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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명 | 한자명 | 국가 | 정의부 |
관평 | 関平 | 촉나라 |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명장 관우의 아들. |
마량 | 馬良 |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 | |
마초 | 馬超 |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 | |
방통 | 龐統 |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이자 군사. | |
손건 | 孫건 ·乾 | ||
위연 | 衛演 |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였으며 유비가 한중왕이 되었을 때 한중태수로 임명되었다. | |
위연 | 魏延 |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였으며 유비가 한중왕이 되었을 때 한중태수로 임명되었다. | |
유심 | 劉諶 | 중국 삼국시대 촉한을 건국한 유비의 손자. | |
장완 | 蒋琬 |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대사마를 지냈다. | |
제갈균 | 제 ·諸葛均 |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신하여며 제갈량의 동생이다. | |
제갈량 | 제 ·諸葛亮 |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정치가 겸 전략가.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 |
조운 | 趙雲 |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무장. 유비와 그의 아들 유선을 보좌하여 무훈을 세우고 익군장군·정남장군 등을 지냈으며, 순평후에 추증되었다. | |
팽양 | 팽 ·彭羕 | 노비에서 촉한의 신하로 발탁되었으나 모반의 야심을 드러내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 |
황충 | 黄忠 |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 | |
가규 | 賈逵 | 위나라 | |
공손연 | 公孫淵 | 중국 삼국시대 연나라의 왕. 오나라를 뿌리치고 위나라 편에 들어 요동태수가 되었으나, 그 뒤 자립해 연나라 왕을 자칭했다. | |
곽가 | 郭嘉 | ||
곽회 | 郭淮 | 중국 위나라의 장수이자 정치가. | |
동소 | 董소 ·昭 | 위나라의 문신으로 사도의 자리까지 올랐다. | |
만총 | 満寵 | ||
맹달 | 맹 ·孟達 |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장수였다가 위나라에 투항하였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 |
문빙 | 文聘 | ||
서황 | 徐晃 | 중국 위나라의 장수. | |
악진 | 楽進 | ||
양부 | 楊阜 | 중국 위나라의 신하. | |
왕쌍 | 王双 | 위나라 조예 휘하의 장수. | |
우금 | 于禁 | 중국 위나라의 장수. | |
장료 | 張遼 | 중국 위나라의 장수. | |
장합 | 張郃 | 중국 위나라의 장수. | |
정욱 | 程昱 | ||
조방 | 曹芳 |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 제3대 황제. | |
조비 | 曹丕 | ||
조인 | 曹仁 | ||
曹操 |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시조. 황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두각을 나타내고 동탁이 죽은 뒤 헌제를 옹립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 ||
조진 | 曹真 | ||
조홍 | 曹洪 | ||
조홍 | 趙弘 | ||
조환 | 曹奐 | 위나라의 제 5대 황제. | |
조휴 | 曹休 | 위나라 황제 조조의 조카였으며 전투에서 많은 공적을 세웠다. 오나라를 토벌하는 전투에서 대패하자 수치심에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 |
종요 | 鍾繇 | ||
진군 | 陳羣 | 중국 위나라의 중신. | |
최염 | 崔琰 | ||
하후돈 | 夏侯惇 | ||
하후란 | 夏侯蘭 | 중국 위나라 하후돈의 부하. | |
하후무 | 夏侯楙 | 위나라 하후돈의 둘째 아들. | |
하후상 | 夏侯尚 | ||
하후위 | 夏侯威 | 위나라 하후연의 둘째 아들. | |
하후패 | 夏侯패 ·覇 | 위나라의 장수였다가 촉나라로 달아나 거기장군이 되었다. 하후연의 둘째 아들이다. | |
하후혜 | 夏侯恵 | 위나라 하후연의 셋째 아들. | |
하후화 | 夏侯和 | 위나라 하후연의 넷째 아들. | |
한호 | 韓浩 | ||
허저 | 許褚 | ||
화흠 | 華歆 | ||
환범 | 桓範 | 중국 위나라 조방의 신하. | |
반장 | 潘璋 | 오나라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손권의 휘하에서 활약한 장군. |
서성 | 徐盛 | 중국 오나라의 장수. | |
설종 | 薛綜 | ||
