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성일기 2018.03.22. (목)
2018 명성교회 3월 특별새벽집회
믿음에 굳게 서라 (STRENGTHENED IN THE FAITH)
2018. 3. 4.(주일 저녁)
강사 김하나 목사
약한 자의 강한 믿음
(행 14:19-28)
명성교회 2018년 3월 특별새벽집회 주일찬양예배 1부
https://www.youtube.com/watch?v=H7LXnDd30CU
명성교회 2018년 3월 특별새벽집회 주일찬양예배 2부
강한 믿음을 향하여
오늘 이 시간 약한 자가 갖고 있는 강한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우리 중에 강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는 다 약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은혜가 있는 것은, 소망이 있는 것은 약하지만 강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아브라함이 스스로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의 훈련을 시켜주신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시험하시고, 연습시키시고, 훈련시키셔서 아브라함이 좋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훈련을 주실 때 강함의 훈련도 주시고 약함의 훈련도 주십니다. 아주 균형 있게 주십니다. 때로는 우리를 약해지게도 하십니다. 약해지게 하셔서 강하게 하시고, 강함의 훈련을 통해서 더욱더 강한 사람이 되도록 하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강할 때 강할 줄 알고, 약할 때 약할 줄 아는 겸손과 강함의 믿음이 함께 작용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얼마나 약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습니까? 예수님은 연약한 자들을 보시며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약함은 은혜입니다. 연약한 사람들에게는 항상 약한 모습을 보여주셨고, 반대로 교만한 사람들 앞에서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장사로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사람들을 보실 때에는 강하게 그것을 뒤엎으셨지만, 연약한 이들을 바라보실 때에는 한없이 약해지셔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훈련
좋은 부모는 아이가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안 되는 것은 “안 돼!”라고 말해 주는 부모입니다. 그래야 아이가 예의를 갖추고 인격적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그렇게 하면 안 돼!”라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셔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내치지 않으시고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아브라함을 훈련시켜 주셨고, 다윗과 바울을 훈련시켜 주셨고, 우리도 그렇게 훈련시켜 주십니다.
사울은 원래 굉장히 강했던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초반에 이 사울이라는 젊은이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마치 야수와 같습니다. 늑대와 같은 후각을 갖고 그리스도인들을 끈질기게 추적해서 결국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입니다. 그리고 다메섹까지 올라갔습니다. 대충 유대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강하게 믿고 열심이 있는 젊은이였습니다. 사상이 사람을 그렇게 만듭니다. 사상에 심취하면 날카로워지고 잔인해지며, 자신이 갖고 있는 정의감으로 인해서 거칠어집니다. 이것이 사상이 갖고 있는 힘입니다. 사울이 얼마나 강했는가 하면 로마로 압송되어 가기 전에 베스도와 벨릭스 총독과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기를 변호하는 이야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행 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주님이 가시가 달린 채찍으로 바울을 치셨는데 바울이 뒷발질을 하느라 고생한다는 것입니다. ‘뒷발질을 하다’(헬라어 라크티조, laktizo)라는 표현은 그냥 가축이 하는 뒷발질이 아니라 사나운 야수들이 하는 뒷발질입니다. 사울이 얼마나 강한 사람이었는가 하면 야수와 같아서 뒷발질을 하면서 주님을 찼다는 뜻입니다. 그 정도로 강한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바울이 되고 나서 육적으로, 사상적으로 강하고 거칠었던 젊은 사울의 모습이 점점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런 강함은 쓸모가 없습니다. 사람을 잡아서 죽이는, 나의 사상들로 인해서 남들을 핍박하는 잔혹한 강함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강함이 아니었습니다. 육체적인 강함과 잔혹함의 강함은 사울에게서 철저하게 제하시고 서신서를 통해서 드러나는 바울이 점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사울은 점점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주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강함을 오히려 약하게 만드십니다. 뜨거운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 앞에서 아주 약한 존재가 됩니다. 세상에서 아주 강한 척하며 살았지만 주님 앞에 나오면, 사울이 바울이 되면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순한 양처럼, 아주 여린 새싹처럼 연해져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약함 속에 강함이 있는 주의 종이 됩니다.
