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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남유다의 12번째 왕 아하스의 행적을 소개한다.
총 20절에 걸처 비교적 소상하게 아하스를 소개한다.
하나님께서 아하스를 우리에게 소개하시는 이유를 살펴보겠다.
설교 제목이 <아하스의 비문>이다.
"비문"? 비석에 새겨진 글을 가리킨다.
주로 고인의 행적을 칭송하고 후손에게 알릴 목적으로 행해진다.
공원 묘지나 납골당에 가면 비문을 볼수 있다.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안중근 의사 가묘에 비석이 세워져있다.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본관 순흥. 1879년 황해도 해주 출생.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국권 회복의 길을 강구하였고, 을사 늑약 이후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힘쓰셨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부대를 이끌고 대일항전을 전개하였으며 1909년 단지동맹을 결성하여 국권회복을 맹세하셨다.
1909년 10월 26일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에서 처단하여 민족의 기개를 드높였다.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시다가 1910년 3월 26일 일제에 의해 교수형으로 순국하시고 중국 뤼순감옥 인근에 매장되셨으나 아직까지 유해를 찾지 못하여 빈 무덤으로 혼백을 모시고자 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반면, 일반인들의 비문은 비교적 간략하게 기록되어있다.
관직이나 직함을 쓰고, 호를 쓰기도 하고, 본관을 쓰기도한다.
"집사 000" "광산 김공000"
어느 작가의 수필에 나오는 글이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건강해라 행복해라 사랑한다. 그리고 고맙다.” 라고 묘비에 새겨진 비문이 밝은 달빛을 받으며 내 눈에 읽혀졌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사람은 죽어서 비문을 남긴다.
우리가 죽은 후에 여러분의 비문에는 어떤 글귀가 기록되기를 원하는가?
아하스왕의 비문에는 어떤 글이 새겨져 있었을까요?
오늘 설교를 통해 자신의 비문을 상상해 보시기를 바란다.
아하스는 20세에 남유다의 12번째 왕이 되어 16년간 유다를 통치했다(2a)
그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단 한 줄로 요약되어 있다(2)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했다"
아하스왕의 비문이다.
우리 인생도 한 줄로 요약된다.
그가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본문은 네 가지로 소개한다.
1) 그는 남유다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패역한 북이스라엘 왕과 같은 길을 걸었다(3a)
그는 남유다의 왕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들의 발자취를 따라갔다고 소개한다.
마치 예수믿는 사람이 새상 사람들처럼 살았다는 의미이다.
본문만 보면 그가 북이스라엘 왕들의 어떤 점들을 따라 행했는지 잘 알 수 없지만, 역대기에는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대하 28:2)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하스는 바알 우상을 부어 만들었다.
‘부어 만들었다’함은 ‘주조했다’는 뜻으로 이는 쇠를 녹여 거푸집이나 틀에 부어 커다란 바알 신상을 주조했음을 의미한다.
아하스는 우상을 만들되 대강 만든 것이 아니라 아주 정교하고 튼튼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가 얼마나 바알을 신성시하며 숭배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일국의 왕이 이럴진대 그 백성들은 어떠했겠는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선지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땅에는 우상도 가득하므로 그들이 자기 손으로 짓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것도 공경하여 천한 자도 절하며 귀한 자도 굴복하오니” (사 2:8-9)
아하스로 인하여 남유다 전역에 바알 우상이 득세하게 되었다.
예수의 길은 세상의 길과 다르다.
그 이유? 목적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예수님이다. 세상의 목적지는 바알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살아야한다.
이런 이유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사는 방식과 세상사람이 사는 방식이 다른 것이다.
에수를 제대로 믿는다면 세상사람들과 다르게 사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이다.
하지만 아하스는 세상사람들처럼 살았다.
2) 그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다(3b)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아들을 제물로 불에 태웠다는 뜻이다.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삼는 일, 특히 자신의 자녀를 제물로 삼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입다가 자기 딸을 인신제사의 제물로 삼았다(삿11:29-40)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대 이방나라의 인신제사에 대해 노하셨고, 이 같은 제사행위를 엄격히 금지하셨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아브라함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라고 하셨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인신제사를 원치 않으셨다.
그럼에도 지금 아하스는 자신의 손으로 인신제사를 드렸다.
아하스는 이방인들의 인신제사형식을 답습했다.
3)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사람(타국)의 힘에 더 의지했다(5-9)
아람이 남유다를 위협했다(5)
그러자 아하스는 여호와의 전에 있던 보물을 뇌물로 삼아서 앗수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여호와의 전에 있는 은금은 하나님의 제물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재물을 자신의 것처럼 착복하여 앗수르 대국에 뇌물로 바쳤다.
