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유월절 어린양(문현화)
고전5:7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를 구원해내셨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출애굽 때로 돌아가게 한다. 출애굽의 10번째 재앙은 애굽 사람의 집집마다 장자가 다 죽는 재앙이다. 애굽사람들은 열 번째 재앙 때 이스라엘 사람들을 내 보낸다. 짐승부터 사람까지 첫 번째 자식들은 다 죽는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 고집대로 하면 결국 손해나는 것 자기밖에 없다. 맏아들이 죽는 불행한 자리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 애굽 땅에는 재앙을 내리는 천사가 집집마다 찾아가 다 죽였지만 이스라엘자손들의 집에 어린양의 피가 발려졌으므로 들어가지 않는다. 물론 애굽사람들 중 피를 바르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은 사람들은 장자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유월절 어린양규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피 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그리스도도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을 마음에 발라야 하는 것이 순종하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발라야 한다. 옛날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이 악한 세상에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이다. 유월절은 껑충 뛰어넘는다는 뜻이다. 재앙을 내리는 천사가 왔다가 뛰어넘어갔다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 문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발라놓으면 재앙이 왔다가도 도망간다.
둘째로 어린양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양의 고기를 먹는 것이다. 식구들이 먹고 남으면 이웃과 나누어 먹으라고 한다. 어린양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을 잘 해나가야 한다. 그 다음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 한다. 무교병은 누룩 없는 빵이다. 누룩은 일종의 속임수라고 볼 수 있다. 부풀리는 것은 우리의 부패성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왜 쓴 나물을 먹으라고 하셨는가? 우리의 쓴 인생을 말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달콤한 것만 찾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주님을 잘 따라 가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떤 쓰라림을 당하더라도 기쁨으로 감내해야 한다. 유월절 양은 6월 10일 날 양을 택해서 4일 동안 관찰한다. 흠이 없어야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4일 동안 조사를 받으셨다. 빌라도의 법정에 섰을 때 빌라도가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죄를 이기게 하고, 사탄을 이기게 한다. 하나님께서 새 은혜로 충만하게 해 주시기를..
이삭대신에 죽은 예수님
창22장
모리아산에 가서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독자 이삭을 죽이지 말라고 하셨고, 수풀에 어린양으로 제사를 드린다. 이 이야기가운데서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사자로 두 번 나타나신다. 하나님의 사자와 어린양으로 나타나신다. 하나님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반드시 죽는다고 하실지라도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히브리서는 말한다. 어린양은 단에 드려 죽이려고 할 때 수풀에 걸려 있는 양이 발견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것들이 다 감추어져 있다. 나 자신을 드릴 때 가능하다. 여호와 이레.. 창조 때도 사람을 위해 하늘과 땅과 바다 씨 맺는 채소 짐승들을 다 준비해놓으신다. 이러한 것들을 볼 때 인생의 어려움 앞에서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어려움 앞에서 믿음으로 전진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위해 예비하신 것,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엄청난 일을 이루어주신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이다. 억울하고 힘든 일이 생겨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서 꼭 좋은 것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개인뿐 아니라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예레미야서에서도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고 장래와 희망을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받기 까지 사망의 음침한 길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백성들도 가나안을 들어가기 위해 광야 40년의 과정이 있었다. 이삭대신 죽은 어린양의 피를 바를 때 마지막 때 고통가운데 있는 자들을 구원하는 일들도 감당할 것이다.
느낀점: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 40년이라는 과정을 거친것처럼, 이삭을 드려야 하는 아브라함의 힘들어 보이는 그러한 과정도 결국 하나님이 여호와 이레로 책임져 주시고 더 큰 복을 주신다는 말씀이 조금이나마 공감되고 아멘으로 받아드려진다. 요즘 삶 가운데 누구도 어려움을 겪지 않고 가는 길을 나는 왜 이렇게 힘에 부치고 괴롭게 가야되는가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나를 누르는 시간들을 보내왔다. 그러나.. 그 힘든 고난이 결국 더 좋은 결말을 가져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분의 보호하심과 돌보심이 떠나지 않는다는 믿음의 확신을 더 견고히 마음에 쌓았다. 그래도 여전히 고난과 아픔은 싫다. 낯설다. 그것 때문에 또 잠시 괴로워하고 주님께 간구하겠지만 결국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그 쓴 고통은 아름다운 결말로 끝날 것이다.