아라비아 광야와 다메섹으로 돌아가서, 수많은 사람들의 의심을 받고 다시 다소로 돌아가서, 나중에 바나바가 데리고 안디옥으로 돌아갈 때까지 그곳에서 숨죽이고 살았던 바울의 삶을 통해서 약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봅니다. 이런 바울이 감옥에서 서신서를 쓸 때는 골로새서 2장 6-7절을 보면 정말 따뜻한 주의 종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잔혹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따뜻하게 마음을 담아서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애쓰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함의 훈련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면, 주님과 함께 죽으면 주님은 우리로 다시 살게 하시고 주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힘을 더해 주실 줄 믿습니다. 내가 가진 강함으로 사는 것보다 약하지만 주님이 주신 강함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능력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여행이 끝나는 사도행전 14장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1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장면은 루스드라에서 시작합니다. 바울이 루스드라에 갔을 때 마침 평생 걷지 못했던 자가 있었는데 바울이 기도하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서 걷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은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섬기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바나바가 능력을 갖고 있는 제우스라고, 신들의 왕이라고 부르며 높이 세우고 바나바와 바울에게 예배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바나바와 바울이 옷을 찢으며 우리는 예배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렸습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은 루스드라로부터 160km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얼마나 죽이기를 원했는가 하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까지 와서 사람들을 충동질하였습니다. 방금까지도 신들인 줄 알고 제사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충동을 받으니까 바로 돌로 쳤습니다.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했던 그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떠한 강함을 가져야 하는지, 믿음이 우리를 어떻게 강하게 만드는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진짜 강함 : 믿음의 강함
진짜 강함이 따로 있습니다. 강해 보이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이 강합니다. 우리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없이 강해 보였던 사람들이 의외의 장소에서 굉장히 연약한 모습들을 종종 발견합니다. 성경에서도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 의외의 부분에서 약한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엘리 제사장은 강력한 영적 지도자였지만 자녀들에게 약했습니다. 아무리 강해도 약한 부분을 통해서 큰 시험에 들 수 있고 완전히 무너질 수 있습니다. 헤롯은 강력한 왕이었지만 아이 하나가 왕으로 태어났다는 소문에 자신의 군사를 보내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기들을 죽여 버리는 잔혹한 왕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자기와 비슷한 사람, 자기와 경쟁이 되는 사람, 조금만 잘난 사람이 있으면 바로 없애려고 하는 사람들은 사울과 헤롯의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헤롯 신드롬’입니다. 삼손은 육체적으로는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지만 유혹에는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수백 명의 군사와는 나귀 턱뼈 하나로 싸울 수 있었지만 여자 한 명의 유혹에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술과 여자와 유혹에는 견뎌낼 수 없었습니다. 그는 나실인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귀한 것을 누리지 못하고, 강함이 있었지만 약함을 통해서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요즘 아이들의 체격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 시대의 아이들은 키가 더 커지고, 몸무게도 더 나가고, 근육이 더 좋아졌는지는 모르지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약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사방으로, 산으로 놀러 다녀서 아이들이 발목이 다 튼튼했지만 요즘 아이들은 평지만 걸어서 발목이 약합니다.
요즘 우리의 신앙생활이 ‘평지신앙’이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 어렵지 않고, 좋은 말씀을 듣는 것이 어렵지 않고, 성경이 어렵지 않고, 좋은 찬양을 듣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많이 들어서 강한 것 같지만 어려움이 닥치면 다 넘어지고 회복하지 못하는 평지신앙, 평지의 약한 발목을 갖게 되었습니다. 시편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처럼 해발 800m의 시온산을 올라가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약하지만 강한 사람, 약하지만 강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약하지만 강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약해 보이지만 정말로 강해야 하는 순간에 강한 모습을 보입니다. 영적 근력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돌에 맞았습니다. 바울이 돌에 맞은 것은 단 한 번입니다(고후 11:25). 그렇다면 이것을 자세히 표현하고 어떻게 살아났는지를 묘사해야 하는데 너무나 간결하게 표현합니다. 돌에 맞았고, 일어났고, 다시 루스드라로 들어갔고, 이튿날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만 적혀 있습니다. 여기에는 기적적인 장면이 없습니다. 바울이 돌에 맞았을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보호하여 주셔서 잠깐 기절했다가 벌떡 일어나서 성으로 돌아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가도 하나님의 기적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누가가 이것을 자세히 기록하고 싶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설명하는 부분을 보면 의사답게 설명합니다.
