
10년 생활한 것을 한 번에 올리다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장황한 글 읽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한 곳을 떠나는 아쉬움이 크셨겠어요 새로운 곳에서 더 큰 행복을 만들어나가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장문의 글 읽느라 고생했습니다.
10년간 일을 쓰다보니... 그래도 제 마음은 좀 아쉽습니다.
이제 제주도에서 3막인생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잘 살수 있도록 축복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파란지붕과 돌벽 그리고 성모상이 소박하고 잘 어울리는 시골 공소같아요 수많은 신자들의 정성과 기도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도전리에서도 즐겁게 지내신 것처럼 이곳 제주에서도 행복하시길~~
신앙적으로 유서깊은 이곳 용수리에서의 생활~
임마누엘 하느님과 함께하는 하루하루 행복합니다.
응원과 축복의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