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뛰어든 외국인 노동자의 24시
내쫓지 마세요, 험한일 마다않잖아요
‘법 밖의 삶’을 한번 함께 살아보겠다는 시도는 성사부터 쉽지 않았다.
불법체류 외국인노동자와 함께 일하고, 그들과 함께 잠자며, 그들의 삶이 녹아든 기사를 써보겠다는 제안에 사장들은 모두 손사래를 쳤다. “한번이라도 법을 어겨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불안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란 대답과 함께. 외국인노동자를 고용한 중소사업주들 역시 외국인노동자와 별로 떨어지지 않은 음지에 있었다. 언론 역시
그들을 단죄하려고 했을 뿐, 이해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구원의 손길은 성공회 남양주교회의 이정호 신부한테서 왔다. 외국인노동자들을 위한
‘샬롬(이스라엘어로 평화란 뜻)의 집’을 10년 넘게 운영해온 이다. 노동과 운동으로
검게 그을린 얼굴의 이 신부는 그곳 외국인노동자들에겐 ‘모세’요, 공장 사장들에겐
중재의 지혜를 주는 ‘솔로몬’과도 같은 존재다.
약속한 지난 9일, 춘천으로 향하는 46번 국도를 달려 ‘체험, 삶의 현장’에 닿았다.
대한민국 최대의 가구단지 ‘성생공단’. 거칠게 시멘트 벽을 바른 납작한 건물들이
산허리를 감아 겹치고 겹쳐 있었다. 가구공장 511개. 공장 옥상에는 색바랜 컨테이너가 하나씩 놓여 있다. 불법으로 설치한 외국인노동자들의 기숙사다. 이 땅에 불법으로
머물고 있는 이들은 잠자리마저도 ‘불법’이었다. 공단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은 모두
1400여명이었다.
기자가 일할 곳은 어느 침대공장이었다. 그곳에는 필리핀, 방글라데시, 나이지리아, 몽골 등 뒤섞인 국적의 노동자 9명이 일하고 있었다. 하루살이 ‘시다바리’(보조) 일꾼이 할 수 있는 일은 찾기도 쉽지 않았다. 결국 침대커버를 정리해 옮기는 일과 침대 매트리스를 만드는 솜, 부직포, 겉감과 안감 등의 자재를 나르는 일이 주어졌다. 무게
30~40㎏, 길이 3m가 넘는 자재를 옮기는 일은 결코, 결코 쉽지 않았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자재를 허리에 얹다 번번이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기자의 모습에 함께 일하던 필리핀 출신의 루하미(32·가명)는 자주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13년째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한국 공장에서 역시 외국인노동자로 일하던 필리핀인 아내를 만나 아들까지 낳았다. 6살난 아들은 ‘차별’이 싫어 일찌감치 필리핀으로 보냈다. 부인 나나(33·가명)는 남편이 일하는 직조기 옆에서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다. 나나는 한국에서
앞으로 10년을 더 일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고향마을에서 슈퍼마켓 주인이 되는 게 나나의 꿈이다.
침대 스프링 작업장에는 나이지리아 남자 2명, 2층 매트리스 작업장에는 방글라데시인 2명과 필리핀 여성 1명, 그리고 몽골인 2명이 일했다. 이들과 함께 일하는 한국인은
8명. 한국인은 한국인끼리, 외국인은 외국인끼리 따로 작업조가 짜여 있다. 괜한 말썽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한 ‘노하우’라고 사장은 설명했다. 국적을 뒤섞어 놓은 것도 같은 이유다. 한 나라 출신만 고용하면 집단행동이 많아 골치 아프기 때문이라는 거다.
