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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조선의 영토다 안용복에서 칙령 제41호
★독도는 조선의 영토다 안용복에서 칙령 제41호★ 역사스페셜
한반도 동쪽 끝, 평화와 긴장이 공존하는 섬, 독도. 이곳에선 지금도 침탈에 맞서 우리 땅을 지켜났던 천년 역사의 외침이 울려 퍼진다.
독도는 조선의 영토다 : 안용복에서 칙령 제41호까지
지난 3월말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한층 더 강력하게 담은 일본 중학교 교과서 12종이 일본 문무성에 검정을 통과함에 따라서 한국과 일본 두 나라 간의 독도 문제가 또 한 번 불거지게 됐습니다. 제가 나와 있는 이곳은 울릉도에 있는 독도 전망대입니다. 날씨가 좋은 날은 육안으로 직접 저 독도를 관측할 수가 있다고 하는데요. 헌데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영토인 오키섬에선 독도를 전혀 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울릉도에선 볼 수 있지만 일본에선 볼 수 없는 섬, 독도. 오늘 역사스페셜에서는 독도를 자국의 땅으로 주장하고 있는 일본 교과서의 검정 통과를 계기로 우리 땅 독도의 역사를 긴급 점검해 보겠습니다.
지난 3월 규모 9.0의 대지진으로 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은 일본. 그러나 일본은 이 와중에도 독도대한 야욕을 멈추지 않았다. 3월 말 일본 문부과학성은 독도 영유권 주장을 기술한 중학교 사회 교과서 12종의 검정을 통과시켰다. 일본 교과서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지난 해 초등학교 교과서에 이어 다시 1년 만에 중학교까지 확대 된 것이다.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사회과 교과서들은 내년 4월부터 일선 학교에서 사용하게 된다. 개정된 교과서들은 지도에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고 일본 영토에 포함시키고 있다. 서술에서도 독도를 일본의 고유 영토라고 쓰고 있다. 역사 1종을 비롯해 공민(7종) 지리(4(7종))과목은 100%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이신철 교수 /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공동운영위원장 “일본의 교과서에서 독도문제가 등장한 것은 2005년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가 점자 기술하는 범위도 넓어지고 내용도 점차 개악되는 상황입니다.”
영유권 주장을 넘어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고 기술한 교과서가 대폭 늘어났으며 심지어 에도시대부터 독도를 확보했다는 터무니없는 내용도 눈에 띤다. 국제법 위반을 거론하며 국제사법재판소 회부를 주장하는 실정이다. 제작진은 일본문부성에 교과서 개정 대비표를 긴급입수 실태 확인에 나섰다. 시미즈 서원의 경우 애초 일본의 고유 영토로만 언급했으나 문부성은 17세기 영유론과 한국불법점거 표현을 추가할 것을 지시했다. 지유샤는 이웃국가를 한국으로 바꾸는 조건으로 통과됐다.
2005년 시마네 현에 다케시마의 날 선포 이후 일본의 교과서 왜곡은 정부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번 개정도 2008년 신학습지도요령해설서에 따른 결과물이다. 이번에 개정되는 교과서들은 일본외무성 입장을 충분히 따르고 있다. 영어와 아랍어 등 10국어로 번역돼 전세계에 뿌려지고 있는 이 자료는 현재 학교에서도 논란이 많은 상태다. 학문적 논증도 거치지 않은 일방적인 정부의 주장을 토대로 진실을 담아야 할 일본에 교과서가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일방적인 정부 주도에 역사왜곡에 일본의 양심적 학자와 단체들 역시 반발하고 있다. 지난 4월 29일 요코하마에서 열린 교과서 개정 반대모임은 이번에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들을 위험한 교과서로 규정했다. 이들은 교과서를 정치운동의 장으로 변질시키고 있으며 전쟁과 식민지 지배를 미워하는 천황중심의 역사관이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요시후미 사무국장 / 어린이와 교과서 전국네트21 “독도 문제가 일본의 한국병합과 식민지 과정에서 벌어진 역사 문제임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저희들은 그 점을 지적하여 중학생에게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은 이웃 나라들과의 우호와 평화를 구축하는데 백해무익할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역행하는 위험한 교과서. 일본은 지금 청소년들의 가슴에 독도와 증오심을 새겨 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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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외무성 홈페이지에 다케시마 문제를 이해하기 위한 10가지 포인트나 최근의 검정을 통과한 12종의 중학교 사회 교과서 모두 마치 독도가 일본의 영토인 것처럼 오인할 수 있도록 교묘한 논리를 펼치고 있는데요. 특히 자신들은 이미 17세기에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확립한 반면에 한국에선 옛날부터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인식했다는 근거가 없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자, 과연 이러한 주장은 사실일까요. 자 이쪽을 보시죠. 이곳 독도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 안용복이 두 차례에 걸쳐서 일본을 왕래한 행로를 이처럼 그려놓고 있습니다. 이미 17세기 안용복은 이곳 독도를 보고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주장했습니다. 자 독도 분쟁의 가장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 안용복을 만나보겠습니다.
