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불교의 가르침이자, 화엄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일체유심조’다. 오늘은 일체유심조의 세 가지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일체유심조에서 ‘일체’가 무엇일까? 말 그대로 일체 모든 것, 삼라만상 모든 것이다.
첫 번째 일체유심조의 뜻은 마음이 일체의 삼라만상 현상세계를 만든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자기계발서나, 시크릿이나, ‘마음나는대로 이루어진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등의 유행했던 것들이 바로 이 일체유심조의 권능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문구다. 즉, 우리의 마음이 현실세계를 창조하는 창조주인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이 현상세계는 실체가 아니라, 인연 따라 잠시 왔다가 가는 것일 뿐이라는 점이다. 이 현상세계는 공한 것이며, 비실체적인 것이다. 무상하며 무아인 것이다. 꿈과 같은 것일 뿐이다.
두 번째로 일체유심조의 의미는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출세간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물론 본래면목, 불성이라는 참된 성품은 만들어내는 것도, 창조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완전하게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허망한 분별심으로 인해 이 완전한 진리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제 스스로 허망하게 창조해 낸 가짜의 꿈과 같은 현실만을 분별해서 볼 뿐이다. 불법이란 바로 그렇게 분별망상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중생계의 왜곡되고 전도된 현실을 되돌려 분별없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 실상을 보는데 있다.
사실 깨달음을 얻는 특별한 정해진 방법은 없다. 이미 산의 정상에 도착해 있는 사람에게 정상에 도착하는 특별한 방법이 없듯이, 이미 깨달음은 완성되어 있고 깨달음 속에 있기 때문에 또 다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다만 방편으로 방법을 설한다면 그것은 일체유심조의 방법 밖에 없는 것이다.
분별망상이라는 허망한 필터를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과 마주하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참된 진실의 세계를 보겠노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 바로 이 간절한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체유심조의 두 번째 의미다.
깨달음도 결국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불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심이고, 발보리심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스스로 본성에 계합하고야 말겠노라는 간절한 발심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전부다. 그렇기에 이것은 길 없는 길이라고 한다. 간절한 발심이야말로 참된 수행인 것이다. 간절한 발심과 간절한 믿음, 바로 이 두 가지 마음이 깨달음을 가능케한다.
대발심과 대신심을 내어 깨달음을 얻고자 하지만 도무지 본성을 밝힐 방법도 없고, 알 수도 없다보니 그저 답답하고 궁금할 뿐이다. 오로지 알고자 하는 의심이 있을 뿐, 다른 방법은 전혀 없다. 이것이 바로 대의심이며, 화두요 의정이다. 이처럼 대의심, 대발심, 대신심이라는 마음이 곧 깨달음을 가능케하는 모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한 마디로 ‘마음’ 아닌가. 바로 이처럼 마음이 깨달음을 가능케한다. 현실세계에서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것도 마음을 낼 때 가능해지고, 출세간의 깨달음에 이르겠다는 것도 마음을 낼 때 가능해진다.
세 번째로 근원적인 차원에서의 일체유심조의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마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중생심으로써의 마음이 아니라, 본바탕, 한마음, 본래면목, 불성을 의미한다. 본래면목이라는 이 마음자리에서 세상 모든 것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드러내는 그 한바탕의 배경이 바로 이 마음이며, 법이고, 자성이다. 이 마음 없이 그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나온 근원적인 바탕, 본질적인 배경이 바로 이 한마음이라는 것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