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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앵두☆]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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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
안수환 시집 / 예술가시선 01 / 예술가(2014.10.25) / 값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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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
안수환
주가는 급락하고
환율은 급등했다
당분간은
신용경색현상이 지속될 모양이다
나는 조금 덜커덩거렸다
45번 국도처럼
삽교로 가는 45번 국도처럼
하늘을 올려다 보니
누가 날 흡수해버린 것 같다
옷소매를 보아도
누가 흡수해버린 것 같다
왜 따라오는가
45번 국도에 핀 저 앵두꽃
귀
안수환
내 귀는 엷디엷어
노자의 귀만큼 엷어
노자의 이름처럼 내 堂號 뒷머리에 귀 耳를 붙여볼까 했다
귀 이를 붙이기도 전,
어찌된 영문인지
近者엔 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형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近者엔 누가 날 부르는 것 같기도 하다
형님,
누가 날 부르는 것 같기도 하다
콩나물 근접
안수환
채소값이 꽤 올랐지만,
난 콩나물을 샀다
호박을 샀다
난 포항복집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미심쩍은 것은 싫으니까
或
복집엘 가더라도 그땐
늦잠꾸러기 데카르트를 불러내 그와 동행할 것이다
미심적은 것은 싫으니까
존재의 근거를 대보라면
내 존재의 근거는 콩나물에 있다
콩나물 근접 호박에 있다
내일
난 또 콩나물을 살 것이다.
쑥
안수환
쑥을 삶고
맵쌀 반말을 물에 불린 후
떡 방앗간으로 갔다
당신과 쑥을 캐던
북면 쪽 바라보려고
북면 쑥을 보려고
천지사방 쑥을 보려고
쑥과 멥쌀은
떡 방앗간 분쇄기로 들어갔다
하얀,
오
내 사랑 하얀,
평택
안수환
잠깐 사이 동남풍이 불 때
새들은 날아갔다
그러니
진리는 달려오다가 평택쯤에서 어정거릴 것이다
평택 근처 어디쯤
진리는 거기서 어정거릴 것이다
비 올 때
흑성산이 다 젖을 때
진리가 빗물이 되면
난
손등 위 평택 먹구름을 데리고 놀면 되니까
타조
안수환
껑충껑충 뛰어오른 타조의 査頓을 만나보고 싶거든
내 장딴지를 만져볼 것
아니면
무르팍을 꼿꼿이 세운 내 철학을 들춰볼 것
장담하건데
난
타조보다도 더 꼿꼿한 목을 쓰고 있다
목덜미 내 철학을 들춰볼 것
타조의 韻이 내 목덜미에 박혀 있다
해바라기
안수환
꽃 앞에서
꽃을 반듯하게 그리면 화가가 아니다
스르르 붓자루 흘러내리도록
물감 몇 방울 흘러내리도록
고흐의 그림처럼,
해바라기는 해바라기도 아니게
까마귀는 까마귀도 아니게
비슷하게
꺼무스름하게
아
꺼무스름하게
추상
안수환
겁에 질린 소가 도살장에 끌려왔다
양혜왕은 소를 놓아주라고 명했다
제시를 중단하라는 말입니까
아니다
그럼,
소를 양으로 바꾸어라
비용을 줄이라는 말입니까
아니다
소보다는 양이 덜 불쌍하다는 말입니까
그렇다
소는 내 눈 앞에 잇지만
양은 그렇지 않다
즉 ,
양은 추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맹자孟子』양혜왕, 상.7
눈짓 한 번
안수환
오늘 밤
불을 뺀 다음
옹기든 와당이든 저분들은 긴장할 수밖에
눈짓 한번에
흙먼지 가 알아보고
흙먼지는 개똥벌레 흉내를 내며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흙먼지,
나를 닮은 흙먼지는
저쪽 손을 놓아두고
누구 곁에 가서 붙을까
와당 쪽
옹기 쪽
흙먼지를 뛰어넘은 저분 곁 멀리 두고
그쪽
안수환
사악한 쪽만 아니라면
화산 백련지 연잎은 백련지 연못을 다 뒤덮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연잎의 보조개를 쳐다 본 뒤
천년만년
날 위해 애간장을 태우는 당신을 만났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악한 쪽 그쪽 물 밑바닥에 가라앉은 몸인즉
향기 만리
안수환
꽃병을 깼다
꽃병은 죽었지만
어딘가
꽃병의 향기는 살아 있다
꽃병의 향기는 이때부터다
고통을 줄이려면
