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1월 13일,
진보당 사건, 이승만의 조봉암 선생 살해 사건
1958년 1월 12일 새벽, 죽산 조봉암 선생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일제 검거 작전이 실시됐다.
진보당의 당수인 조봉암은 은신 중인 터라 검거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지들의 체포소식을 듣고
자신이 도망을 가면 무고한 동지들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면서 13일 오전에 전화로 자진출두 의사를
밝혔다. 이른바 '진보당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비운의 정치인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4·19 혁명이 일어나기 겨우 9개월 전이었다.
1958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진보당 간부 17명을 구속을 다룬 기사내용이다.
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 ~ 1959년 7월 31일)은 한때 공산주의자였다. 일제 강점기에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조직중앙
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해방 이후 공산당과 결별했다. 1946년 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한 직후 그는 조선공산당의
실질적 지도자인 박헌영과 갈라섰다. 1946년 5월 박헌영에게 경고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고 좌익에서
우익으로 사상전향을 하였고, 공개서한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공산주의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였다. 그
리고 6월 인천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인천시민대회 때 조봉암은 “조선 민중은 공산당을 원치 않는다”는
성명서를 뿌리면서 공개적으로 전향을 선언했다.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에도 참여하여 그가 구상하는 이상을 제도권 안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1948년
8월 이승만은 좌익계의 농지개혁 요구를 무마하고, 자신의 개혁 의지를 표명하며, 지주정당인
한민당을 견제하기 위해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승만이 처음 장관직을 제안하였을 때
조봉암은 제의를 거절했지만, 이승만이 조봉암의 개혁을 승인하기로 약속하고 재차 승락을
요구하자 농림부장관직을 수락한 것이었다. 물론 그의 장관 재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농지개혁 저지에
사활을 건 한민당은 그를 끌어내리려 했고, 이승만은 이를 방조했다. 즉 이승만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
만을 위해 철저하게 조봉암을 이용하고 필요 없다고 판단되자 버린 것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의 초대내각, 농림부 장관에 조봉암 선생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신익희와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 경무대로 갔다가 이승만의 도피소식을
접하였다. 신익희는 측근들과 함께 가자 해놓고 가족들과 먼저 경기도 수원으로 피신한 반면, 조봉암은
끝까지 남아 서류들을 정리하고 불태운 뒤 동료 의원들을 피신시키고 나서 미처 피하지 못한
윤길중 등의 청년들을 데리고 남하하였다. 그러나 아내 김조이는 차마 데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실종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자기들만 살겠다고 야반도주한 이승만 정권과는 달리 조봉암은
이토록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제2대 후반기 국회 의장단 선출, 1952년 7월 10일 새로 선출된 국회의장단. 좌로부터 윤치영 부의장,
신익희 의장, 조봉암 부의장
이런 조봉암을 이승만은 간첩으로 몰아 살인했다. 자신의 집권을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생명은 관심
밖이었다. 살생이 이미 익숙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조봉암을 살해한 이유는 그의 존재가 이승만 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진보당 사건의 본질이다.
진보당은 선거벽보 조차 제대로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조봉암은 1952년 2대 대통령 선거에서 80만여 표를 얻었다. 그런데 1956년 5월 15일에 있은 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216만여 표를 얻었다. 신생 정당의 돌풍이었다. 보수 야당인 민주당은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가 사망한 상황임에도 조봉암에게 표를 몰아주지 않았다. 무효 표가 됐던 이른바
‘신익희 추모표’는 185만여 표에 달했다. 당시 이승만은 500만여 표를 얻었다. 관권과 금권, 언론을 모두
동원한 선거에서 조봉암이 얻은 표는 이승만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국 이승만 정권의 하수인인 검찰은 진보당의 간부들이 박정호 등 14명의 간첩단과 접선한 혐의가
있을 뿐 아니라, 진보당의 평화통일 주장이 북한의 주장과 같아 그들과 내통한 혐의가 짙다는 이유로 1958년
1월 구속 기소한다. 또한 간첩 양명산(양이섭)이 군 수사기관에 검거되었는데, 당국은 조봉암이 북한과
남한의 첩보조직 사이에서 이중간첩으로 활약하고 있던 양이섭을 통해 1955년과 1956년 사이에 북에서
온 약 2,500만 환에 달하는 자금을 받아 진보당의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당국은
재판도 열리기 전인 2월 25일 평화통일론, 북한 간첩과의 접선, 대한민국의 파괴하려는 기도 등의 이유를
들어 진보당의 등록을 일방적으로 취소시켰다
1958년 7월 2일 1심 재판에서 당시 유병진 재판장은 간첩죄를 인정하지 않았고, 단지 불법 무기 소지
등을 근거로 조봉암에게 5년 형을 선고했다. 그런데 천인공노할 일이 벌어진다. 7월5일 자칭 반공청년
이라 부르는 괴한 3백 여명이 법원에 난입했다. 그들은 ‘친공 판사 유병진을 타도하자’, ‘조봉암을
간첩죄로 처단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10일 후 또 다시 친공판사를 규탄한다고
대한문 앞에 모였다가 무장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로 인해 1심에 관여했던 법관 유병진, 이병용, 배기호
등은 한동안 피신해 있었다.
