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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수(金子粹)는 자가 순중(純仲)이며 계림부(雞林府) 사람이다. 공민왕 말년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를 제수 받았다. 우왕 초에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당시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 조민수(曺敏修)가 밀성(密城)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수십 명의 목을 베었다. 우왕이 의복, 술과 말을 하사하자 조민수가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였다. 이에 〈왕이〉 김자수에게 회답하는 교서를 만들라고 했는데 김자수가 이를 사양하며 말하기를, “조민수는 한 도의 군사를 총괄하고 있는데 김해(金海)·대구(大邱)의 전투에서 겁을 먹고 패전하여 많은 사졸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밀성에서의 작은 승리로는 공이 죄를 덮을 수 없습니다. 의복, 술과 말까지 하사하여 상을 받은 것이 이미 과한데 또 무슨 교서로 회답하시렵니까? 또한 회답의 교서에는 공적을 기록해야 하는데 지금 조민수는 기록할만한 공적이 없으므로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우왕이 화가 나서 김자수를 순위부(巡衛府)에 하옥하고 지윤(池奫) 및 대사헌(大司憲) 하윤원(河允源)에게 명령하여 그를 국문하도록 하였다. 지윤 등이 왕의 명령을 어긴 것으로 연관시키자 김자수가 말하기를, “선왕들께서 간관을 둔 것은 임금의 실수를 보완하려는 것이다. 예로부터 임금의 말 가운데 옳지 못한 것이 있으면 간관이 간쟁하여야 하니, 바라건대 공들은 나라에서 간관을 둔 뜻을 살피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지윤이 크게 화가 나서 장(丈)을 치고 유배 보내려고 도당(都堂)에서 논의하자 여러 재상들이 두려워서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밀직부사(密直副使) 이보림(李寶林)이 말하기를, “김자수가 비록 하찮은 유생이지만 간관이다. 또한 왕의 명령을 어겼다는 죄목은 마치 사람을 동쪽에 두었다가 마음대로 서쪽으로 옮기는 것과 같다. 김자수의 죄를 이것으로 논의할 수 없다고 본다.”라고 하였다. 도당에서 그 말을 옳다고 하여 단지 유배를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우왕이 말하기를, “순위부가 이미 그 죄를 의논하였으니 지금 다시 가볍게 할 수 있는가?”라고 하여 끝내 듣지 않았다. 우사(右使) 김속명(金續命)이 태후를 찾아가 보고하여 말하기를, “신은 무인(武人)이기 때문에 사리에 밝지 못하지만 문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간관이 비록 〈임금의〉 뜻을 거스르더라도 죄를 주지 않는 것은 언로를 열기 위함이다.’라고 합니다. 지금 김자수의 죄는 작은 것이니 무겁게 죄를 논하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태후가 우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늙도록 많은 일을 겪었으나 간관에게 장을 쳐서 욕보인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닫아 국사가 나날이 잘못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김자수는〉 장형을 면하고 전라도 돌산수(突山戌)로 유배되었다. 지윤 등은 김자수가 반드시 낭사(郞舍)와 의논하였을 것이라고 보아 간의대부(諫議大夫) 정우(鄭寓)도 경상도 죽림수(竹林戌)로 유배보냈다. 해가 지나자 종편(從便)을 허락하고 고신(告身)을 다시 주었다.