부산시 수영동. 옛 경사 좌수터에 자리한 안용복 사당. 매년 4월 18일 안용복기념사업회는 제향식을 거행하며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안용복은 독도를 지켜낸 민족의 영웅이자 수호자로 장군 칭호를 받는 인물이다. 17세기 후반 안용복은 일본에 건너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알렸고 역사는 그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한상규 이사 / 안봉복기념사업회 “일본이 독도에 대해서 일본의 잘못된 역사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안용복 장군이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사료적인 근거를 제공했다.”
또다시 불거진 일본의 독도 침탈 야욕. 세월은 3백여 년이 흘렀지만 그의 발자취는 두 나라의 역사에 뚜렷이 새겨져 있다. 일본 남서부 해안가에 위치한 시마네 현. 지난 2005년 다케시마의 날 조례안을 통과시킨 이곳 현청은 청사 앞에 첨단 광고판을 설치하고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현청 안에는 독도문제연구소를 개설해 독도자료 수집과 관련연구를 조직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특히 일본에 유리한 역사자료나 인물을 찾아 독도가 일본 영토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주임무다. 이곳에서는 우익학자들의 관련 연구를 모아 지속적으로 출판작업을 하고 있으며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강좌도 진행한다.
시모죠 마사오 교수 / 타쿠쇼쿠 대학 “즉 한국은 전쟁 전과 완전히 달라져 이번에는 자신들이 영토를 확장하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채로 독도를 여러 문제와 결부시켜 주장하고 있습니다.”
대표적 우익학자 시모죠 마사오 교수는 연구소의 보고서에서 안용복은 한일관계의 큰 혼란을 가져다 준 원흉으로 혹평하고 있다.
권오엽 명예교수 / 충남대 명예교수 “일본은 어떻게든지 안용복을 부정을 해야 합니다. 안용복을 부정하는 것이 조선에 대한 독도의 인식, 독도가 조선의 영토였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안용복을 부정하죠.”
일본 시마네 반도에서 북쪽으로 약 60km 떨어져 있는 오키섬. 독도는 160km 떨어져 있지만 일본에서 독도에 가장 인접해 있는 곳이다. 항구 주변에서는 독도를 염원하는 홍보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300여 년 전 안용복 일행 11명이 배를 타고 이곳 해안에 도착했다.
안용복 일행이 처음 안내된 곳은 무라카미 가(家). 당시 막부 직할령이었던 오키 섬에서 촌장과 곡문서를 담당했던 유력한 가문이다. 지난 2005년 이곳에서 발견된 한 문서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바로 안용복을 취조한 문서다.
이케우치 사토시 교수 / 나고야 대학 “안용복 사건과 관련해서 지금까지는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안용복의 증언에만 의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무라카미 가문의 문서는 안용복의 증언을 객관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문헌이라는 의미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이 문서에 의하면 안용복은 일본 관리들 앞에 조선팔도지도를 꺼내 보이며 강원도에 울릉도와 독도가 속했음을 알렸다. 당시 일본은 울릉도를 죽도로 독도를 송도로 부르고 있었다.
