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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 순교성지→ 배나드리 성지 →여사울 성지 →신리 성지→황무실 성지
26.2Km 15.6Km 6.1Km 10Km
13.배나드리 성지
배나드리는 예산군 삽교읍 북쪽 용동 3리 삽교천 가에
섬처럼 생긴 마을로 도리(島里)라고도 부르며,
홍수가 나면 사면이 물바다가 되어 배를 타고 건너 다녔으므로 ‘배나드리’라 하였다.
이곳은 삽교에서 아주 가까운 곳(1.3km)이지만 삽교천으로 인해
물이 불어나면 배를 타고서야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비밀리 신앙을 지키기에 적당한 마을이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명칭 또한 바로 이런 지형적 위치에서 연유되었다.
1817년 10월 이곳에 밀고자의 소행으로 여겨지는 박해의 손길이 뻗쳐
해미의 포졸들이 나타나 신자들을 모두 체포해갔다.
체포되어 간 신자는 20-30명가량인데 대부분은 배교하여 석방되었으며,
민 첨지 베드로와 형수 안나, 송 첨지 요셉, 손연욱 요셉, 민숙간 등은
혹독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키다가 옥사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손연욱의 부친 손여심은 오랫동안 해미 옥에 갇혀 있다가
10년 뒤인 1827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 후 1880년대 초까지도 신자가 한 집도 없었으니
아마도 배교하여 석방된 신자들은 다른 지방으로 이주하였을 것이라 생각되며
또한 그때의 상황이 얼마나 참혹하고 철저하였었나를 짐작케 한다.
민 첨지는 결성(結成) 출신으로 목천 소학골(지금의 천안시 북면 납안리)에서 살다가
배나드리로 이주하였고, 손연욱은 홍주 출신인 것으로 보아 배나드리는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모여 이룩한 교우촌으로 추정된다.
현재 삽교 성당 관할 구역인 용동 3리의 배나드리 교우촌 인근 용동 2리에는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가 있다.
이곳은 본래 예산 본당 관할의 주례 공소 강당이 있던 곳이었다.
1967년 예산 본당에서 삽교 본당이 분가되면서 공소가 폐지되고 강당이 헐리게 되자
공주에서 체포되어 해미에서 순교한 인언민 마르티노 순교자를 기념하는 사적지로 조성하였다.
용동리는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 추진 중인 125위의 시복시성 대상자(하느님의 종) 중
한 명으로 선정된 인언민 마르티노 순교자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순례도장을 찾지못해 삽교성당으로 갔다.
사무장 말이 녹색문옆에 있다고 하여 난감해했는데 다행히
삽교성당에도 순례도장이 있어서 찍을 수 있었다.
삽교성당을 방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14. 여사울 성지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 1752-1801년)의 생가 터가 있는 여사울은
신례원 본당의 공소를 거쳐 2008년 성지본당으로 지정되었으며,
주민의 상당수가 천주교 신자로 구성돼 있는 선교의 요람이다.
'내포(內浦)'라 함은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삽교천(揷橋川)과 무한천(無限川)의 두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지역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이 지역은 이존창을 비롯해 김진후(金震厚), 성 김대건 신부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해 낸 곳이다.
김대건의 출생지인 합덕, 이존창의 출생지인 여사울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본당들
그리고 해미, 덕산 등의 순교자들이 이 지역에 산재해 있다.
농민 출신으로 충남 예산군 여사울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초기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초기 교회의 가성직단(假聖職團)의 일원이 되어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 선교의 사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은 물론 내포 지방 일대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훗날 '내포의 사도'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 신부 영입을 위해
윤유일(尹有一), 지황(池璜) 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을 찾게 하여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그는 다른 수많은 천주교인들과 함께 관헌에게 붙잡히게 된다.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은 그로 하여금 배교의 쓴맛을 보게 한다.
그 뒤 양심의 가책으로 내포 지방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사하여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교세가 커져 갔고
이에 따라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집안도 그의 전교로 입교했는데,
김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며, 최양업 신부도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이다.
