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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대러 제재를 해제하면, 한국 자동차 기업들이 가장 먼저 러시아 시장으로 돌아와 6개월도 안돼 자동차 판매를 시작할 것이다."
러시아 자동차 전문 매체 '자룰룜'(Зарулем, 운전대를 잡고)의 막심 카다코프 편집장이 우크라이나전 종전 분위기에 감지되는 외국 자동차 브랜드의 복귀 움직임에 대한 최근(3월 3일) 전망이다. 다른 자동차 전문가들의 견해도 대략 비슷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러시아 현지 언론에는 현대차의 시장 복귀를 알리는 신호들이 그만큼 자주 잡히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가 2023년 말 현지 업체 '아트 파이낸스'(이후 AGR홀딩스·그룹으로 상호 변경)에게 넘긴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에서는 현재 새로운 브랜드 '솔라리스' 이름으로 현대차 기반의 차량들이 생산되고 있다. '솔라리스'는 원래 현대차가 러시아 공장에서 현지 맞춤형으로 생산한 승용차 모델이다. 현대(Hyundai)란 브랜드를 '솔라리스'로 바꿨을 뿐이다.
현대차 기반의 솔라리스 브랜드 차량/사진출처:텔레그램
현대차 자산을 인수한 AGR그룹 홈페이지
◇현대차 상트 공장에서는 지금 솔라리스 차량들이..
AGR그룹이 현대차 자산을 인수했으니, 공장에 남은 부품(현지 언론 표현으로는 '키트')을 이용해 차량을 조립한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다. '현대' 브랜드만 쓰지 않는다면, 현대차로서도 '짝퉁' 현대차라는 것외에는 시비를 걸 마땅한 근거가 없다. 독일 자동차 업체 BMW는 전쟁 발발 전까지 위탁 조립하던 공장에서 최근 BMW X5, X6 SBU 차량을 생산, 판매한다고 발표하자 즉각 BMW 본사가 '품질 보증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선언했다. 현대차는 '현대' 브랜드를 쓰지 않으니, 품질 보증을 운운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외국 자동차 자산을 인수한 러시아 업체의 입장도 이해가 된다. 어차피 남아 있는 부품으로, 그동안 조립을 담당해온 근로자들이 같은 생산 라인에서 자동차를 생산할 수 있는데, 굳이 놀릴 이유가 없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거점의 경제 매체 '델로보이 페테르부르크'(DPru)는 지난 14일 현대차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에 납품하던 12개 부품 업체가 적극적으로 인력을 모집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현대차 그룹의 자동차 부품 전문 기업 현대모비스는 이달 들어 품질 관리와 공장 운영 등 주요 분야의 인력 채용에 나섰다. 현대모비스 측은 국내 언론에 “현대차·기아가 러시아에서 철수했지만 모비스의 생산 법인이 여전히 러시아에서 운영되고 있다”며 “현지 법인이 시장 상황을 보고 인력 충원에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동차의 철강·철판을 생산하는 현대스틸러스(제철)와 엔진 생산을 맡고 있는 현대 위아(현지 법인은 Хендэ Виа Рус·현대 위아 루스)도 인력을 구하고 있다. 현대차 협력 업체로 현지에 나가 있는 '동희'(동희홀딩스 Donghee.co.kr)를 비롯해 성우하이텍(프레임 부품 및 시트), DRB(고무 제품), NVH(내부 및 도어 트림), 대원(자동차 시트) 등도 인력 충원에 나섰다. 특히 동희는 현대차·기아의 전장 부품, 서스펜션, 연료탱크, 페달 등을 생산한다. 이들 협력 업체는 현대차 공장과 달리 여전히 한국인 소유다.
이들 업체가 인력을 충원하는 것은, AGR그룹의 '솔라리스' 브랜드 차량의 생산 확충, 또는 현대차 복귀를 대비한 정지작업으로 봐야 한다.