한참 뒤에 〈김자수(金子粹)는〉 전교부령(典校副令)에 임명되었다가 거듭 옮겨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가 되었다. 공양왕 때 성균대사성 세자좌보덕(成均大司成 世子左輔德)을 제수받자 상서하여 말하기를, “엎드려 교서를 보니 천문(天文)에 이변이 보이어 〈전하께서〉 매우 간절하게 자책하시며 직언을 구하신다고 하기에 미치고 망령된 말이지만 조목별로 삼가 올립니다. 전하께서는 숨은 덕망이 드러나 알려졌기에 사람들이 마음으로 추대하여 다른 성씨의 재앙을 제거하고 조종의 왕업을 회복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현릉(玄陵)〈공민왕〉 대비(大妃)의 명령을 받들어 시행한 것입니다. 그분께서 맹약과 방책을 주도하는 공로로 인하여 전하께서는 왕위에 오르셨으며 삼한(三韓)은 같이 의지한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즉위 초기에 곧바로 왕대비(王大妃)로 책봉하여 위호(位號)를 바로 하여 책보(冊寶)를 바친 것은 매우 성대한 전례였습니다. 전하께서 그분을 섬기는 예도 마땅히 낳아준 사람보다 두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해 남쪽으로 거둥하시던 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대비(國大妃)의 궁전에 친히 찾아가신 것이 한 번이 아니었으며 봉양도 지극하였지만, 오직 왕대비의 궁전에는 한 번도 가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낳아 기른 은혜에만 익숙해져서 〈종묘를〉 계승하는 일의 중요성을 잊으신 것이니 어찌 옳겠습니까? 전(傳)에도 말하기를, ‘후계가 된 자는 그 〈집안의〉 아들이 된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고금의 대의(大義)입니다. 왕대비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 장사지내는 일[亮陰之禮]는 물론 〈정성을〉 다해야 하나, 살아 섬기는 예라고 어찌 마음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지금부터는 명절과 복일(伏日), 납일(臘日)에는 반드시 먼저 왕대비전을 찾아가 문안을 올린 후에 국대비전에 나아가셔서 큰 대의를 밝히십시오. 근래에 봉숭도감(封崇都鑑)을 설치하여 왕세자를 책봉하시려는데, 신은 의혹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아직 황제의 명령을 받지 못했는데 세자가 책보를 하사받는 의례를 먼저 하니 그것이 옳겠습니까? 전(傳)에는, ‘아들이 비록 지혜롭고 성스럽더라도 그 부친보다 먼저 녹봉을 받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앞뒤의 순서를 어지럽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친히 황제에게 입조하여 명을 받는 것을 기다린 후에 천천히 논의하여 시행하여도 늦지 않습니다. 하물며 지금 중국 조정의 사신이 와서 양마(良馬)를 10,000필이나 징발하니 모든 관청이 명령에 분주하여 지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억지로 봉숭의 의례를 행하려고 하는 것은 여론에도 부합되지 않는 일입니다.
당(唐) 한유(韓愈)가 헌종(憲宗)에게 말하기를, ‘황제(黃帝)와 요(堯)·순(舜)으로부터 삼대(三代)까지 모든 임금이 장수를 누리고 백성들이 안락하였으나 그 당시에는 불교가 있지 않았습니다. 한(漢) 명제(明帝)[永平]대 이후 처음 불교가 들어왔는데, 계속 〈나라들이〉 어지럽고 멸망하는 일이 계속되었으며 국운도 길지 않았습니다. 송(宋)·제(齊)·양(梁)·진(陳)·원위(元魏) 이래 점점 더 부처를 섬겼지만 〈왕조의〉 연대는 더욱 짧아졌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한유가 근거 없이 한 말이 아니니 역사책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연복사(演福寺)의 탑을 수리하여 넓히면서 민가 3,40호를 없애버렸는데 지금 또 대대적으로 부도를 일으키고 여러 번 토목 공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농사일이 한창 제절인데 교주도(交州道) 전체에서 나무를 베고 목재를 실어 나른다고 온 사람과 가축이 모두 지쳐버렸지만 일찍이 조그만 구휼조차도 없습니다. 꼭 얻는다고 할 수 없는 내세의 복을 차지하려고 현세에 살고 있는 생령(生靈)들에게 실질적인 화를 끼치고 있으니 민의 부모가 되어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바라옵건대 분명하게 분부를 내리시어 그 부역을 중지시킴으로써 민력(民力)을 넉넉하게 하소서. 어떤 이는 ‘놀고 있는 중들을 사역하면 해가 없다.’라고 하지만, 중들이 과연 굶주려가면서 부역에 나오겠습니까? 나라의 비용을 소비하는 것이 이보다 심한 일이 없고, 민들로부터 원망을 받는 것도 역시 이보다 더 심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태묘(太廟)와 여러 능에 대해 수리하거나 새로 짓는 일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고, 탑 세우기만 급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조상께 보답하고 추모하는 정성이 도리어 복을 구하고 자기만 잘 살겠다는 생각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니, 어찌 〈전하의〉 큰 덕에 하나의 흠이 되지 않겠습니까?