행 14:8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이것이 누가의 스타일입니다. 누가는 병자를 설명해도 그냥 ‘걷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정확히 말해줍니다. 이렇게 걷지 못하는 사람도 자세히 설명하는데 돌에 맞은 사람이 얼마나 부상을 당했는지 전혀 쓰지 않고, 그냥 돌에 맞았고 다시 일어난 장면만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혹한 현장을 전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특별한 기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기적이 있었다면 의사인 누가는 충분히 그런 모습을 썼을 것입니다.
바울은 정말로 죽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성밖으로 내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일어나서 이튿날 다시 전도하러 갔습니다. 정말로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갖고 있는 믿음의 강함을 보게 됩니다. 어려움을 만날 때, 세상의 환난과 고난과 핍박을 만날 때 바울처럼 강함을 갖고 다시 일어서서 이튿날 우리의 삶으로 돌아가서 풍성하게, 충실하게,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의 훈련 :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
바울은 왜 이튿날 다시 전도하러 갈 수 있었습니까? 믿음의 훈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훈련은 어떤 훈련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믿음의 훈련은 나를 온전케 하신 주님, 나를 구원하신 주님, 나를 인도하신 주님, 나를 사랑하신 주님을 어떤 상황에서도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훈련을 쌓게 하십니다. 우리는 자꾸 하나님의 손만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보고, 은혜 주시고 복 주시고 나를 좋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손에만 눈이 가고, 정작 하나님의 얼굴은 너무 게으르게 쳐다봅니다.
믿음은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먼저 바라볼 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가 샘솟듯이 나옵니다. 악수는 얼굴을 보면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 은혜와 긍휼이 많으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손을 잡는 것이지 손만 잡으면 안 됩니다. 눈물이 나고, 슬프고, 괴롭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이 정말로 강한 사람입니다. 눈물이 나면 사람은 안 보이고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워싱턴 주에 있는 휘트워스(Whitworth) 대학교에 제럴드 싯처(Gerald L. Sittser)라는 교회사 교수가 있습니다. 이 교수님에게는 아픈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어느 지방 교회에 초빙을 받아 온 가족을 태우고 가서 말씀을 전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맞은편의 음주운전 차량과 정면충돌을 해서 아내와 아이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분이 쓴 『하나님 앞에서 울다 : 상실을 통해 우리 영혼은 어떻게 성장하는가』(A Grace Disguised: How the Soul Grows Through Loss)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분은 아내와 아이를 잃고 10년이 지났는데도 그 슬픔이 조금도 가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눈물이 나지 않겠습니까? 슬프고 힘들 때 안 우는 사람이 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어려울 때 “난 괜찮아.”라고 말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붙잡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안 아픈 게 아니라 돌에 맞아서 죽을 뻔했지만 이튿날 다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이 주신 삶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바울에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연습을 시키셨습니다. 왜 바울을 아라비아 광야에 두셨습니까? 더위에 고생해 보는 것은 훈련이 아닙니다. 더위에 고생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훈련입니다. 추운데 밖에서 고생해야 훌륭한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알아야 좋은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군인들도, 운동선수들도 극한의 체험을 반드시 하게 합니다. 유격의 초점은 한계를 넘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준비한 모든 것은 반드시 한계를 만납니다. 우리 인생은 반드시 한계를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바울이 아라비아 광야를 통해서, 다소의 삶을 통해서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나님께서 훈련시키셨습니다.
믿음의 훈련을 통한 강함의 모습
1. 믿음은 우리 속사람을 강하게 합니다.
믿음은 우리 내면을 강하게 합니다. 뿌리가 밑으로 내려가듯이 믿음은 내 안에 깊이 뿌리내려야 합니다. 잔뿌리까지 쫙쫙 뻗어나가야 어떤 시련에도 뽑히지 않습니다. 바울은 항상 적이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바울을 해하려 하고, 죽이려 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세운 교회, 바울이 기른 제자들, 바울이 정성껏 섬겼던 사람들마저 바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바울에게 돌을 던지고, 바울을 얼마나 험담을 했습니까? 바울은 그것을 참고 견디고 이겨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그 안을 강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겉을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고린도후서 11장은 ‘바보장’으로 불립니다. 고린도 사람은 바울에게 은혜를 많이 받고 바울이 주는 말씀으로 인해서 성장했지만 늘 바울에 대해서 말을 많이 했습니다. 바울이 바보 같고, 어리석고, 말도 잘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자랑했습니다.