◇부품 업체 인력 확중, 현대차 복귀의 사전 정지작업?
현지 매체 DPru가 주목한 것은 2021년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엔진 공장 가동에 들어간 '현대 위아 루스'의 움직임이다. 현지 구인구직 사이트 hh.ru에 생산 부문및 영업 전문가 모집 공고를 올렸다고 했다. 그러나 23일 기준 hh.ru 사이트에 Хендэ Виа Рус 구인 여부를 검색하면 '자료가 없다'고 나온다. 이미 채용이 끝났을 수 있다.
DPru는 "AGR 그룹이 (과거 현대차 상트 공장의)부품 공급업체들과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줬다"며 "현대 위아 루스에서 생산된 현대차 엔진이 솔라리스 차량에 장착된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현대 위아 루스는 2023년 현대차의 자산 매각시 그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아직 현대차 그룹의 직접 지휘권 하에 있다는 뜻이다. 현대차 그룹의 지시에 따라 AGR그룹에 엔진을 납품하는 것인지, 손실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납품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현지 기업 정보 사이트 '콘투르 포쿠스'(focus.kontur.ru)에 따르면, 현대 위아 루스는 2023년 기준, 순손실이 전년(2022년)의 90억 루블에서 63억 루블로, 직원 수는 405명에서 162명으로 줄었다. 2022년 봄부터 공장 가동을 중단한 것을 감안하면 비용 절감을 위해 노력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지난해(2024년) 재무 제표 등 기업 경영 상황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DPru는 "현대차는 러시아 시장 복귀를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지만, 자회사 혹은 협력회사들은 러시아 시장에서 입지를 새로 다지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차 주변의 이같은 움직임을 현대차의 러시아 복귀를 위한 정지작업으로 곧바로 해석하는 것은 아직 섣부르다. 철수한 외국 기업의 복귀에 대한 러시아 정부의 정책이 계속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푸틴 대통령은 18일 트럼프 미 대통령과 2번째 전화 통화를 하기 전, 러시아 산업·기업인연맹(우리의 한국경제인연합 격) 회의에 참석해 서방 기업의 러시아 복귀에 대한 기준을 대략적으로 제시했다. △ 자산을 헐값에 넘기고 러시아 시장을 떠난 기업이 똑같은 가격으로 자산을 되사는(바이-백. buy back 옵션) 것은 안된다 △ 다른 브랜드를 달고서라도 러시아 시장을 떠나지 않은 외국 기업들을 존중한다 △ 러시아 기업의 이익이 우선이며 외국 기업의 복귀에 대한 특혜는 없다 △서방 기업이 떠난 틈새시장을 러시아 기업이 채우고 있다면 그 기업의 이익이 우선한다는 등이다.
푸틴 대통령의 기준에 따르면 현대차는 △바이백 옵션을 달고 자산을 넘겼고 △ 다른 브랜드(솔라리스)를 달고서라도 남아 있는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넘긴 가격에 현지 공장을 되찾지는 못하더라도 '우대 기업'에 들어간다.
AGR 그룹은 현대차가 떠난 뒤 지난 1년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에서 약 2만 2천 대의 자동차를 조립, 출시했다. '솔라리스' 브랜드만 붙였을 뿐, 기존의 현대 솔라리스와 크레타, 기아 리오 그대로다. AGR 그룹은 올해 1월~2월에 4천 대의 자동차를 추가로 생산했다고 공개했다. 월 평균 2천대다. 현대차가 떠날 즈음, 공장에 남아 있는 차량 키트(부품)가 5만~7만 대에 달한다는 소문이 돌았으니, 아직 더 조립할 여지가 있다는 뜻이다. 부족한 부품은 인력을 충원하기 시작한 기존의 부품 협력 업체를 통해 조달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AGR 그룹도 DPru에 "지난 1년간 외국 파트너(현대차)의 기술 지원이 완전 중단됐지만, 부품의 현지 생산이 크게 늘었다"며 "러시아의 주요 부품 공급업체와도 협력을 재개했다"고 밝혔다.