손권 | 孫権 | 중국의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황제. 안후이, 후난을 비롯한 각 지방의 산월 민족과 그 밖의 이민족을 토벌 진무하고, 타이완, 하이난섬 방면에도 원정군을 보냈으며, 랴오둥의 공손씨와도 접촉을 시도하는 등 국내외의 경영에 노력하였다. | |
손등 | 孫登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초대 왕인 손권의 장남. | |
손랑 | 孫朗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건국시조인 손견의 서자이다. | |
손익 | 孫翊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건국 시조인 손견의 3째 아들. | |
손정 | 孫静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시조인 손견의 동생. | |
손준 | 孫峻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에서 승상을 지낸 인물. | |
손침 | 孫綝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승상을 지낸 인물. | |
손호 | 孫皓 | 중국 삼국시대의 오나라 최후의 황제. 즉위한 후 처음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점점 공신 일족들을 물리치고 근친자와 측근을 들여앉혀 새 제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립시키려고 힘썼다. | |
손화 | 孫和 | 오나라의 왕 손권의 3남. | |
손환 | 孫桓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손책의 휘하에서 활약한 장수. | |
손휴 | 孫休 | 오나라 왕 손권의 6남. | |
장온 | 張温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신하로 태자대부를 지낸 인물. | |
장온 | 張温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신하로 태자대부를 지낸 인물. | |
정병 | 程秉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태자대부를 지낸 인물. | |
제갈근 | 제 ·諸葛瑾 | 중국 오나라 손권의 장사를 지냈으며 제갈량의 형이다. | |
조무 | 祖茂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장수. | |
주치 | 朱治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장수. | |
주환 | 周奐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장수. | |
주환 | 朱桓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 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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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의 위(魏) ·촉(蜀) ·오(吳) 3국의 정사(正史).
진(晉)나라의 학자 진수(陳壽:233∼297)가 편찬한 것으로,
《사기(史記)》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와 함께
중국 전사사(前四史)로 불린다.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
합계 65권으로 되어 있으나
표(表)나 지(志)는 포함되지 않았다.
위나라를 정통 왕조로 보고
위서에만 <제기(帝紀)>를 세우고,
촉서와 오서는 <열전(列傳)>의 체제를 취했으므로
후세의 사가(史家)들로부터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저자는
촉한(蜀漢)에서 벼슬을 하다가
촉한이 멸망한 뒤 위나라의 조(祚)를 이은 진나라로 가서
저작랑(著作郞)이 되었으므로
자연 위나라의 역사를 중시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때문에 후에 촉한을 정통으로 한 사서(史書)도 나타났다.
그러나 찬술한 내용은 매우 근엄하고 간결하여
정사 중의 명저(名著)라 일컬어진다.
다만 기사(記事)가 간략하고 인용한 사료(史料)도 지나치게 절략(節略)하여
누락된 것이 많았으므로
남북조(南北朝) 시대 남조(南朝) 송(宋)의 문제(文帝, 407~453)는
429년에 배송지(裵松之, 372-451)에게 명하여 주(註)를 달게 하였다.
《삼국지》에 합각(合刻)되어 있는 배송지주(裵松之註:裵註)가 그것이다.
이 배송지의 주는
본문의 말뜻을 주해하기보다는
누락된 사실을 수록하는 데 힘을 기울여,
어환(魚豢)의 《위략(魏略)》을 비롯한
하후담(夏侯湛)의 《위서(魏書)》 이하
당시의 사서와 제가(諸家)의 계보(系譜) ·별전(別傳) ·문집(文集) 등
140여 종의 인용문이 기재되어 있다.
이 제서(諸書)는 그 후 태반이 산일(散逸)되었는데,
여기에 인용된 글들이 당시의 사실을 고증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된다.
그 중에서도 어환의 《위략》은
특히 귀중한 사료가 많이 있어,
이것을 배송지가 인용한 주를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 다른 일문(逸文)을 추가하여,
청(淸)나라 때 장붕일(張鵬一)이
《위략집본(魏略輯本)》 25권을 편찬하였다.