사장의 ‘노하우’ 덕분인지 공장은 평온해 보였다. 그러나 한꺼풀만 벗기면 말 못할
아픔들이 고스란히 숨어 있다. 말이 없던 루하미는 “어려운 일 없느냐”는 물음에 “외국인들끼리 너무 싸운다”고 했다. “사는 게 답답해서, 고향이 그리워서, 때로는 공장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술에 취해 다같이 힘든 사람들에게 주먹질을 해댄다는 것이다. 다치고 병원비 물고. 이중의 손해였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
페미(32)는 지난해 남동생을 잃었다. 사소한 시비 끝에 한국인 남자에게 “맞아 죽었다”고 했다.
하루치 노동을 끝내고 공장을 나섰다. 방글라데시 노동자들과 하룻밤을 함께 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12년째 일하고 있는 샤운(31)과 8년째를 맞은 라자(27)가 기꺼이 자신들의 방에 이방인을 맞아들였다. 4평 남짓한 한달 20만원짜리 단칸방에는 또다른 1명
등 모두 3명이 함께 생활했다. 라자가 “맥주 한잔 하자”고 했다. 외국인노동자들이
주로 찾는 한 맥주집에 자리잡았다. 술 한잔에 샤운과 라자는 말문이 터졌다. 지난
1991년 한국에 온 샤운은 처음 3개월은 한국음식만 먹으면 토했다고 했다. 말을 알아듣지 못해 맞은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짙은 눈썹이 매력적인 라자는 방글라데시에 있는 부모님이 보고싶다며 울먹였다. 샤운은 98년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가지 못했다. 불법체류자이기에 한번 출국장을 나서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오려면 1만달러(1200만원)를 주고 브로커를 통해야 한다. 그 이후 샤운은 향수병에 걸렸다. 향수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술이다. 그는 술을 급하게 마셨다. 고향이 그리울 때 그는 술을 마신다. 가구공장에서 뽀얗게 날리는 분진과 페인트, 시너의 독성 때문에 나빠진 폐가 아파올 때도 그는
술을 마신다. 다들 지금은 젊음으로 버티고 있지만, 고향에 돌아가면 어떤 병이 날지
모를 사람들이다.
“우리는 고국에서는 먹고 살 길이 없어요. 그래서 한국 와서 일하는 거예요. 한국에
‘상부상조’라는 말이 있잖아요. 이제 이런 험한 공장은 우리 외국인 없으면 안 돌아가요. 그런데 왜 우리를 계속 쫓아내려 해요? 우리는 한국에 해를 끼친 것은 하나도 없어요.” 라자의 말이었다. 샤운이 보탰다. “때리면 맞죠, 월급 밀려도 군소리 없죠, 일
시키는 대로 하죠, 데모 안하죠. 이제 사장들은 한국사람 안 써요. 일 시키기 편한 외국인 써요.”
한국인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라자는 아직 한국인 친구를 한 명도 사귀지 못했다고 했다. 30년 전 전태일 열사가 “대학생 친구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것처럼. “지난해 월드컵 때 우리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모두 한국 응원했어요. 같은 아시아인이고, 한국에서 일하고 있고, 한국 덕분에 살고 있으니, 우리는 ‘한국편’일 수밖에요.”
라자의 말은 풀잎사귀에 손가락 베듯 한국인 기자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우리는 언제쯤 ‘라자편’이 될 수 있을까? 깊어가는 공단의 밤, 기자는 라자에게 술잔만 권했다.