옛날 송(宋) 경공(景公)이 군주로서 바른 언행을 하자 형혹성(熒惑星)이 물러갔으며, 성왕(成王)이 유언비어에 현혹되자 바람처럼 우레와 번개가 쳤습니다. 이런 일로 볼 때, 임금이 한 마음으로 〈올바름을〉 얻으면 천심을 감동시킬 수 있고, 한 가지라도 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면 천재지변을 부르게 됩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마음을 〈올바름에〉 두고 거처하시기를 상제(上帝)를 대하듯이 하여 비록 혼자 조용한 곳에 있더라도 항상 〈상제가〉 임하는 것처럼 행동하시고, 〈사람을〉 응대할 때에는 더욱 삼가고 심사숙고하십시오.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반드시 예에 맞게 하시고 출입과 기거(起居)는 언제나 경건하게 해야 합니다. 또 일을 처리할 때 개인적인 욕심에 사로잡히지 마시고 고식(姑息)으로 흐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마음의 경건함이 천심에 감응하여 재변이 사라질 것이며 교화(敎化)가 펴져나가 나라가 흥할 것입니다. 또한 어찌하여 반드시 불교를 높이 받들고 탑묘(塔廟)를 크게 세운 후에야 국운이 신령(神靈)하고 장구해지겠습니까? 하물며 신라(新羅)가 불사를 많이 일으켜 끝내 망했다고 태조께서 유훈을 남기셨으니 어찌 이를 어길 수 있겠습니까? 불교의 설도 믿을 수 없거늘 하물며 괴이하고 황당무계한 무당의 말은 어떻겠습니까? 도성 안에 무당의 신당을 세우는 것을 금지하지 않아서, 이른바 별기은(別祈恩)이라는 곳이 10여 곳도 넘습니다. 사철 제사와 무시로 하는 별제(別祭)를 합하면 1년에 소비되는 비용을 모두 기록할 수도 없습니다. 제사 때가 되면 비록 금주령(禁酒令)이 매우 엄하여도 여러 무당들이 떼를 지어 국가의 행사라고 칭탁하니 해당 관청에서도 감히 힐책하지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술을〉 잔뜩 마시고 태연자약하게 큰 거리에서 북치고 가무를 벌이면서 하지 않는 짓이 없으니, 풍속이 아름답지 못함이 매우 심하게 되었습니다. 바라옵건대 해당 관청에 분명히 분부하시어, 사전(祀典)에 기재된 〈제사를〉 제외하고는 음사(淫祀)를 모두 금지시키고 무당들이 절대 궁중에 드나드는 것을 통렬하게 끊어버려 이로써 요망한 짓을 근절하고 풍속을 바로잡으소서.
얼마 전에 직언을 구한다고 하교하신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그렇지만 신이 일찍이 본 바에 따르면 대성(臺省)에서 누가 정사에 대해 간언하면 갑자기 화를 내셔서 직임을 박탈하거나 외지로 내쫓거나 혹은 관직을 낮추거나 하셨습니다. 신이 생각해보니 〈전하께서는〉 직언을 구한다는 교지가 비록 절실하지만 간언에 대한 거부하시려는 마음을 아직도 가지고 계십니다. 바라옵건대 과거 파직된 간신(諫臣)들은 모두 등용하시고 그들의 말을 다 시행하시어 후대에 권면하신다면 뜻있는 선비들이 누가 전하를 위하여 말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성균생원(成均生員) 박초(朴礎) 등이 역시 상소하여 말하기를, “엎드려 생각해보건대 우리나라는 태조께서 창업한 이래 금지옥엽 〈같은 자손들께서〉 대대로 계승하면서 그 계통이 계속되어온 것이 거의 500년간에 이르고 있습니다. 중간에 불운하게도 다른 성씨의 화를 만난 것은 입으로 차마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전하께서는 신성한 천품으로 하늘과 사람에게 순응하여 간흉들을 제거하면서 무력을 쓰지 않고도 천명을 받아 종사를 회복하셨습니다. 즉위하시던 초기에 삼한의 억조창생(億兆蒼生)이 매우 기뻐하며 눈을 비비고 태평성대를 희망하였으니 이는 옛것을 회복하고 중흥하여 화락한 세상을 이룰 때[雍熙之秋]입니다. 신 등은 좋은 때를 만나 태학에서 함께 공부하고 녹봉만 허비하면서 외람되게 성은을 입고 있습니다. 이에 분발하여 요·순 시대의 임금과 민(民)으로서 이단을 배척하겠다는 뜻을 둔 것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길이 없어 할 수가 없었고 지위에 있지도 못하여 도달할 수 없어, 울분을 가슴에 품은 채 몰래 의논하거나 개인적으로 탄식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약 전하께 건의하게 되어 한번 성심(聖心)을 각성시킬 수 있다면 비록 요망한 말을 했다는 죄를 덮어쓰더라도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이제 전하께서 덕음(德音)을 내리시고 분명하게 하교하시면서 널리 언로를 열고 목마르듯이 직언을 구하시니 신 등은 어찌 감히 입을 닫은 채 평생의 뜻을 저버리겠습니까?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너그러이 용납하시어 이 성대에 직언을 하다가 형벌을 받는 자가 없게 하시면 국가를 위해 큰 다행일 것입니다.
