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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과 포교하는 사부대중 >
한국학 분야의 하나로 탄허학을 주창하는
문광스님
글 / 전현자 (취재기자)
기자: 진심으로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스님께서 생각하시는 불교란 무엇입니까?
스님: 불교를 사람들마다 다르게 말할 수 있겠지요. 저는, 한마디로 자기 본래면목을 깨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자; 스님, 좀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우리는 ‘나’라고 하는 말을 항상 쓰고 있지만, 실상 내가 누구인지, 내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고, 껍데기로 살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모셨던 혜암스님(전 조계종 종정)께서는 “내가 내 마음을 모르는데, 무슨 자유가 있고, 행복이 있고, 세상의 모든 가치가 있겠느냐?”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제 경우를 예로 설명 드리자면, 불교에 처음 입문하게 된 계기도 ‘내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막혔기 때문입니다. 출가하기 전에 가장 관심이 있었던 것은, ‘도(道)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어려서부터 동양학을 접했고 중문학을 전공하면서 유불선의 경전을 두루 섭렵하고 나니까 이론적으로는 ‘도(道)’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게 되었습니다. 즉 ‘도(道)’라고 하는 것이 ‘말이 끊어진 세계’, ‘말로 할 수 없는 세계’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가 곧 자기의 근본 마음자리라 하는 데에서는 도저히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책으로 아무리 동양학 공부를 해도 풀 수가 없는 문제에 부딪힌 겁니다. 결국 독서와 학문 연구만으로는 안 되고 수행이 필요하다고 여기게 되었어요. 그리고 이 공부는 지금까지 해 오던 방식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출가를 했고 자기 본래 면목을 깨치는 수행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교란, 자기 본래 면목, 본래 마음을 아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자: 스님 말씀대로라면 본래 마음이 따로 있고 그것을 알아내는 것이 수행이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평소에 무슨 마음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까?
스님: 본래 마음이 따로 있다고 하면 처음에는 이분법으로 생각한다고 여길 수 있지만, 제가 수행을 해 보니, 이해가 되었습니다. 모든 수행의 근본이 무심입니다. 마음이 무심의 상태가 될 때 근본 자리로 갈 수가 있으니, 무심 상태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런데 무심의 상태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는 유심의 마음을 무심의 마음으로 보내야 하는 형태가 존재하는데, 그런 점에서 본래 마음인 무심과 하나가 되지 못한 유심의 마음이 있는 상태에서는 이분법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어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본래 부처’라고 말합니다. 유심의 마음, 중생의 마음 이것이 곧 본래 마음이고 부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실증적으로 체험해야 알 수 있는 겁니다. 불교 수행을 하기 전에 불교 서적을 읽었을 때는 ‘닦을 바 없이 닦고, 공부할 바 없어도 그대로 부처다.’ 이런 말들이 저에게는 공허하게 느껴졌어요. 아무리 ‘본래 네가 부처다.’ ‘네게 법신이 있다.’ ‘너는 본래 깨달아 있다.’ 등의 말들을 제게 던져주어도 제가 그렇다고 여겨지지 않으니, 그런 말들이 언어의 잔치에 불과하게 느껴진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수행하셨던 것과 비슷하게라도 실행을 해 보아야 그런 말들이 실제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출가하기 전에도 늘 생각했던 것이 성현의 말씀이 옛사람들보다도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왜 잘 다가오지 않는 가였습니다. 옛사람들의 일화를 보면 말 한마디 끝에 깨달았다는 내용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지금 우리는 잘 안 되고 있습니다. 혜가 스님이 “마음이 불안합니다.”라고 하자, 달마대사가 “불안한 마음을 가져와 봐라”라고 했습니다. 혜가 스님이 “찾아봐도 마음이 없습니다.” 하니, “그럼 네 마음이 편안해졌도다.”라고 달마대사가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혜가 스님은 바로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이유로 인해 성현의 말씀을 실제적으로 체득하기 어려운지는 확인하기 어렵지만, 중요한 것은 옛사람들처럼 수행은 할 수 있으니 수행을 했고, 어느 정도 하고 나니, ‘닦는다고 해도 닦을 바가 없이 닦는구나.’는 말을 실감하며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기자; 훌륭하십니다. 그 체험을 배우고 실천하고 싶은 사람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가르침을 주시는지요?