남양주/이태희 기자 3Dhermes@hani.co.kr">hermes@hani.co.kr
느낌표 '아시아! 아시아!' 김영희 피디 ; 학력높은 미남만 출연? 편견깨야 인권 관심생겨
“외국인노동자들도 우리와 똑같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일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얘들아, 행복하니’ 등 ‘공익 버라이어티쇼’라는 새
장을 연 문화방송 의 김영희(43) 피디. 그는 두달째 아시아계 외국인노동자들의 가족상봉 코너인 ‘아시아! 아시아!’에 매달리고 있다. 그는 “33만명의 주한 외국인노동자 대부분이 아시아인”이라며 “외국인노동자들이 우리보다 열등하고 미개하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의식적으로 ‘학력이 높고, 얼굴이 잘 생기고, 한국말을 잘 하는’
외국인노동자들을 골라 출연시킨다”고 했다. 편견이 사라져야 그들의 인권에 대한 관심도 생긴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특히 외국인노동자의 ‘의료문제’에 관심이 많다. 지난달 19일 출연자였던 인도 출신 노동자 모힌달 싱은 급성간염을 앓다 숨졌다. 열흘만 일찍 병원에 갔어도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방글라데시 출신 비뿌는 손목에 생긴 종기를 “연필깎는 칼로 자르라”는 업주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가 피가 멈추지 않아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는
“전쟁터에서 적군이 다쳐도 치료해주는 게 사람의 도리”라며 “우리나라에 와 일하는 외국인들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주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그는 “한국사람들은 따뜻한 감성을 갖고 있다”며 “외국인노동자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서는 시사고발 프로그램 보다 오히려 감성을 자극하는 오락 프로그램이 더 적합하다”고 이야기했다. 실제로 라나의 죽음이 방송된 뒤, 청와대와 노동부 홈페이지에는
‘외국인노동자 인권대책’을 주문하는 글이 수도 없이 올라왔다. 그는 “매주 2천만명 정도의 한국인에게 한번쯤 외국인노동자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것이 ‘아시아! 아시아!’ 프로그램의 진정한 기획의도”라고 말했다.
전정윤기자 3Dggum@hani.co.kr">ggum@hani.co.kr
외국인노동자들과 남희석팬클럽등 축구대회 ; 축구공에 편견과 오해 실어 '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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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1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한신대 신학대학원 운동장에서 외국인노동자 체육대회를
마친 뒤, 외국인노동자와 개그맨 남희석씨 등 한국인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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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한신대 신학대학원 운동장은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 외국인노동자 100여명의 유쾌한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열린 이날 체육대회는 서울 외국인노동자센터가 마련한
행사로, 개그맨 남희석씨와 그의 팬클럽인 ‘앤에이치에스’(NHS), 사법연수원 노동·인권 법학회 회원 등 한국인 50여명이 함께 했다.
인도네시아, 방글라데시, 사법연수원, 앤에이치에스 등 4개팀이 참가한 축구대회는 이날 행사의 절정이었다. 인도네시아팀과 예선전을 치른 개그맨 남희석(33)씨는 “에이(A)매치는 처음”이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이날 결승전은 인도네시아와 사법연수원팀이 맞붙어 승부차기 끝에 인도네시아의 우승으로 끝났다. 우승상금 10만원을
받은 인도네시아팀 주장 삼수아(27)는 “인도네시아 친구들과 축하파티를 열겠다”며
기뻐했다. 사법연수원 인권법학회 회원 권택곤(30)씨는 “외국인노동자들과 함께 땀흘리고 살을 부대끼면서 많이 친해졌다”며 ”앞으로 이들에게 법률적인 문제가 생길
때면 언제든지 달려가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 행사를 도운 최의팔 외국인이주노동자 대책협의회 대표는 “외국인노동자 문제의
상당수는 서로가 서로를 잘 몰라 생겨난 편견과 오해 때문”이라며 “오늘처럼 서로
자주 만나고 어울리다 보면, 모든 게 다 잘 풀릴 것”이라고 말했다.
글·사진 김영인 기자 3Dyiye@hani.co.kr">yiye@hani.co.kr
코리안드림 애환 서린 ‘그들만의 해방구’
서울안의 외국 '구로구 옌볜동' '대학로 마닐라' ; 안산선 주민 1만-아시아계 2만 '국경없는 마을'
"문화적 이질감 넘어 색다른 삶의 방식 이해를"
“자장면요 그런 건 다른 동네 가서 물어봐요.”