신 등이 가만히 들어보면, 천지가 있은 후에 만물이 있고, 만물이 있은 후에 남녀가 있고, 남녀가 있은 후에 부부가 있고, 부부가 있은 후에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은 후에 임금과 신하가 있고, 임금과 신하가 있은 후에 상하가 있고, 상하가 있은 후에 예의가 비로소 생기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하의 통달하는 도리이며 고금의 떳떳한 법이니 잠시라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만약 이것을 폐하려는 자는 〈천지간에〉 용납될 곳이 없을 것이고 해와 달이 비치지 않을 것이며, 귀신으로부터 죽음을 받을 것이고 천하 만세의 공론으로부터 성토를 받을 것입니다. 저 부처란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대를 이을 적자로서 그 아비를 배반하여 부자의 친분을 끊고, 필부이면서 천자에게 항거하여 군신 간의 의리를 없어지게 했으며, 남녀가 한집에 사는 것을 도가 아니라고 하고, 남자가 밭 갈고 여자가 베 짜는 것을 의롭지 못하다고 합니다. 〈자손을〉 생육하는 도를 끊고, 먹고 입는 근원을 막아 버리면서 자신의 도로써 천하를 바꾸려고 생각합니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100년 후에는 인류가 절멸할 것입니다. 위에서 운행하는 하늘과 아래에서 싣고 있는 땅 사이에서 생육하는 것은, 다만 풀과 나무, 금수(禽獸), 물고기와 자라, 용과 뱀뿐이니 결국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도는 그 사이에서 어디에 붙어살겠습니까?
부처는 본래 오랑캐의 사람이기 때문에 중국과는 언어가 다르고 의복을 다르게 만듭니다. 〈그는〉 선왕(先王)에게서 본받은 말을 입에 담지 않고 선왕에게서 본받은 옷을 몸에 걸치지 않으며, 부부·부자·군신의 윤리를 알지 못합니다. 거짓으로 삼도(三途)를 말하고 그릇되게 육도(六道)를 주장하여 드디어 우매한 자들로 하여금 망령되게 공덕(功德)을 구하고 〈나라의〉 금지된 것을 겁내지 않고 함부로 법을 어기도록 합니다. 또한 생사와 수명은 자연에 의한 것이고 복록과 형벌은 임금에게 달린 것이며 빈부와 귀천은 노력에 달려 있지만, 어리석은 중들은 교묘하게 속여서 그것이 모두 부처에 의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임금의 권한을 도둑질하고 조물주의 힘을 제멋대로 내세우면서 백성들의 귀와 눈을 가리고 천하 사람들을 더럽고 혼탁한 곳에 빠뜨려 취생몽사(醉生夢死)하도록 하여 이를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누각과 궁전을 지어서 부처를 섬기고, 흙과 나무, 구리나 쇠로 불상을 꾸며 양민 남녀들의 머리를 깎아서 그곳에 살게 합니다. 비록 걸(桀) 임금의 선궁(璇宮)과 상랑(象廊), 주(紂) 임금의 경궁(瓊宮)과 녹대(鹿臺), 초(楚) 영왕(靈王)의 장화대(章華臺)와 여정(呂政)의 아방궁(阿房宮)이라도 이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백성의 재물과 노력에서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아아! 통탄스럽습니다. 누가 이것을 바로 잡겠습니까? 반드시 윗사람이 자기의 덕을 닦고 아랫사람들을 교화해 예의를 밝혀 이 민(民)에게 천리(天理)의 소재를 알도록 한 후에야 이것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동방은 신라 말부터 불법을 숭상하여 여염에 이르기까지 탑묘(塔廟)가 즐비하였습니다. 불교의 교리가 귀에 가득 차도록 흘러들어 피부에 스며들고 골수(骨髓)에 사무쳤기에 올바른 이치로서도 깨우쳐 줄 수 없고, 역시 어떤 말로도 분별시켜 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태조께서 삼한을 통일한 초기에 그 적폐를 큰 징계로 삼아 후대의 군신들이 사사롭게 원찰(願刹)을 세우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이에 태사(太師) 최응(崔凝)이 불교를 없애자고 요청하자, 태조께서는, ‘신라 말에 불교의 교리가 사람들 골수에 박혀 사람마다 사생과 화복이 모두 부처가 하는 것이라고 본다. 지금 삼한이 겨우 통일되어 인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만일 갑자기 불교를 없애면 필시 민심이 동요할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이내 『훈요(訓要)』를 지어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신라가 불사를 많이 일으켜 멸망하는 데까지 이르렀음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태조께서 후세에 남긴 교훈은 매우 깊고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역대의 군신들은 태조의 유훈을 본받지 않고 구차하게 관습에 따라 암자와 탑을 세워 한 시기도 없던 때가 없어 지금까지 이르렀으니 그 폐해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인심(人心)과 