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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으로 보는 세계사 한 장면] (36) 줄리오 바르젤리니의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의 신망을 거부하는 사보나롤라’
종교 개혁의 불씨 남긴 두 인물
- 줄리오 바르젤리니,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의 신망을 거부하는 사보나롤라’(1897년), 브라스키 궁, 로마 박물관 소장.
1492년은 인류 역사는 물론 교회사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던 해였다. 우선, 스페인의 상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무슬림의 마지막 보루던 그라나다를 정복함으로써 781년간 스페인 내(內) 무슬림 지배를 종식시키고 통일을 이루었다.(1월 2일) 이사벨라와 페르난도 부부는 르네상스 시대의 신흥 군주로 지위를 확립했고, 같은 해에 로드리고 보르자가 알렉산데르 6세 교황(재임 1492~1503)이 되었다.(8월 11일) 정치·지리·종교적인 통일을 이룩하고, 새로 국가의 비상을 꾀하던 이사벨라-페르난도 정부는 콜럼버스(Cristoforo Colombo, 1450~1506)를 후원하여 신대륙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10월 12일)
반면, 이탈리아의 상황은 르네상스를 크게 후원하고 견인했던 피렌체의 로렌조 데 메디치(마니피코)가 사망했고(4월 8일), 인노첸시오 8세 교황이 사망했다.(7월 25일) 이후 피렌체는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가, 로마 교회에는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 등장하면서 종교 개혁의 불씨를 남겼다. 이번에는 이 두 인물, 사보나롤라와 알렉산데르 6세에 주목하기로 한다.
메디치 가의 몰락과 사보나롤라의 부상
페라라 출신의 사보나롤라는 1475년 도미니코 수도회에 입회하기 전에 인문주의, 철학, 의학을 공부했고, 볼로냐에서 7년간 신학을 공부했다. 높은 학식과 금욕적인 생활로 수도자로서 모범을 보였고, 성경을 강의했다. 그의 강의는 쉬운 언어로 간결하면서도 깊이가 있어 많은 사람이 감동했고, 설교를 듣기 위해 대중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1480년 피렌체의 지도자로 있던 로렌조 마니피코는 도미니코 수도회 측에 요청하여 사보나롤라를 피렌체로 불러 성경 강의를 부탁했다. 그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고, 이에 그의 추종자들을 일컬어 ‘울보들(Piagnoni)’이라고 불렀다. 명성은 날로 높아졌고, 이런 대중적인 인기에 힘입어 공화주의 정치사상을 설파하며, 당대 거의 모든 정치 지도자를 공격했다. 자신을 피렌체로 부른 로렌조 마니피코는 물론, 알렉산데르 6세 교황, 밀라노의 루도비코 일 모로 공작, 프랑스 샤를 8세 국왕 등 가리지 않고 비판했고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중 가장 심한 공격의 대상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로렌조 마니피코와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었다.
로렌조 마니피코에게 돈으로 예술을 부추겨 사치와 허영을 시민들에게 주입해 타락하게 했다고 비난했다. 마니피코는 죽음이 임박하여 사보나롤라의 말대로 하느님의 심판이 두려워 어떻게든 용서를 청하고자 했으나, 사보나롤라는 이를 끝까지 외면하고 말았다. 이것은 메디치 가문이 거의 한 세기 동안 도미니코 수도회와 맺은 관계에 대한 배신이기도 했다. 이에 메디치가를 추종하던 팔레스키(Palleschi, 메디치의 상징이 빨간 공 5개가 박힌 거라고 하여 ‘공’을 의미하는 palla에서 나온 말로 ‘메디치 추종자들’이라는 뜻이다)의 분노를 샀다. 훗날 사보나롤라가 몰락할 때 가장 앞장섰던 사람들이 팔레스키들이었다.
마니피코가 죽고 그의 아들 피에로가 피렌체의 통치자가 되었다. 1494년 샤를 8세는 밀라노를 점령하고 나폴리로 향하면서 피렌체로 진격해왔다. 피에로는 전쟁을 피하고자 샤를 8세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 피렌체 성문을 열어주었다. 피렌체 시민들은 굴욕적인 항복에 분노했고, 메디치 가문을 추방했다. 메디치 가문이 몰락한 후, 피렌체의 정치는 깊은 혼란에 빠졌고, 시민들은 그간 새로운 정치를 주장한 사보나롤라에게 정권을 맡겼다.