생물학자적인 지식을 씻어낸 후
눈꺼풀을 수그릴 것
희미한 윤곽의 비늘이 될 것
향기 만리
찻잔
안수환
찻잔을 놓쳤다
찻잔이 깨진 것이다
아내가 들고 있던 찻잔이 깨진 것이다
찻잔이 사라졌다
내 대신 찻잔이 아내의 뒤를 따라간 것이다
오,
바람소리
팽나무
안수환
팽나무 손등을 만졌다
잠시 후 팽나무 팔뚝을 만졌다
어느 정도 친근한 기분이 들 때
팽나무 겨드랑이를 만졌다
팽나무는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내 말 인즉,
한 발씩 가까이 또 한 발짝 가까이
당신을 만날 땐 이 농간을 부리고 싶다
꽃잎
안수환
사랑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말하고 싶을 때는
꽃잎인 듯
돌인 듯
꽃잎 물어뜯고 돌 물어뜯고
혹은 딱정벌레 뚜껑을 눌러쓴 채
발가락 꼼지락꼼지락
까치
안수환
까치는 앞으로 몰려오고 뒤로도 몰려왔다
통관이 매끄러웠다
난 망치를 들고 못 하나를 제대로 박지 못했다
까치만도 못한 내 눈길
앞에서 속고 뒤에서 속고
오리엘 창문
안수환
한 발짝 앞으로 나온 창문,
다른 말은 하지 않고
한 발짝 앞으로 나와 한강을 바라보았다
안 보이는 부분을 보려고
한 발짝 앞으로 나와 한강을 바라보았다
욕심이 이러하매 내 나이 헛먹었다
흘러가는 물 한강을 내버려주지 않고 끌어당겼으니
내 나이 헛먹었다
그러니까 말인데
나완 달리
그 사람 이지함은
안 보이는 부분보다 더 큰 신령한은 없느니라 단언했건만
하늘은
안수환
하늘은 쉽게 죽는다
본받으라는 것인가 본받지 말라는 것인가
바람이 바람을 붙잡지 않은 것을 보면
더 이상 중심을 잡을 일도 없을 터
나는 혼자 걸었다
눈물이 나더라도 혼자 걸었다
나를 비추던 조명이 깨진 다음에도
당신 앞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아내의 바다
안수환
내 아내는 나뭇잎에 물든 물방울을 보면
바다라고 부른다
햇빛이 반짝이는 날,
나뭇잎을 쓸고 가는 바람을 보면
바다라고 부른다
바다는 저쪽에 있는 것
바다는,
호수보다도 크고 노을보다도 먼 곳에 있는 줄 잘 알면서도
나뭇잎을 물들이는 물방울을 보고 바다라고 부른다
가슴이 답답해지면
아내는 내 손바닥을 끌어당겨 자기 젖가슴 위에 놓는다
인생
안수환
내가 놓친 것은
당초무늬 질그릇 뚜껑만이 아니다
칫솔을 놓치고
손수건을 놓치고
읽고 있던 칸트를 놓쳐버렸다
내 아내를 놓쳐 버렸다
허무한 인생,
그러나 정말로 내 손에서 빠져나간 것은
가벼운 먼지였다
가볍게 가볍게 손에 들고 있던 인생이었다
지상시편 1부. 24
안수환
나는 각목에 박힌 못을 뺐다
각목이 가벼워졌다
나는 연못에 박힌 대못도 뺐다
연못이 가벼워졌다
그런데
눈물 반쪽을 데리고 온
내 가슴 속 흰 돌멩이는 온데간데없다
잠깐,
지상시편 5부. 19
안수환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정화를 보면
손가락을 내민 쪽은 당신의 손이었다
1512년 이후,
내 손가락은 당신의 손에 닿지 않았다
그러므로 손해 본 쪽은 당신의 손이었다
안간힘을 쏟은 당신의 손,
미켈란젤로의 생각과는 달리
사르트르는 그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화를 보고 無를 발명했다
말하자면,
사르트르는
당신의 손가락과 내 손가락 사이로 無의 공간을 찔러넣은 것이다
그날 이후,
無는 당신의 밥이 되었다
저것 봐
계룡산 수탉도 암탉을 끼고 다니면서 풀씨를 쪼아 먹는 것 봐
아니라니까 풀씨가 아니라니까 無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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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自序
1. 간절한 말은 외마디소리일 테고 외마디소리보다 더 간절한 말은 아무 말도 없는 침묵일 것이다. 시는 궁극적으로는 이 침묵의 권속일 것이다. 따라서 시는 나뭇가지 끝에 매달려 조금 흔뎅거리다가 슬그머니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이를 망각해버리면 시를 쓰는 시인이 교만해진다. 또 수다쟁이 소인의 淺薄으로 굴러 떨어진다. 지금 나는 이 문지방 앞에 앉아 있다.
2. Ⅵ부의시편들은 지난해 충남시협상을 받을 때 자선해보라는 부탁을 받고 다른 시집에서 끄집어낸 작품 들이다.「지상시편」몇 쪽은 연작시로서 아직 <시문학>지에 연재하고 있는 편린들이다. 이번 시집에 재수록하는 까닭은 그때 이들을 대상으로 하여 박찬일 교수가 해설을 써 붙여주었기 때문이다.