스님; 좋은 질문입니다. 나름 체득 하고나니 저도 함께 공유하고 싶어져 일상을 살면서 수행하여 체득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분들께 알려드렸던 것을 미주현대불교 독자님들께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참선하면서 기도를 2년 정도 하다 출가를 했는데, 절 생활은 일만 열심히 하는 상황 이었습니다. 불교를 잘 몰랐고 더구나 승가의 생활 방식은 더욱이 몰랐던 상태에서 절 생활을 해 보니, 출가해도 본인 스스로가 몸부림치듯 간절히 행해야 겨우 수행할 수 있는 것이지, 절집안의 일정대로만 따라가다 보면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일상 생활하는 가운데 불교 수행을 하기 위한 조건을 매우 간단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수행법이 연공입니다. ‘이을 연(連)’자에 ‘공부할 공(功)’ 연공(連功). 하루도 안 빠지고, 일정하게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저도, 선방에서 참선만 할 때도 있었고, 박사 학위 논문 쓰는 데 전념해야 할 때도 있었고 절에 소임 살 때도 있었습니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수행을 하루도 안 빠지고 하자고 다짐하고 시작을 했지요. 일단 목표는 만 일입니다. 삼십 년쯤 되는 기간입니다. 지금 6000일이 넘었는데 16년 정도이지요. 일단 만 일이 끝이 나면, 죽는 순간까지 수행을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출가해 정한 자신과의 약속을 깨달을 때까지 지키자는 것입니다.
혜암스님은 ‘공부하다 죽어라’는 말씀을 늘 하셨어요. ‘연공’이란 이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생각하며 만들어 낸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5년, 10년을 하다 보니, 연공하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되고 더 확실한 변화를 체득하기를 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는 짧은 기간이라도 집중 수행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 나눔의 뜻을 일으킨 것에는, 제 수행에만 바빴기에 부처님처럼 보살행이나 이타행까지는 생각도 못 해봤고, 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점차 바뀌었습니다. 화엄경을 보면, 묘각이라고 하는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지 않아도, 중간에 10회향이 있습니다. 내 공부를 남과 같이 나누고, 돌려주는 회향이 있는데. 제가 연공을 하면서 왜 그렇게 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 성불하지 못해도, 수행의 좋은 경험을 다른 분들께 같이 하자고 하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연공 수행을 함께 하자고 많은 분들께 권했고 제 권유로 시작해서 현재 십 년 넘게 매일 하는 분들도 생겼습니다. 수행을 도반들과 함께 한다는 것도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강의를 하더라도 매년 3월이 되면, 연공하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시작을 108일간을 먼저 하시라고 권합니다. 100일 기도는 만(滿) 수가 되기 때문에, 101일째가 되면 하기 싫어지는 심리가 생길 수 있어서입니다. 100일 기도는 수능시험 기도처럼 목표 세워서 한 번 하고 마치는 기도에 좋아요. 그렇지 않고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경우에는 108일 기도가 좋습니다. 염주가 계속 돌아가듯이 108일을 하루도 안 빠지고 해나가다 보면 하기가 편해져서 계속 해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수백 명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 집에서 매일 하루도 안 빠지고 정진을 하면 그 장소가 바로 법당이 되고 선방이 된다고 말합니다. 올곧게 수행을 하다보면 반드시 마음의 본래자리를 깨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연공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기자: 스님께서는 한국학을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학이 무엇인지요?
스님: ‘한국학 중앙 연구원’이라는 것이 있는데, 저는 ‘한국학’이란 것이 좋아서 동국대 대학원을 안 가고 그곳에 갔습니다. 원래는 ‘정신문화연구원’이었는데, 노무현 대통령 당시에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한류라는 것이 생기면서 ‘한국학 중앙 연구원’도 생기고, 한국학을 규정해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한국학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저도 질문했어요. 그랬더니, 한국의 모든 역사, 문화, 전통, 과학 기술까지 모두 다루는 것이라 했습니다.
기자; 한국학을 하시기 전에는 중국학을 하셨다고요.
스님; 네. 출가 전에 대학에서 중국학으로 석사수료를 했습니다. 중국학을 ‘씨놀로지-Sinology’라 해요. 중국학은 한국학보다 폭이 넓습니다. 공부해 보니 중국학은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 중에는 오히려 중국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반면, 외국인들 중에서 중국학을 전공하는 이들이 매우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자; 한국학의 미래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
스님; 유감스럽게도, 한국학의 경우에는 우리도 잘 모르고, 그동안은 외국인들도 큰 관심이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한국학은 우리도 당연히 연구하고 체계를 확립해야겠지만, 우리보다 더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전통과 역사·문화를 연구해나가고 확장해 갈 것이라고 봅니다. ‘한국학’을 ‘Korean studies’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구체적으로 정립되어 갈 것이며 K붙어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앞으로 한국학을 채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제 때 조선학이라는 게 있었어요. 정인보, 최남선 이런 분들이 조선학을 했어요. 일제가 조선 시대를 연구했는데, 왜 그런 말이 있잖습니까. 식민지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식민지를 가장 잘 연구한다. 그런데 의도가 불순하고 식민지 통치를 잘하기 위해서 식민지에 대한 왜곡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대응이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조선학 연구였어요. 일본 사람들이 조선 총독부에서 연구해놓은 것들에 대해서 반대급부로 굉장히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당시는 식민지 상태여서 조선학이라고 일컬었으나 알고 보면 국학이지요. 자기 나라를 알고자 연구하는 것이 국학인데요. 일제강점기 때의 조선학이 일제에 대한 대응에서 생겨났던 것이라면,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밖에 나가서 크게 히트를 치고 이슈가 되어 다시금 한국학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는 형태입니다.