이후 피렌체에서 화려한 색깔의 옷은 금지되고, 가발, 향수, 미술품, 고대의 필사본 등을 사고파는 것도 전면 금지되었다. 사보나롤라의 정치적인 영향력은 정점으로 치달았고, 1497년 2월, 사순절을 앞두고 시뇨리아 광장의 장작더미에서는 ‘허영의 화형식(fal delle vanit)’이 진행되었다. 엄청난 양의 고서(古書)와 미술품이 많은 귀금속과 함께 불에 타 사라졌다.
알렉산데르 6세 교황과 사보나롤라의 날선 공방
당시 교회를 이끌었던 알렉산데르 6세 교황도 사보나롤라의 비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르네상스 교황들 가운데 가장 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소재가 될 만큼, 한 마디로 끝내주는 교황이었다. 외교와 정치, 행정에는 탁월한 능력을 갖추었지만, 종교 지도자로서 호색과 족벌주의, 개인적인 야망이 너무 커서 늘 입방아에 올랐다. 여러 여성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두었고 그들에게 온갖 특혜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자녀들은 당대 최고의 권력가들과 교류하며 높은 직책을 얻거나 혼인하여 부와 명예를 누렸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체사레 보르자, 루크레치아 보르자 등은 모두 그의 자녀들이다. 라파엘로가 그린 ‘유니콘을 든 여인’에 등장하는 줄리아 파르네세도 알렉산데르 6세의 정부(情婦) 중 한 사람이다.
이런 교황에 대해 사보나롤라는 가만있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교황은 부도덕했고, 로마 교회는 타락했다. 그런 교회는 곧 하느님의 징벌을 면치 못할 것이고, 징벌이 지나가야 새로워질 것이며, 이런 일은 빨리 이루어질 거라고 예언했다. 샤를 8세가 이탈리아로 쳐들어오자 많은 사람은 사보나롤라의 예언이 적중했다며 그를 더욱 영웅시했다.
1495년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은 사보나롤라에게 설교 금지 명령을 내렸고 사보나롤라는 거부했다. 재차 직접 로마에 와서 주장하라고 명했으나 사보나롤라는 건강을 핑계로, 또 로마로 가는 도중에 불상사가 생길까 봐 그것마저 거절했다. 이에 교황은 사보나롤라에게 불복종의 죄를 물어 파문했다. 이런 교황을 사보나롤라는 더욱 거세게 비난했고 교황은 피렌체시에 사보나롤라를 로마로 보내거나 설교를 못 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이를 어길 시 피렌체시가 통째로 전례 금지를 당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사보나롤라는 시의 명령에도 불복했고, 결국 시 법정은 그에게 유죄 선고를 내렸다. 1498년 5월 23일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서 사보나롤라는 화형에 처해졌고 추종자들에게 혁명의 불씨를 조금도 남기지 않기 위해 유해는 갈아서 아르노 강에 뿌렸다.
전통 예술에 현대 예술 접목
소개하는 그림은 줄리오 바르젤리니(Giulio Bargellini, 1875~1936)가 그린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의 신망을 거부하는 사보나롤라’(1897년)이다. 나보나 광장 근처 브라스키 궁전의 로마 박물관에 있다.
피렌체 출신 화가인 바르젤리니는 피렌체 국립미술원에서 고전 미술을 공부하고, 로마로 이주하여 모렐리(D. Morelli), 미케티(F. P. Michetti), 피아첸티니(M. Piacentini) 등의 영향을 받으며, 사실주의와 라파엘로 이전의 상징주의에 눈을 떴다. 이때부터 이탈리아의 전통 예술에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에서 보는 현대 예술을 접목하는 시도를 했다. 그 시기에 ‘부활’, ‘사보나롤라’와 같은 역사적이고 종교적 주제의 작품을 남겼다. 1913년 로마 베네치아 광장에 있는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의 반원형 천장 장식을 위한 공모전에서 우승하여 명성을 얻었다. 여기에서 바르젤리니는 리찌(A. Rizzi)와 함께 법, 가치, 평화, 일치를 표현한 대형의 4개 모자이크를 완성했다. 기념관의 장엄함에 어울리는 표현 양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로마에서 여러 궁전과 공공건물에 프레스코화들을 많이 남기고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그림에서 우측 그룹의 사람들 앞에 흰 수도복에 검은 망토를 입은 통통한 사람이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이다. 그 옆에 선 어린 부제의 손에는 추기경의 옷이 들려져 있다. 교황은 사보나롤라에게 추기경직을 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보나롤라는 이를 거부하고 방을 나가고 있다. 눈치를 보는 교황과 도도하게 바라보는 사보나롤라의 시선이 대조적이다.
