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의 동료들이 지어준 별명, 소주도병의 의미는?
농암이 산 도산구곡은 천혜의 주거지
한직이었던 지방근무가 오히려 장수의 요인
죽을 위기에서 연산군의 실수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지다
조선시대에 대대로 장수한 명문 집안이 많지만 이 집안만큼 엄청나게 장수한 집안은 아직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영천 이씨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 1,467~1,555) 선생 집안은 도대체 오륙백 년 전에 그렇게 장수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89세까지 장수한 농암을 비롯하여 부친 98세, 모친 85세, 숙부 99세, 조부 84세, 조모 77세, 증조부 76세, 고조부 84세입니다. 그리고 아우 현우 91세, 현준 86세, 아들 문량 84세, 희량 65세, 중량 79세, 계량 83세, 윤량 74세, 숙량 74세. 어떻습니까? 고조부가 고려말 조선초 때의 인물이니 대략 1,300년-1,600년의 3백년 사이에 그만한 장수를 이어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 않습니까?
농암 이현보 집안의 장수 가계도. /정지천
당시의 평균 수명에 비해 얼마나 장수했나?
평균수명은 전쟁, 돌림병으로 인한 사망과 영유아 사망도 포함됩니다. 일본 강점기인 1,900년 초반에도 위생 상태가 좋지 못했던 탓인지 30대 초반으로 조사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5세를 넘긴 사람들은 대개 50세 전후에 세상을 떠나는 게 일반적이었고, 회갑을 맞이하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와 지금의 수명 차이가 적어도 20, 30년은 되므로 조선시대에 80세를 넘긴 것은 요즘으로 보면 100세를 넘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농암의 아들 문량의 증손자와 고손자도 각각 94세, 82세까지 장수했다고 하니 10대에 걸쳐 장수한 것이죠. 지난 1,998년에 세상을 떠난 16대 종손도 91세까지 장수했다고 합니다.
농암은 어떤 분인가?
어부사시가 사진. /정지천
이 집안의 장수비결은 농암에 관한 얘기가 위주입니다. 기록으로 남은 것이 주로 농암에 대한 것이기 때문인데, 그 중에는 집안과 직접 연계되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농암은 ‘어부가(漁夫歌)’라는 시조로 유명하죠. 고려 때부터 전래되던 어부가를 다듬어 새로이 만든 것인데,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으로서 뒤에 고산 윤선도 선생이 지은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농암은 안동 출신으로서 선정을 베푼 지방관으로도 명성이 높았습니다. 무려 76세 때까지 벼슬살이를 하다 그만 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귀거래(歸去來)를 실천했는데, 효심이 지극한 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죠.
농암의 장수비결, 첫째
선천적으로 강한 정기를 타고났습니다. 고조부, 증조부, 조부, 부친 모두 장수했으니 요즘 말로 ‘장수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입니다. 뼈대가 강한 튼튼한 체격도 물려받은 것으로 여겨지는데, 한의학적으로 보면 신장의 정기를 잘 물려받은 것입니다.
농암의 외모를 표현한 기록이 있는데, 어떤 벼슬아치가 선생을 무고하기를 “전날에 철면을 쓰고 수염이 길게 난 자가 바로 큰 죄인인데 누구인지 이름을 몰랐더니 그가 바로 이현보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이것을 보면 농암은 수염이 많고 얼굴이 검붉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수염은 신장의 정기를 반영하므로 수염이 왕성하다는 것은 신장의 정기가 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헌 선생, 영조대왕도 수염이 무성했습니다.
얼굴색이 검붉다는 것은 건강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건강한 얼굴색은 붉고 누런빛이 은은하게 보이면서 윤기가 있고 광택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야 기(氣)와 혈(血)이 화평(和平)하고 정기가 충분한 것이 밖으로 드러난 상태인 것이죠.
한의학에서 얼굴색은 주색(主色)과 객색(客色)이 있습니다. ‘주색’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는 얼굴색으로서 평생 불변하는 것이고, ‘객색’은 계절과 기후에 의해 수시로 변화하는 얼굴색입니다. 만약 얼굴색이 검붉게 변한 것이라면 질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많지만 원래 검붉다면 건강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검붉은 색이라도 어둡고 윤기가 없으면 병적이지만 밝고 윤기가 있으면 좋은 상태입니다. 농암은 타고난 얼굴색이 검붉으면서 윤기가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예전에 방송되었던 중국 드라마에 ‘판관 포청천’이 있었죠. 송나라 때의 명판관 포청천의 얼굴을 떠올려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농암 이현보 /정지천
농암의 얼굴색은 특이한 편
농암이 사헌부에 근무하던 시절 동료들이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는 별명을 지었습니다. 겉모습은 질그릇 병처럼 검고 투박하지만 내면은 소주처럼 맑고 엄격하다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얼굴색이 거무티티하지만 성품이 좋다는 것을 칭찬했다는 겁니다.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겠죠. 아무튼 농암은 건강 체질을 타고난 것으로 보입니다.