나이토 세이추 시마네대학 명예교수 “가장 중요한 건 안용복이 제시한 조선팔도지도라는 문서입니다. 거기에 보면 강원도에 울릉도와 독도가 들어있음이 명백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즉 안용복은 두 섬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었고 이를 막부 대관의 간부에게 기록하게 했음은 매우 큰 의미가 있으므로 한 마디로 안용복은 독도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획기적인 의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당시 이 문서를 안용복이 독도를 자산도라 불렸다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일본의 억측을 깨는 또 하나의 단서가 됐다. 바로 우산도의 정체다. 그동안 일본은 우산도가 독도라는 우리나라의 주장을 인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안용복이 오키를 거쳐 찾아간 돗토리 번은 우산도가 지금의 독도가 가리키는 말임을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돗토리 번의 공식문서 이나바지는 안용복 일행의 친필필담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을 만큼 당시 상황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안용복이 말한 자산도는 우산도로 송도 즉 독도라고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케우치 사토시 교수 “자산도라는 이름은 문헌에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습니다만 안용복이 말하는 자산도는 우산도와 일치한다고 봐도 좋습니다. 궁극적으로 지금의 독도와 일치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안용복이 말한 자산도는 바로 우산도를 뜻하는 말이며 우산도와 독도가 다른 섬이라는 일본 측 주장은 단번에 무너졌다. 당시 안용복은 타고 온 깃발에 ‘조울양도 감세장 신 안동지 기’라는 글귀를 새겨 넣었는데 여기에서 조울양도란 조선 울릉도에 두 섬 즉 울릉도와 독도를 의미하며 안용복은 이 두 섬에 세금 징수를 담당하고 관리한다는 의미다.
호사카 유지 교수 / 세종대 교양학부 “그러면 예들 들면, 제주도 이야기도 해야하고요. 그냥 일반지리를 말한다면 고문도 이야기도 해야 하고 그러나 안용복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울릉도 독도가 조선의 땅이라고 말하고 싶어서 갔기 때문에 다른 도에서는 그냥 이런 도가 있다라고 이야기만 했고 강원도 부분에서만 울릉도 독도가 속해있다는 것을 강조 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무라카미 가의 문서에 기록된 안용복의 도일 행적에서도 드러나는데 5월 15일 울릉도를 출발한 안용복은 독도에 도착해 하루 밤을 묵은 후 일본으로 향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안용복은 그때 조선과 울릉도 독도 사이의 거리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있다.
그렇다면 안용복은 왜 일본까지 와서 독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해야만 했던 것일까. 그가 일본으로 건너가기 3년 전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일본 어선에 납치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당시 조선이 쇄환정책으로 울릉도를 비워둔 틈을 타 일본 어민들이 국경을 넘어 불법조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3년 뒤인 1696년 5월 15일 안용복은 또 다시 울릉도에 조업중인 일본 어선을 만나게 된다. 안용복이 ‘울릉도는 본디 우리 땅인데 왜인이 어찌 감히 경계를 넘어 침범하였는가’라며 꾸짖자, 일본 어민들은 자신들이 독도에 산다고 대답했다. 안용복은 배를 몰아 일본인들을 추격해 독도 역시 우리 땅임을 알리고 내쫓았다. 그리고 도주하는 왜선을 일본까지 쫓아가 이를 항의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돗토리 번 요나고에 한 절에서 단서를 찾을 수가 있었다. 왜구의 창궐로 조선초기 모든 섬의 주민들을 본토로 이주시킨 사이 울릉도 해역을 독점한 이들이 이 지역에서 번성하고 있었다.
오오야 가문은 무라카와 가문과 손잡고 울릉도의 풍부한 수산자원과 살림자원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조선 땅 울릉도까지 이들의 출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요나고시 산인박물관. 요나고의 두 가문이 70여 년 간 울릉도 출어가 가능했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에도막부로부터 허가를 받았다는 울릉도 도해면허 봉서다. 봉서란 정식허가서가 아닌 편지형태를 말한다. 원래 도해면허는 매년 갱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런데 1696년 안용복이 일본에 건너가 이들에 불법조업의 부당성을 지적할 때까지 두 가문은 첫 해에 허락된 도해 허가증으로 70여 년을 사용했다. 배에 선두에 꽂아두는 목찰과 에도막부에 문양이 그려진 깃발은 이들에게 허락된 일종의 면허증이었다.
