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 아룬다티 로이, 세계화에 맞서는 '보통 사람들'의 상상력
2005-10-01 오후 12:30:00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의 에세이 모음집 <보통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정병선 옮김, 시울, 2005)라는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여기에는 '전쟁이 평화라는 아이러니'를 비롯해 모두 8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지금까지 첫 소설인 <작은 것들의 신>(황보석 옮김, 문이당, 1998)을 시작으로 인도의 대형댐 건설과 이라크 전쟁을 비판한 에세이집 <생존의 비용>(최인석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과 <9월이여, 오라>(박혜영 옮김, 녹색평론사, 2004) 등이 번역돼 나왔지만 아직까지도 로이는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작가가 아니다.
로이는 1997년 <작은 것들의 신>으로 매년 영어로 쓰인 소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을 선정하는 영국의 부커상을 수상하고 연이어 뛰어난 작가적 상상력으로 인도의 대형댐 건설, 이라크 전쟁, 신자유주의, 세계화 문제를 통렬하게 비판하는 정치적 에세이들을 발표하면서 놈 촘스키, 하워드 진과 함께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주목받는 지성인의 대열에 들어섰다.
600만 부나 팔린 첫 소설의 성공으로 로이는 일약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고, 마치 그녀가 세상의 모든 돈이 돌아가는 파이프에 구멍이라도 뚫은 것처럼 돈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녀가 소설 속에 그렸던 작은 감정들이 은행 계좌의 돈으로 교환되는 상처를 입는 동안 자신의 작가적 상상력의 원천이던 인도의 아름다운 땅과 강은 수백만 달러를 쏟아 부은 인도 정부의 핵 실험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로이는 그 뒤 인도 정부가 가장 '골치 아파하는' 지식인으로 떠올랐다.
'진실'에 대해 침묵하는 작가들
로이는 소위 말하는 정치적 작가이자 세계화를 반대하는 활동가다. 물론 그녀 자신은 마치 '소파 겸용 침대'처럼 들리는 이 말을 엉터리 딱지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로이 자신은 그저 자기가 본 대로 쓸 뿐이고, 쓴 대로 행동할 뿐이기 때문이다.
로이는 3억 인구가 문맹인 나라에서 이른바 '유명 작가'가 된다는 것을 미심쩍은 영예로 여긴다. 마하트마 간디를 배출하고 그 반세기 뒤 핵 실험을 하는 나라에서 작가로 존재한다는 것은 가혹한 시련이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에게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거는 나라에서 작가가 된다는 것은 결국은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정치적인' 행동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안다.
무너지는 나무들, 댐 공사로 쫓겨나는 하층민들, 폭탄을 맞은 아이들과 그들을 감싸 안고 우는 가족들, 로이는 작가란 결국 아픈 눈을 뜬 채 자신이 목격한 삶의 불의와 고통을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하고 일단 본 다음에는 진실에 대해 발언하는 것도, 침묵하는 것도 모두 정치적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 작가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롭게 말할 권리를 보호받고 있지만 실제로는 작가들이 마땅히 해야 할 말이라도 "팔리지 않는" 경우에는 스스로 눈을 감거나 입을 다물고 있다. 보이지 않은 힘 때문에 사람들이 가정과 땅, 일자리와 인간적 존엄성, 그리고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잃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작 지금의 작가들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발'이란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싸움을 걸어 이들을 밀어내는 것"
작가로서 로이가 처음 목격한 아픈 현실은 인도의 나르마다 강 개발이었다. 1999년 인도 대법원이 나르마다 강의 거대한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 공사 재개를 결정하자 로이는 바로 댐 건설 반대 운동에 나섰다. 가슴까지 차오르는 강물 속에서 며칠이고 저항하는 가난한 농부들과 어부들을 보면서 그녀는 3200개의 댐 건설이란 결국 나르마다 강에 생존을 의지하던 무수한 약자들의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것임을 알았다.
