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조 38년(1762) 5월 22일,攻洪派의 행동대원 羅景彦이 형조에 고변(반역과 잘못된 일)서를 올렸다.
고변의 내용은 왕 주위의 내시들이 역모를 꾸민다는 내용이었다.이件의 처리를 두고 형조참의 이회중은
고심하다가 먼저 영의정 홍봉한에게 알렸다.이에 홍봉한은 고변을 왕에게 알려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고변서를 본 영조는 즉시 '홍봉한,운동도,신만' 등과 함께 친국을 실시했다.그러나 친국도중 나경
언은 그의 옷속에서 한통의 글을 꺼내 왕(공홍파의 공작)에게 올렸다.글에는 세자의 비행에 대하여 10여
조목에 걸쳐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내용에는 세자의 낭비와 사치,시장 상인들에게 진 부채까지 쓰여져
있었다.이를 통해 세자 비행의 전모를 알게된 영조는 큰 충격을 받았다.조정의 대신들은 대부분 알고있는
내용들 이었으나,영조는 금시초문의 사실들 이었다.이에 다급해진 세자는 春川에 은거하고 있던 소론의
대신 '趙載浩' 에게 도움을 청했다.조재호는 죽은 효장세자 빈(후에 효순왕후)의 동생이자 조문명의 아들
이었다.그러나 조재호는 '대신은 거취를 가볍게 하지 않는다' 고 하며 사도에게 도움을 주지 못했다.
2, 이에 영조는 대신들의 청에 따라 나경언을 죽이고,세자의 비행에 가담한자 들도 죽였다.세자로 부터
도움 요청받은 조재호도 처벌했다.조재호는 처음에 세자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지만,영조 38년(1762)세자
가 폐위 되었다는 서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그러나 정치적 힘이 없었던 조재호는 세자를 위해 도움을
줄일이 없었다.그럼에도 그는 세자의 보호를 요청 받았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처벌받아 春川으로 축출
되었다.그는 평소에 '老論들이 동궁(사도세자)에게 불충하니 소론인 나라도 東宮을 보호해야 한다' 고 말
하곤 했다고 한다.이말이 세자의 장인이자 노론 척신인 홍봉한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홍봉한은 이를
영조에게 고하여 피해를 본 것이다.결국 별것 아닌 일인데도 장인이 사위를 동정하는 소론들 얘기를 왕
에게 고해 바친 것이다.어찌보면 사도세자의 죽음은 조재호 같은 소론 대신들의 언행과 존재를 무시한
영조가 있고,그 다음에 권력부를 장악하고 있던 노론 일파들의 집요한 정치공작(세자 길들이기)에 의한
것으로 볼수있다.
그러지 않고는 세자의 비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시들의 역모를 고변한 공홍파의 나경언 친국현장
에서,그것도 그의 옷속에서 사도세자의 비행문서가 나올수가 있는가? 이건 사전에 준비된 것으로 권력
쟁취를 위해 꾸민 죽음과 맞 바꾸는 공작인 것이다.모르긴 해도 권력을 잃기 싫은 노론들이 소론들과 친
하게 지내는 사도세자를 미리 축출하기 위한 사전 공작이였을 가능성이 크다.그리고 여기에 영조가 말려
든 것이다.이런 공작으로 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은 영조로 하여금 소론과 친한 사도세자이자 자식을 처벌
하도록 유도한 것이다.소론들이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의 권력과 그동안 누렸던 영화가 모두 물거품이 되
고 날라 가니까?
3, 영조 38년(1762) 윤 5월 13일 영조는 그 간의 어떠한 환국보다 더 처절한 처분을 내렸다.영조는 칼을
휘두르며 세자에게 자결할 것을 명했다.그러나 세자는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즉 허울 뿐인 왕의 자리를
물려받아 봐야 노론의 전횡으로 왕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허세의 왕이 되기 싫었기 때문이다.한편으로
영조는 올가미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세자의 비행을 구실로 세자를 죽게 함으로서 상당수의
노론 대신들을 물리친후 왕권을 강화해 세손에게 물려 주고자는 욕심도 있었을 것이다.이는 후에 영조가
말많고 골치아픈 외척의 노론세력들을 제거한후 왕위를 세손(정조)물려주는 여정을 보면 알수가 있다.