성과도 분명히 있다. 현지 자동차 시장 분석 기업인 아프토스타트(오토스탯.ru, autostat.ru)에 따르면 3월 첫째주(3일~9일) 기준, '솔라리스' 브랜드가 처음으로 러시아 신차 판매 상위 10위권에 진입했다.
DPru는 "AGR그룹은 올해 '솔라리스'의 생산을 확대할 계획인지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는 않았다"면서 "그러나 솔라리스가 시장에서 거둔 성공을 보면 생산량을 늘릴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AGR그룹이 인력을 적극적으로 충원하는 이유로 해석하기에 충분하다. 특히 충원 인력의 일부를 현대차가 2020년 말에 인수한 옛 제너럴 모터스(GM) 공장에 배치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대차가 러시아 시장으로 복귀하더라도 AGR그룹에 상당한 대가(돈)를 치러야 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다만, 현대차가 상트 공장을 계속 놀렸을 경우, 감당해야 할 유지및 보수비와 비교하면 '바이백' 옵션의 손익 계산은 또 달라질 수 있다.
독일의 폭스바겐/텔레그램 캡처
◇러시아 자동차 단지가 다시 움직인다
현대차 외에 폭스바겐 등 외국 자동차 브랜드가 남기고 간 러시아 현지 공장의 최근 움직임도 비교적 활발하다.
러시아 일간지 콤스몰스카야 프라우다(KPru)는 23일 현대차 공장이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일원의 자동차 클리스터(산업단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에 따르면 일본 닛산의 옛 공장은 당초에는 러시아(소련) 국민차 '라다'를 생산하려고 했다가 중국 자동차 기반의 새로운 브랜드 'XCITE' 생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난해 출시된 이 브랜드로 'X-Cross 7'과 'X-Cross 8' 두 가지 모델이 생산됐는데, 중국산 '체리'(Cherry)의 SUV 차량이다. 지난해에만 약 2만 대의 차량을 조립, 출시했다고 한다. 올해 생산 계획은 공개하지 않았다.
닛산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구 도요타 공장의 상황은 좀 복잡하다. 자산(공장)을 인수한 러시아 국영자동차개발연구소(NAMI)는 푸틴 대통령의 전용차 브랜드로 유명한 '아우루스' 생산과 러시아 국영 방위산업체인 '알마즈-안테이'(Алмаз-Антей)가 개발한 전기차 'E-NEVA'의 생산을 두고 고민했는데, 둘 다 일단 보류됐다.
KPru에 따르면 '알마즈-안테이'사는 전기차 'E-NEVA' 개발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새 법인 '로마노프'(Романов)를 세웠다. 이 법안은 전 도요타 자동차 공장을 포함해 E-NEVA 프로젝트 팀과 기술 자산 등을 모두 흡수했다. 그러나 전기차 생산 계획을 접고, 과거 스웨덴 상용차(트럭) 브랜드 '스카니아'와 독일 폭스바겐의 '만 트럭'을 조립했던 시설을 이용해 군용 차량(트럭) '바즈'(BAZ, 러시아어로는 БАЗ)를 생산할 계획이라고 한다.
도요타 공장에서 생산이 보류된 '아우르스' 브랜드 측은 KPru에 새로운 정보 제공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 회사는 자동차 설계및 디자인, 전기차 엔지니어 등을 뽑는 구인 광고를 냈다.