세도(世道)를 위하여 계획하는 사람들은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전(傳)에는 ‘한 사내가 밭을 갈지 않으면 굶주리는 사람이 생기게 되고, 한 아낙네가 누에를 치지 않으면 추위에 떠는 사람이 생기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 불교를 믿는 무리들은 밭을 갈지 않으면서도 먹고 살기가 넉넉하고 누에를 치지 않는데도 옷이 마련되어 있으니, 편안하게 살면서 스스로 부양하는 자가 몇 천 몇 백만인지, 또 그들 때문에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자가 몇 사람이나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저들이 비록 바람과 이슬을 먹고 마시며 벌판에 둥지를 틀고 산다고 하더라도 국가를 위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들을 배척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호화로운 집에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놀고 있으면서 임금과 어버이에게 읍하는 자들을 어찌 하루라도 천지간에 놓아둘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영명한 자질에도 불구하고 불교와 참위(讖緯)의 설에 현혹되어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시고 존귀한 나라 임금의 신분으로 친히 회암사(檜菴寺)에 거둥하시어 부친과 임금을 무시하는 불교를 이끌어주시고 불충과 불효의 풍속을 만들어 우리 삼강오상(三綱五常)의 성전을 훼손하십니까? 신 등은 전하께서 중흥하신 훌륭한 업적으로 볼 때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또한 탄신일에는 전하께서 백관들을 거느리고 태비(太妃)께 축수를 올림으로써, 삼한의 신민들에게 전하께서 이룩하신 중흥과 효도의 성대한 덕을 보이셔야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지 않고 도리어 오랑캐의 종교를 좇아 구구하게 중에게 절하고 불공을 드려 중흥과 지치(至治)를 바라는 신민들의 여망을 저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사람의 힘을 다하게 하고 원망을 모으는 연복사(演福寺) 탑묘(塔廟)의 부역에 이르러서는 온 나라가 시끄럽고 사(士)와 민(民)들이 희망을 잃고 있습니다. 신 등은 모르겠습니다만, 공사에 쓰이는 목재는 귀신이 실어다주며, 소용되는 재물을 하늘이 내려주고 땅에서 솟아나는 것입니까? 내세의 복을 구하려다 도리어 현세에 환란을 초래할 것입니다. 신 등이 생각하기에 일단 바람과 먼지가 다시 어지럽게 일어나고 서리와 우박이 연이어 닥친다면 승려들이 방패와 창을 잡지 못하고 탑묘(塔廟)가 기근을 물리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옛날 후주(後周)가 불경과 불상을 헐어서 갑주와 병장기를 만들었지만, 제(齊)는 탑묘를 숭상하고 형법과 정치가 해이해져, 하루아침에 전쟁이 벌어지자 후주는 흥하고 제는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니 불교가 인간세상에 화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역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요(堯)·순(舜)과 삼대(三代)가 흥성함을 본받으시고, 제(齊)·진(陳)·양(梁)의 소(蕭)씨가 멸망했던 까닭을 거울삼아 위로는 태조의 유훈을 계승하고 아래로는 우리 유생들의 평소의 여망에 부응하십시오. 저 불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 병역과 부역에 충당하고, 절을 민가로 만들어 호구(戶口)를 늘리며, 그들의 책을 불살라 그 근본을 아예 근절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지급했던 토지는 군자시(軍資寺)에서 이를 맡도록 하여 군량을 넉넉하게 하고, 〈절에〉 소속된 노비는 도관(都官)에서 장악하여 각 관사(官司)에 나누어 주게 하소서. 그리고 불상과 놋그릇은 군기시(軍器寺)에 속하게 하여 병장기와 갑주를 수리하는데 쓰고, 절에서 쓰던 그릇들은 예빈시(禮賓寺)에 맡겨서 각 관사에 나누어 주게 하소서. 그런 뒤에 예의를 가르치고 도덕을 기르게 되면 몇 년을 지나지 않아 민심이 안정되고 교화가 행해지며, 창고가 가득 차고 재정이 튼튼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임금과 아비를 배반하여 인륜을 훼손하고 천리에 역행하던 자들이 더러운 구습을 버리고 떳떳한 〈인륜의〉 양심을 발휘하여, 부자와 군신의 윤리를 알고 부부의 도리를 알게 될 것이며, 남자는 밭을 갈고 여자는 베를 짜서 그 삶을 살면서 양껏 먹고 배를 두드리며 즐거움을 누릴 것입니다. 다스림을 달성하여 생기는 풍요함은 삼대(三代)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한(漢)·당(唐)을 넘어설 것입니다.