또한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扶餘) ·고구려 ·동옥저(東沃沮) ·읍루(挹婁) ·예(濊)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
왜인(倭人) 등의 전(傳)이 있어,
동방 민족에 관한 최고의 기록으로
동방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유일한 사료가 된다.
《삼국지》에 관하여는 후세에 많은 참고서가 만들어졌으며,
그 중에서도 청나라 전대소(錢大昭)가 엮은 《삼국지변의(三國志辨疑)》 3권과
양장거(梁章鉅)의 《삼국지방증(三國志旁證)》 30권
및 항세준(杭世駿)의 《삼국지보주(三國志補注)》 등이 저명하다.
최근의 것으로 1957년 베이징[北京]의 고적출판사(古籍出版社)에서 발간된
노필(盧弼)의 《삼국지집해(三國志集解)》 65권, 보권(補卷) 2권이
《삼국지》의 해설서로는 가장 상세하고 완벽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 三國志演義(삼국지 연의)
《삼국지연의》는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三國志)》에 서술된
위(魏), 촉(蜀), 오(吳) 3국의 역사를 바탕으로 전승되어 온 이야기들을
중국 원(元)과 명(明)의 교체기 때의 사람인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이
장회소설(章回小說) 형식으로
재구성한 장편 소설이다.
원래 이름은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이며,
《수호전(水滸傳)》,
《서유기(西遊記)》,
《금병매(金甁梅)》와 함께
중국 4대기서(四大奇書)의 하나로 꼽힌다.
진수(陳壽)의 《삼국지》에 서술된 위(魏)·촉(蜀)·오(吳) 3국의 역사는
천하의 패권(覇權)을 둘러싸고
3국이 벌이는 힘과 지혜의 다툼이 워낙 치열하게 펼쳐졌기에
일찍부터 중국인들에게 흥미 있는 이야기로 전해져 왔다.
당(唐, 618~907) 시대에
이미 3국의 이야기가 야담(野談)으로 전해진 기록이 있으며,
송(宋, 960∼1279) 시대에는
전문적인 이야기꾼인 설화인(說話人)들의 이야기 대본인 화본(話本)으로 정리되고,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하였다.
당시 곽사구(禱四究)의 ‘설삼분(說三分)’은 매우 유명했으며,
인종(仁宗, 1010~1063) 때에는
3국의 이야기를 공연하는 ‘피영희(皮影戱)’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원(元, 1271∼1368)의 영종(英宗, 재위 1320~1323) 때,
전래되던 화본(話本)들을 바탕으로
푸젠성(福建省) 젠양(建陽)의 출판업자 우(虞)씨가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를 간행하였다.
이 책은 3권으로 되어 있으며
위에 그림, 아래에 글을 넣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元) 시대에는
이를 바탕으로 많은 희곡이 만들어져 공연되었는데,
종사성(鍾嗣成)의 《녹귀부(錄鬼簿)》에 따르면 그 수가 30~40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는
명(明, 1368∼1644) 시대에도 출판되었지만,
야담(野談)과 화본(話本)에 기초해 있었기에
허황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고 역사적 사실과도 차이가 많았다.
그래서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은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의 줄거리를 근간으로 하되,
진수(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429년 배송지(裵松之, 372-451)가 이를 보완한 《삼국지주(三國志註)》,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에 어긋난 부분을 바로잡아
장회소설(章回小說)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삼국지연의》를 편찬하였다.
《삼국지연의》는
후한(後漢) 말부터 위(魏)· 촉(蜀)·오(吳) 삼국의 정립시대(鼎立時代)를 거쳐서
진(晉)이 천하를 통일하기까지의 역사를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 등 세 인물의 무용(武勇)과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지모(智謀)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원본(原本)은 전해지지 않으며
명(明)의 가정제(嘉靖帝, 1507~1566) 때인 1522년에 간행된 ‘가정본(嘉靖本)’이
가장 오래된 판본(版本)으로 전해진다.
《삼국지통속연의(三國志通俗演義)》란 제목으로 간행된 이 판본은
홍치제(弘治帝, 1470~1505) 때인 1494년의 서문(序文)이 실려 있어
‘홍치본(弘治本)’, 혹은 나관중(羅貫中)의 성을 따서 ‘나본(羅本)’으로도 불린다.