한국학의 형태는 지금 만들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불교적으로는 원효, 유교의 퇴계 등 한국학이라고 설정해 연구하고 체계를 세울 인물들은 있어왔으나 ‘한국학’이라고 말할 만한 학문적 체계를 통합적으로 성립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잘 알려하지도 않았고, 우리를 너무 모른다고 저는 늘 말합니다. 그러기에 이제라도 우리는 우리를 알아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제가 왜 한국불교를 전공하면서 한국학에 관한 말을 많이 하냐면, 한국불교를 얘기하면, 세계불교사 가운데 하나에 해당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인도, 티벳, 중국, 남방, 일본 중에, 한국불교가 있다는 식이죠. 이제 미국불교도 생겼어요. ‘미국불교사’라는 책을 봤는데, 미국불교사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겁니다. 벌써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미국에 불교를 가르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면에서 세계 여러 나라 불교 중에 하나가 한국불교일 뿐입니다.
그리고, 불교라 하면 한국 내 에서도 독자 반은 잃어요. ‘불교’가 들어가면 안 보는 거예요. 그래서 한국학, 한국 문화의 바탕이 되어온 한국학을 구성하는 중요한 정신문명 중의 하나로 불교를 보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기자: 한국학 내에서 한국 불교라 하면 축소될 수 도 있을 것 같습니다.
스님: 한국학 내에서 한국불교를 내세우는 것이 축소된다고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학문적으로도 불교는, 인도불교, 중국불교를 전공한 분들도 인도, 중국불교 안에서 한 분과로 한국불교를 거론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인이잖습니까. 한국인으로서 한국불교를 전공한다면 한국학적인 차원에서도 한국불교에 대해 반드시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중국불교를 연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한국불교를 연구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땅에 살고 여기에 정착해서 한국 특유의 형태로 먹고 보고 생각하는 생태에 불교라는 것이 어떻게 작용을 했는가를 알아내며, 발전하도록 해야 되는 것이 한국불교 전공자들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자: 한국학 내에서의 불교학은 홍익사상 등의 것과도 연결 짓는 것입니까? 전통불교적인 면을 살려가면서 한국적 철학 신념 전통을 아우르는 것입니까?
스님: 두 가지가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불교를 홍익인간과 맞춰서 설명했던 분이 정인보 선생님입니다. 그때에 국학대학이 있었어요. 탄허스님도 그곳에서 강의하셨고요. 국학대학교, 단국대학교, 홍익대학교 등이 단군, 홍익사상을 바탕으로 생겨난 대학들입니다. 한국불교의 특색 중 하나가 홍익인간이나 요익중생,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것과 맞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불교는 살생을 하면 안 됨에도 역사적으로 보면 한국불교에서는 신라시대 원광법사부터 세속오계에 살생유택을 넣어 “살생을 해야만 할 때 반드시 가려서 하라”하셨고, 그러한 뜻에 따라 스님들이 나라를 지키러 전쟁에 나가기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때는 물론이거니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할 때도 스님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현실에 뛰어들었죠. 특별히 사명, 서산대사 같은 분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만 지키면 되는데 그러한 대응 방식을 보이는 것에는 사명대사의 말씀에 “나라가 없는데 불교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하신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국난 극복에 뛰어든 한국승려들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고 믿습니다. 한국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삶에 부처님의 자비가 가장 잘 실현되는 방식은 우리 국민이 우리 땅을 향유하고 있을 때라는 생각에 의한 것입니다.