고후 11:24-27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강함은 힘으로 이겨서 강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려운 일을 만나도 속사람이 강하기 때문에 견디고 참아냅니다. 모욕과 수치를, 돌을, 수많은 것을 참아냅니다. 복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말 한마디를 하지 않습니다.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전도하기 위해서 그 사명을 붙잡고 다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에 약해지지 마십시오. 사람은 말 한마디에 파장이 생깁니다. 돌 하나가 떨어졌을 때 물결이 일어나고 그 물결이 끝까지 갑니다. 믿음의 사람은 파장이 없는 호수가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주님의 은혜의 파장, 은파(恩波)가 있어야 합니다. 절망의 파도, 근심의 파도, 미움의 파도, 모든 파도들은 잠재우고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어떠한 것도 이겨내고 견뎌내며 바울처럼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으면 내 안이 강해집니다. 그리스도를 밖으로만 섬기는 사람은 밖으로만 강한 척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주님을 모시고 살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안으로도 강건한 사람이 됩니다.
2. 믿음은 우리의 사명을 강하게 합니다.
바울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은 그가 당연히 죽은 줄 알고 시외로 끌어내어 버렸습니다. 옛날에는 성 외곽에 쓰레기를 버렸습니다. 쓰레기장에 누워 있는, 작고 마른, 강함은 다 사라져버린 바울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바울 앞에 모여서 얼마나 절망하였겠습니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때에 피투성이, 상처투성이의 바울이 깨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가장 놀라운 단어는 ‘이튿날 ’입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다음날 바울이 다시 주의 사명을 붙잡고 갔다는 것입니다. 아니 죽은 줄 알고 쓰레기장에 버렸는데 이 사람이 깨어나 이튿날 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적일뿐만 아니라 믿음이 가진 힘입니다. 믿음이 가진 힘, 그것이 기적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주는 일상의 기적을 만나야 합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기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보호해 주지 않아도 믿음이 있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무너진 곳에 너무 엎드려 있지 마십시오. 쓰러진 곳에, 넘어진 곳에 엎드려 있지 마십시오. 사랑하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여 일어나십시오. 우리의 삶이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명 있는 곳에 우리를 불러주십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사명으로 나와야 합니다. 우리가 사명으로 나오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새벽예배가, 저녁예배가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멋진 리더를 얼마나 환호합니까? 요즘은 정치인들도 이미지가 좋아야 한다고 가꿉니다. 바울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약한 사람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푯대를 향해서 뛰었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은 사명과 주님의 은혜로 가득 차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주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으로 인해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명을 가진 사람은 사명의 근육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사명이 있는 강건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귀한 일터, 맡겨주신 사업, 맡겨주신 작은 일이라도 열심히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이 바울과 같이 사명에 사로잡힌 믿음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믿음은 나의 강함을 통해서 남을 강하게 합니다.
바울이 갖고 있는 믿음의 능력은 혼자만 잘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의 강한 믿음을 통해서 제자들의 믿음까지 도 굳게 했습니다.