더욱이 오늘날 조선 교우의 거의가 그가 개종시킨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전교 활동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1795년 말에 이르러 그는 다시금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고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게 된다 .
그리고 마침내 그는 1801년 다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정약종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公州)로 호송되어 황새 바위에서 50세를 일기로 참수된다.
내포 지역과 여사울 성지의 중요성을 인식한 대전교구는
교구의 뿌리인 여사울 성지를 개발하기 위해 2002년부터 신례원 성당을 중심으로
성지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주변 부지를 매입하고 진입도로를 넓히는 한편
십자가의 길과 강당을 추가로 조성하였다.
2008년 1월 성지본당으로 지정되고, 12월 22일 '예산 여사울 이존창 생가터'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되면서부터 성역화를 본격 추진하여
생가 터 앞 강당 자리에 이존창 사도 기념성당을 신축하고,
기존의 공소 건물 뒤에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립하였다.
스페인풍의 기와를 얹은 새 성당은 2010년 10월 16일 봉헌식을 가졌다.
15. 신리 성지
충청도 내포 지방으로 조선 천주교 초창기부터 마무리 박해 때까지 신앙의 요람지로서
많은 신자와 순교자들을 끊임없이 배출해 낸 지하 공동체가 있었던 곳이다.
이 공동체는 신리 성지를 중심으로 한 거더리, 세거리, 소덜, 강계, 양촌 등 주변 마을이었다.
성지는 지금도 신리란 이름과 함께 남아 있다.
신리 성지는 20여 평 되는 목조 건물로 1815년에 지은 초가집이었다.
이곳에서 배교자 이선이(李先伊)의 밀고에 의해 1866년 3월 11일 안 다블뤼 주교가 잡힘으로써
수 많은 무명, 유명의 순교자를 내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1863년 안 주교 부재시 이웃집에 난 불이 옮겨 붙어 귀중한 자료들이 다 타 버렸다.
지금도 그 때 불에 탄 서까래, 대들보가 그대로 남아 있다.
교난 중에 이 마을의 부호였던 박경래의 소유가 되었다.
1927년 합덕 본당의 주임신부였던 페랭(Perrin, Philipe, 백 비리버 문필) 신부가 이 집을 사들여
서울교구 부주교로 승품하신 원 아드리아노 라리보 주교님께 주교 승품 기념품으로 바쳤다.
그러나 건물만 교회 소유가 되고 대지는 여전히 박경래의 소유였는데,
순교기념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박경래가 대지 전부를 천주교 유지 재단에 기증하였고
후에 그 자신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초가였던 이 집은 1954년 성모 성년 기념으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벽, 기둥, 서까래, 대들보, 주춧돌은 원래 집에 있었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1964년 다시 수리를 하면서 상량문을 다시 써서 올렸는데 대들보의 상량문에는
『天主降生 1815年 嘉慶 21年 丙子 2月 18日 辰時 上樑 (1954年 祝聖),
1964年 3月 23日 修理, 新里公所, 人間眞理 在於永生』이라고 씌여있다.
당시까지도 신리 공소는 초가집이었으나, 훗날 함석 지붕을 새로 이었다가
2003년 10월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2004년 4월 원형대로 초가집으로 준공식을 갖었다.
이곳은 다블뤼 주교가 1845년 10월 12일 김대건 신부와 함께
전라도 강경 황산포에 첫걸음을 내딛은 후
1866년 갈매못에서 순교하시기까지 21년간 지내셨던 장소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으로 조선 교구 제 5대 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안 주교는
1845년 7월 하순 상해로 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 김대건 신부와 함께
그 해 10월 12일 전라도 강경의 황산포(黃山浦)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그는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1866년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됐다.
이 집에서 다블뤼 안 주교와 여러 신부들은 신유박해와 기해박해 그리고 병오박해 당시
순교한 신부 등과 평신도들의 행적을 조사하여 한국 가톨릭 교회사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의 편찬이었다.