모두 24권(卷) 240절[節, 혹은 칙(則)]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장 나관중의 원본(原本)에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지연의》는 그 뒤 가정본(嘉靖本)을 근간으로 하면서
문체나 내용이 보완되어 왔으며,
수많은 속본(俗本)들을 낳았다.
명(明) 말기에 이지(李贄, 1527~1602)는
《삼국지연의》에 평을 붙이면서
2개의 절(節)을 하나로 합하여
240절(節)을 120절(節)로 줄였는데,
이를 ‘이탁오평본(李卓吾評本)’이라고 한다.
그리고 청(淸)의 강희제(康熙帝, 1654~1722) 때인 1679년(강희18년)에
모성산(毛聲山)과 모종강(毛宗岡) 부자(父子)는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에 기초해
작품 전체의 통일성을 높이고
문체(文體)를 간결하게 다듬어
19권(卷) 120절(節)로 구성된 새로운 판본을 간행하였다.
이를 ‘모본(毛本)’이라고 하는데,
모종강(毛宗崗)의 개정본은 다른 판본을 압도하고 정본(定本)이 되었다.
오늘날 번역되는 《삼국지연의》의 내용도
대부분 이 ‘모본(毛本)’에 기초하고 있다.
《삼국지연의》는
중국인에게 오랫동안 애독되었고,
그 내용은 연극(演劇)이나 강담(講談) 등으로 글자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전달되었다.
관우(關羽)는
민간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어
관제묘(關帝廟)가 곳곳에 세워지기도 하였으며,
《삼국지연의》에서 비롯된 ‘삼고초려(三顧草廬)’나
‘계륵(鷄肋)’,
‘읍참마속(泣斬馬謖)’ 등의 표현이
고사(故事)와 함께 널리 쓰였다.
《삼국지연의》는
한국에서도 조선(朝鮮) 시대부터 매우 폭넓게 읽혔다.
《삼국지연의》는
이미 16세기 초에 조선(朝鮮)에 전해져
1569년에는 국내에서 원문(原文)으로 간행되었다.
인조(仁祖, 1595~1649) 때인 1627년(인조 5년)과
숙종(肅宗, 1661~1720) 때에도 출간(出刊)되었다.
《삼국지연의》를 번역(飜譯)하거나 번안(飜案)한 작품들도 상당수 전해지는데,
이는 사대부(士大夫)만이 아니라 부녀자(婦女子)나 민간(民間)에서도 폭넓게 읽혔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시조(時調)나 소설(小說), 속담(俗談) 등에서도
《삼국지연의》의 영향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렇듯 《삼국지연의》가 널리 읽히고 확산된 것은
이 작품이 충효(忠孝)와 의(義)를 강조하는
조선(朝鮮)의 유교적(儒敎的) 지배이념과 일치되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근대 이후에도 《삼국지연의》는 수많은 번역본을 낳으며 폭넓게 읽혔는데,
1904년 박문서관(博文書館)에서 최초로 근대적 활자본이 간행되었고,
1929년에는 양백화(梁白華, 1889~1938)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연재하였다.
그리고 1945년에 박태원(朴泰遠, 1909~1987)이
‘모본(毛本)’을 기초로 현대적 번역본을 출간(出刊)한 뒤,
박종화(朴鐘和, 1901~1981),
김구용(金丘庸, 1922~2001) 등
수많은 작가들이 각기 다양한 번역본을 출간하였다.
한편 현대에 와서 《삼국지연의》는
영화나 컴퓨터게임, 애니메이션 등으로도 활발히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고우영(高羽榮, 1938~2005)이 만화로
신문에 연재한 작품이 1979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일본에서는
요코야마 미츠테루(橫山光輝, 1935∼2004)가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코에이(KOEI)는
1985년 ‘삼국지(三國志, samgugji)’라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개발하였다.
그 밖에도 《삼국지연의》의 내용에 바탕을 두고
경영학이나 처세학 등을 논하는 책들도 폭넓게 출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