스키모토 요시미 / 산인역사관 운영위원장 “그 무렵 일본 정부는 일본 이외에 나라로 건너가는 것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항을 위해서는 허가가 필요했습니다. 허가서가 없으면 도항할 수 없었고 국가의 규정을 위반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허가 증명서를 소지하고 도항해야 했으므로 반드시 허가서가 필요했습니다.”
일본은 현재 돗토리 번 어민들이 17세기에 울릉도와 독도를 왕래한 것을 두고 일본이 먼저 독도를 실효 지배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외국으로 건너가는 오늘날의 여권 성격이었으며 그나마도 뇌물로 얻어진 것이었다.
스키모토 요시미 “막부가 가장 기뻐했던 물품은 ‘전복’이었습니다. (상인들은) 전복을 헌상했습니다. 그리고 막부는 울릉도에서 나는 진귀한 대나무를 건축용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를 헌상했습니다.”
두 가문은 어업 독점을 위해 막대한 뇌물을 헌상하고 막부는 장군이 직접 입던 옷을 하사했다. 도해 면허를 위해 얼마나 많은 뇌물이 오갔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증거다.
박병섭 / 독도문제연구 네트 “안용복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일본인의 울릉도 도항이 계속 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일본령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가능성이 상당히 큽니다. 안용복 사건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울릉도에 대한 영토문제가 양국간에 일어났고 울릉도가 조선령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밝혀졌습니다.”
뇌물로 받은 불법 도해면허도 울릉도 일대에서 조업하던 돗토리 번 요나고 지역 두 가문은 안용복 이후에는 다시 이곳에 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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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6년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던 안용복. 현재 17세기 독도 영유권 확립설을 내세우고 있는 일본 측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이 안용복입니다. 그의 행적과 진술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면 일본 측이 내세우고 있는 10가지 주장에 대부분이 무너지게 되는데요. 일본 측이 애써서 안용복을 부정하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안용복으로 인해서 한국과 일본 두 나라는 독도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15세기 태종이후 쇄환정책으로 비워두었던 울릉도와 독도. 숙종 19년 안용복 사건 이후 조일간의 울릉도 문제가 표면화 되자 조선 조정은 적극적인 수토정책으로 돌아섰다. 1694년 삼척첨사로 파견돼 울릉도 수토 임무를 맡은 장한상. 그는 150명의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 울릉도와 독도 실정 파악에 나섰다. 그리고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조사활동을 마친 후 그 내용을 울릉도 사적에 기록했다. 이때부터 법으로 정해 정기적인 수토사들을 파견하고 토산물을 채취해 조정에 바치도록 했다.
김호동 교수 / 영남대 독도 연구소 “세종과 숙종이 조선정부에서 울릉도에 대한 세한, 세출 혹은 수토정책을 실시하면서 하는 얘기가 세종 때도 매년 울릉도에 사신을 파견하고 조사를 실시했다고.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땅임을 알리려는 의도였습니다.”
조선조정은 울릉도와 독도지역 수토를 위해 책임관청을 두고 2~3년에 한 번 씩 울릉도와 독도를 관?老求?지방관을 파견했다. 대풍헌. 정부관리가 바람을 기다리며 머물렀던 관청이 있던 자리다. 이곳은 곧 울릉도 독도 관할의 전진기지였던 것이다. 이때 이후로 제작된 지도에는 한결 같이 우산도로 표기된 독도가 울릉도 동남쪽에 정확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장한상의 울릉도 사적에는 독도를 진방향 300리 밖에 있다고 적었는데 이 섬이 독도인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일본은 이 기록 속에 등장하는 섬이 독도가 아닌 울릉도의 인근 죽서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승진 독도박물관장 “그러나 그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죠. 우리의 고 기록에 의해서 예를 들어 맑은 날이면 울릉도에서 독도가 잘 보인다. 서로 잘 바라본다고 얘기할 수 있다면 지금 보시는 이 죽도는 맑은 날이든 아니든 간에 아주 어두는 날에도 잘 보입니다. 어차피 확인할 수 있고 인지할 수 있으니까 우리 기록에서 얘기한 것은 독도를 이야기 하는 것이죠.”