2014년 가을
안 수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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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환 詩集 [※앵두※]
[ 안수환의 글쓰기 ] -
세계-내-존재 自覺의 한 방향-無의 형이상학
박 찬 일(시인)
(1) 인생이란 무엇인가?-당초무늬 질그릇 뚜껑을 놓치는 일이다-칫솔을 놓치는 일이다-손수건을 놓치는 일이다-칸트를 놓쳐버린 일이다. 아내를 놓쳐버린 일이다〔이 모든 것을 합쳐 말할 때〕-먼지를 놓친 일이다. 인생이란 무엇인가?-먼지를 놓치는 일이다. ‘먼지로서 인생’을 놓치는 일이다.
(2) 내가 놓친 것은/당초무늬 질그릇 뚜껑만이 아니다/칫솔을 놓치고/손수건을 놓치고/읽고 있던 칸트를 놓쳐버렸다//내 아내를 놓쳐버렸다//허무한 인생//그러나 정말로 내 손에서 빠져나간 것은/가벼운 먼지였다/가볍게 가볍게 손에 들고 있던 인생이었다
- 「인생」전문, 『그 사람』,2012.
1. 예술가의 지독한 자부심
신학-존재론-존재철학-존재신론-철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형이상학이 본래적 의미에서, 구제형이상학을 포함하고, 윤리형이상학을 포함한다.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혹은 따로따로 향유하였다. 안수환의 도저한 사유가, 신학-존재론-존재철학Ontosophie-존재신론을 관통하면서, 본인 고유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존재’에 대한 응답인 것으로서, 언어를 통해 전경화 시켰다. 안수환은 이에 관한 한 20세기-21세기 한국의 거의 독보적 詩人이다. 詩人 중의 詩人을 말해야 할 때, 안수환을 먼저 떠올릴 일이다. 안수환은 문학판-정치판의 그 雜音에 응답하지 않는, 오로지 ‘존재音’에 응답하는 존재자로서, ‘고유한 철학으로서 詩세계를 구축해왔다. 세치 혀로 詩를 말하지 말고, 온몸으로-진정성으로 詩를 하렸다! 안수환의 범주적 명령〔정언명법〕이 아닐 리 없다.
중심이 없는 하늘이 ‘그 하늘’이 아니다. 바람으로 비유되는 하늘 역시 그 하늘이 아니다. 바람은, 늘 한 번 지나가며, 그리고 다시 안 오는, 하여. 구름과 유비로서, 다시 올려다보면 늘 그 자리를 벗어난 그 구름과 유비로서, 그 바람이기 때문이다. 2013 늦가을, 필리핀을 휩쓸고 간 태풍 하이엔, 2011, 일본 동북부를 강타한 대지진, 그리고 대형원전사고, 2010 아이티의 首都를 궤멸시킨 대지진 등이 하늘을 부정하게 하는 것들로서, 하늘을 쉽게 죽인다. [쉽게 죽는 하늘이 그 하늘이 아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하늘이 그 하늘이 아니다! 종말론으로 표상되는 구원론이 2000년 동안 지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 나부의 敵같은 것으로서, 내부에 똬리튼, 구원에 대한 갈망 때문이다. 구원에 대한 갈망이 보편적이다. 구원에 대한 갈망이 쉽게 죽는 하늘이 아닌것으로서, 神性이다.
하늘은 쉽게 죽는다
본받으라는 것인가 본받지 말라는 것인가
바람이 바람을 붙잡지 않은 것을 보면
더 이상 중심을 잡을 일도 없을 터
나는 혼자 걸었다
눈물이 나더라도 혼자 걸었다
나를 비추던 조명이 깨진 다음에도
당신 앞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하늘은」전문『눈부신 먼지』,2008
“쉽게 죽는〔…〕하늘”이 世界史的 차원에서만 확인되지 않는다. 個人史的 차원에서도 확인된다. 인간은 그냥 슬프다. ‘피조물로서 비애’이다. 피조물로서 비애가 ‘하늘’을 꼭 우러러보게 하지는 않는다. 피조무로서, 눈물이 단지를 넘쳐흐를 때 〔하늘에 대한 더 큰 집중이 가능하고〕‘하늘에 대한 포기’가 가능하다. ‘구원론으로서 종말론’의 포기가 가능하다. ‘피조물로서 비애?’ 너무 거창하다. 피조물로서 비애는 초월적 존재가 아닌, ‘내재적 존재로서 비애’이다. 초월적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 ‘순전한’ 내재적 존재로서 비애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세상 사람-世人으로서 비애이다. 안수환은 世人으로서 비애를 작정하고, ‘世人으로서 비애’를 감수-감당하려고 한다. 이른바 “눈물” 흘리면서 “혼자” 씩씩하게 “걸”어가는 자세이다. 사실 눈물 흘리면서 앞으로 걸어가는 자세는 동태적 멜랑콜리-역동적 멜랑콜리의 자세이다. 일반적 멜랑콜리가 아닌, 역동적 멜랑콜리dynamishe Melancholie가 구원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자기 자신의 구원이다. ‘그’에게 인생을 늘 살만한 것으로 의식하게 하는 ‘자부심-자존심’이 있다. 프로메테우스的 자부심이 “눈물이 나더라도 혼자 걸었다”라고 진술하게 한다. “나를 비추던 조명이 깨진 다음에도/당신 앞으로 달려가지 않았다”고 발언하게 한다. ‘자부심으로서 안수환’을 말해야 하는 까닭이다.「하늘은」의 맨 끝 구절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가 쐐기 역할을 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가 ‘자부심으로서 안수환’의 극명한 노출이다. ‘눈물’로 표상된 생-로-병-사의 고통이 인생을 점철하더라도, 하늘을 찾지 않는다. ‘나를 비추는 조명이 꺼짐’으로 표상된 ‘변덕성으로서 희-로-애-락’의 고통이 인생을 점철하더라도 ‘당신’‘을 찾지 않는다.