지금 아첨하는 신하 김전(金琠)이 못나고 어리석은 자질과 무지한 식견으로 전하의 뜻에 맞추느라 시비를 혼란시킴으로써, 아비와 임금을 무시하는 가르침을 부흥시키고 고금 성현의 도를 없애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태조께서 개국한 것은 모두 부처의 힘을 입은 것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불교를 배척하려는 사람들은 태조에게 죄를 지은 자라고 합니다. 태조의 성덕과 신공은 하늘과 인간에게 순응하여 요·순과 마음이 같고 탕(湯)과 무(武)왕의 행동을 본받은 것입니다. 삼한의 민은 우레가 치는 듯 그 위엄을 두려워했고, 부모를 대하듯 그 덕을 품었습니다. 비록 후위(後魏)처럼 나라 안의 중들을 모두 처형하고,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처럼 불상을 모두 녹여 돈을 주조했다 하더라도 저 승려들이 어떻게 하여 태조가 삼한을 통일하는 공을 이룰 수 없도록 하겠습니까? 우리 국가는 경인(1170, 의종 24)·계사년(1173, 명종 3) 이전에는 유학의 이름난 선비가 중국보다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당(唐)에서는 군자의 나라라고 하였고 송(宋)에서는 문물과 예악의 나라라고 하여 본국의 사신이 말에서 내리는 곳을 소중화지관(小中華之館)이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나 경인·계사년 이후로는 전쟁에서 죽지 않으면 산중으로 도피하여, 유학에 통달한 선비가 100에 1,2명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때 불교를 공부하는 어떤 자가 비로소 사악한 설을 만들어 위로는 신하들을 속이고 아래로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기만하여 태조 9세 〈전생의〉 초상을 만들고는, ‘태조의 전신인 아무개는 무슨 원주(院主)이며, 누구는 어떤 탑을 지었고 또 다른 아무개는 어떤 불경을 조성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몇 대 전생 태조는 어떤 절의 소였는데 몇 대 생(生)을 거쳐 왕위를 얻었고 돌아가신 뒤에는 이제 보살이 되었다.’라고 하며 이를 글로 만들어 목판에 새긴 다음 깊은 산에 간직하고 영원토록 속이려고 하였습니다.