죽서도는 울릉도에서 불과 2km 거리. 날씨와 관계없이 언제나 볼 수 있지만 아득하게 보이는 거리에 위치한 섬은 87km 밖 독도 외에 없다. 그렇다면 장한상이 기록한 진방향은 과연 어느 방향을 뜻하는 것일까. 제작진은 직접 방향확인을 시도했다. 조선시대 나침반 패철에 의하면 죽서도는 인(寅)방향에 해당된다. 이로써 장한상의 기록 속 진(辰)방향 300여리에 있는 섬은 명백한 독도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홍성근 연귀위원 / 동북아재단 독도연구소 “제가 조사를 하게 된 취지도 과연 역사 문헌 속에 나오는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사실이 과연 사실인가라는 것을 현대과학으로 증명하는 것이 조사 취지였습니다. 그래서 실제 조사를 하니까 역사 문헌 속 기록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동북아 역사재단은 지난 2008년 7월부터 2009년 12월까지 1년 반 동안 울릉도에서 독도를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는 지역을 조사했다. 기상여건이 허락되는 날이면 1년에 40여일 가까이 울릉도에서 독도 관측이 가능했다. 이는 우산, 무릉은 날씨가 청명하면 가히 바라볼 수 있다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최희찬 / 울릉도 주민 “울릉도와 독도는 둘이 아닌 하나의 섬입니다. 독도는 어로 행위 등 어민들의 중요한 생활공간이었다는 것이죠.”
한편 조선 정부가 적극적으로 영토를 수호하는 수토 정책으로 입장을 바꾸자 일본 역시 울릉도와 독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에도 막부는 먼저 돗토리 번에 울릉도에 영유권과 관련된 질문을 하달하자 돗토리 번은 곧 자신들의 관할이 아님을 답했다. 또한 독도에 대한 별도 조사에서도 일본 어디에도 부속되는 섬이 아니라고 답했다.
이케우치 사토시 교수 “에도막부가 보낸 서신의 취치는 돗토리 번의 소속 여부를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돗토리 번은 자신이 지배하는 영지는 아니라는 답을 했습니다. 결국 돗토리번 소속이 아니라는 말은 일본 소속이 아니라는 것이므로 당시 일본은 독도가 자국 영토라는 인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17세기 일본 내 각 번의 지도를 모아 만든 에도 막부 공식 지도 어디에도 울릉도와 독도가 포함된 지도는 찾을 수 없다. 돗토리번의 확답을 받은 지 3일 후. 에도 막부는 일본인의 울릉도 도해 금지령을 내렸다. 에도 막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안용복 도일 이후 조선과 일본 양국 정부는 독도를 조선 땅으로 규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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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독도까지는 약 87.4km. 빠르면 뱃길로 1시간 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립니다. 맑은 날씨에는 울릉도에서도 뚜렷이 보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 위치해 있는 섬 독도. 당연히 조선에서 건너간 울릉도 수토사나 어민들은 독도를 울릉도에 부속 섬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따라서 안용복 사건 이후 17세기 일본정부에서 시행한 일본인 울릉도 도해금지령은 독도 도해 금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일본에선 그 속에 독도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꺾지 않고 있습니다.
17세기 안용복의 도일로 촉발된 사건 이후, 에도 막부를 통해 공포된 울릉도 도해 금지령. 이 금지 조항의 효력을 잘 지켜졌을까. 하마다시 향토 자료관엔 그 이후 상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남아 있다. 1837년 에도 막부가 전국 해안가에 내건 경고문이 바로 그것이다. 막부는 전국 법령이 해당하는 경고판을 통해 도해 금지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일본 국민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계기는 조선 땅 울릉도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뱃사람 하치에몬이 처형되는 사건이었다. 도해 금지령이 내려진지 100여 년이 흐른 후, 하치에몬은 독도에 간다는 핑계로 울릉도에 갔다가 처형됐다. 이를 두고 일본은 당시 도해 금지령에 독도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나이토 세이추 명예교수 “(독도를) 울릉도에 속한 부속 섬으로 보고 일본에서는 죽도(竹島), 송도(松島)를 한 세트로 불렀습니다.” 이케우치 사토시 교수 “울릉도 도해가 금지되면 독도의 이용가치가 없어져 버립니다. 이 두 개의 섬은 서로 묶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거죠. 죽도도해금지령을 낸 이후에 일본인이 독도만 이용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도쿄대 부속 도서관. 당시 처형된 하치에몬에 진술내용을 기록한 죽도도해일건기가 보관돼 있다. 울릉도 도해에 관한 일급사료다. 그에 재판 기록 끝부분에는 당시에 그려진 지도가 첨부돼 있다. 오키 섬과 일본 영토는 노란색으로 칠해진 반면 한반도와 울릉도, 독도는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는 것이 눈에 띤다.
