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12.26
허문회 교수의 ‘통일벼’ 개발
우리가 매일 식사하는 쌀은 벼를 찧어 껍질을 벗겨낸 것이며, 벼에는 여러 가지 품종들이 있다. 크게는 열대지역에 잘 적응하는 인디카 품종과 고위도 온대지역에 잘 적응하는 자포니카 품종으로 나눌 수 있다. 근래 우리가 밥으로 이용하는 것은 대부분 자포니카 품종이다. 세계적으로 벼의 품종은 5만여 개로 알려졌으며, 육종학자들은 더욱 우수한 벼 품종들을 개발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한 개의 벼 품종을 만드는 데에는 보통 5~10년이 소요되니, 육종학자가 일평생 만들 수 있는 벼 품종은 불과 몇 개밖에 안 된다.
쌀이 부족하던 보릿고개 시절
허문회 교수, ‘통일벼’ 개발에 이르기까지
ⓒ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당시 세계적으로는 키가 작은 반 왜성 품종의 밀과 벼가 생산성이 높다고 인정되었기에, 허문회 교수는 신품종 개량에 반 왜성 유전자를 이용하면서 인디카와 자포니카 품종의 장점을 결합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1965~1966년에 걸쳐 1개의 자포니카 품종과 2개의 인디카 품종을 교배하는 이른바 3원 교배를 실시했는데, 이 방법은 예전에 시도되지 않던 창의적인 육종방법이었다.
3원 교배를 통해 만들어진 잡종 집단으로부터 높은 생산성이 기대되는 벼들이 등장하자, 그는 이 중 우수한 벼 종자를 선발하고 교배하여 세대를 진전시켜 나갔다. 품종 육성에 걸리는 기간을 줄이기 위해 여름에는 한국에서, 겨울에는 국제미작연구소에서 벼를 재배했더니 1년에 2회 세대를 진전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육종사업은 육종연구시설이 비교적 잘 갖춰져 있는 농촌진흥청과의 협력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1971년에 ‘통일벼’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고, 1972년부터는 농가에 보급되어 재배되기 시작했다.
‘통일벼’가 가져온 변화
이끌어낸 허문회 교수(1927~2010). ⓒ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통일벼’가 가져다준 쌀의 자급자족은 우리나라 식량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통일벼에 약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열대에 잘 적응하는 인디카 품종의 유전자를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저온에 약했고, 맛도 자포니카 품종만 못했다. 허문회 교수를 비롯한 우리나라 육종학자들은 통일벼 품종의 약점을 개선하기 위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추진했지만, 아직도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는 못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통일벼’는 쌀의 과다생산에 대한 우려와 맛이 다소 떨어진다는 약점 때문에 재배면적이 줄어들게 되었다.
‘통일벼’의 개발은 우리나라의 식량자급을 가져다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작물육종 기술을 세계수준으로 격상시키는 데에 이바지했다. 또한, 실용적인 성과로 직결되어 나라의 안정과 발전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시대적 사명감과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허문회 교수의 헌신은 오늘날 우리나라가 발전한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공로를 기리고자 허문회 교수는 2010년에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http://www.kast.or.kr/HALL/)에 헌정되었고, 국립과천과학관에도 그에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최근 생명공학은 엄청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프론티어사업, 바이오그린사업 등 생명공학 연구사업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는 과학인들이 많이 있다. 앞으로 생명공학의 각 분야에서 우리나라를 일류국가로 도약시킬 제2 ? 제3의 ‘통일벼’가 탄생하기를 기대한다.
[교육팁]
확대경으로 볍씨의 겉모양을 관찰해본다. 껍질을 벗겨 낸 뒤 속모양도 관찰해본다.
2. 볍씨 고르기
3. 벼의 한살이 관찰하기
[교육과정]
글 / 고희정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교수 heejkoh@snu.ac |
통일벼를 개발한 식물육종학자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1970년대 초반 학교에 다닌 중장년층이라면 점심시간마다 행했던 도시락 검사를 기억할 것이다. 도시락 뚜껑을 열어놓으면 선생님들이 일일이 돌아다니며 쌀밥만 싸온 학생이 없는지 검사하곤 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도시락 윗면에만 보리밥을 입혀 오는 학생들도 있었다.
정부가 이 같은 혼분식장려운동을 한 까닭은 그 당시만 해도 쌀 생산량의 부족으로 전 국민이 모두 풍족하게 먹을 만한 쌀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쌀밥은 왕이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으며 평민들은 조나 보리 같은 잡곡을 먹어야 했다.
그러다 관개시설이 잘 정비돼 모내기를 전국적으로 실시할 수 있게 된 조선 영조 때에 이르러서야 일반 백성들도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단위면적당 쌀 생산량은 현재의 10%에 불과해 봄만 되면 항상 보릿고개에 시달려야 했다.
전의 모습. ⓒ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
우리나라가 역사상 최초로 주곡인 쌀의 자급자족에 성공한 것은 1976년부터였다. 허문회 박사가 개발한 ‘통일벼’가 재배되기 시작함으로써 그 뛰어난 생산량에 힘입은 결과이다. 허문회 박사는 식량이 부족했던 우리나라에 품종 육성을 통해 주곡인 쌀 자급의 토대를 제공한 세계적인 식물육종학자다.
