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장소 : 약사암
일 시 : 2022.10.06(목) 10시,
참 가 : 강공수 나종만 박남용 양수랑 윤정남 장휘부 정원길등 7명
불 참 : 김상문(사회복지사 현장실습) 김영부(병원 치료) 윤상윤(부인 병원 진료 수행) 이용환(집안 일 처리) 최문수(당분간 쉼)
회 비 : 0원
식 대 : 56,,000원(애호박 찌개 4, 청국장 2, 김치찌개 1) 윤정남이 카드로 결재
잔 액 : 0원
이월 잔액 : 265,000원
총 잔액 : 265,000원
부곡정에는 박남용과 나종만이 먼저 와 있었다. 이어서 강공수 윤정남이 도착하여, 10시 정각에 산행을 시작하였다.
날씨가 흐리다고 예보하였지만 산뜻하게 해가 떴다. 맑은 가을 하늘 아래 맑고 서늘한 공기를 마시며 산행을 즐기고자 앞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산행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운림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해결하여야 할 과제에 따라 모둠별로 과학 실기 학습을 하면서 지나가는 것으로 보아, 아마 국립공원 담당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 코스로 이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국립공원 직원의 제복을 입은 여직원이 학생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길가의 벤치에서 한 번 쉬고 약사암에 도착하였다.
지난주에 비해 소국 화분들은 더 싱싱하게 더 화려하게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푸른 가을에게 자랑하고 있었다. 암자의 방문객들에게도 가을 국화의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약사암의 석등에서 나오는 석간수를 한 모금씩 마시고 쉬었다가 하산하였다.
금주의 노래를 부를 정자로 돌아왔다. 결석한 회원이 많아서 지난주에 불렀던 정훈희의 <꽃밭에서>를 복습으로 부르고, 금주의 노래는 강공수의 하모니카 연주를 맛보기로 듣기만 하고 끝냈다.
우리가 점심을 먹을 식당으로 가서 밥을 먹었는데, 윤정남(밝뫼선생)이 오늘 밥값을 자기가 카드로 긁겠다고 하니까, 나종만이 우리가 허락 해 주지도 않았는데, 왜 자기 마음대로 하려냐면서 마지 못해 허락하는 것처럼 하여, 서로가 인심 쓰는 척하면서 즐거운 밥을 먹게 되었다. 윤정남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헤어졌다.
오늘도 ‘사회 복지사’ 현장실습 때문에 김상문이 결석하였다. 김상문은 기인(奇人)이다. 그래서 (내가 아는 데로) 그의 삶의 궤적에 나타난 몇 가지 모습을 가지고, 그의 인간적 면모를 부분적으로나마 풀어보고자 한다.
김상문은 내가 사범학교 1학년 1반이었을 때, 같은 반이었다. 그가 앉은 자리는 주로 제일 앞줄이었고, 내가 앉은 자리는 뒤에서 두 번째 줄이었다. 그러니 같은 반이라도 같이 논 적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가 요즘 나에게 고백한 바로는, 함평에서 어렵게 광주사범에 합격하였지만, 광주에 거주할 곳이 없어서 걱정하던 차에, 어머니께서 자기가 살던 함평의 어느 교회 목사님께 부탁하여, 그 분의 도움으로 같은 종파인 광주 학동 어느 교회가 운영하는 청소년 보호시설에서 살게 되었고, 학동에서 먼 거리에 있는 풍향동의 학교까지 걸어 다니느라 어려움이 많았다고 고백하였다.
풍문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늙으신 아버지께서 지어진지 얼마 안 된 서울의 육삼 빌딩을 구경하고 싶다고 하여, 늙으신 아버지를 업고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육삼 빌딩을 구경시켜 드린 효자이기도 하였다. 또, 아버지께서 당신의 친구끼리 사돈 맺기로 한 약속을 파기하지 않으려고, 아버지 친구의 딸을 아내로 맞을 만큼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던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다.
전남도교육청 장학사로 근무할 적에는 깐깐한 교육감의 결재를 받으러 가서, 만족스럽게 결재를 받지 못하고 얻어 듣기만 하여, 정신적 스트레스가 막심하게 되자, 인사담당 친구에게
“나 다시 현장인 학교로 가고 싶으니 발령 나게 해 달라.”
고 애원한 적도 있다고 진솔한 고백을 하였다.