횡령죄에 해당한다.
이러한 아하스의 계략은 단기적으로 앗수르에 의해 아람과 북이스라엘 연합군의 위협에서는 벗어나게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유다가 앗수르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하스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다.
기억하라.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는 행위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다. 범죄행위이다.
4) 앗수르의 군사력에 매료된 아하스는 이제 앗수르 왕의 제단을 그대로 모방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변형시켰다(10-16)
예루살렘 성전은 다윗이나 솔로몬이 마음대로 설계해서 건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설계에 의해 건축된 성전이었다. "식양대로"(왕상 6:38)
"설계대로"(현대어 성경)
하나님의 설계도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 건축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하스는 다메섹에 있는 앗수르 왕의 제단을 그대로 모방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자기 마음대로 리모델링하여 제사를 드렸다.
또 하나 이렇게 리모델링하여 제사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본문은 분명히 증거 한다.
“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13a)
제사를 드리는 이유가 자기를 위해서였다.
아하스는 자기위주의 신앙생활을 선택했다.
주일예배는 우리를 위해 드리는 영적행위가 아니다.
모든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행위여야만 한다.
만일 우리중의 어느 한 분이라도 자신을 위해 주일예배를 드린다면 그 예배는 이방인의 제사가 될 뿐이다.
이상으로 우리 모두는 아하스가 하나님으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런 원인때문에 하나님께서 아하스의 비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3)
1세기 전, ‘편도 선교사들’(one-way missionaries)이라고 알려진 일단의 용감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갔다가 돌아올 왕복 배표가 아닌 선교지행 편도 표만 구입하여 짐 가방 대신 단출한 개인 물품만을 미리 준비한 관 속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 항구를 빠져나가면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선교사들 중 밀른(A. W. Milne)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꿈은 남태평양 뉴헤브리디스(New Hebrides) 제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거기 원주민들은 앞서 파송했던 모든 선교사들을 살해한 잔혹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잘 알았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그곳으로 가려했다. 그를 아는 지인들은 모두가 “얼마 못가서 죽을 터인데 왜 가려고 하느냐”며 극구 만류를 했지만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어째서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떠나기 전 자신은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선교지 편도 배표만 구입해서 뉴헤브리디스로 떠났다. 그의 짐은 자기 시신을 담을 수 있는 ‘관’ 하나와 단기간 사용할 간단한 일용품뿐이었다.
그는 항구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장례식을 하는 것처럼 ‘소식이 없으면 죽은 줄 알라’며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그는 35년간 원주민을 사랑하며 선교를 마감했고 그 선교지에서 사망했다.
그가 세상 떠났을 때 원주민들은 마을 한 가운데 큰 무덤을 만들어 그를 묻고 묘비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겼다.
“그가 왔을 때 빛이 없었다.
그가 떠났을 때 어둠이 없었다.”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감동적인 내용이다.
과거 미주신보에 실렸던 대조적인 실화 하나가 떠오른다.
한 때 그 지역에서 가장 큰 교세를 자랑했던 미주한인 교회가 분란 속에 휩싸였다.
교인들이 시험 들어 교회를 떠나게 되니 하루아침에 교세가 팍 줄어 작은 교회가 되고 말았다.
다름 아닌 원로 목사의 은퇴 사례금과 관련되어 벌어진 내홍이었다.
그는 은퇴 사례금으로 교회 앞에 300만 불을 요구했다고 한다. 33억정도
한 은퇴목사의 지나친 개인 욕심이 행복했던 교회를 불행한 교회로 만들어놓고 만 것이다.
만일 이 은퇴 목사가 죽고 나서 교인들에게 그를 위한 비문의 글을 새기라 했다면 어떤 내용의 글이 새겨질까? 아마도 이런 내용이 되지 않았을까?
“그가 왔을 때 어둠이 없었다.
그가 떠났을 땐 빛이 없었다.”
우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를 위해선 어떤 시문이 새겨졌으면 좋겠는가?
빌 2:1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죄 많은 불신자들 가운데 빛으로 나타내라고 하셨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가 먼저 흠이 없고 순전해야 한다.
우리 무덤 비문에 새겨질 내용으로 다음 두 글보다 더 멋진 문장이 또 있을까?
“그가 왔을 땐 빛이 없었다.
그가 떠났을 땐 어둠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비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람 000"라는 글귀가 새겨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