통영에 가면
민어를 먹는다
통영에 가면
황복어를 먹는다
맨드라미 바라만 보고
시청 주차장에서 날 기다리는
그리스도
잠깐 손 잡아보곤 놓아드리고
배가 부른 만큼
-「통영」전문,『그 사람』,2012
“민어”-“황복어”-“맨드라미”가 각각 표상하는 것이 내재성으로서 삶이다. ‘내재성으로서 삶’이 “시청주차장”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나, “시청 주차장에서 […] 기다리는” 것으로 해서 이미 그 의미를 脫色으로 암시한,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나, 이미 충분히 삶을 산 後였다. ‘희-로-애-락으로서 삶’을 충분히 겪은 者가 충분히 “배가 부른 만큼” 이 세상을 ‘가벼이’ 떠날 자격이 있다. 충분히 고통을 “먹”은 者, ‘배부른 者’가 그리스도를 “놓아드리고” ‘가뿐하게’ [그리스도 없이] 세상을 뜰 자격이 있다. 인간으로서 삶이 먼저이나, 인간으로서 삶이 그리스도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1) 구원을 무시로서 무시한다]
생-로-병-사의 잔혹성과 희-로-애-락의 변덕성이 동시에 말하는 것이 ‘좌불안석으로서 인생’, 그리고 불안이 그 표상인 ‘어쩔 줄 몰라하는 인생’-‘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인생’이다. ‘역동적 멜랑콜리로서 안수환’에게 불안이 ‘신에 의한 구원’의 동력으로 사용되지 않고, ‘자기자신에 대한 구원’의 동력으로 사용된다. 예술가의 지독한 자부심으로, ‘미적 단계→윤리적 단계→종교적 단계’의 역순으로서 ‘종교적 단계→윤리적 단계→미적 단계’를 자발적으로 말하는 안수환,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는 인간 안수환의 자부심의 표현이고, 동시에 예술가 안수환의 자부심의 표현이다. ‘프로메테우스-시지포스’가 계속 간을 쪼아 먹히고, 계속 바위를 굴려 올리는 것은 ‘자기자신의 정당성’ 대한 확고한 인식에 기반 한다. 태어난 게 罪이나 그것은 나에 의한 罪가 아니다. 이미 ‘나’는 세계-내-존재로서, 罪와 무관하다. 나는 나의 창조자이다. ‘세계-내-존재 意識’이 被殺性-수동성이 아닌, 企殺性-능동성으로서, 자신을 새롭게 규정하는 동력이다. 예술가의 지독한 자부심이 가능한 까닭이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로 표상되는 예술가의 지독한 자부심-자긍심이「소나무」에서 아주 간결하게 처리됐다.
소나무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지 않았다
팔꿈치를 펼쳤다가 팔꿈치를 접고 있는 나무
특별히 허리를 꼬부리고 서 있는 나무
푸른 소나무
존엄이란 존엄이 다 몰려왔다
얼얼얼
나는 이 소나무 씨를 받으며 살아갈라네
- 「소나무」전문,『그 사람』,2012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소나무”가 자부심이 아닌 것이 거기에 삶이 없기 때문이다. ‘내재성으로서 삶’이 없기 때문이다.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소나무가 삶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는 나무(“팔꿈치를 펼쳤다가 팔꿈치를 접고 있는 나무”) 이삭 줍는 나무(“특별히 허리를 꼬부리고 서 있는 나무”), 거기에 삶이 있고, 안수환이 특별하게 말하는 것으로서, 삶이라는 “존엄이란 존엄”이 있다. “푸른 소나무” 한 그루에 우주가 있다. 아니, 푸른 소나무 하나를 우주가 감당하지 못한다. [푸른 소나무가 오직 영원하다] 푸른 소나무가 술부가 아닌 주부로서, ‘나머지는 침묵이다’가 말하는 바와 같다. 푸른 소나무의 유비가 타락하기 以前의-‘선악 분별’ 以前의, 천지창조시대의 로고스이다. 푸른 소나무와 ‘타락하기 이전의 선악과 나무’가 상호 유비적이다. 푸른 소나무가 말하는 것이 ‘존엄으로서 존엄’으로서, 즉 동일률로서2), 로고스이고 아담언어이다. 안수환이 살고 있는 땅이 선악의 분별없는, “얼 얼 얼”이 그 표상인 시니피앙의 시대, 곧 천지창조시대의 에덴공간이다. ‘얼 얼 얼’이 언필칭 ‘방언’과 같은 것으로서, 천지창조시대의 언어이다. ‘그’가 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고, 악이 무엇을 말하는지 모른다.