무엇이건 너무 강하면 부러지는 법이다. 메디치가와 교회를 너무 오랫동안 적으로 돌렸고, 굽힐 줄 모르는 사보나롤라의 태도와 막상 그가 지휘봉을 잡은 정치는 실망스러웠다. 모든 것이 금지된 경제는 위축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설교에 눈물 흘리던 시민들은 냉정했다. 사보나롤라를 통해 공화주의에서 ‘신정정치’까지 여정을 보며 더 세속적이고 보수적인 정치 모델이 만들어졌고, 존 위클리프, 얀 후스에 이어 루터의 종교 개혁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 되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7) 오라스 베르네의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전 설계를 명하는 율리오 2세 교황’
걸작 성 베드로 대성전을 만든 ‘르네상스 주역들’ 한 자리에
- 오라스 베르네,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설계를 명하는 율리오 2세 교황’, 1827년, 루브르, 프랑스 파리.
권력가 율리오 2세 교황과 어지러운 정세
말 많고 탈 많은 알렉산데르 6세 교황(보르자)의 뒤를 이은 사람은 줄리아노 델라 로베로 곧 율리오 2세 교황(Giulio II, 재임 1503~1513)이었다. 율리오 2세는 선임 알렉산데르 6세를 몹시 싫어했다. 공공연하게 “나는 보르자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율리오 2세도 만만치 않기로는 오십보백보였다. 알렉산데르 6세가 호색가였다면, 율리오 2세는 권력가였기 때문이다.
율리오 2세의 가문 ‘델라 로베레’는 대대로 전사 가문이다. 알렉산데르 6세 시절, 원래 교황령이었던 땅을 자신의 영지로 만들고 아들 체사레 보르자를 공작으로 앉힌 적이 있었다. 그곳은 이탈리아 북부 로마냐 지역인데, 율리오 2세는 교황이 되자마자 체사레 보르자를 내쫓고 영지를 도로 빼앗아 왔다. 그러나 일부 도시들이 그 틈을 타 자치권을 들고 나오며 베네치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베네치아는 나름의 속셈이 있어 이를 수용했고, 리미니, 파엔차 등 몇 개 도시들이 베네치아로 넘어갔다.
율리오 2세는 원래 교황령이었음을 내세워 반환을 요구했으나 베네치아가 이를 거절하자 탈환하기 위해 프랑스의 루이 12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로 구성된 반(反)베네치아 동맹 곧 ‘캉브레 동맹(Ligue de Cambrai)’을 조직했다. 이 동맹은 1508~1516년, 유럽의 국제 정세를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오로지 전쟁을 위한 동맹이었기 때문에 ‘캉브레 동맹 전쟁(Guerre de la Ligue de Cambrai)’으로 알려졌다. 동맹 초기에는 원래 의도대로 베네치아에 넘어간 영지들을 찾아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후 율리오 2세와 루이 12세간 관계가 틀어지면서 1510년, 사실상 동맹은 해체되었다.
그런데 율리오 2세 교황이 이번에는 프랑스에 맞서,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었다. 베네치아와 율리오 2세간 동맹은 ‘신성 동맹(1511~1513)’이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잉글랜드, 구 스위스 연방까지 가세하여 확장되었다. 그 결과 1512년,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리품을 분배하는 문제로 베네치아와 교황이 합의를 보지 못하자, 이번에는 베네치아가 동맹을 깨고 프랑스와 친선을 맺었다.
이렇게 어제의 아군이 내일의 적군이 되고, 친선과 배신이 요동치는 속에서 ‘신성 동맹’에 한번 가입하여 교황 편에 섰다가 끝까지 교황 편으로 남은 국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구 스위스 연방(Ancienne Confdration suisse)이었다. 오늘날 스위스의 전신이 되는 국가다. 율리오 2세의 삼촌이었던, 식스토 4세 교황(재임 1471~1484)은 헬베티아 연방(Confederazione Elvetica, 구 스위스 연방의 전신)과 동맹을 맺어 교황 호위를 맡겼었다. 알렉산데르 6세 시절 요란한 교황 때문에 스위스 용병들은 프랑스에 맞서, 교황 영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반발에 맞서, 심지어 신성 로마 제국 때문에 장화 반도에서 일어나는 여러 세력에 맞서 항상 최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그런 역사를 잘 아는 율리오 2세는 교황 즉위 직후, 신변 보호를 구실로 ‘교황청 근위대’를 정식 창설했다. 스위스 연방과 체결하여 첫 용병대를 요청한 것이다. 1506년 1월 22일 폰 시레넨(Kaspar von Silenen, 1506~1517)을 지휘관으로 한 150명의 스위스 용병이 포폴로 성문(Porta del Popolo)을 통해 처음으로 로마에 공식 입성했다. 율리오 2세는 이들에게 ‘교회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내렸다. 이런 인연으로 스위스 연방은 교황과의 신뢰를 중시했다.