김병로 대법원장은 배후조종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색출하여 엄단하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난입난동으로 체포된 청년들을 일부 구속, 석방, 즉심회부 등 너그러운 처사로 흐지부지 처리하고
말았다. 그리고 자유당은 국회에서 야권 측이 제시한 법원난동사건진상조사단 구성안을 거부했다. 이들은
훗날 밝혀졌지만, 일부는 경찰기동대 사람들이었고 일부는 자유당의 직속 조직인 반공청년단 소속이었다.
즉 이승만이 꾸민 일인 것이다.
이후 이승만 정권은 보다 노골적으로 재판에 개입하였고, 반공청년단 법원난입사건 후 사법부는
확실히 위축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열린, 1958년 9월 김용진 판사가 담당한 2심 판결에서는
검찰의 공소사실이 인정되어 검찰의 구형대로 조봉암과 양이섭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진보당 사건 판결 언도 장면 (1958년 10월 25일, 서울 고등법원)
그러나 검찰이 주장한 조봉암의 간첩죄 적용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우선 1, 2심의 처리과정에서
조봉암은 양이섭으로부터 돈을 받은 사실을 시인했으나 그 돈이 북한에서 온 것이라는 점은 몰랐으며
북한과 내통했다는 검찰의 공소는 터무니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증인들의
진술은 조봉암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우선 HID(대북공작기구)에서 양이섭에 대한 감시감독을
책임졌다는 엄OO은 자신이 양이섭의 이북 왕래 시 소지품 검사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조봉암이
북한과 주고받았다는 돈이나 약재, 양이섭은 자신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었고, 그러한 물품은 자신이
아는 한 없었다고 진술했다. 또한 조봉암 간첩죄의 유일한 증인이자 피고인인 양이섭도 2심에서는
1심에서의 자백을 번복했다. 그것은 특무대의 고문과 협박, 회유에 못 이겨 한 ‘거짓자백’이었다고 번복
진술한 것이다.
1958년 12월 24일(24파동) 정당의 입을 막고 언론의 자유에 재갈을 물릴 속셈으로 내놓은 신 국가
보안법이 국회의사당에 무술경관 200명을 불러들여 야당의원들을 지하실에 감금한 상태에서 통과되었다.
그리고 곧 1959년 2월 27일 진보당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졌다. 2심과 같이 사형선고였다.
조봉암은 재심을 청구했지만 상고심을 맡았던 그 재판부가 다시 맡았고 대법원은 7월 30일 조봉암이 낸
재심을 기각하고, 다음 날인 7월 31일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승만의 마녀사냥을 중단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미국이었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이승만
정부가 평화통일론을 정부 전복 혐의로 규정하는 것은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규정했고,
조봉암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주한 미국대사가 직접 이기붕을 찾아가 “미국이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발전을 이룩한 것을 상당히 훼손시킬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1959년 7월31일 사법살인이 벌어졌을 때,
주한 미국대사관은 “놀람과 비통으로 쇼크를 받았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미국은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을 우려했지만,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그들은 냉전체제가 흔들거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조봉암의 억울한 죽음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진보당 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정적인 조봉암 선생을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저지른 비인도적
인권 유린이자 정치 탄압"이라고 결정하였고, 그리고 2008년 후손들은 재심을 청구했고, 2011년
1월20일 대법원은 그에 대한 종전의 사형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그것도 대법관 전원 일치의
찬성으로.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이고 추잡하게 늙어 죽어가는 그리고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이승만
조봉암 선생님 “극락 왕생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