그는 이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교구장으로부터 위촉받고 1857년부터
이를 위해 새 자료를 발굴해 그것을 프랑스어로 옮겼으며
목격 증인을 찾아 증언을 수집하는 데 힘썼다.
특히 1859년을 전후해 그는 윤지충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 본부로 보내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관한 비망기를 저술해
1862년 모두 파리로 보냄으로써 후세의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1863년에 그의 집에 불이 나 조선말과 한문으로 된 치명 일기와 주석책 등
귀중한 자료가 모두 타 버렸기 때문에 이 책은 한층 가치 있는 것이 됐다.
바로 이 집에서 수집, 기록한 순교사 및 역사 자료 7권이
1862년 10월 홍콩의 리부아 신부를 통해 파리로 전해져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두 권이 나오게 된 것이다.
낮이면 문을 잠그고 숨어서
「한불사전」, 「한글문법」, 「불한사전」, 「달레의 천주 교회사」의 기초가 된
자료수집, 문헌 번역, 순교자 행적을 기록하였다.
여사울이 초기 교회의 못자리였다면, 신리 일대는 박해 후기의 사적지였다.
내포 공동체는 거듭되는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끈질기게
복음의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언제나 새로운 지도자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거더리(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출신의
성인 손자선 토마스를 기억하고 있다.
1866년에 공주 관아에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한 분으로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 거더리와 붙어 있는 마을이 바로 신리이다.
신리 무명 순교자의 묘
손자선 성인의 선산에서 1972년과 1985년 2차에 걸쳐서 파묘하여
이장한 무명 순교자들의 묘다.
충남 당진군 합덕읍에서 신리 성지 못 미쳐 궁리 정류소가 있고
여기에서 오른쪽 얕은 언덕길로 약 500m 올라가면
합덕읍 대전리에 무명 순교자의 묘소가 있다.
무명 순교자 묘(I)에는 목이 없는 32구의 시신을 6개 봉분에 합장 이장하였고,
무명 순교자 묘(II)에는 손자선의 가족묘로 표시하고
14구의 시신을 14개 봉분에 이장하였다고 표시되어 있다.
1972년에 손자선 성인의 선산(합덕읍 대전리 소재)이었던 산 일부가 개발되어
94,400평 이 과수원으로 개발되었는데, 그때 32기의 연고자 없는 고총이
파묘되었을 때 묘마다 목이 없는 시신이 나왔다고 목격자들은 전하고 있다.
또한 묘마다 묵주가 나왔는데 그 양이 시골 바가지로
한 바가지 정도나 될 만큼 많았다고 한다.
발굴된 32기의 유해는 그 당시 강계에 살던 손석윤 씨가
10여 명의 교우를 데리고 와서 사과 상자 4개에 담아서 지고
그곳에서 1km 떨어진 어떤 공동묘지에 일렬횡대로
6개 봉분에 나누어 합장하였다고 한다.
이 이장 장소가 합덕읍 대전리 소재의 중상부에서 서남향에 있는
무명 순교자 묘(I) 6기의 분묘다.
아마도 32기의 묘는 손씨 집안의 순교자 묘이거나
박해기에 살던 손씨 가족들의 묘가 아닐까 생각된다.
실제로 신리(거더리) 지역에서는 ‘손자선 성인의 선산에 있는 수십 기의 묘가
손씨 가문의 치명자라는 구전이 내려왔다고 한다.
32기의 유해들을 6개의 봉분에 합장한 이유는
각각의 유해를 구분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1985년 4월에 또 그 산 일부인
대전리 상개(대전리 120-8)가 개발되어 공장이 들어섰기 때문에
그때에도 14기가 파묘되었는데, 역시 십자가와 함께 유해들이 나왔다.
14기의 묘는 서종순 씨의 작업 청탁으로
김병국 씨가 동료 김영기, 최동철 씨와 이장하였는데,
14기의 묘는 구전으로 전하는 바 손씨 치명자 가족묘로 전해 오고 있다.
무명 순교자 묘(II)에는 이 14기의 묘가 그대로 이장되어 있는 것이다.