로이가 보기에 국가가 말하는 소위 '개발'이란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싸움을 걸어 이들을 밖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구자라트 주의 도시 산업 부문의 기득권층을 위해 나르마다 유역에 수천 년간 삶을 의탁했던 가난한 주민들은 결국 쫓겨나야 했다.
쫓겨날 20만 명의 주민들은 지금까지는 비록 가난했지만 아름다운 고향에서 살 수 있었다. 강에서 물고기를 얻고, 숲에서 땔감과 약초를 얻으며 자급자족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운명은 싸구려 농업 노동자가 되거나 아니면 도시의 판자촌으로 굴러가 빈민으로 전락하는 것 이외엔 다른 길이 없다. 이제부터 이들은 계속해서 이곳저곳으로 쫓겨 다니게 될 것이다.
로이의 말대로 한번 쫓겨나면 나중에 서너 차례나 더 쫓겨난다. 댐 건설로 쫓겨나고, 우라늄 광산 때문에 쫓겨난다. 도시 정비로 쫓겨나면, 다시 택지 개발로 쫓겨나고, 나중엔 미군 기지 이전으로 또 쫓겨난다. 일단 한번 구르기 시작하면 멈추어 쉴 곳이 없다.
'전쟁이 평화라는 아이러니'에도 나오듯이 결국 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 시대에 가난은 범죄고, 더 가난해지는 것에 항의하는 것은 테러가 된다. 국가의 논법으로 보면 희생자들이 마땅히 희생자이길 거부할 때 이들은 곧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이다.
결국 삶의 터전을 내놓으라는 아디바시들의 항의에 케랄라 주 경찰은 2003년 2월 어린이와 여성들이 포함된 4000명의 시위대에게 발포했고, 이들은 즉시 '무장 반란군'으로 보도됐다. 물론 그들에게도 무기가 있었다. 부엌칼 몇 개와 벌들이 들어 있는 비닐 봉지가 발견됐다.
"이라크 민중과 인도 민중은 바로 우리의 모습"
개발과 성장지상주의 논리는 곧 전쟁의 논리다. 한 나라가 한 나라이길 멈추고 제국으로 뻗어나가려 할 때, 그래서 경제발전을 위한 무한성장과 무한시장을 확보하고자 할 때, 필연적으로 이것은 약육강식의 생존 경쟁과 약자들을 상대로 한 전쟁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로이에게 이라크는 먼 나라가 아니다. 미국의 침략과 점령으로 죽어간 이라크 민중은 바로 댐 건설로 뿌리가 뽑힌 인도의 기층 민중들이었고, 나르마다 개발 계획으로 희생될 무성한 수목들과 작은 곤충들이었다.
개발이 비즈니스이듯 이제 전쟁도 비즈니스다. 전쟁이란 창고에 오래 쌓인 재고 물량을 단숨에 처리하고 새로 개발된 신형 무기들을 실험하는 강대국들의 독점적인 판촉 시장이다. 상공을 가르는 신형 전투기와 야간 폭격의 섬광은 숨 막히는 아름다움으로 대대적인 나이키 광고와 함께 텔레비전에 계속 방영된다. 이제 세계 전역의 어린아이들이 새 비디오 게임을 사달라고 조르는 것을 멈춘다.
그러나 여기서 전쟁 비즈니스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수지맞는 '재건'사업이 남아 있다. 이라크 '재건' 계약 덕분에 세계 경제에 도약의 시동이 걸릴 수 있다고 소위 '자유언론'들은 자유롭게 흥분한다.
'제국의 진실'(<9월이여, 오라>에는 '메소포타미아, 바빌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로 번역돼 있다)에 나오듯이 로이가 보기에 아르헨티나 민중들이나 이라크 민중들은 단지 사용된 무기만 다를 뿐 모두 똑같은 과정을 거쳐 황폐화됐다. 한 쪽은 국제통화기금(IMF)의 수표장이, 다른 쪽은 크루즈 미사일이 쓰였을 뿐이다.