행 14:21-23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의 공통점은 바울을 죽이려는 집단이 있었던 곳입니다. 루스드라는 그가 돌을 맞았던 곳이고,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은 바울을 죽이려고 유대인들이 떠나온 곳입니다. 바울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가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습니다. ‘굳게 하다’라는 말은 ‘Strengthened’입니다. 힘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믿음의 강함을 갖고 있는 사람은 혼자서 믿음의 강함을 갖고 혼자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통해서 남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힘과 능력을 베풀어 주어야 합니다. 수많은 환난 속에 있는 사람들, 별의별 돌을 맞아서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전하여 그들이 믿음으로 살도록 하는 그 강함을 이 땅 가운데 세워가야 합니다. 여기서 ‘굳게 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피스테리조(episterizo)’입니다. 에피스테리조는 사도행전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행 15:32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행 15:40-41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견고하게 하고, 굳게 하는 것이 바로 이 Strengthened, 힘을 주고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주변 사람을 한 명이라도 실족하게 하면 너희가 연자맷돌에 묶여 바다에 던져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8:6, 막9:42, 눅 17:2). 주변 사람의 믿음을 약하게 하고 옆의 사람을 흔들면 주님이 기뻐하시는 주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의 믿음으로 인해서 주변 사람들이 강해진다면 그 사람은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도 주변 사람들에게 자꾸 권고하시고, 사랑하시고, 믿음으로 인도하시고, 주의 말씀을 전해서 그들이 강한 사람이 되도록 축복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말 중에 ‘헛똑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school smart(학교에서 배운 지식으로 사는 사람), book smart(책으로 읽은 지식으로 사는 사람)를 ‘헛똑똑이’라고 합니다. 국어사전에서의 정의는 ‘겉으로는 아는 것이 많아 보이나 정작 알아야 하는 것은 모르거나,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 ‘헛똑똑이’입니다. 세져야 하고 강해져야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 ‘헛강함’입니다. 남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강함, ‘헛강함’입니다. 우리 가운데 ‘헛부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남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헛부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능력이 많은데 자기만을 위해 쓰는 능력, ‘헛능력’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능력 있는 부자, 기업인, 의사, 변호사, 목사, 교사가 되어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나누어주는, 내 옆에 있는 사람이 견고해지는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22절을 이렇게 번역해 보았습니다. “바울이 제자들의 마음을 강하게 하면서 그들이 믿음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앞으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믿음은 쉽지 않습니다. 믿음생활을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길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쉬운 길이 아니라 유일한 길, 좋은 길, 복된 길입니다. 자꾸 쉬운 길로 매칭시키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어렵지만 가장 복된 길입니다. 이 길 외에는 가면 안 됩니다. 이 길에는 당연히 어려움이 있습니다.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쉽게 가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주의 종들에게 광야를 걷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워하셔서 광야에 넣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을 미워하셔서 광야를 헤매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훈련을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환난을 겪게 하신 것입니다. 환난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어렵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어려움을 겪기 위해서 어려움을 겪지 마시고, 잘 믿기 위해서 어려움을 지나가십시오. 그 모든 환난과 어려움과 고난과 핍박과 외로움의 시간 속에서 믿음을 갖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 터널을 지나가면서 믿음을 소유하고 나온 사람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진짜 금메달은 믿음입니다.
23절 말씀이 이어집니다.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장로와 집사의 역할은 요즘과 같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의 집사는 봉사를 위해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을 전하는 것에 전념하기 위해서, 헬라파와 히브리파로 나누어져 있는 과부들의 구제를 감당하기 위해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 집사를 택하여 봉사의 직분을 맡겼습니다(행 6:1-6). 진짜 안수집사는 봉사하는 집사입니다. 사도행전 시대의 장로는 지금의 목회자와 마찬가지로 말씀을 전합니다. 본문에는 장로들이 말씀을 갖고 나아가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을 택하면서 금식기도를 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귀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는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훈련, 환난의 훈련, 주님의 종의 훈련, 인내의 훈련, 금식기도의 훈련입니다. 본문의 금식기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금식기도가 아닙니다. 원어에는 ‘기도와 금식’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철저한 기도의 훈련, 금식의 훈련은 나를 낮추고, 나를 없애고, 나를 비우는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금식의 훈련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금식은 철저하게 내가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는 훈련입니다.
사람들 중에 타고난 강함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유전자로 결정되는 강함과 약함이 있습니다. 원하지도 않는데 강한 근육이 있고, 원하는데 약한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인생은 유전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약함과 강함뿐만 아니라 믿음이 주는 강함, 훈련이 주는 강함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훈련을 받는 사람은 안이 강하고 끝까지 강한, 주님이 주신 강함이 있습니다. 약한 부분들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약한 부분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많이 금식하시고 기도하십시오. 유혹에 약하면 유혹을 위해 기도하시고, 물질에 약하면 물질을 위해 기도하시고, 말에 약하면 말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약함을 위해서 기도할 때 주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강하게 만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얻는 방법
하나님의 능력(두나미스, dynamis), 그 능력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습니까? 능력은 영어로 POWER라고 합니다. 이 POWER를 통해 훈련해야 할 다섯 가지를 말하고자 합니다.