기자: 우리 것을 지키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국수주의에 빠지거나, 한국학 내에서의 한국불교로 축소시키는 위험 또한 있을 수 있는 면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스님: 한국에서는 국학을 얘기하고, 민족주의를 얘기하면 사람들이 국뽕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어요. 제가 그 질문을 많이 받아요. “너 국뽕 아니냐?” 그럼 저는 두루마기 고름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승복입니다. 승복인데 한복이예요. 다른 나라는 이렇게 안 입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옛날부터 입어온 이 승복이라는 두루마기를 입고 있다고 해서 국수주의인 건가요? 우리 것을 있는 그대로 가지고 있을 뿐인 것이지요. 중요한 건 한국의 국학적 특색이 다른 나라에 쳐들어가서 식민지를 건설하는 식의 제국주의로 빠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일본이나, 독일처럼 타종족을 배제·말살하려 했던 역사가 있다면, 한국의 국학 또한 위험성을 가지게 되지요. 그러나 우리는 가장 올곧은 방식으로 부처님 법을 배우려고 노력해왔던 역사가 있었어요. 부처님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그대로 유지해오려고 했던 한국의 좋은 전통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지키고 거기서 본질을 회복해낸다는 면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한국불교나 한국학에는 특수성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보편성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한국인이 폭력을 싫어하고, 평화를 좋아하는 방식으로 불교를 발전시켜 왔다는 것, 우리의 땅이나 사람들을 폭력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국난의 현실에 뛰어들었던 호국불교 정신 등이 그러합니다. 또한 우리는 일본보다 힘이 있을 때에도 일본에 건너가 그들을 괴롭히는 방식을 쓰지 않고 우리의 학문과 문물을 전했었습니다. 삼국시대에 우리의 불교 문물이 일본에 전파되었던 방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유교도 전공했었는데요, 조선시대에 일본에 보내는 통신사가 있었고, 당시의 외교문화에서는 시문(詩文)을 주고받는 게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습니다. 책들도 많이 주고 오게 되지요. 18세기 문사들이 가서 보니 일본 사람들이 열심히 유교 경전을 읽으며 공부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조선의 문사들은 굉장히 낭만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일본인들이 책을 읽고 있으며 문(文)을 숭상하고 있으니, 이제 임진왜란 같은 전쟁은 안 일으킬 것 같다”. ‘무(武)’라는 게 ‘그칠 지(止)’에 ‘창 과(戈)’자로 구성되어 있잖아요. 폭력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 ‘무’가 존재한다는 거예요. 칼을 더 이상 쓰지 않게 하려고 칼을 쓴 것이므로 결국엔, ‘문(文)’을 추구하게 된다는 식의 생각이 있었어요. 이런 비폭력적인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성향입니다.
그러한 전통이 지금도 이어져 한국의 문화·예술이 세계에 퍼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불교나 유교에서 문화적인 부분을 강조했던 특성이 지금 한류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지요. 그 연관과 기저를 연구해 보는 것이, 한국불교와 한국학의 연결 고리, 또는 주요 주제 중의 하나가 될 것 같아요. 한류가 더 발전하고 확산되면 나중에는 외국인들이 틀림없이 한국의 문학, 사학, 철학 등으로 관심의 폭을 훨씬 넓혀 궁금해 할 것입니다. 그때 ‘한국 정신’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반드시 받게 될 것이고요. 그때에 중요한 해답을 역사 속에서, 특히 한국불교 속에서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한국학과 한국불교의 관계를 한국문화와 한국역사라는 전체적인 측면에서 공부하고 연구해 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한국학에 대한 말씀을 들으니, BTS 음악에 대한 반응이 떠오릅니다. 서양의 부모들 중에 아이들이 BTS 음악에 빠져드는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부모들이 들어보니 가사 내용이 의미 있고, 특히 선정적이거나 폭력적 언어가 없어서 안심했다합니다. 스님의 말씀과 통하는 것 같습니다.
스님: 한국학으로 BTS가 될 수 있는 강점이 있다면 뭘까요? 한국학이 BTS처럼 될 수 있는?
기자: 네
스님: 초코파이라는 과자 있잖아요? 그 포장지에 ‘정(情)’이라고 써져 있어요. 그런데 중국인들이 초코파이를 수입해 갔는데, 중국인들이 이 초코파이를 수입해 가면서 글자를 바꿨어요. ‘어질 인(仁)’자를 써놨어요.
정은 유교에서 안 좋은 것으로 여깁니다. 정은 불안한 것이라 생각하지요. 그런 반면, 인은 인간 근본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것이니 좋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은 비본질적인 욕망과 관련되어 있어서 조절해야 할 그 무엇인 거예요. 유교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성품 성(性)’과 ‘정(情)’을 나눕니다. 인간의 근본 성품인 ‘성’은 간직을 하고 ‘정’은 다스려야 할 것으로 생각해요.
그런데 한국문화의 특징은 본성이라는 부분만 강조하고 있지 않아요. 정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한국 국민들의 정서는 중국과 다른 점이 있어요. 초코파이에 붙은 ‘정’이라는 글자는 그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것의 중요한 감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BTS와 기생충이라는 영화에 대해 불교신문의 한국학 에세이에서 다룬 적이 있어요. “기생충은 장르가 파괴되어 있다. 장르가 뭔지 모르겠다”는 평을 많이 받아요. 호러가 됐다가, 코미디가 됐다가, 갑자기 서스펜스가 되는, 여러 장르가 한 영화 안에 다 담겨있는 거예요.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즉 기뻤다가 슬펐다가, 즐겁다가, 갑자기 무서웠다가, 울었다가, 인간의 여러 감정이 한꺼번에 담겨 있는 것이지요. 불교적으로 보면 무심하고 무정해야 좋을 것 같잖아요. 그런데 한국인은 무심이나 근본 성품을 중시하면서도,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정을 귀히 여기지요. 한국인들이 주는 정은 진심으로 위한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는 것이지요.