농암이 태어나서 젊은 시절까지 살았던 마을이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부내(분천 汾川, 분강촌 汾江村)인데, 환경이 건강에 좋은 여건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람이 살기에 좋은 환경이었던 것이 두 번째 비결입니다. 영천 이씨의 세거지(世居地)는 영천이었으나 고려 말에 농암의 고조부인 이헌이 1350년 경에 부내 앞을 지나다가 산천이 수려한 것을 보고 거처를 옮겼다고 합니다.
도산면은 사람이 살기에 얼마나 좋은 곳인가?
도산면에는 낙동강이 흐르고 있는데, 강의 물줄기가 굽이굽이 흘렀습니다. 그래서 중국 주자(朱子)의 고향에 있는 ‘무이구곡(武夷九曲)’에 빗대어 ‘도산구곡(陶山九曲)’이라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얼마나 경치가 아름다운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안동 출신인 권시중(權是中)의 <선성지(宣城誌)>에 의하면 ‘조물주가 특별히 만들어 놓은 땅이며,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별천지’라고 했습니다. 500km가 넘는 낙동강 중에서 안동의 도산을 지나는 20km 정도만이 싱그럽고 다양한 아름다움을 연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우리나라에서 최적의 주거지(가거지지, 可居之地)로 안동의 두 지역을 거론했는데, 바로 도산(陶山)과 하회(下回)입니다.
도산 구곡 /정지천
도산면에 자리를 잡은 명문 집안
9곡 중에 4곡이 분천곡으로 농암의 고향이고, 1곡은 광산 김씨를 비롯한 일곱 군자가 있었다고 하여 군자리라 했으며, 3곡에는 유학자 우탁 선생이 살았고, 5곡은 퇴계 이황 선생이 만든 도산서당이 있으며, 6곡은 퇴계의 후손인 항일 저항 시인 이육사의 고향입니다.
그런데 6백년 내려오던 그 땅에 안동댐이 생기면서 9곡 중의 여섯이 사라지고 셋만 남았다고 합니다. 도산구곡은 경치가 좋아 많은 문장가들이 시를 썼는가 하면 겸재 정선이나 강세황 같은 화공들도 산수화를 그렸던 곳인데 안타깝지요.
어떤 좋은 점이 있기에 그렇게 살기 좋은가?
산이 좋고 물이 좋고 경치가 좋다고 해서 사람이 살기에 좋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살만한 땅은 볼만한 땅이나 놀만한 땅과는 다르다는 것이죠. <택리지>에 의하면 산들이 푸른 병풍처럼 둘러 있지만 산이 너무 높지 않기에 자연이 사람을 압도하거나 사람에 압도당하지 않고 알맞게 더불어 살만한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수려한 산천도 좋을 뿐만 아니라 문전옥답(門前沃畓)이 있기에 넉넉한 살림살이를 할 수 있어 좋았던 겁니다. 농암은 “정승 벼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다”고 찬탄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도산 땅에는 큰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농암의 장수비결, 세가지
첫째와 둘째 비결은 당사자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이죠. 태어날 때 이미 정해져 있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이제부터는 본인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것이죠. 셋째 비결은 운동을 많이 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 놀기를 좋아했고, 성품이 호탕하여 사냥을 즐겨 해서 학문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고 합니다. 19세에 향교에 들어가고, 20세에 홍귀달(洪貴達 : 1438~1504)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경전을 배우게 되면서 크게 깨달은 바 있어 학문에 힘을 쏟았다고 하는데, 과거 급제가 늦은 편입니다. 소과에 합격한 것이 29세 때이고, 대과 급제는 32세 때였는데 그것도 33명 중에 30등으로 붙었습니다.
공부 좀 했다는 선비들은 20대 초반에 소과에 급제하고 20대 중후반에 대과에 급제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 학문에 몰두하는 바람에 건강을 해친 선비들이 많았죠. 먹고 자는 것도 잊고 글공부에 전념해서 몸이 상하는 바람에 평생토록 건강이 나빠진 퇴계 선생은 관직 생활 중에 질병 때문에 사임하는 일이 20차례 정도나 되었죠. 심지어 밤낮으로 공부하다 학문을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선비들도 적지 않습니다. 농암은 어려서부터 젊었을 때까지 사냥 다니며 운동한 것이 건강 장수에 큰 도움이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농암은 연산군 시절인 38세 때 갑자사화(甲子士禍)를 당하여 서연관(書筵官)의 비행을 상계(上啓)했다가 의금부(義禁府)에 갇혀 국문을 당하였고 안동의 안기역(安奇驛)에 유배되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 다시 의금부로 이송되어 장형(杖刑)을 당하고 70여 일을 옥에 갇혀 지내는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 살벌했던 연산군 때의 사화에서 국문을 당하고 장형을 맞았지만 워낙 건강한 몸이었기에 회복되었고, 2년 뒤에 중종반정으로 관직에 복귀했던 것이죠.