Pray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얻으려면 날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은혜를 주십니다.
Obey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순종에서 얻습니다. 노아는 배를 잘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배를 잘 만드는 사람을 찾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노아를 데려다 쓰신 것입니다.
Worship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마다 우리의 믿음이 깊어집니다. 예배를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365일 새벽예배, 주일예배를 잘 지키면 이것이 우리에게 능력이 됩니다. 명성교회는 예배하는 교회입니다. 이 예배는 끝까지 지켜져야 합니다.
Evangelize 전도, 선교입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셔서 권능을 받으면 가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행 1:8).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전도하지 않으면 그 능력을 가져가십니다. 전도하십시오.
Repent 회개입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여 주시고 전에 없는 주의 능력과 은혜를 더해 주십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 회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날마다 반복되는 POWER 훈련을 통해서 우리를 귀하게 세워주실 줄 믿습니다.
반복의 훈련
반복의 훈련이 중요합니다. 어느 사막 지역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물이 귀하기 때문에 샤워도, 설거지도 늘 최소한의 물로 한데 모아서 하였습니다. 다 돌려쓰고 난 마지막 물을 창밖으로 버렸습니다. 어느 날 놀랍게도 창밖 외진 곳에 꽃들이 활짝 핀 정원을 발견하였습니다. 메마른 우리의 심령일지라도,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은 땅일지라도 반복해서 믿음의 물을 부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포기하지 마시고 매일같이 믿음의 물을 부으십시오. 매일같이 주님 앞에 반복하는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 모레도, 일주일 뒤에도, 일 년 뒤에도,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반복되는 믿음의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믿음의 자리 : 지금 여기
제럴드 싯처(Gerald L. Sittser) 교수님의 책에 나오는 어느 유명한 부자 이야기입니다. 그는 얼마나 돈을 많이 벌었는지 사람들에게 떵떵거리며 살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그의 신앙은 그저 교회를 다니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삶에 회의가 왔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던 중 어느 성자의 소문을 듣고 고민을 풀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 성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나는 이제 모든 회사와 재산을 내려놓고 성자를 찾으러 떠납니다.” 부자는 기자회견에 모인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를 뒤로하고 기차에 오릅니다. 특실을 마다하고 일반실에서 자리를 찾다가 허름한 모습을 한 노인 옆에 마지막 하나 남은 빈자리에 앉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자는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드디어 기차는 성자를 만날 수 있다는 마을에 도착했고, 역시나 수많은 사람들이 마중 나와 있었습니다. 부자는 본인을 환영하는 장면을 상상하고 일부러 천천히 내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먼저 터져 나왔습니다. 이상하여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누군가 대답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우리 마을에 오시는 성자를 마중 나온 것입니다.” 부자는 놀라서 군중을 헤치고 성자가 누구인가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좀 전까지 옆에 앉아 있던 그 노인이었습니다. 부자는 조용히 성자를 따로 만나 물었습니다. “너무 부끄럽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잘 믿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자는 “집으로 돌아가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며 사십시오.”라고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주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는 곳은 특별한 장소가 아니라 바로 우리에게 주신 삶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뿌리가 깊어지고, 내가 만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내가 하는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의 대단한 일은 다른 대단한 곳이 아니라 지금 명성교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단기선교를 나가는 청년들에게 너무 크고 대단한 일을 기대하지 말고, 병자를 고치거나 뚫는 곳마다 우물이 펑펑 터지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기적을 바라지 말고, 선교지에서 살다가만 와도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꼭 이야기해 줍니다. 우리는 너무 업적에 매여 있습니다. 대단한 일을 이루어야,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구원해야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찬양대 구석에서 찬양만 해도 놀라운 믿음인 것입니다. 구역장으로 이름도 빛도 없이 섬기는 것, 교회학교 교사로 섬기는 것이 진정한 믿음의 자리입니다. 바로 여기가 믿음의 훈련의 장소이고, 여기서 믿음이 깊어져야 합니다. 다른 곳에 가서 대단한 사람들의 말씀을 듣는다고 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일을 해야만 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돌에 맞았지만 이튿날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항상
주님과 함께 걸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