BTS 음악도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있어요. 불교적으로 보면 사람의 근본 불성(佛性) 자리는 다 똑같아요. BTS의 노래 가사들을 보면 인간의 정감을 섬세하게 잘 만져주는 것 같아요. 그것이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하게 하지요.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한국적인 부분들이 BTS 음악에 담겨 있는데 외국의 젊은 아이들이 그 음악에 공감을 했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공통적인 문제점, 지금의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우리의 괴로움과 외로움. 이런 부분들을 위로해주는 부분들이 정감 있게 담겨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기자: 음악과 영화나, 음식 등이 세계화되는 면에서, 한국학 내지 한국불교학이나 불교도 세계화 할 수 있다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스님: 예. 그렇습니다.
기자: 스님께서는 한국학을 하셨는데, 불교 공부하시다가 탄허스님 연구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탄허스님의 어떤 부분에 매료되어 연구를 하시게 되셨습니까?
스님: 제가 출가하고 스님이 된 지 1년 남짓 되었을 때였어요. 당시 주로 불공 기도를 드리며 생활하고 있었는데, 불교신문에서 탄허스님이란 분의 CD가 나왔다는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유교, 불교, 도교, 화엄경까지 그 CD에 다 회통해서 강의해놓았다고 되어 있었죠. 그때 탄허스님은 이미 돌아가신 뒤였죠. 당시 저는 불교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초심자였고, 동국대학교에도 입학하기 전이니까 불교에 대해 잘 모르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분이 출가 전에 제가 전공했던 유교, 노장, 주역을 다 강의하셨다는 거예요. 강한 호기심이 일어나 바로 사서 CD를 들어봤어요. CD가 열 여덟 장이었고요. 스님께서 스물 세 살 때 출가하셨다는데, 유교, 노장에 대해 서른 가까이 되도록 그것만 공부했던 저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시더라고요. 중요한 건, 유교·노장의 경전을 다 외우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제가 공부할 때 접해 보지 못한 자료들도 다 보신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유교 공부하는 사람들은 보지도 않는 텍스트를 왜 다 보셨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학문적 이해의 수준이 아주 특별했어요.
사실 장자의 ‘제물론’ 같은 건 동양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도 어렵게 느껴요. 역학 분야, 주역에서도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요. 동양학 공부를 하다 보면 누구나 다 아는 부분까지는 알게 되지만 막히는 지점이 비슷한 데가 있어요. 그런데 그 지점을 탄허스님이 불교를 끌어와서 딱 한 번에 명쾌하게 해석해 주는데, 막혔던 지점이 확 뚫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정말 많았어요.
화엄경 강의는 물론 그 방대한 화엄경을 다 번역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아직 화엄경을 보기 전이었는데, 탄허스님의 화엄경 CD 강의를 들으며 화엄경을 접하게 되었지요. CD 열 여덟 장 중의 절반 뒷부분이 화엄경이었습니다. 스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방대한 화엄경의 핵심 내용을 알 수 있었습니다.
탄허 스님의 강의를 듣고는 탄허스님이 번역한 책들을 보기 시작했어요. 그때까지는 탄허 스님을 연구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유교, 노장, 주역 경전에 대한 해석을 보니 박사 학위 받은 분이 아니어도 이 분의 스칼러십은 탁월하며 ‘이 분은 믿을 만하다’ ‘이 분의 책은 조건 없이 읽어도 된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그래서 금강경, 원각경, 화엄경 등 불교 경전에 대한 공부를 이 분의 책을 교재로 삼아 계속 해 나갔어요.
그러다가 출가한 지 십년 쯤 됐을 때 쓰다가 중단했던 석사 논문을 다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참선하려고 출가한 것이라 그동안은 참선하는 데만 주력했었는데, 다시 학문을 하게 될 상황이 온 것이지요. 그렇다면 탄허스님이란 분을 꼭 다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예전에 했던 학문 분야에서는 이런 분이 계신지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논문을 쓰려고 참고문헌을 조사하면서 탄허스님에 대한 학위논문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비록 제 석사 논문의 한 챕터에서 탄허스님을 다루었지만, 제 논문이 학위논문에서 탄허스님을 다룬 첫 케이스가 된 것입니다.
제가 탄허스님 덕분에 막혔던 공부가 뚫렸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탄허 스님의 학문과 사상을 알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탄허스님 번역책이 너무 많아 사람들이 다 보기 힘든 게 사실이에요. 그래서 적어도 스님의 학술적 핵심 부분만이라도 파악할 수 있는 개론서라도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탄허스님을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삼아 집중적으로 다뤄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어요. 탄허스님은 불교의 선(禪)과 화엄을 중심으로 유학 사상, 역학 사상, 노장 사상, 기독교까지 다 아울렀습니다. 이것을 다뤄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기자: 기독교까지요?