강요와 자유의 경계 밖으로
새들은 더 높이 날아올랐다
-「지나가는 바람10」부분,『눈부신 먼지』,2008
예술가의 지독한 자부심이다. “강요”/“자유”와 선/악이 상호 유비적이다.
2. 내재성으로서 비애
‘내재성으로서 비애’가 토출된 글이 「아내의 바다」이고 「지나가는 바람․10」이고,「지상시편24」이다. 「아내의 바다」가 궁금하다.
내 아내는 나뭇잎에 물든 물방울을 보면
바다라고 부른다
햇빛이 반짝이는 날
나뭇잎을 쓸고 가는 바람을 보면
바다라고 부른다
바다는 저쪽에 있는 것
바다는
호수보다고 크고 노을보다도 먼 곳에 있는 줄 잘 알면서도
나뭇잎을 물들이는 물방울을 보고 바다라고 부른다
가슴이 답답해지면
아내는 내 손바닥을 끌어당겨 자기 젖가슴 위에 놓는다
-「아내의 바다」전문,『눈부신 먼지』,2008
“나뭇잎에 물든 물방울”과 “나뭇잎을 물들이는 물방울”이 벌써, 하늘이라고 할 때 그 하늘이 의미하는, “바다”인 것이다. 바다가 “저쪽에 있는 것”으로서, “먼 곳이 있는” 그 바다가 아니라, ‘지금 여기’가 바다라고 알린 것이다. [여기가 로도스다] “답답”한 “가슴”-“아내”의 “젖가슴” 또한 벌써 바다이다. ‘변덕성으로서 희노애락’-‘잔혹성으로서 생로병사’가 바다이다. 안수환이 내재적 질서에서 구원을 찾는 것이 분명할 때, ‘답답한 가슴’이 구원에 포함되고, ‘아내의 젖가슴’이 구원에 포함된다.「지상시편24」에 주목하는 까닭이다.
나는 각목에 박힌 못을 뺐다
각목이 가벼워졌다
나는 연못에 박힌 대못도 뺐다
연못이 가벼워졌다
그런데
눈물 반쪽을 데리고 온
내 가슴속 흰 돌멩이는 온데간데없다
잠깐
-「지상시편24」부분,『시문학』,2012.10
“눈물 반쪽을 데리고 온/내 가슴속 흰 돌멩이”가 서쪽에서 온 뜻이 ‘가슴속 흰 돌멩이’가 말하는바, 내재적 삶에 대한 강조이다. ‘가슴속 흰 돌멩이’가 ‘내재성으로서 삶의 비애’를 표상한다. 흰돌멩이가 하얀 소복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서, 애도대상을 표상한다. “눈물반쪽”이 얘기하는 바이기도 하다. [죽음이 다녀가셨다] “가슴속 흰 돌멩이는 온데간데없다”가 동쪽으로 간 뜻은? ‘애도불가능성-자아상실감’으로 표상되는 일반적 멜랑콜리의 그 행로에서 벗어난 것을 알린다. 문제는 별연으로 처리한 “잠깐”이다. 콤마로 끝냈으므로 뭔가 생략된 듯? 아님 ‘열린 형식offene Form’으로서 해석상의 자유를 부여하려 한 것? ‘잠깐’이 ‘온데간데없다’ 바로 다음에 오는 것이므로, 즉 잠깐이 온데간데없다에 걸리므로, ‘잠깐, 온데간데없다’를 말한 것일까? ‘애도불가능성[리비도집중철회불가능성]-자아상실’의 여지를 알린 것일까? 일반적 멜랑콜리 또한 보편적인 것으로서, 내재성의 범례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슬프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슬프고, 자기자신에 對한 실망이 말하는바, 자기자신 때문에 슬프다. ‘자기자신에 對한 실망’을 선고하는 초자아Ubenrich 때문에 슬프다. ‘흰 돌멩이’에 주목할 때, 다른 式의 해석이 등장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요한계시록」2장 17
성경에서 “흰 돌”이 표상하는 것이 “만나”와 마찬가지로 구원 즉 구원의 증표이다. “각목에 박힌 못”을 빼서 “각목이 가벼워졌”으나, “연못에 밥ㄱ힌 대못”을 빼서 “연못이 가벼워졌”으나, 내 가슴속 돌멩이는 [벌써] 온데간데없었고, 그러므로 나는 가벼워진지 오래라고 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종말론-구원론에서 자유로워진지 오래라고 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지상시편24」의 “눈물 반쪽”이 표상하는 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 너희들을 쉬게 하리니’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 같은 것이다. 눈물이 아니고, 더구나 눈물 한쪽도 아니고, 눈물 반쪽의 어투가 암시하듯,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이 구원요청의 근거가 아니라, 지상에서 감내해야 할 몫으로 본 것이다. 더구나 인생은 잠깐 아닌가?: “잠깐”을, 제목「지상시편24」의, ‘지상시편’을 고려해서, 말 그대로 잠깐인 인생에 관해서 말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잠깐 다음의 쉼표에, ‘있다가는 인생 아닌가? 같은 것이 내장돼 있다 보는 것이다. [구원을 단호히 거부하는 안수환]