지난 13일 오후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가리봉시장 안 춘광반점. 이곳의 주메뉴는 가지를 기름에 튀긴 ‘쓰어치에즈’, 쇠고기와 두부요리인 ‘즈란뉴로’, ‘말라두오후’
등이다. 모두 중국 본토 음식이다.
500여m 길이의 이곳 가리봉시장 큰골목 양쪽으로는 자장면 없는 중국집, 중국노래방,
중국식료품점 등이 빼곡이 늘어서 있다. 거리 곳곳에서는 중국 시시티브이(CCTV) 방송이 흘러나오고 가게 안에서는 중국어와 한국말이 뒤섞여 오간다. 마치 옌볜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하다.
1970~80년대 구로공단 노동자들의 애환이 서려 있던 가리봉시장이 이처럼 중국동포들의 해방구가 된 것은 90년대 중반부터다. 구로공단 공장들이 서울 외곽으로 빠지면서 빈 자리를 동포들이 자연스레 메운 것이다. 이제 이곳은 ‘구로구 옌볜동’으로 불리고, 대림동, 가산동, 독산동 일대로 그 영역을 점점 넓혀가고 있다. 현재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동포와 중국인들은 3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도권 일대에는 이처럼 외국인노동자들이 모여 살면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이뤄나가는 곳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로 자주 쓰이는 이런 ‘게토’(외국인 집단거주지) 사회는 한국 속에 이국적인 모습을 심어주는 것은 물론 한국인과 외국인 노동자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이해하게끔 해 주는 다리 구실을 해내고 있다.
‘국경없는 마을’, ‘코시안 타운’으로 불리는 경기도 안산역 앞 원곡동은 외국인
노동자 2만, 한국인 1만1천으로, 주민 가운데 외국인 노동자가 더 많다. 이곳의 한국인과 외국인노동자들은 처음에는 문화적 차이로 티격태격하기도 했지만, 해가 갈수록 아시아인들의 공통정서인 ‘정’으로 서로를 묶고 있다. 2001년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대대적인 불법체류자 단속을 벌였을 때는 지역주민들이 나서 단속중단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또 외국인 노동자들은 아이엠에프 이후 공동화되어 가던 이 마을에서 최대 소비자층으로 부상해 이 지역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이곳에서 외국인노동자센터를 운영하는 박천응 목사는 “외국인 노동자들과 한국인 주민들은 이제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이웃이 됐다”고 말했다.
서울 혜화동 성당에서 동성고등학교 정문 아래쪽 500여m 거리 주변은 매주 일요일 ‘리틀 마닐라’로 변한다. 일요일인 지난 11일 오후 서울 혜화동 성당 주변 거리는 필리핀 사람들로 넘쳐났다. 도로변 트럭에는 담배·과자·과일·신문 등 ‘필리핀제’ 물건들이 가득했다. 이곳에 필리핀 노동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지난 95년부터다.
서울 자양동 성당에서 한국인 수녀가 몇몇 필리핀인들과 미사를 드리다 사람 수가 불어나자 혜화동 성당으로 옮기면서 근처에 필리핀 게토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역삼동의 한 소방기구업체에 다니는 준 파비아(41)는 “필리피노들은 하루 16시간씩
고된 노동을 하다가 1주일에 단 하루 이곳에 모여 서로 위로받는다”고 말했다.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살던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에도 90년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동남아와 아프리카 등 16개국에서 온 1700여명의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곳의 가구·도금·기계류 공장에서 일하며 나라별로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특히 이 지역 외국인 노동자 중 방글라데시인 비율은 절반을 넘는다. 이들은 돈을 모아 이슬람 성원(모스크)을 세웠고,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 샤이브’까지 초청해
정식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슬람 금식기도일인 라마단 기간에는 동네가 조용해지고,
방글라데시 축제일에는 전국의 방글라데시인들이 모여들어 축제를 벌인다.