스님: 탄허스님은 기독교에 대해서도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성경 전체를 외우셨다 합니다. 한문본 성경으로요.
기자: 스님의 혜안으로 탄허스님께서 재 탄생 하신 듯 합니다. 탄허스님께서는 예언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그 부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스님: 불교나 화엄이나 유불선, 기독교까지 회통하는 그런 강의를 많이 하셨지만, 맨 마지막에 꼭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취미로 미래학을 합니다.’ 당시에 이미 ‘미래학’이라는 용어를 쓰셨는데, 우리나라에 엘빈 토플러, 퓨처올로지 등 미래학자들이 회자된 건 그보다 한참 뒤였지요. 스님은 ‘나는 취미로 미래학을 하니까 소설처럼 한번 들어나 보십시오.’ 이렇게 시작하면서 얘기하셨어요.
그러나 스님께서는 노스트라다무스 류의 예언가라는 아니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동양에는 전통적으로 역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주역이라는 역학은 평생을 공부해도 다 마치지 못할 만큼 방대하며 유교의 최고봉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불교의 최고봉이 화엄경이고, 도교의 제일이 노자·장자라면 유교에서는 주역이 으뜸이라는 것이지요. 역학에 대한 이해는 아주 낮은 단계부터 굉장히 높은 단계까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스님은 역학을 굉장히 깊이 연구하셨던 것 같아요. 스님은 출가 이전에 이미 역학을 깊이 공부했었어요. 스님의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10대 후반이 되자 일찌감치 결혼을 했거든요. 그런데 처가가 바로 토정 이지함 선생 집안이었어요. 결혼 후 처가가 있는 충남 보령에 갔는데 거기서는 역학을 모르면 무시당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탄허스님 부인도 탄허스님만큼 경을 잘 읽으셨대요.
탄허스님은 이지함 선생의 집안에 장가드신 후, 그 동네의 이국종이라는 선생님께 다시 오경을 배우면서 역학을 다시 배웠어요. 그런데 탄허스님이 주역 책을 빌리기가 힘든 거예요. 옛날에는 책을 빌려와 다 베껴서 보곤 했거든요. 스님이 매우 보고 싶어 하시니, 장모님이 송아지를 팔아서 주역 책을 사 주셨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서당에서 밤을 새면서 그 책을 보느라고 집에 안 들어오는 거예요. 장모님이 서당에 가 봤더니 탄허스님이 좋아서 박수를 쳐 가면서 주역을 보고 계시더래요. 그래서 장모님이 “처자는 고사하고 집안도 돌아보지 않겠네 공부 때문에!”라고 혼잣말을 하고는 그냥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역학에 심취하셨던 거 같아요, 출가하기 전에 말입니다.
탄허스님의 학문 배경이 되는 계통으로 보천교도 주목할 만합니다. 강증산이 창시한 증산교 계열에 보천교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보천교에서 2인자이셨어요. 그래서 탄허스님은 보천교에서 말하는 얘기, 즉 강증산 계열의 종교에서 말하는 미래에 대한 얘기들을 이미 다 섭렵하셨던 것 같아요. 게다가 탄허 스님은 참선을 하셨습니다. 화엄경에 십통품이 있는데, 선정수행을 통해서 성취하게 된 10가지 신통력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요. 참선을 하여 선정에 깊이 들어가면 숙명통이라고 해서 과거 전생을 본다든지, 미래를 본다든지 하는 능력이 생길 수 있어요. 깊은 선정력을 바탕으로 해서 나오는 신통에 해당하는 것들이지요. 그러나 미래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늘 역학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역학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탄허 스님의 말씀은 무속인, 신비가, 예언가들이 말하는 형태와는 다릅니다. 스님의 미래 예견은 역학 이론, 동양학 공부를 기반으로 하고 참선 수행이 바탕이 되고 스님의 부사의한 능력이 발휘되어 총체적으로 나온 결과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자: 예언들이 맞다고 한다면, 미래가 정해져 있다고 해석 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수행할 필요가 있나요? 환경의 변화 등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개선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스님: 옛 성현들도 미래에 대해 얘기를 하셨습니다. 부처님도 말씀해 놓으신 것이 있고, 공자가 얘기해 놓은 것도 있습니다. 탄허스님이 미래학을 말한 목적은 미래에 위기와 혼란이 오는 걸 맞추기 위함이 아닙니다. 탄허 스님은 위기가 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미래를 말씀하셨다고 했어요. 성현들이 지혜로서 예견한 것은 특히 어려운 때를 대비해 말씀 하신 것으로, 위기를 마주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절부절 하지 못하여 불안, 공포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 보셨기 때문이지요. 큰 혼란 앞에서는 올바로 잘 살던 분들도 마음이 흔들려버릴 수 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부동심과 무심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탄허스님이 미래 예견을 하면서 강조하는 핵심 중의 하나는 미래에 크나큰 위기가 닥쳐오면 사람들이 놀라서 죽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 크나큰 위기가 닥쳐오기 전이나 닥쳐 올 때나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은 참선하고 명상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미래의 위기에 대해 예견해 주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미래 위기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탄허스님이 가장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과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방편설이라는 것입니다. 장차 지구에 엄청난 위기와 환란이 닥쳐오면 기독교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의 종말이라고 느낄 수 있고, 심판이라고도 여길 수도 있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양적 사상에서 보자면 지구는 아직까지 반만큼 성숙한 상태이고,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하추교역기(夏秋交易期)를 지나 가을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구에 닥치는 큰 위기와 혼란은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추교역기에 일어나는 변화이며 성숙되어 가는 과정이자 결실을 맺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지요.