◆ 순교자
◆ 성 손자선 토마스(1838∼1866)
손자선은 충청도 홍주 거더리 마을의 3대째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다.
확실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무슨 이유로 덕산 관아로 갔다가 체포되었다.
관장은 손자선을 옥에 가두어 고문하며 배교를 강요했지만
굴하지 않자 그를 해미로 보냈다.
해미에서 두 다리가 부러질 만큼 심한 고문을 받고도
신앙을 지킨 손자선은 결국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1866년 3월 30일에 교수형을 받아 23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16. 황무실성지
충청도 내포 지방은
조선 천주교 초창기부터 마무리 박해 때까지 신앙의 요람지로서
많은 신자와 순교자들을 끊임없이 배출해 낸 지하 공동체가 있었던 곳이다.
면천의 황무실 교우촌도 역시 오래된 교우촌으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탄생시킨 곳이다.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를 자기 집에 모신 적이 있는
순교자 이보현(李步玄, 1773~1800, 프란치스코)은 이곳 황무실 출신이다.
지금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황무실 교우촌의 순교자는
박해 시에 순교한 송 안토니오를 비롯한 9명 외에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고
무명 순교자로서 내포 지방 산야에 잠들고 있다.
다만 그곳을 사목 중심지로 해서 활동했던
성직자들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만 남아 있다.
알려진 황무실 출신 순교자로는 병인년(1866년) 공주에서 교수형을 당한
송 안토니오를 비롯하여, 병인년 해미에서 순교한 신 베드로(85세),
신 아우구스티노(23세), 정묘년(1867년) 해미에서 순교한 표 안드레아(36세),
무진년(1868년) 5월 30일 해미에서 생매장 당한 방 마리아(35세)와
역시 해미에서 순교한 그의 시어머니 박 바르바라(74세),
같은 해 공주에서 순교한 조군서 등이 있다.
황무실은 매스트르(Maistre, 李, 1808~1857, 요셉) 신부와
랑드르(Landre, 洪, 1828~1863, 요한) 신부가 전교 도중 1857년 12월 20일과
1863년 9월 15일에 각각 병사하여 뒷산에 나란히 안장되었던 곳이다.
이 매스트르 신부는 성 김대건(金大建, 보명 芝植, 1821~1846, 안드레아),
최양업(崔良業, 鼎九, 1821~1861, 토마스),
최방제(崔方濟, 과출, 1820?~1837, 프란치스코) 신학생의 스승이었다.
1852년 8월에 입국한 매스트르신부는 다음해(1853년)에 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자
베르뇌 주교가 입국할 때(1856년)까지 임시 감목대리로서 활동하였으며,
베르뇌 주교가 입국한 이후 새로운 사목지인 충청도 해안에서 경상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담당하여 활동하다가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황무실에 묻혔다.
매스트르 신부가 1857년에 선종하고, 1861년 랑드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여
하부 내포(충청도 해안) 지역을 담당하게 되고,
랑드르 신부는 이후 황무실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활동하다가
1863년 9월 15일에 선종하여 그곳에 안장되었다.
황무실에 있던 랑드르 신부의 무덤도 매스트로 신부의 무덤과 함께 1970년 발굴되었으며,
그 유해는 합덕 성당 구내로 옮겨졌다가 훗날 대전교구 성직자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그 이후 성 위앵(Huin, 閔, 1836~1866, 마르티노) 신부가 1865년 조선에 파견되어
내포에 머물면서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 안토니오) 주교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후 황무실을 사목 근거지로 하고 전교하였다.
위앵 신부의 1865년 10월 19일(2통), 10월 29일, 12월 12일 서한이
황무실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아 황무실이 위앵 신부의 사목 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황무실은 당진시와 예산군의 경계에 걸쳐있는 마을로
어느 한 곳을 주소지로 확정하기가 곤란하다.
그간 충남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로 주소지를 사용하였으나
2011년 8월 30일 대전교구 성지위원회 추계 회의에서는 박해시대에 사망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었던 ‘충남 당진시 합덕읍 석우리’로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