내 영혼이 깨끗해진 것은
사라지는 것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
무쇠에게 입을 맞추고 돌아온 자는
다시 눈을 떠야 하리라
갈참나무 아래 물달개비꽃
낯익은 죽음 한가운데 서서
천둥을 가슴팍에 찢어붙인 너는
아름답구나
오 상처난 영혼이 더욱 아름답구나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강요와 자유의 경계 밖으로
새들은 더 높이 날아올랐다
-「지나가는 바람10」부분,『눈부신 먼지』,2008
“사라지는 것들”을 “내 영혼이 깨끗해진” 이유로 말한다. 무서운 역설이다. 역설은 늘 ‘역설적 진리’이다. “무쇠에게 입을 맞추고 돌아온 자는/다시 눈을 떠야 하리라”에서 ‘무쇠’가 은유하는 것이 시체 같은 것으로서, ‘사라지는 것’-‘사라진 것’이다. 육사가 “강철로 된 무지개”(「절정」)을 말했을 때, 강철 또한 무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강철로 된 무지개’는 무지개를 ‘어려운 것’으로 말한 것이다. ‘무쇠에게 입을 맞추고 돌아온 자는 다시 눈을 떠야 하리라’가 특히 말하는 것이 ‘몰락의 보편성’이다. ‘몰락의 보편성’이 진리로 드러났을 때, 그것은 진리가 말하는 것으로 해서 ‘무조건적 수용’을 요구한다. ‘다시 눈을 떠야 하리라’가 말하는 것은 ‘깨끗해진 영혼’이 말하는 바와 같다. 요이 땅! 인생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담배 한 갑에 스무 개의 자유가 있다지 않는가? 스무 번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담배, 인간이 담배보다 못하지 않지 않은가? “낯익은 죽음”이 말하는 것 또한 몰락의 보편성이다. 죽음은 늘 낯이 익다. 참 많이 죽는다. 죽음이 ‘친숙한 죽음’이다. 죽음이 인간에게 동무로서, ‘친구야 놀자!’가 같은 곳을 向한다. “천둥을 가슴팍에 찢어 붙인 너”를 “아름답구나”로 불러 주었을 때, 이것은 파우스트의 어조로서, 진리를 보았을 때 말한 ‘멈추어라, 아름답다!’의 그 어조이다. ‘세계의 가장 안쪽을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알겠노라’, 그 어조이다. 진리의 司祭로서 안수환을 말한다. ‘몰락의 보편성으로서 진리’를 告知하는 안수환을 말해야 하는 까닭이다. 몰락의 보편성이 진리로서 是認됐을 때, 몰락의 보편성이 구원을 말하기 시작한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저녁 무렵에 날기 시작한다. “강요와 자유”를 非-“경계”로 말하는 것이 구원이다. “더 높이 날아”오른 “새들”이 구원받은 새이다.
3. 지상의 양식-천상의 양식
지상시편들 中 안수환의 생-철학을 비교적 명료하게 드러낸 것이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교회 천정화 「천지창조」의 감상문 「지상시편19」이다. 신이 손을 내밀려고 하고, 인간이 그 손을 잡을 준비를 하고 있다. 神이 인간에게 말을 걸려고 하고, 인간은 神에 응답할 준비가 돼있다3). 파르메니데스 용어로서 ‘동일한 것das Selbe-to auto’의 場, 즉 사유와 존재가 ‘함께 속해있음Zusammengehoren'의 場에서 사유와 존재는 상호공속성 Zueinandergehorikeit이 특징이다. 상호共屬性이 벤야민의 용어로는 '상호공명'이다4). 神이 말을 걸어올 때, 준비하던 인간이 그 말을 듣고, 그 말을 받아 적는다. ’우주 가장 안쪽에 있는 존재‘가 들려주는 말 [우주音]을 들을 수 있고, 그것을 받아 적을 수 있는 者가 詩人이다. 詩人 중의 詩人이다.「천지창조」에서 안수환이 본 것은 그러나 神 의 손을 붙들지 않은 인간의 손이었다. 神의 손과 인간의 손 ’사이‘였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정화를 보면
손가락을 내민 쪽은 당신의 손이었다
1512년 이후
내 손가락은 당신의 손에 닿지 않았다
그러므로 손해 본 쪽은 당신의 손이었다
안간힘을 쏟은 당신의 손
미켈란젤로의 생각과는 달리
샤르트르는 그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화를 보고 無를 발명했다
말하자면
샤르트르는
당신의 손가락과 내 손가락 사이로 無의 공간을 찔러 넣은 것이다
그날 이후
無는 당신의 밥이 되었다
저것 봐
계룡산 수탉도 암탉을 끼고 다니면서 풀씨를 쪼아 먹는 것 봐
아니라니까 풀씨가 아니라니까 無라니까
-「지상시편19」전문,『시문학』,2013.11.