탄허 스님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종말론적 미래관이 사람들을 더 많이 흔들리게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큰 혼란이 와도 사람들이 ‘아, 지구가 성숙되는 과정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두렵고 힘이 들더라도 수행을 하며 정진을 계속 해 나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탄허 스님이 미래학을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고 봅니다.
기자: AI에 대해서도 말씀 하신 것이 있나요?
스님: 탄허스님은 화엄학의 시대가 한 번 다시 온다고 하셨어요. 화엄학의 내용 중에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부분이 ‘사사무애(事事無碍)’라는 것입니다. ‘일[事]’과 ‘일’ 간에 장애가 없다는 말인데, 이걸 화엄학에서는 어떻게 표현하냐면, ‘수미산을 콧구멍에 집어넣는다.’ 는 식이에요. 이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어떻게 수미산이라는 저 큰 산이 자그마한 콧구멍에 들어간다는 것인가?’라며 의아해하게 되지요. 그런데 탄허스님은 “지금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테지만, 앞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게 될 것이고 화엄경에 미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하셨어요. 스마트폰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림픽 경기를 폰안에서 볼 수 있으니까요. 이전 사람들은 물질세계에 대한 관념에만 얽매어 ‘수미산을 콧구멍에 넣는다’라고 하면 수미산을 실제로 다 가루를 내어서 콧구멍에 집어넣는 것만 생각을 했죠. 그러나 그대로 있으면서도 콧구멍에 그대로 들어올 수 있는 형태는 이해하기 어려웠던 거죠.
다른 예를 들어 볼까요? 컴퓨터 안에는 방이 여러 개 있지 않습니까? 이 방 속에 저 방이 들어가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게 화엄에서 말하는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하나 가운데 전체가 있고, 전체 가운데 하나가 있고 하는 게 화엄이거든요. 이렇게 화엄의 세계를 이해하게 된 거니까 화엄경의 세계가 열린 것이지요.
탄허스님이 화엄학의 시대가 한번 다시 올 것이라고 한 말씀이, AI 시대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메타버스를 생각해 봅시다. 화엄에서 말하는 법신, 보신, 화신도 이 메타버스에서 잘 이해가 됩니다. 화신은 아바타라고 할 수 있는데, 나의 아바타가 메타버스라는 가상의 세계에서 움직이고 있단 말이죠. 메타버스 같은 게 화엄이 말하고 있는 세계를 가장 현실적으로 만들어낸 문명 아닙니까?
AI라고 하는 것이 문제점이 있다, 앞으로 인간이 더 괴로워질 것이다 하는 것은, 인간이 그걸 만들어낸 다음의 윤리의식과 인간이 더 고양되어야 될 인간의 과제사항이나,
AI시대가 열리는 것은 필연이라고 봐요. 탄허스님이 앞으로 화엄이 열릴 것이라 하셨으니까요. AI가 인류의 거처온 산업 혁명, 정보혁명 뇌과학까지를 통합해 만들어낸 것으로 본다면, 이제는 마음 혁명을 위한 “마음산업시대”가 도래했습니다.
탄허스님은 ‘팔만대장경이 다 마음 닦는 것밖에 없다. 선(禪)이다.’말하셨습니다. 탄허스님은 미래학도 하셨고, 화엄도 하셨고, 경전 공부와 번역도 하셨고 여러 사상을 통합하여 회통도 하셨지만. 궁극적으로 강조한 것은 ‘참선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기자: ‘마음산업’이라 말씀하셨는데 용어 선별이 훌륭하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탄허스님께서 코로나 같은 병에 대해서 말씀도 하신 것이 있으신가요?
스님: 탄허스님이 하신 말씀 중에 가장 감동적인 게 있어요. 말법 시대에, 힘든 시대에 반드시 기억해야 할 구절이 있다며 말씀하신 거예요.