고문과 장형의 후유증이 크지 않았나?
국문을 당하면 사극에 나오는 것처럼 모진 고문에다 곤장을 맞게 됩니다. 곤장을 심하게 맞으면 상처에 독이 생기는데, 장독(杖毒)이라고 합니다. 매 맞아 생긴 ‘골병’이죠. 많이 맞았으니 엉덩이 주변엔 불이 나고, 열독도 오르고, 살점도 뜯겨나가 헐고 곪게 됩니다. 곤장을 맞던 중 현장에서 사망하는 경우도 더러 있는데, 대부분 쇼크사에 가깝습니다. 물론 50대 이상 맞으면 그것만으로 죽을 수도 있는데, 맞은 부위에 피가 집중적으로 몰리면서 정작 심장에는 혈액이 부족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곤장을 맞은 후 옥이나 유배 중, 또는 집으로 돌아간 후 사망한 경우가 많은데, '장독‘이 올라 죽었다'고 합니다. 곤장을 맞은 후 터진 상처부위의 2차 감염 때문인데, 괄약근에 힘이 풀려 대소변이 새어나와 상처로 들어가거나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항생제가 없었으니 세균의 감염이 빠르게 이루어졌던 것이죠. 을사사화 때 귀양 가는 도중에 사망한 퇴계 선생의 형을 비롯하여 곤장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장형집행 전경 그림. /정지천
농암의 장수비결, 넷째
농암은 32세부터 76세까지 무려 44년이나 벼슬살이를 했는데, 주로 외직 근무를 했습니다. 외직이란 군수, 목사, 관찰사 등의 지방관직을 일컫는 것으로 중앙관직인 내직에 상대되는 의미이죠. 중앙관료가 아닌 지방관으로 근무한 것도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었던 네 번째 비결이 되었습니다.
한양 근무가 아닌 지방 근무가 건강 장수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농암이 관직생활을 했던 시기는 연산군에서 중종 때인데, 3차례의 사화(士禍)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이처럼 중앙 정계를 오래 떠나 있었다는 것은 권력 투쟁의 암투와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죠. 훈구파와 외척들이 권력을 잡고 유지하기 위해 각종 음모를 꾸며 사림파 관리들을 모함하고 탄압하던 혼란기였기에 지방 근무는 정쟁에 휩쓸리지 않게 되지요. 특히 농암의 성품으로 보면 그 시기에 중앙정계에 있었을 경우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농암은 스스로 지방근무를 원했던 것인가?
예나 지금이나 관리라면 누구나 지방을 옮겨 다니며 근무하는 것보다 중앙 근무를 선호할 것인데, 농암은 스스로 외직 근무를 선호해서 30년을 지방으로 떠돌아다녔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부모가 연로해서 가까이 모시고자 함이었습니다. 농암은 4남 1녀 중 장남이었고, 효심이 지극했었죠. 또 하나는 갑자사화 때 국문을 당하고 곤장을 맞고 유배를 당하는 고초를 겪었기에 조광조 등의 급진 사림파가 등장한 이후에는 외직근무를 선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천군수, 밀양부사, 충주목사, 안동부사, 성주부사 등을 거쳤고, 늙어서도 대구부사, 평해군수, 영천군수, 경주부윤, 경상도 관찰사 등 주로 고향과 가까운 외직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농암의 관직 생활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농암 종택. /조선일보 DB
죽을 위기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농암
농암은 갑자사화 때 서연관의 비행을 논박하다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 안동으로 유배되었었는데, 또 무고를 당하여 다시 의금부로 이송되어 70여 일을 옥에 갇혀 죽음을 당할 위기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연산군이 석방자를 가려내는 과정에서 농암의 바로 위에 적힌 자를 지목한다는 것이 잘못되어 기적적으로 방명(放命)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연산군은 농암의 이름은 잊어버리고 ‘얼굴 검붉고 수염 긴 놈’으로밖에 기억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명을 내리는 붓에서 떨어진 먹물이 실수로 농암의 이름 위에 떨어졌던 것이죠. 형벌을 행하는 관리는 농암의 이름 위에 떨어진 낙묵(落墨)을 보고 그를 풀어주었던 겁니다. 죽을 고비에서 운 좋게 살아난 경우 오래 산다는 말처럼 농암은 장수했는데, 농암이란 호도 이 사건으로 인해 지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