“당신의 손가락과 내 손가락 사이”에 “無의 공간”이 있다. 인간은 늘 신으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다. 신과 인간 사이에 無-Nichtsein가 있다. 신은 말을 걸려고 했는가? 어쨌든 인간은 응답할 준비를 하지 않았고, 신의 손을 잡지 않았다. 無인 것이다. 은하수 전체가 ‘적막으로서 無’인 것이다.5) 당신의 양식-“당신의 밥”이 無인 것이다.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는 것이 “수탉”과 “암탉”이 “풀씨”가 표상하는 사랑을 “쪼아 먹”고 살지만, 결국 먹게 되는 것이 마찬가지로 無라는 점이다. “아니라니까 풀씨가 아니라니까 無라니까”, 화자가 강한 톤으로 풀씨를 부인하고 無를 긍정한다. 인간의 양식도 無인 것이다. 이른바 無의 보편성이다. 당신 [하나님]도 無가 밥이고, 인간도 無가 밥이다. 無의 보편성과 몰락의 보편성이 상호 유비적이다. 신이 無가 양식일 때, 신이 그 극단적 존재자로 해서, 사실대로 말해 최고 존재자로 해서, 신이 無가 양식인 것을 알리는 것은 ‘無가 보편성으로서, 진리’를 알리는 것이다. 천상의 신도 無를 먹고 사는구나! 천상의 신이 無를 먹고 사는데 뭘, 우리가 無를 먹고 사는 게 천상 당연한 것 아냐? 신의 無가 인간의 無를 정당화시킨다. ‘안수환’이 구제형이상학으로서, 특이 이점에서 니체-벤야민에 합류한다.
저녁인데
살구꽃은 발끈 성이 나 고함을 질렀다
내 발목 복숭아뼈 近洞
꺼뭇꺼뭇한 배추밭이 일어나
꽃보고 揖을 한다
상황이 이러하매
아홉 겹 九天 자갈밭에 묻어 둔
내 이름을 불려내
揖 하도록 명했다
꽃 보면
揖
-「지상시편4」전문,『시문학』,2013.1.
은하수 전체가 無로 판명나고, 신이 無로 판명나고, 인간이 無로 판명났다. 사유와 존재의 상호공명을 말할게 아니고, 인간과 신의 상호공명을 말할 게 아니다. 안수환은 “살구꽃”과 “배추밭”이 상호공명하는 모습을 볼 것을 요청한다. “내 이름”에게 살구꽃의 “고함소리”에 공명할 것을 요청한다. ‘살구꽃의 고함소리’의 그 소리가 ‘신의 소리-존재의 소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 소리가 아닙니다. 저 소리가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꽃”에게 경배할 것을 요청한다. “꽃 보면/揖”!-압권이다; 굳이 구별한다면, 신과 無의 상호공명이 수직적 상호공명이고 살구꽃-배추밭-내 이름들의 상호공명이 수평적 상호공명이다, 무슨 소용인가?-안수환의 말일 것이다.
안수환의 시적 성취는 그 표면이 잠잠한 만큼이나 그 깊이를 측량하기가 곤란하다. 안수환의 시적 성취는-존재론을 넘어, 존재-神-론Onto-Theo-Logit을 넘어, 無의 형이상학에, ‘구제형이상학으로서 無의 형이상학’에 도달했다. ‘나머지는 침묵이다’
---각주----
1) “금을 만들 때는 수은이 들어간다/수은은 증발하고 금이 남는다//설악산 신흥사엔 부처가 없다//앞마당 뒷마당에 수은이 없으니/부처를 감싸줄 수은이 없으니//오 증발이 없으니// 설악산 신흥사엔 부처가 없다” 안수환의 「설악산 신흥사」 전문이다. 시집 『그 사람(2012)』에 실렸다. “수은”이 “부처”의 조건이지 부처가 수은의 조건이 아니다. 수은이 먼저이고 부처가 나중이다. 형상이 먼저 오고 질ㄹ쇼가 그 뒤를 따른다. 아니다! 질료가 먼저이고 형상이 나중이다. [“증발”이 ‘충분한 삶’을 표상했다]
2) ‘존엄이 존엄이다’가 동일률-항진명제-분석명제이다. ‘존재사로서 繫辭’, ‘이다’가 존엄을 진리로 是認시킨다..