능엄경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한 사람이 발진귀원(發眞歸源)해서 참다움을 발하여 근원 자리로 돌아가면, 한 사람만이라도 그렇게 돌아가면, 시방 허공이 실개소운(悉皆銷殞)이라, 즉 이 시방 허공세계 전체가, 우주법계 전체가 다 녹아내린다. 한 사람만 발심해서 근본 자리 돌아가는 공부만 해도!
한 사람으로 인해 어떻게 시방 세계가 다 녹아내릴까 생각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를 통해 역으로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죠.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도 처음에는 한 사람부터 시작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퍼져 세상을 다 뒤엎어 버렸잖아요.
능엄경에서 말하는 것은 전염병과 다르지만, 비슷한 원리로 볼 수 있어요. 한 사람만이라도 진짜 마음을 내어서 수행하겠다는 마음 하나를 일으키면, 코로나 바이러스처럼 주변으로 퍼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탄허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지진, 해일, 화산등 자연재해가 많이 발생한다.” ‘대방등 대집경’이라는 경전에서도 앞으로 병겁이 온다, 즉 큰 질병들이 많이 온다고 했어요. 어쨌든 이러한 시대를 맞이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제일 중요한 것은 근본 마음을 놓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스님이 말씀하셨던 것 중의 중요한 내용이 1984년 갑자년부터 2044년 갑자년에 이르는 60년동안 지구가 엄청나게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는 거예요. 1984년은 탄허스님이 돌아가신 그 다음 해입니다. 이 기간 동안 환란도 많이 생기고, 큰 변화도 일어난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민본군말’의 시대가 온다고 하셨어요. 일반 국민이 근본이 되고, 통치 지도자는 말석에 앉게 된다는 겁니다. 갑을 도치도 일어난다고 했어요. 음양의 변화도 일어나 남녀의 지위도 변화된다고 했어요. 이러한 엄청난 변화가 이 60년간에 다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죠. 이렇게 사회적으로 커다란 변화들이 계속 일어나서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이 불성이 있다는 평등이 실현될 것이라 하셨어요. 군민이, 갑을이, 남녀가 평등해질 때까지 변화가 계속 일어날 거라는 것이지요. 그 사이에 세계적으로 질병도 겪고 하면서 말이지요. 2년 동안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변화한 게 많아요. 대내외적으로 공장 가동이 제한되니까 미세 먼지가 굉장히 적어졌어요. 마스크 쓰고 다니다 보니까 감기 환자도 많이 줄었구요. 건강과 보건 체계에 더 신경을 많이 쓰게 됐고요. 누군가 병이 생기면 다 같이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몸소 겪으며 우리 모두가 같은 공동 운명체임을 체감하게 된 거죠.
그런 점에서 코로나 사태가 나쁜 영향만을 준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런 위기를 함께 겪으며 지구촌 사람들이 한 가족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걸 느끼게 되었으니까요. 옛날 같으면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생길 때 발병한 그 지역만 통제하면 되었잖아요. 하지만 비행기와 같은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세계 각국 사람들이 서로 빈번하게 왕래하는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전염병, 생태계 보호, 환경 문제 등 전 세계가 함께 대응해야 하는 문제가 굉장히 많아졌어요. 어느 한 지역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지역을 돕지 않으면 자신도 위기를 겪게 됩니다. 이런 면들이 불법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과 맞아 떨어져요. 말법 시대가 끝나면 새로운 미륵불이 오시고 새로운 개벽이 일어난다는 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기자: 탄허스님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주신 스님은 누구십니까?
스님: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살고 있는 수행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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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탄허스님 학문을 공부하면 많은 이득이 있읍니다
학문으로 요익중생을 하신 탄허스님 감사합니다
알버트아인슈타인을 똑똑한 중생이라 강의 하시던
탄허스님 유불선 삼교를 회통하신 탄허스님!
서산대사님의 선가귀감 유가귀감 도가귀감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생각합니다
금바위가 공부하는 금타대화상님의 법을
공부한다면 사사무애법계 실천이 됩니다
왜냐하면 요익중생의 방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탄허스님의 10년동안 번역 수고하신 이통현 장자의 화엄경합론 번역본 읽은지 30년전입니다
학문을 뒤받침하는 요익중생 척척 실천하는
21세기 LEADERSHIP을 인도하시는
원효대사님 금타대화상님 탄허스님 학문
갖춘다면 한국학문과 육바라밀 능통하는
육행대사되는 방법을 미국의 금바위는
최소한 갖추고 즉석에서 미국인들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고 있는지 17년 되었읍니다
21세기는 화엄학 재조명과 불보살님들의 광명세계에 의하여
요익중생 실천 한다면 한국 화엄
생로병사 고통받는 중생들을 척척 여래장바다로 인도하는
불성문명 전달하는 정견의 인사! 보리살타!
인재양성 SYSTEM 절실히 필요합니다
미국에서 실천되어야합니다
반가운 탄허학문 강조 하시는 문광스님!
수고 많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