현릉〈공민왕〉께서 이것을 보고 깊이 공경하고 믿었습니다. 이에 내불당(內佛堂)의 법석(法席)과 연복사의 문수회(文殊會)에서 강경(講經)하고 반승(飯僧) 하였습니다. 심지어 임금의 존귀함을 낮추어 중에게 절을 하고 스승으로 삼아 직접 제자의 예를 집행하였지만 갑인년(1374, 공민왕 23)에 이르러는 부처를 섬긴 복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 등은 모르겠습니다만, 태조 9세상은 석가(釋迦)와 달마(達摩)가 동방에 다시 태어나서 직접 태조를 천당(天堂) 불찰(佛刹)에서 친견하고서 이 초상을 만든 것입니까? 또 태조의 전생에 소로 있을 때나 원주로 있을 때 직접 본 것이 어떤 중이었습니까? 저들이 거짓말로 임금을 속여 태조가 소였다고 하니, 성자신손(聖子神孫)인 〈임금께서〉 어찌 이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있겠습니까? 아아! 올바른 학문이 드러나지 않고 인심이 바르지 못한데도 덕을 닦지는 않고 오로지 복만 구하며, 도를 알지 못하고 오로지 괴이한 것을 들으려 하니 어찌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애석하지 않겠습니까? 맹자(孟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배척하고 공자를 존숭한 이래 한(漢)의 동중서(董仲舒)와 당(唐)의 한유(韓愈)와 송(宋)의 정자(程子)·주자(朱子)가 모두 이 도를 받들어 이단을 물리쳤기에 천하 만세의 군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왕안석(王安石)과 장천각(張天覺) 등은 불교를 일으키고 풍속을 타락시켜, 천하 만세의 소인배가 되었습니다. 만약 동중서·한유·정자·주자와 같은 분들과 왕안석·장천각 같은 무리가 현재 함께 살고 있다면 전하께서는 동중서·한유·정자·주자와 같은 분들을 천하 만세의 법으로 삼겠습니까, 아니면 왕안석·장천각을 써서 오랑캐나 짐승의 종교에 앞장서시겠습니까? 신 등은 감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왕안석과 장천각이 좋아하던 것을 좇아 삼한 민(民)들의 머리를 깎아 집과 나라를 버리게 하며, 왕위를 헌신짝같이 여겨 산으로 들어가서 부처의 〈가르침을〉 구하시려면 김전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만약 동중서·한유·정자·주자의 학문을 좇아 인심을 바르게 하고 인륜을 밝히며 백성을 해치는 자들을 제거하여, 요·순과 삼대의 다스림을 흥기하고, 〈나라를〉 중흥하여 하늘처럼 영원한 왕업을 빛내시려면, 저 김전이라는 자를 도시에서 수레로 찢어 죽여 삼한을 만세토록 중흥하실 대성인(大聖人)이 거짓말에 현혹되지 않음을 보여주심이 옳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김전을 국가에 충성하는 신하라고 삼는다면 신우·신창 부자가 우리 태조와 열성(列聖) 31대의 제사를 단절시켰을 때 저 김전이 왕씨를 부흥시킬 계책을 세우기나 하였습니까?
겸대사성(兼大司成) 정도전(鄭道傳)은 하늘과 사람의 성명(性命)의 근원을 발휘하여 공자·맹자·정자·주자의 도학(道學)을 부르짖었으며, 불교가 오랜 세월 전해온 거짓말을 물리치고 삼한에 천년 동안 전해온 미혹을 깨뜨렸습니다. 이단을 배척하고 거짓된 설을 그치게 하였으며,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을 바르게 하였습니다. 결국 우리 동방의 참된 유학자는 이 한 사람뿐입니다. 이는 하늘이 전하께 고요(皐陶)·이윤(伊尹)·부열(傅說) 같이 보좌할 〈사람을〉 내려주어 중흥의 때에 요·순 및 삼대와 같은 융성을 일으키게 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불교를 배척하는 계책을 세운 정도전을 조종의 죄인으로 만드시려고 하십니까? 불교를 떠받드는 설을 아뢰는 김전을 충신으로 여기시는 것입니까? 이에 대해 신 등은 역시 알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정도전의 올바른 학문을 의심하고 김전의 잘못된 설을 믿는다면 어찌 천하 사람들의 조소를 사고 만세에까지 비난받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 등이 감히 아뢰는 이야기입니다. 다스림의 근본에서 인심을 바르게 하는 일을 버리면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대개 인심의 지향하는 것이 올바르지 못하면 그 근본이 망하게 됩니다. 단지 소소한 일에 매이면 말단이 되는 것으로 모두 구구한 것일 뿐입니다. 근원이 깨끗하지 못한데도 물이 맑을 수는 없으며, 또한 뿌리가 깊이 박히지 못한데도 가지가 무성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신 등은 오직 이단을 물리치는 것이 인심의 근본을 바르게 만들기에 이를 올리는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바쁜 정사의 여가에 특별히 유념하시어 거행하신다면 오늘날의 다행일 뿐 아니라 또한 만세에까지 영원하게 칭송을 받을 것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신 등의 말을 잘못된 것이라 여기지 마시고 받아들여주신다면, 신 등은 다시 전하를 위하여 통치의 방도를 만분의 일이나마 아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상소가 올라가자 왕이 크게 노하였다.