한 마디로 그는 아주 착하고 순수하다. 그래서 여러 번의 수기(手記) 공모에 입상한 재능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가 문장력이 뛰어나서 입상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오로지 직접 경험하고 실천한 것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피력한 점을 높이 사서 입상한 것이라고 본다. 너무 솔직해서 우리들의 단체 카카오 톡 방에도, 자기의 심경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는 글이 있을 때, 또 그 주장이 합리성이 있다고 생각하면, 퍼 나르다가 초등학교 모임에서 핀잔을 당한 적도 있는데, 매우 의기소침해 지거나 반발하는 것이 아니라, 털털 털어버리고 웃어넘기는 활달한 면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와도 그런 토론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절대로 어떤 목적의식이나 음모를 꾀하고자 퍼 나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토론으로 그의 인식에 대한 합리적 근거에 오류가 있음을 일깨워 주고, 나도 그 친구에 대한 인식의 다양성을 인정해 주면서, <서로 틀린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를 뿐이라는 것>으로 결론을 맺었던 적도 있다.
또 그가 방송통신대학을, 10개 학과를 다녔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기록은 한국 방송통신대학이 생긴 이래 최초이고. 아마도 전무후무한 기록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사고(思考)의 범위나 관심(關心)의 범위도 아주 넓고 다양하다. 통신대학에서 전공한 10개의 학문만 해도 다양하지 않는가! 불교나 기독교 등 종교이건 전통 유학(儒學)이건, 심지어 동양의 대체의학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이나 고금의 학문을 모두 섭렵한 ‘만물박사’이다.
그는 혼자 산다. 가족이라는 범주에 속박됨이 없으니, 무엇에나 거리낌이 없기도 하다. 아침에 집에서 나와 발길 닿는 데로 마음 쓰이는 데로 다니고, 허기지면 아무 데서나 아무 것이나 구미에 당기는 대로 해결한다고 하였다. 보이는 것이 옥수수든 빵이든 가리지 않고 허기를 해결하는 소박한 사람이다. 걷다가 지치고 피곤하면 적당한 자리에서 눈을 붙이고 나서, 다시 걷다가 어두워지면 집으로 들어가서 하루를 마무리 한다고 말하였다.
사귀는 사람도 다양하다. 고향사람들을 비롯하여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생들, 광주에서 사귄 사범학교 동창생들, 40여년 교직에 근무하면서 교류한 교직원들 뿐 아니라, 학부모 제자 그리고 지역사회 인사들을 포함하여, 통신대학 10개 학과에서 함께한 남녀노유의 각양각색의 다양한 친구들이 전국에 퍼져 있다. 그래서 그는 인맥 부자이다.
우리가 금주의 노래로 정지용의 <향수>를 불렀을 때, 우리들이 1절도 배우기 힘들어 할 때, 4절까지 모두 한 글자도 빠지지 않고 다 암송한 귀재(鬼才)였다. 자기의 말로는 오늘 배운 것도 다 잊어먹는다 하면서도 몇 년 전에, 충청도 정지용의 생가 마을을 방문했을 때에 거기에 세워진 시비(詩碑)에 적힌 시를 그 자리에서 다 암기하였고,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으니, 참 특별한 재능을 가진 귀재(鬼才)라고 해도 결코 과장된 표현이 아닐 것이다.
단지 그가 힘들어 한 것은, 몇 가지 병을 복합적으로 짊어지고 산다면서, 고통을 호소하고 있지만 그가 날마다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거의 매일같이 쉬지 않고 걷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엄살을 부리는지, 아니면 고통을 감내하면서, 고통을 잊고자 노력하는지, 알 수가 없다. 바라건대 그가 지병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오래 오래 의연한 모습으로 우리 곁에 있기를 소망하면서 글을 맺는다.(그를 가장 지근 거리에서 오래 겪어 본 후당(厚堂)은 김상문을 더 잘 알겠지만, 그냥 요즘 내가 그를 관찰한 대로만 써본 것이니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용서를 구하면서)
첫댓글 봉창문이 부친을 업고 오르내리며
구경시킨. 건물은 63빌딩이 아니고 광주의 화니백화점이라고
듣는듯합니다.
방통대는 현재 12개학과를 졸업한 교수가 한 분 계시다고도 해요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도 뒤따라 갈 수 없는 기인의 모든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됐네요.
잘 못 조사된 점은 더 알아보고 고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