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장천재(長川齋)
천관산 동쪽 기슭 최고의 경승지에 자리 잡고 있는 장천재는 18세 승문습독공(承文習讀公) 휘 유형(由亨)의 배위 의인(宜人) 신씨(申氏)의 묘각이다. 따라서 장흥 위씨의 상징적 재각(齋閣)이라고 할 수 있다. 울창한 숲과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듯 우람했던 태고송(太古松)은 2013년에 고사했지만 그러나 사시사철 흐르는 계곡 등 주변의 풍광과 어울린 재각은 위문과는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1) 창건 및 중수연혁(沿革)
장천재는 본래 영은암지(靈隱庵祉)이다. 암자가 있었다는 위치의 이름도 영천암지(靈川庵址) 또는 장천암지(長川庵址) 등 세 가지 설(說)이 있다. 장흥군의 용역을 받아 목포대 이해준교수 팀이 1994년 3월 30일자로 발행한 전통문화마을 '장흥 방촌'지에는 영천암(靈川庵)으로 기록하고 있다.(同誌 p.141) 영은동과 장천동은 계곡의 위아래 지근거리에 있어 두 암자의 위치를 구별할 의미는 없다.
재각은 동식(東寔․1640~1708) 형제가 아버지 웅천공(熊川公․1580~1656)이 타계하자 동쪽 기슭에 유택을 쓰고 암자 곁에서 시묘살이를 한데서 단초를 연다. 그 후 영은암 승려가 떠나자 문중에서는 1659년(己亥) 그 자리에 초가재각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 설은 영이재(詠而齋)의 1747년 중수기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 장흥조에 기록되어 지금까지는 정설로 알려졌다.
그러나 암자와의 인연은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다. 강릉참봉공 19세 휘 진현(晉賢․1483년․癸卯~1564년․甲子)께서 영은동에 어머니 평산 신(申)씨의 묘소를 썼고, 아들 진사공 휘 곤(鯤․1515~1549) 역시 양부모와 생모 광산 김씨(金氏)가 타계하자 할머니 계하에 묘를 썼다. 그렇다면 시묘가 됐건 장천암 승려로 하여금 묘를 돌봐달라고 했건 재각의 효시(嚆矢)는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웅천공의 장형인 청금공(聽禽公) 휘 정훈(廷勳, 1578~1662)의 「제장천당(題長川堂)」이란 한시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이는 장천재의 전신이거나 현재의 장천재일 수 있다. 아울러 그가 1600년(庚子) 11월에 장흥부를 순시하는 상국(相國,관찰사)에게 올리는 '상순상서(相巡上書)'란 제목의 서간에도 그때 이전에 강학소라는 자제들의 교학소가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에 장천재의 창건은 1659년 이전일 수 있다.
그 뿐 아니다. 장천재의 중수기는 영이재공(詠而齋公)의 아버지 삼족당(三足堂) 휘 세보(世寶, 1669~1707)의 글이 있다. 그가 1704년(甲申)에「부계당(俯溪堂) 중수기」를 썼다. 그 중수기에 "(전략) 爲其先展墓後敎學之所而兩相全幸矣"라고 했다.(중략) 그리고「俯溪堂春思」라는 제목의 한시에도
"부계당은 장천재의 별호다"라고 했다. 그런데 편제록에는 그 중수기가 왜 포함되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또 조상들의 장천재 창건에 대한 의문이다. 잉여옹(剩餘翁) 휘 명덕(命德, 1683~1756), 간암공(艮庵公) 휘 세옥(世鈺, 1689~1766) 두 분은 1700년 초부터 장천재에서 지냈다. 그럼에도 간암공은 1752년(壬申)에 잉여옹 원운에 차운한 「俯溪堂謹次剩餘翁韻」에서 "墳庵兼塾問何年"을 반문하고 있다. 1659년에 건립했다면 60년 정도 지난 셈인데 이전의 역사를 아는 선조가 없었다니 참 이상하다.
이외에도 의문이 있다. 삼족당은 1704년에 중수했다고 했는데 다암공은 1705년(肅宗 31)이라고 했다. 왜 이런 시차가 있을 수 있는가. 1659년에 건립한 초가 재각을 50년 가까이 보수하지 않으면 유지하기가 어렵다. 이후부터는 2차 보수가 19년, 3차는 23년 만에 보수를 했다. 이때는 이미 기와지붕임에도 보수가 20여년 주기에 비하면 너무 늦었던 것이다. 장천재는 건립시기에 이상한 점이 많다.
기록상으로는 재각이 들어선 후 1차 보수는 1705년(乙酉)에 휘 세침(世琛)과 세기(世琦)의 주도로 당을 넓혀 그때까지의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기와를 덮었다고 한다. 2차는 1724년(甲辰)인데 휘 세최(世最), 세린(世璘), 명성(命成), 명익(命益) 등의 주도로 이뤄졌다. 그리고 3차는 1747년(丁卯) 집이 너무 낡아 문중회의를 열어 휘 명래(命來), 명호(命虎), 상겸(相謙), 문덕(文德) 등이 공사를 주도했다.
장천재의 역사네요.
창건과 중수에 대해 다루고 있네요
장천재에 대한글 잘보고 공부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