열화우라늄탄은 전차만 녹이는 것이 아니다. 방사능 열기로 어린 병사들의 생명도 녹아내린다. 스마트 폭탄, 전자기펄스 탄, 소프트 폭탄, 토마호크, 파쇄성 폭탄에 공중폭발 대형 폭탄까지 한 나라가 이토록 엄청난 폭탄을 맞고도 재건이 가능할까? 나무가 죽고, 강도 죽고, 땅도 죽고, 빗물을 마신 아이들마저 죽어 가는데 과연 미래를 위한 재건이 가능할까?
2004년 11월 7일 호주의 시드니 평화재단이 올해의 평화상 수상자로 로이를 선정하자 로이는 '평화와 신(新)기업해방신학'이라는 연설문을 낭독했다. 이 글을 보면 미국이 말하는 이라크 '재건' 사업이란 바로 이라크 경제의 모든 부문을 민영화해 자유롭게 초국적 기업에 매각하고, 기업들이 그로 인한 이윤을 100% 국외로 빼내갈 수 있도록 하는 '기업해방신학'임을 알 수 있다. 일단 이라크를 초국적 기업에게만 넘겨주면 약간의 권력 정도는 얼마든지 '임시 이라크 정부'에게 민주적으로 이양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매각 이윤이 충분하지 않다면 700만 달러를 보상받은 벡텔처럼 만신창이가 된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 배상금'과 '이익 손실' 청구 소송까지 제기할 수 있다. 미국식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식 대가로 이제 침략당하고 점령당했던 이라크는 핼리버튼, 쉘, 모빌, 네슬레, 펩시,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같은 초국적 기업들의 이익 손실에 대해 2억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 물론 민영화와 구조조정을 위해 IMF에 손 벌리도록 강요받아 생긴 국가부채 1250억 달러는 별도로 갚아야 한다. 이러고도 이라크에서 과연 미래를 위한 재건이 가능할까?
"작가는 '야만의 세상'의 진실을 발언해야"
나르마다 강과 이라크 땅은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밀려나고 누가 이득을 챙겼는지, 약자들의 삶이 어떻게 무너지고 다시 이어질 수 있는지, 이런 보이지 않는 진실들을 들어주고 말해 줄 작가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로이는 국가가 아닌 강과 계곡으로부터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자 했다. 로이가 생각한 저항이란 바로 전쟁, 제국, 기업 세계화 뒤에 숨겨진 토막 난 진실들을 하나씩 짜맞추어 '보통 사람들'의 언어로 다시 들려주는 것이다.
언젠가 로이는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맑은 강물을 들여다보며 거기에 시멘트를 쏟아 부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문명이냐"고 반문한 적이 있다. 로이에 따르면 작가란 연약한 존재의 연결 고리들을 깊이 들여다보고 마술적 상상력으로 그 고리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예술가다. 어떤 존재이건 일단 깊이 들여다보면 결코 우리와 연결된 그 고리를 쉽게 잘라내지 못할 것이다.
가령 맑은 강물을 깊이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그 물속에 시멘트를 쏟을 수 없을 것이다. 나무가 자라는 것을 두고두고 지켜본 사람이라면 그 나무를 베어내지 못할 것이다. 또 죽어가는 동물의 눈을 오래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결코 덫을 놓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다른 존재를 처음 사랑했을 때의 설렘을 기억하고 있다면 결코 다른 존재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눈을 감을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의 저항이란 바로 자신에 대한 겸손이자 다른 존재에 대한 존중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맑스주의 혁명가였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잡자 1926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체포되어 그 후 죽을 때까지 10년 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혁명의 좌절, 투옥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가족과의 이별, 그의 몸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질병과 고통 속에서 결국 그람시는 1937년 끝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런 그가 가족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어린 둘째 아들에게 아버지의 고향 마을인 사르데냐에 대해 들려주고자 이런 아름다운 동화를 적어 보낸 적이 있다.