모세의 지팡이
출4:1~5
지팡이 하면 떠오르는 것이 노인들이다. 지팡이를 의지해서 살아가기도 하고 등산할 때 사용하기도 한다. 성경에 지팡이에 대해 많이 나온다. 야곱이 집을 떠날 때 지팡이 하나를 가지고 나갔는데.. 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다음 유다이야기에서도 나온다. 유다는 자기친구 양털 깎는데 갔다가 며느리를 범하고 증표를 요구하는 그에게 지팡이를 준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 다윗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한다는 표현을 한다. 목자들에게는 필요했겠지만 젊은 야곱도 들고 갔다. 지팡이가 가정마다 필수품이였다고 볼 수 있다.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다른 말로 지팡이가 있으므로 나를 위로 한다는 것이다. 모세가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달라고 하나님께 말했을 때 네 손에 있는 것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시자 뱀이 되고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된다. 사람들과 비교 할 수도 있다. 어려울 때 지팡이처럼 든든히 의지되는 사람들을 잘 대해야 한다. 지팡이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 필요한 것인데 나에게 필요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친구, 남편, 자녀들이다.
성경은 자녀들이 많은 것을 화살 통에 화살이 많은 것과 같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나를 잘 도와주던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면 내 친구와 아내도 배반하고 떠나간다. 세상 끝날 까지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 주변에 든든한 사람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지팡이를 가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령이 우리의 지팡이가 되고 막대기가 되신다. 성령은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으로 성경을 말한다. 그가 우리와 함께 하시면 마음이 든든하다. 모세의 지팡이는 모세에게 무슨 일을 했는가? 뱀이 되어서 물려고 하고 다시 잡으니 지팡이가 된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라고 하신다. 애굽의 열 가지 재앙 중 모세가 지팡이로 재앙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 네 번이다. 메뚜기, 이, 피가 되는 재앙, 우박이 쏟아지는 재앙, 홍해가 갈라지고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는 놀라운 일들을 한다.
아론도 지팡이를 던졌더니 뱀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에게도 똑 같은 은혜를 부어주신다. 아론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서 하나님의 지성소안에 들어가기도 한다. 이 지팡이가 있으면 원수를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의 보혜사가 되시는데 그 분이 내게 계셔야 지팡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성령이 지팡이와 막대가 되실 것을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 지팡이를 꼭 받아야 한다. 믿음의 식구들이다. 어려울 때 진심으로 위로하고 도울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께 이 지팡이를 달라고 구해야 한다. 창세기 49장 10절 말씀에는 통치자의 지팡이가 유다를 떠나지 않는다는 표현한다. 이 놀라운 지팡이를 받아서 힘있고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성령으로 세례 베푸시는 분
요1:33~34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왔다. 예수님은 그 소리의 말씀으로 왔다. 말씀이 육체로 오신 것이다. 요한은 소리를 외치고 사라지지만 말씀은 영원히 있다. 요즘 스마트폰속에 성경이 있다 보니 책으로 된 성경을 가지고 다니지 않고 읽지 않는다.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해볼 때 요한이 회개하라고 할 때 사람들은 찔림을 받고 회개를 한다. 예수님이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회개하라고 할 때 기적이 일어나니 사람들이 모여든다. 예수님의 설교는 양심을 찔러주는 설교를 하였다. 요즘은 기분 좋은 소리를 해주려고 한다. 계시11장에는 메시지를 전하는 두 사람이 찔림을 주는 능력을 말한다. 이 두 사람은 순교를 당한다. 사도행전 1장 7절에도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는다고 하신다. 땅 끝으로는 이슬람과 중국이다. 마지막 때 사명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이러한 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셨다. 아나니아가 바울을 찾아와서 소경된 것을 고쳐줄 때 세례를 받고 고침을 받으라고 한다. 세례는 씻음을 받으라는 것이다. 물속에서 씻음을 받는 것이다. 어린아이들과 병약자들을 물속에 넣는 것이 쉽지 않다. 세례로 단순화 했는데 의미를 약화 시키면 안된다. 세례가 하나님을 향한 선한양심의 간구라고 한다. 선한양심은 선량한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헬라어 원어는 영적인 것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례를 받으므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로는 롬6:4 세례는 나의 옛 사람이 육체로 죽고 새사람으로 된다는 설명이 있다. 오늘 날 세례를 많이 받지만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일어나는 일은 많지 않다.
우리가 마지막 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성령세례는 무엇인가? 교단마다 조금씩 다르다. 성경적인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사도행전 1장에서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으라고 하신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권능을 받는다고 하신다. 성령의 은사가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제자들은 복음을 전할 때 3천명, 5천명이 주께로 돌아왔다. 초대교회는 성령충만한교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였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