그는 1927년 1월 21일 충북 충주시 소태면에서 태어나 청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954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농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중앙농업기술원과 농촌진흥청의 전신인 농사원 농사시험장에서 근무하다가 1959년 미국 텍사스 A&M 대학교로 연수를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쌀과 밀의 육종 연구분야의 아버지로 불리는 헨리 비첼(Henry Beachell) 박사를 만나 벼와 곡물의 육종에 관한 실질적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삼원교배라는 창의적 방법으로 통일벼 개발
1960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교수로 임명된 그는 록펠러재단에 의해 1962년 필리핀에 설립된 국제미작연구소(IRRI)에서 1964년부터 2년간 근무했다. 이때부터 그의 ‘통일벼’ 육종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가 IRRI에 파견된 애초의 목적은 품종 개량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면서 열대형 벼인 인디카 종 가운데 우리나라에 도입할 수 있는 종을 골라오기 위해서였다. 흔히 안남미로 불리는 인디카 종은 열대에 적응한 벼로서 각종 질병과 해충에 강하며, 생산성이 높은 특징을 갖고 있다.
그곳에서 거의 모든 인디카 종을 살펴보며 연구한 허문회 박사는 인디카 종을 한국에서는 절대 재배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인디카 종과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자포니카 종을 교잡해 신품종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했다.
온대형 벼인 자포니카 종은 온대 북부에 적응한 벼로서 낮은 온도에 강하며 우리 입맛에 맞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인디카 종과 자포니카 종은 종간 거리가 멀어서 교배 기술이 까다로울 뿐 아니라 교잡을 해도 거기서 태어난 잡종은 불임이 되어 종자를 맺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일본 학자들도 이 두 품종의 우수한 특징을 가지는 잡종 쌀을 개발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매달렸지만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그러나 허 박사는 자포니카와 인디카를 고배시킨 뒤 불임이 아닌 종자들만 골라 다시 인디카와 교배시키는 ‘원연종 간 삼원교잡(멀리 떨어진 3개 종 교잡)’으로 통일벼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방법은 예전에 시도되지 않던 창의적인 육종 방법이었다.
그 같은 방법으로 냉온에 견디는 성질이 좋은 인디카종 TN1과 일본의 벼 가운데 출하시기가 빠른 유카리라는 자포니카종, 그리고 생산성이 뛰어난 인디카 교잡종 IR8을 가지고 삼원교잡을 해서 ‘IR667’이라는 통일벼 품종을 탄생시켰다. 우리나라의 쌀 자급 성공시켜
통일벼는 키가 작으면서도 줄기가 두텁고 이삭이 크며, 잎이 곧게 뻗어 태양빛을 이용하는 효율이 높아 생산성이 좋다. 당시 재배되었던 자포니카 품종에 비해 30% 이상 많은 쌀을 생산할 수 있었다.
1972년부터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한 통일벼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1976년 3621만 석의 수확량을 기록하면서 우리나라의 쌀 자급을 성공시켰다. 1977년에는 전국 평균 1000㎡당 494㎏의 수확으로 세계 최고 기록을 세웠으며, 1978년에는 전국의 논 76%에서 통일벼를 재배해 1000㎡당 평균 생산량이 500㎏에 근접했다.
허문회 박사는 통일벼를 개발한 이후에도 통일벼가 가지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했을 뿐만 아니라 작물 육종기술 및 육종학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연구를 수행했다. 특히 간척지에서 재배하기 위해 1990년에 개발한 ‘HP3319’는 당시 세계에서 내염성이 가장 강한 종으로 인정받아 국제미작연구소에서 내염성 모본으로 사용할 것을 세계 각국에 권장할 정도였다.
이외에도 허 박사는 우리나라 및 동북아 벼 재배의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연구에 몰두해 벼의 기원과 분화 및 동북아 전파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남겼다. 또한 그는 서울대 농대 교수로 30년 이상 재직하면서 벼 연구과 더불어 후학 양성에도 앞장서 우리나라 농학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이 같은 공로로 허문회 박사는 2010년 9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으며, 그로부터 2개월 후인 그해 11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2011년에는 고향인 충주시의 조동리 선사박물관에도 그의 유품과 일대기를 볼 수 있는 전시실이 만들어졌다.
그가 개발해 우리나라 성장의 원동력이 된 통일벼는 1992년 정부가 수매를 중단한 이후 농촌에서 사라졌다. 밥맛이 떨어지는 통일벼의 단점을 보강하면서 수확량도 많은 품종이 잇달아 개발됐을 뿐 아니라 비료와 장비의 발달로 자포니카 종만으로 자급자족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개발한 통일벼는 우리가 사용하는 50원짜리 동전 뒷면에 새겨져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이성규 객원편집위원다른 기사 보기2noel@paran.com저작권자 2015.03.18 ⓒ ScienceTime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