"한 아이가 마루에서 우유병을 옆에 둔 채 잠이 들었습니다. 생쥐가 한 마리 나타나서 그 우유를 마셨습니다. 아기는 잠에서 깨어나 우유병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래서 생쥐는 양에게로 달려가 젖을 좀 달라고 했습니다.
양은 젖이 말라버리고 없었습니다. 풀을 먹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생쥐는 다시 들로 갔습니다. 그러나 물이 말라 들에는 풀이 없었습니다. 생쥐는 우물에게로 갔습니다. 우물은 허물어져 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쥐는 석공에게로 달려가 우물을 좀 고쳐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석공에게는 알맞은 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쥐는 또 산으로 달려갔습니다. 산은 생쥐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무가 죄다 없어진 산은 해골 같았습니다. 그래서 생쥐는 산에게 말했습니다. 지금 돌을 주면 나중에 아기가 자라서 어른이 되어 산에 벚나무도 심고 소나무도 심을 거라고요.
그러자 산은 돌을 내주었습니다. 그래서 아기는 우유를 실컷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유 속에서 목욕도 할 수 있을 만큼 우유가 넘쳐났습니다. 그리고 훨씬 더 나중에 아기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는 산에 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흙이 씻겨 내려가는 일이 없게 되고, 땅은 기름지게 되었습니다."
이 동화는 혁명의 꿈은 사라지고, 가족과 동지들은 모두 흩어지고, 몸은 병들어가던 극도의 공포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씌어진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게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평생을 저항운동에 바쳤던 그람시는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모든 존재가 얼마나 신비롭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리고 왜 다른 존재의 고통과 슬픔이 덜어지지 않고는 나의 운명도 나아질 수 없는지를 뛰어난 시적 상상력을 통해 설명해준다.
그람시의 고향인 사르데냐 섬은 원래 숲이 울창한 곳이었지만 19세기에 벨기에와 프랑스의 기업들이 돈벌이를 위해 광물 자원을 약탈하고, 이탈리아 본토의 공업화에 따라 목재수요가 늘어나면서 점차 황폐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런 자연의 황폐는 물론 사르데냐 주민들의 억압적인 상황과 동시에 일어났다. 아마 그람시는 땅과 나무와 물과 인간이 모두 같은 운명임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저항이고 혁명이라고 본 것이리라.
이 동화는 결국 홍수를 조절하고 가뭄을 막는 것은 거대한 부패 고리로 쌓아올린 대형 댐이 아니라 바로 나무이고, 우물이 마르지 않고, 양의 젖이 풍족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재건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보통 사람들의 보통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다.
도덕심은 깊은 집중에서 나온다고 한다. 오래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그 존재를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게 되면 우리의 태도를 정할 수 있다. 나무를 베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무를 심는 사람도 있다. 물을 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길을 터주는 사람도 있다. 상처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상처를 돌봐주는 사람도 있다. 약자들을 밀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들의 약한 운명을 지켜주는 사람도 있다.
우리가 어느 쪽에 서야 하는지는 너무도 분명하다고 로이는 말한다. 로이의 글을 깊이 집중해서 읽고, 오래 생각해보면 우리는 길이 분명하게 보일 때 중립을 취하는 것은 결코 보다 나은 미래를 재건하기 위한 도덕적 성실성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야만의 세상에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고 있다면 그것은 로이와 같은 사람들의 이런 '상식적인' 신념 덕분이다.
박혜영/인하대학교 교수
아룬다티 로이 글 국내번역
<작은 것들의 신>(황보석 옮김, 문이당, 1998)
<생존의 비용>(최인석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3).
<9월이여, 오라>(박혜영 옮김, 녹색평론사, 2004).
<보통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정병선 옮김, 시울, 2005).
첫댓글 올 여름에 아룬다티 로이가 쓴 소설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06.04 06: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