호사카 유지 교수 “그 색깔을 보면 독도하고 울릉도 하고 조선이 다 똑같은 빨간색입니다. 그것은 다 같은 영토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고요. 일본 쪽은 노란색을 돼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당시 에도 막부는 확실하게 울릉도 독도가 조선 영토로 인식했다는 증거입니다.”
하치에몬 당시 일본인들은 이처럼 독도가 조선 땅임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1876년 시마네현이 다시 독도 관할권을 내무성에 질의했을 때 메이지 정부의 입장은 동일했다. 당시 최고 권력기관인 태정관은 울릉도 외 1도는 일본과 관련이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여기서 울릉도 외 1도는 독도를 의미한다는 지도로 첨부돼 있다.
나이토 세이추 교수 “1696년 사태의 결과 막부는,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며 명백히 조선에 돌려주겠다고 했었습니다. 이게 첫 번째 주장이고요. 두 번째는 1877년, 메이지 10년, 시마네 현이 신청한 죽도외일도(竹島外一島)에 대해 일본정부의 태정관이 본방(일본)은 관계가 없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 두 가지가 결정적인 근거입니다.”
안용복 사건 이후, 울릉도와 독도를 분명하게 인식한 조선조정은 1894년 수토사를 사검관으로 임명하고 관리의 지휘를 격상시켰다. 이같은 수토정책의 지휘 승격은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반포로 이어졌다.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한다."
칙령 제2조는 울도 군 내에 죽도와 석도를 포함시켜 이틀 후 관보에 게재됐다. 울도군 행정 관할 하에 현재 울릉도 전체와 죽서도 그리고 독도까지 군도 개념으로 포함시킨 것이다.
유미림 소장 / 한아문화연구소 “칙령 안에 울릉도를 울도 군으로 바꾸면서 편재를 격상시키면서 그 안에 석도를 관할하도록 분명하게 못을 박고 있기 때문에 법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을 관보에 게시해서 다 온 국민이 알게 했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도 관보라는 것은 국가 중앙정보에서 제시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외국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대내외적으로도 울릉도와 독도가 우리 관할 구역이라는 것을 선포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가 팽창하던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라 칭하고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독도를 강제 편입시켰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6년 독도시찰단 40여명을 울릉도에 파견해 주인 없는 땅 독도를 접수했다고 알렸다
나이토 세이추 교수 “주인 없는 땅이라면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고유 영토론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고도 이를 국내외적으로 공표하는 행위는 거의 않은 채, 그저 지방신문에 기사가 게재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당시 한국은 통감부 지배 하에서 그에 대한 이의가 있어도 항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다음 날 울도군 제3대 군수 심흥택은 곧바로 울도군 소속 독도가 침범당한 사실을 알렸지만 조선은 이미 외교권이 유명무실해진 상황이었다. 일제가 조선을 강탈하기 5년 전 조선침?ダ?첫 번째 희생지였던 독도, 1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는 망언과 교과서까지 왜곡하며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 그러나 역사는 독도가 조선의 땅이였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 수만 년 파도와 바람 속에서도 언제나 꿋꿋이 동해 끝자락에 우뚝 솟아 있는 섬 독도. 우리 민족의 숨결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현재 일본에서는 일본 고유의 영토인 독도를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며 교과서의 개정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함께 보셨듯이 조선과 일본의 수많은 기록들과 옛 지도 등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데요. 특히 일본은 에도 막부로부터 메이지정부까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명확히 해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울릉도와 독도는 서로 마주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반면에 독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 영토인 오키 섬에선 독도가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이처럼 독도영유권 분쟁에 대한 해답은 자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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