처음 사예(司藝) 유백순(柳伯淳)이 박초(朴礎) 등이 상소하려는 것을 알고 여러 생도들을 불러 말하기를, “천하가 넓으니 비록 이단이 있다 한들 우리 도를 해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생원(生員) 윤향(尹向)이 말하기를, “천하에 어찌 두 개의 도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유백순은, “여러 생도들의 뜻이 크긴 하지만 비록 글을 올리더라도 임금께서 반드시 듣지 않을 것이니 어떻게 정치에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윤향이 말하기를, “맹자께서 이르기를 ‘우리 임금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적(賊)이라고 부른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비록 재주는 없으나 어찌 감히 앞선 선현들의 격언에 등을 돌려 임금을 해치는 역적이라는 오명을 받겠습니까?”라고 주장하니 유백순이 끝내 금지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중 박초·윤향 및 한고(韓皐)·허지(許遲)·김권(金綣)·이자찬(李子撰) 등 15명만이 상서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따르지 않았다. 유백순이 다시 지신사(知申事) 성석용(成石瑢)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박초 등의 상소를 왕에게 보고하지 말아 달라.”라고 하자, 박초 등이 그 사실을 알고 논의하여 수업을 받지 않으려고 하니, 김자수 등이 그들의 무례함을 싫어하였다. 박사(博士) 김초(金貂)·김조(金租), 학정(學正) 정포(鄭包), 학록(學錄) 황희(黃喜) 등은 생원(生員) 서복례(徐復禮)가 상소문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해서 북을 울려 〈죄를 성토하고〉 내쫓아버렸다. 김자수 등은 김초 등이 장관(長官)에게 보고하지 않고 멋대로 생원을 쫓아낸 것에 대해 화가 나서, 김초 등의 가노(家奴)를 가두고 서복례를 불러 국학(國學)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김자수가 관아로 갔으나 김초 등이 뜰에서 내려와 영접하지 않자 김자수가 전문(箋文)을 올려 사직하였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신은 두소(斗筲)만한 작은 도량과 저력(樗櫟)같이 미미한 재주로 일찍이 언관(言官)의 직위에 있다가 먼 변방으로 유배되었고, 잠깐 군수(郡守)가 되었다가 갑자기 포승줄에 묶이기도 하였습니다. 매번 일로 인하여 직선적으로 대하다가 도리어 허물을 초래하고 화를 불러왔습니다. 그러던 중 전하의 은총 덕분에 갑자기 대사성(大司成)으로 승진해 영광과 행운을 받게 되었습니다. 또한 좌보덕(左輔德)을 겸하였지만 자리만 차지하고 제대로 직책을 수행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물러나 현명한 이에게 〈자리를〉 피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물며 아래 관리로부터 모욕까지 당했으니 어찌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겠습니까? 군자는 기미를 보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저는 여기서 멈출 곳을 안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허락을 내리시어 저의 어리석은 생각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고 김초 등을 순군(巡軍)에 하옥시켰다가 얼마 뒤에 석방하였다.
얼마 후 〈김자수는〉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다가 좌상시(左常侍)로 옮기게 되자 동료들과 함께 상소하여 말하기를, “연전에 중국 조정에서 파견한 환관 10명은 모두 본국 사람입니다. 그 중 요행으로 벼슬자리에 나아가려는 무리들이 혹은 창기(倡妓)에게 의지하고 혹은 친척에 줄을 대어 관작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억지로 〈그들의〉 청을 모두 들어주어 실직(實職)을 주거나 첨설직(添設職)을 내린 것이 거의 100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관직의 남발과 염치의 상실이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바라옵건대 해당 관청에 회부하여 그 직책을 모두 빼앗아 뒷사람들을 경계하소서. 또한 삼사(三司)의 관원 수가 15명에 이르지만 녹패(祿牌)에 서명하는 것 외에는 일이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나라의 전곡(錢穀)의 출납(出納)은 먼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보고하게 한 후, 도평의사사에서 공문을 보내 삼사가 정밀히 회계를 따지고, 수입을 헤아려 지출하게 한다면 재정을 거의 맞추어 절약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관리들이 놀고먹는다는 비난이 사라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따랐다. 곧이어 그는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임명되었다. 이후의 일은 본조의 기록에 나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