이밖에도 외국인 노동자 ‘게토’는 의외로 많다. 손기술이 좋은 베트남 노동자들은
봉제공장이 밀집한 동대문구 창신동 일대에 집중 거주한다. 성동구 성수공단에는 타이
등 동남아시아계 노동자들이 나라별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미얀마, 네팔 등 불교국가 출신들은 부천 서광사 등에 본국의 고승을 모셔와 대규모 법회를 열기도 했다. 미군들이 주로 찾는 이태원에도 최근 나이지리아, 가나 등 아프리카인들이 몰려들어 아프리카인 쪽방촌, 아프리카 전통음식점도 생겨났다.
전북대 사회학과 설동훈 교수는 “게토는 외국인 체류자들의 주류사회 편입을 더 늦추고, 우범지역이 될 가능성도 크다”며 “그러나 새로운 문화를 소개하고 전파하는 긍정적 효과도 크다”고 말했다. 김성재 신윤동욱 황준범 김진철 기자
3Dseong68@hani.co.kr">seong68@hani.co.kr">3Dseong68@hani.co.kr">seong68@hani.co.kr
게토란 무엇인가 ; 중세이후 '유대인 거주지'가 기원
이탈리아어에서 유래한 ‘게토’(ghetto)란 원래 중세 이후 유럽 여러 지역에서 유대인 격리를 목적으로 구획을 정한 유대인 거주지역을 말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 나치가 유대인 차별을 위해 바르샤바 등 곳곳에 게토를 만들었다.
20세기 들어 미국에서 생겨난 게토는 인위적으로 만들었던 이전의 게토와 달리 뉴욕의 흑인밀집지역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슬럼이었다.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등 서부지역에서는 철도건설 당시 필요했던 노동자들이 이주·정착하면서 아시아권 국가들의 게토가 자리잡았다. 코리아타운도 이 연장선에 있다. 뉴욕의 푸에르토리코인촌, 마이애미 쿠바인촌 등 중남미인 게토도 유명하다. 영화 〈대부〉, 〈록키〉
등의 무대였던 시카고, 필라델피아 등에도 이탈리아인 게토가 형성돼 있다.
유럽에는 베를린 터키인촌, 파리 알제리·세네갈인촌, 런던 파키스탄촌 등이 있다. 프랑스의 축구영웅 지네딘 지단도 알제리인들이 모여 살던 마르세유의 빈민가에서 자라났다.
이들 지역은 주로 19세기 말~20세기 초 제국주의전쟁 시절 피식민지국가의 국민들이
이주·정착하면서 생겨난 지역이다. 외국의 게토 거주민들은 아직도 주류사회와 고립돼 높은 수준의 부와 복지를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 또 냉전해체 이후 동유럽 국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곳도 경제적으로 낙후한 이들 게토 지역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신생 게토를 또 만들어내고 있다. 가까운 일본에는 가와사키 등에 한국인 불법취업자 집단 거주지역이 형성돼 있다. 김성재 기자
한국내 게토의 역사…서울·수도권 공단 주변에 둥지
법무부 체류심사과는 올해 3월 말 현재 국내 불법체류 노동자를 모두 28만7천여명(그래프 참조)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한국 입국은 대략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린 1986년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이들이 게토를 형성하게 된 것은 90년대 초부터다. 서울에는 이전에도 용산의
미군촌, 방배동 프랑스인촌, 이촌동 일본인촌 등이 있었지만 최근 공단지역과 서울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불법체류자들의 게토와는 성격이 다르다.
서울의 강남·서초·용산구 등은 주로 전문기술직 노동자가, 금천·구로·성동구와
안산·인천·부천·수원·일산·성남·마석·동두천 등에는 단순기술직 노동자들이
모여 살고 있다. 출신국도 점차 다양해져 최근에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와 나이지리아, 카메룬, 가나 등 아프리카인 노동자도 몰리고 있다.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은 낮은 거주비용과 노동시장 근접성 때문에 공단이나 ‘지하철 노선의 맨끝’인 서울 외곽에 주로 게토를 형성하고 있다. 김성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