현대차가 인수한 GM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의 재개 논의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 공장은 현대차 공장과 함께 AGR그룹으로 넘어간 상태다. AGR그룹은 충원한 인력중 일부를 옛 GM공장으로 배치할 계획인데, 중국 브랜드 'Jeland'의 'Jaecoo' 모델 차량을 생산할 것으로 알려졌다. KPru는 'Jeland'가 자동차 완제품을 몇 개의 덩어리(엔진과 차체, 서스펜션 등)로 분해한 뒤 러시아 공장으로 가져와 다시 조립하는 방식(전문 용어로는 녹다운knock down)으로 차량을 생산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현지 전문가들은 서방의 제재를 두려워하는 중국 자동차 측이 통상 자동차 생산 프로젝트를 비밀리에 진행하려고 한다며 'Jeland'의 현지 생산 확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산업 단지를 운영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시 당국은 적극적이다. 알렉산드르 시토프 시 산업 정책, 혁신 및 무역 위원회의 위원장 직무대행은 "자동차는 다른 산업의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분야"라며 "적극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모스크바 인근의 자동차 산업단지에선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 시장을 떠난 독일의 폭스바겐은 공장이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니라 모스크바 인근의 칼루가주(州)에 있었다. 폭스바겐은 2023년 5월 칼루가 공장 등 러시아 자산을 (현대차를 인수하기 전의) '아트 파이낸스'에 매각했다.
AGR그룹은 지난달(2월) 20일, 러시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중국 법인 'Dafetoo'와 '테넷'(Tenet) 브랜드로 자동차를 생산하는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이튿날(21일) 공장이 있는 칼루가주의 블라디슬라프 샤프샤 주지사가 '테넷 SUV' 새 모델을 텔레그램에 소개했다.
'테넷' 새 브랜드를 소개하는 칼루가주 주지사/텔레그램 캡처
현지 매체는 새로운 모델이 중국의 '체리 SUV'와 흡사하다고 말한다. 체리가 테넷으로 이름만 바꿨을 가능성이 높다. 체리 자동차도 현재 칼루가 자동차 산업 단지에서 조립되고 있다.
'체리' 브랜드가 옛 폭스바겐 공장에서는 '테넷'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옛 닛산 공장에서는 'XCITE' 로 브랜드를 바꿔 생산되는 셈이다.
AGR그룹 측은 "올해 2분기 초부터 '테넷' 양산에 들어갈 계획"이라며 "1단계에서는 대형 조립 방식(녹다운 방식)으로, 2단계(3분기)에서는 부품 조립 방식으로 생산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샤프샤 주지사는 "새 자동차는 러시아의 여러 지역적 특수 여건에 맞춰 특별히 제작됐다"며 "안전을 신뢰할 수 있고, 편안하고, 앞선 기술이 적용됐다"고 힘을 실었다. 폭스바겐은 자산(공장)을 매각할 때 바이백 옵션도 걸지 않았다.
또 칼루가 자동차 단지에 있는 'PSMA 루스'(ПСМА Рус)는 러시아 기업 '자동차 기술'(Автомобильные технологии)에 넘어갔는데, 현재 시트로엥과 중국 브랜드 '하발'이 조립되고 있다.
◇짝퉁 BMW의 생산?
독일의 BMW는 또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
현지 자동차 전문 매체 '카엑스포'에 따르면 러시아 역외영토인 칼리닌그라드주(州)에 있는 '아프토토르'에서는 BMW X5, BMW X6의 조립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BMW가 철수한 2022년에 아프토토르에 남겨 놓은 부품으로 BMW X5와 BMW X6 차량을 조립, 생산한다는 것. 2025년에 조립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3, 4년 전의 부품을 사용했으니 연식이 오래된 자동차라고 해야 한다. 이는 현대차 공장에서 조립된 '솔라리스'도 마찬가지다.
BMW 본사는 지난 14일 러시아에서 철수한 뒤 아프토토르 공장에서 생산된 차량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BMW 그룹의 엄격한 품질 및 안전 기준을 충족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당연히 차량식별번호(VIN)도 BMW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는다.
BMW도 러시아에서 계속 자동차 의장 등록을 신청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초에는 러시아 연방 지식청(특허청)으로부터 새 모델(스카이 탑 콘셉트카)의 등록 허가를 받기도 했다. 러시아 시장 재진출에 대한 꿈을 다시 키워가고 있는 상태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