영조에 끝까지 저항한 세자는 오히려 '부왕(영조)에게 죽으라면 죽겠다' 고 했다.이에 영조는 대성통곡하
는 대신들을 내보내고,다시 자결할 것을 재촉했다.세자는 옷소매를 찣어 목을 매는 시늉을 했고,講官(강
의 진행을 맡은자)은 그러한 세자를 말렸다.시간이 지나 마침내 말리는 사람이 없자,이제 어쩔수 없음을
알게된 사도는 세손과 이별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영조는 아버지를 살려 달라는 세손의 애원도 무시했다.영조가 손수 세자를 뒤주속에 가두고 뚜껑을 닫은
후 자물쇠로 채웠다.그것도 모자라 널판지를 가져오게 하여 못을 박고 동아줄로 뒤주를 묶었다.8일을 버텼
지만 끝내 굶어 죽고 말았다.세자가 죽은후 영조는 곧 세자의 휘호를 회복시키고 직접 思悼라는 시호를 내
렸으며,세자의 묘지문도 친히 지었다.그리고 장례날에는 직접 墓에 나가 哭을 하기까지 했다.그리고 세손
(정조)을 동궁이라 부르게 했다.여기서도 영조의 이중성이 잘 드러난다.
4, 300년 종사(이씨왕조의 계승자)를 이어갈 위치에 있던 세자가 굶어 죽었다.이런 전대미문의 사건이 전개
되는 동안 장인인 홍봉한을 비롯해 어느 누구도 그를 구명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사람은 없었다.어찌보면
이것은 세자의 죽음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아닐수 없다.이쯤에서 이씨 왕조는 유교국가 답게 명분과 의리
따위는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 볼수가 없는 듯 했다.영조는 탕평이란 명목하에 정파들의 이해관계를 일정선
에서 충족시켜 줬으나,이는 필연적으로 의리를 후퇴시켰다.이점은 反 탕평파들의 우려와 일치했다.그들은
탕평이 忠逆과 是非를 불러들여 혼란을 야기시키고 선악이 혼재되여 이해가 우선 할것으로 보았던 견해다.
그러나 세자의 죽음에 책임을 면할수 없는 인물이 있다.그는 바로 세자의 장인 홍봉한이다.사위이자 세자가
굶어 죽어가고 있었는데도 권력의 최요직에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그는 자신의 입장을
어떻게 하든 정당화 시켜야 했다.그래서 홍봉한은 1762년 세자가 죽은 '壬午禍變' 에 대해 정리해 줄것을
영조에게 약식으로 상소(箚子)를 했다.이에 영조는 이건을 종묘와 사직을 위해 부득이 했음을 설명하고 나아
가 사라진 의리를 천명했다.그러나 홍봉한의 책임 회피성 차자는 두고두고 그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었다.옛
날이나 지금이나 왕이나 대통령이란 정치적 지도자들은 자본(옛날은 토지소유자들)의 인형에 불과 하다.
