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의 시인들 | 김선미
누룽지 만들기 외
소년이 노란 우산을 쓰고 빙글빙글 돈다 파란 우산을 쓴 옆 친구도 따라 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가보다 난 서대문형무소 씨유 편의점에서
두 달 전 머리를 열었다 닫은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다 소년들이 가고 꽃무늬 우산을 함께 쓴 엄마와 소녀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는 일, 그것이
죽음이든
사랑이든
침묵이든
지루하지 않은 건 없다
감방, 작은 방안 하얀 벽에서 나는 달력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볼록하게 숫자를 새겨 놓은 벽
어느 한 날짜에 동그라미를 그려놓은
그날이 무슨 날인지 나는 모른다 누구의 생일이었는지 누구의 기일이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사형 일이었는지도
머리를 열고 수술을 하고 닫는 동안 온갖 꽃들이 만발했다 꽃이 어울리는 사람들이 다 지나가고
나는 그를 기다리는 중이다
내가 찬밥을 모아서 누룽지를 만들다 말고 나왔기 때문이다
누룽지는 프라이팬에 허접스런 밥을 얇게 깔아 숟가락으로 눌러 놓고 습이 나가도록 약한 불에 오래 놔두면 된다
불 좀 끄고 와
시켜놓고 나는 내가 다녀올 걸 그랬나 잠시 생각했지만
찬밥이 많아서 그랬지 나는
겨우 찬밥에 허접스럽게 기대어 있다
형무소는
한 가지 색깔로 이름 지어지지 않는 색들로 있고
머리가 열렸다 닫힌 사람은
누룽지가 잘 만들어져 있다고 했다가
불이 났다고 했다가
불이 안 켜져 있다고 했다가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다고 했다가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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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guitar
붙여놓은 글씨(쓰레기로 변해가는)가 번져가는 소리인지
빗소리인지
이 골목 비를 쫄딱 맞으며
어제는 늦도록 크고
작은 비가 왔는데 그제부터 온 것도 같고 1년 전부터 온 것도 같고 천 년 전부터 온 것도 같다
기타 위에 “기타를 찾아가시오”
허무 위에 “허무를 찾아가시오”
커다란 배를 내밀고 눈을 부라리며 들어오는 덩치 큰 사람한테 쫓겨온 뒤
종이에 써서 붙여
가게 앞에 버리는 사람들에게 따지다
어디 하나 끊어지거나
보기에 멀쩡한
의자
박스
앵글
어떤 날은 허무
어떤 날은 생각
뭐든 할 기세로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 매일 아침 성형외과로 달려갈 기분인데
살아나는 일이라면
콧대 살아나 나
눈매 살아나 나
예쁨 살아나 나
광고를 보며
몇 세기를 넘나들며 나는 이 골목을 사수 중인데
물결 따라 출렁이듯 바닷바람 맞으며
건너 신발 가게들과 우리 가게 옆에 무인카페 그 옆에 venice 그 옆에 산토리니 하얗게 칠한 신발가게
비가 오네 통을 두드리며
나는 marry mary 노래를 부르고
r이 두 개 아니었나? 리듬에 맞춰 기타에 줄 하나 빠져 있어도 소리는 나고
mary
marry?
장화신은 고양이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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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2009년《시에》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마가린 공장으로 가요 우리』, 『인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