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 찬미
오늘 제1독서에는 이스라엘의 세 번째 임금 솔로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이야기 중 모범적인 왕의 이야기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이야기 중 하나인 오늘의
독서는 솔로몬이 왕이 되고 난 뒤 꿈속에서 하느님께 '분별력'을 청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라고 물으시는 하느님께,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당신 종을 제 아버지 다윗을 이어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만,
저는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아서 백성을 이끄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장신 종은 당신께서 뽑으신 백성,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셀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당신 백성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어느 누가 이렇게 큰 당신 백성을 통치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청합니다.
그는 자신을 '어린아이'라 칭하며 겸손을, 그리고 '셀 수도 헤아릴 수도 없는 당신 백성
가운데'라고 말하며 자신의 나약함을, '듣는 마음'을 달라고 청하며,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왕이 되게 해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고, 덕분에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분별하는 마음에 더해서
지혜까지도 받습니다.
솔로몬의 분별력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쪽은 이 여자에게 ,
또 반쪽은 저 여자에게 주어라."라고 한 명판결을 통해 드러납니다(1열왕 3,16-27 참조).
그리고 백성의 말에 귀 기울이는 왕이 되기를 원했던 그가 이룬 왕국은
"유다와 이스라엘은 그 수가 바다의 모래처럼 많았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행복하게
지냈다."(1열왕 4,1-5,8 참조)는 구절 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느님을 위한 성전을 건립했고(1열왕 5,15-8,66), 공공 노역을
조직하고(1열왕 9,15-25), 외국과 무역을 추진하여 큰 영화를 누립니다."(1열왕 9,26-10,25)
그러나 그는 이런 모든 일들을 하면서, 청동 기술공 이방인 기술자 히람을 불러들였고,
솔로몬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이방인과 결혼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스라엘 땅에는
이미 정착 초기부터 아모리족, 히타이트족, 프리즈족, 히위족과 여부스족 가운데 살아남은
족속들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강제 노동에 동원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종교 혼합 현상이 일어났고 솔로몬도 이방 공주들을 후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이 섬기는 이방신들도 받아들여 섬김으로써 종교 혼합 현상을
가속화시켰습니다(1열왕 11,1-8).
이러한 범죄에 대하여 하느님은 진노하고 이스라엘을 분단시킬 것을
선포하셨습니다(1열왕 11,9-13).
솔로몬 시대는 경제적으로 풍요를 가져온 시기였으나, 소수가 이러한 부를 독점하여
상류층을 형성함으로써 노동자, 노예, 가난한 자 등 민중과 계급 차별이 생기고 빈부의
격차가 심화되었습니다. 또 소수의 상류층이 권력을 독점한 중앙 집권적 국가였습니다.
그 결과 솔로몬 치하에서 이스라엘은 판관 시대의 민주적 지파 체체가 무너지고 계층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그래서 강제 노동, 막중한 세금 부담, 빈부 격차, 계층 차별,
그리고 강제 노동 등에 시달린 민중들은 더 이상 이를 견디지 못하고 솔로몬에게 반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불만과 반발은 특히 북쪽 지파 사람들이 더욱 심했는데, 그 이유는
솔로몬이 다윗보다도 더 예루살렘과 유다 지파에 편중된 정책을 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예로보암을 앞세운 북쪽 지파들은 불만을 품어 오다가 (1 열왕 11,26-40) 그의 아들
르하브암 때 남부 유다에 등을 돌리고 갈라져 나갔습니다(1열왕 12,1-19). 이 분단의
근본적인 책임은 솔로몬에게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늘나라를 알아보는 지혜를 허락받았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왕권이
강력해져 감에 따라 자신의 방법으로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느님 앞에 어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가장 강성했던 때는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지금도 다윗 시대의 강성함과 솔로몬 시대의 영화를 그리워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시대가 다시 오는 것이 메시아의 시대라고 믿고 있지요. 다윗과 솔로몬
같은 위대한 메시아가 나타나 그들을 세속적으로 강성한 백성으로 이끌어 줄 것으로
믿었으며, 그 시대야 말로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한 '때'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지혜'는 "하늘나라를 알아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고 표현하시며 설명하십니다.
처음 말씀하신 '밭에 숨겨진 보물'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안에서 볼 수 있는 하늘나라의
모습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웃을 돕고, 남을 배려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모습이 하늘나라의 모습일
것이라고는 생각하고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단지 착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뿐이지요. 그러나 그 모습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계명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또한 말씀하신 '좋은 진주를 찾는 상인'은 우리를 말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진정한 정의, 진정한 평화, 진정 모두 잘 살 수 있는 세상' 등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이상향을 그리워하며, 그런 세상이 지금 우리 안에서 완성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은 그렇지 않죠.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모두는 아마도 좋은
진주를 찾아다니는 상인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진주는 바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 모든 것을 알았을 때,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사고, 그 진주를 삽니다. 모든 것을
다 판다는 것은 바로 진정한 '회개'일 것입니다. 회개를 이야기하면 잘못을 반성하고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맹세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회개'는 예수님께서 이르신 대로 사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그리고 하늘나라는 모든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그물처럼, 구분 없이 모든 이들에게
복음 말씀의 그물을 던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미 온 세상을 덮 고 있습니다. 온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 말씀의 그물은 온 세상을
덮었고, 모든 이들은 그 그물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이들이 하늘나라에 드는 것은
아니죠. '가톨릭'이라는 말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모든 이에게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이 모든 이의 가슴에 와닿고 심겨져 '회개'로 이끄는 것은 아니죠. 우리의
초대에 모든 이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니고, 나온다고 하더라도 나온 이들 모두가
하느님 뜻에 맞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결국 솔로몬은 왕이 되어 하늘나라를 실현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안에 있는
옛 것도, 새것도 꺼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며 그의 왕권이 돈독이 되어
가기 시작하고, 하느님의 도움으로 끝내 강력한 왕권을 가졌을 때, 결국 그는 하느님께
등 돌리고, 세상의 것을 우선으로 하여, 권력을 탐하고, 권력에 취해 재물을 탐하고, 백성의
말에 귀를 닫아 버리는 사람이 되어, 옛 것을 꺼내는 율법 학자 같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늘나라는 온갖 수고를 다하고 노력을 다하고 온 힘을 다하여 찾아내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느 날 우연히 예수님께로 초대받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참진리를 찾으려
애쓰다 예수님 앞에 설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쩌다 보니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한
가운데 같이 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진리 한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참 지혜'일 것입니다.
주님! 우리 모두가 당신 만이 참 진리임을 깨닫게 하시고, 그 깨달음을 통해 오로지 당신께만
모든 희망을 두도록 이끌어 주소서. 우리가 당신께서 허락하시는 분별력을 통해 세상 안에서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당신께서 베푸시는 지혜가 충만하게 하소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그래야만 하느님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