5, 사도세자가 죽음으로서 홍봉한은 세자의 장인에서 세손의 외할아버지로 격하 되었다.더욱 그를 곤란하게
만든 것은 세자이자 사위의 죽음에서 그의 미온적인 태도가 도마위에 올랐다.영조이자 왕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말은 정말로 궁색해 졌다.세자가 죽는 임오화변의 충격에서 벗어나자 곧바로 공홍파들과 부홍파간
의 본격적이 대립이 시작되었다.노론의 공홍파들과 부홍파들이 주도권을 놓고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은 사도
세자가 죽은지 9년째가 되는 영조 46년(1770) 3월에 일어났다.청주 유생 韓鍮가 도끼를 메고 상경해 궐 앞에
서 상소를 올렸는데,영조실록권 114, 46년 3월 기해일 편에 쓰기를,
'홍봉한의 부자와 형제가 권세를 휘두르며 권력을 농단하고 있습니다.심지어 홍봉한의 아우인 洪麟漢 의 貪虐
함에 사람들은 그의 고기를 먹으려 하고 있습니다.또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亡國洞의 亡政丞이란 동요가 불리
워지고 있을 정도 입니다.홍봉한의 죄가 이토록 크니 이도끼로 먼저 신을 죽이고 뒤에 홍봉한을 처단 하십시
요'
여기서 말하는 망국동의 망정승이란 '안국동에 거주하는 홍봉한' 일컷는 말이다.영조는 한유의 상소가 공홍파
의 부홍파 공격의 黨心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그를 흑산도로 유배했다.물론 공홍파들의 사주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이런 내용의 상소는 처음에 공홍파의 핵심이었던 沈儀之가 올리려던 것 이였는데, 의심받을 것을
걱정해 한유로 하여금 대신 올리게 한 것이다.
6, 이후에도 공홍파와 부홍파간의 대립은 멈출 줄을 몰랐다.특히 공홍파들의 부홍파 거두인 홍봉한에 대한
공격은 집요하게 계속 되었다.그러다 영조 47년(1771) 왕손 추대사건을 틈타 공홍파들이 왕세손과 홍봉한의
관계를 표면화시켜 영조와 왕세손으로 부터 홍봉한을 이간시키는 사건을 조작해 냈다.사건의 발단은 세손이
사치를 부리고 분수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고 있고 이러한 왕세손의 생활은 홍봉한과 연관이 있다는 고변이
늘어 났다.영조는 직접 관련자들을 문초해 사실관계를 확인한후 홍봉한의 벼슬과 품계를 깍아 조정에서 추방
했다.이에 홍봉한은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 공홍파들 입장은 강화 되었다.이에 힘입은 공홍파들은 홍봉한의
中途付處(유배)를 강력히 요구했고 영조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었다.
그러면서 영조는 내가 홍봉한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홍봉한이 나를 배반한 것이라고 규정했다.그런데 사실인
즉 왕세손 추대 음모라고 여길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따라서 홍봉한은 중도부처에서 풀려났고,
풀어주면서 영조는 홍봉한 보다 이조치는 세손을 배려한 혜빈 홍씨를 위한 것이라고 궁색한 변명을 했다.영조
의 입에서 이말이 나온 이후의 부홍파들 권력은 공홍파들을 넘어 더욱 견고해 졌다.이에 공홍파는 부홍파 공격
에 총력을 기울 였음에도 영조의 봉쇄로 수포로 돌아가자,오히려 한계를 느낀 공홍파 일부가 부홍파로 옮겨가
는 기현상까지 벌어졌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조선이 근세기에 멸망당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원인이, 반상의 신분제와
사대부 중심의 삐뚤어진 탐욕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 해 봅니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상류층 기득권층의 삐뚤어진 공정과 상식이 바로 잡혀져야 할 숙제 인 것 같고요.
감사 합니다.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이 욕심이 있는한 권력 상층부는 언제나 같았지요.겉으로는 대단한 것 같지만 뒤에는 온갖 음모와 모략이 판을 치지요.정의,진실,상식,공정,법치,도덕 그런거 없었어요.유교사회에서 도덕과 윤리(3강5륜)이 없어서 폭력과 억지,강요와 전횡이 판을 쳤겠어요.그건 지금도 같아요.결국은 권력과 돈이지요.외척,반상들의 탐욕은 하늘을 찔렀지요.
요즘 재벌집 막내아들 보는 거 같네요
그렇지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권력과 돈을 가진자들의 행동은 같아요.인간의 욕심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지요.이런자들은 또 끼리끼리 놀구요 정보를 만들어 나누구요,돈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지요.옛날이나 지금이나 왕(대통령)은 인형이고,실질 권력은 자본가(농본주의 시대에는 토지소유자) 들에게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