3)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천지창조」를 하이데커에서 보는 것이다. 하이데커, 「동일성의 명제」『동일성과 차이』Pfullingen 1957,6,Aufl.91978), 8~12
4) 벤야민의 말. “모든 이념이 각각 하나의 태여\ID이다. 태양들이 상호 관련 맺듯, 이념이 비슷한 다른 이념들과, 서로 관련 맺는다.” 벤야민, 「이념으로서의 말」(‘인식비판적 서문’),『독일비애극의 원천』, 전집, Frankfurt/M. 1978,2,Aufl. Ⅰ-1, 218
5)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1818)』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 인도인들이 신화 및 의미가 없는 말들을 통해 브라마Brahm로 흡수되는 式처럼, 혹은 불교도들의 니르바니 式처럼, 無를 회피하는 그런 式 말고, 달리 말하는 것: 모든 덕목과 거룩함의 뒤편에서 부유하는 마지막 목표지, 즉 저 무Nichts의 어두운 인상을 몰아내야 할 것인가. 아이들이 어두운 것을 두려워하듯, 두려워하는 그것을 몰아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응당 고백할 것이, 의지가 완전히 지양된 후에 남아 있는 것이, 아직 의지 충만한 그 모든 者들이 볼 때, 물론 無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또한 역으로 의지가 방향을 바꾸어서 자기를 부인한 자들에게는 매우 리얼한 이 세계가 모든 태양들과 은하수들과 함께-無인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자기 부인Sich-Verneinen을 통한 無’-‘無에의 의지를 통한 無’를 말한다. [주목되는 곳이 “無를 회피하는 그런 式 말고, 달리 말하는 것”이다] 무에의 의지가 그 결과로서, 無의지-無이다. ‘無에의 의지’와 ‘몰락에의 의지’가 상호 유비적이다. 쇼펜하우어에서 의지의 형이 상학을 말하고, 니체에서 ‘몰락의지로서 형이상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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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안수환의 도저한 사유가, 神學Theologie-존재론Ontologie-존재철학Ontosophie-'존재신론'[존재Onto-신Theo-론logie]을 관통하면서, 본인 고유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존재’에 대한 응답인 것으로서, 언어를 통해 전경화 시켰다. 안수환은 이에 관한 한 20세기-21세기 한국의 거의 독보적 詩人이다. 詩人 중의 詩人을 말해야 할 때, 안수환을 먼저 떠올릴 일이다. 안수환은 문학판-정치판의 그 雜音에 응답하지 않는, 오로지 ‘존재音’에 응답하는 존재자로서, ‘고유한 철학으로서 詩세계를 구축해왔다. 세치 혀로 詩를 하지 말고, 온몸으로-진정성으로 詩를 하렸다! 안수환의 정언명령이 아닐 리 없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정화를 보면
손가락을 내민 쪽은 당신의 손이었다
1512년 이후
내 손가락은 당신의 손에 닿지 않았다
그러므로 손해 본 쪽은 당신의 손이었다
안간힘을 쏟은 당신의 손
미켈란젤로의 생각과는 달리
샤르트르는 그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화를 보고 無를 발명했다
말하자면
샤르트르는
당신의 손가락과 내 손가락 사이로 無의 공간을 찔러 넣은 것이다
그날 이후
無는 당신의 밥이 되었다
저것 봐
계룡산 수탉도 암탉을 끼고 다니면서 풀씨를 쪼아 먹는 것 봐
아니라니까 풀씨가 아니라니까 無라니까
-「지상시편19」전문,『시문학』,2013.11.
“당신의 손가락과 내 손가락 사이”에 “無의 공간”이 있다. 인간은 늘 신으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다. 신과 인간 사이에 無-Nichtsein가 있다. 신은 말을 걸려고 했는가? 어쨌든 인간은 응답할 준비를 하지 않았고, 신의 손을 잡지 않았다. 無인 것이다. 은하수 전체가 ‘적막으로서 無’인 것이다. ‘예술가의 지독한 자부심’을 떠올릴 때 안수환을 떠올린다.
박찬일(시인-추계예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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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수환 시인∥
∙ 충남 연기 출생으로
∙ 연세대 졸업
∙ 1973년『시문학』과『문학과 지성』에 데뷔했다.
∙ 2012년『그 사람(심지)』외 다수의 시집이 있으며
∙ 시론집으로는 1988년『시와 실제(문학과 지성)』등이 있다.
∙ 현재 충남 평생교육원에서『주역』강의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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