예술과 문학을 후원한 교황
한편, 로렌조 마니피코의 사망과 무능한 그의 아들 피에로가 샤를 8세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피렌체 성문을 열어주었다고 하여 피렌체에서 쫓겨난 이래, 메디치 가문은 18년간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런데 1511년 베네치아와 교황 간 ‘신성 동맹’으로 이탈리아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프랑스의 루이 12세가 공의회를 소집하여 교황의 권력을 제한시키려고 했다. 거기에 손을 들어준 것이 피렌체였고, 피사에서 반(反)교황적인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뒤끝 작렬인 율리오 2세가 이를 가만히 둘리가 없었다. 피렌체를 응징하기로 하고 그의 중요한 영지 프라토(Prato)를 쳤다. 피렌체에서 그동안 숨죽이고 있던 메디치 가문의 지지자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 덕분에 교황군을 지휘하던 조반니 데 메디치 추기경(훗날 레오 10세 교황)은 피렌체에 무혈 입성하여 피렌체의 통치권을 회복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율리오 2세가 이렇게 항상 싸움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역대 어떤 교황보다도 예술과 문학을 즐기고 후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피렌체 르네상스를 로마로 옮긴 장본인이고, 그의 재임기에 브라만테(1444~1514),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모두 바티칸에 와서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 대성전을 설계했고,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화 ‘천지 창조’를 그렸고, 라파엘로는 바티칸 박물관 내 ‘라파엘로의 방들’을 그렸다.
율리오 2세는 화끈하고 솔직한 교황이었다. 그의 화끈한 면 때문에 조용할 날이 없었지만, 솔직한 면 때문에 역사가 제대로 기록되기도 했다. 볼로냐를 탈환(1506년)하고, 1년 전에 자신의 영묘 건설 문제로 틀어졌던 미켈란젤로를 볼로냐에서 재회하여 자신의 동상 제작을 의뢰했다. 그때 미켈란젤로는 손에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을 제안했으나, 율리오 2세는 성경 대신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해 달라고 요구했다. 자신은 학자가 아니라 전사 집안 출신이고, 실제로 전사 교황이라는 것이다.
화가 가문, 19세기 당대 최고의 화가
소개하는 그림은 루브르에 있는 작품으로 오라스 베르네 (Horace Vernet, 1789~1863)가 그린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전의 설계를 명하는 율리오 2세 교황’(1827)이다. 오라스 베르네는 프랑스인 화가며 최초의 사진 예술가였다. 그의 부친 샤를 베르네(Carle Vernet)도 석판화를 많이 그린 화가였고, 조부 클로드 조제프 베르네(Claude Joseph Vernet)도 회화와 판화로 이름을 떨친 화가였다. 그러니까 오라스는 가업을 이은 화가였다.
오라스는 일찌감치 로마에서 아카데미 프랑세즈 원장을 지냈고, 1855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방 전체를 자신의 그림으로 채워 금메달을 받기도 했다. 그 결과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이름을 올렸다. 19세기 프랑스의 비평가 생트뵈브(Charles Augustin Sainte-Beuve)는 그를 두고 “재치 있고, 사랑스럽고, 본성이 바르고 정직하며 충직하다. 활기가 있으면서도 균형이 잡혀 있다”라고 평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가장 명예로운 ‘레지옹 도뇌르(Lgion d’honneur)’ 훈장을 받고 1863년 74살에 사망했다. 파리, 몽마르트르 공동묘지에 묻혔다.
율리오 2세의 교황궁에는 같은 시기에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있었다. 1508년 64살의 브라만테는 율리오 2세에게 두 사람을 천거했다.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였다. 그는 라파엘로는 동향인이라는 이유로 편애했지만, 미켈란젤로는 싫어했다. 그런데도 천거한 이유는 프레스코화를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미켈란젤로를 엿 먹이기 위해서였다. 그때 라파엘로는 25살이었고, 미켈란젤로는 32살이었다. 브라만테는 밀라노에서 활동할 때 스포르차 가문의 신망을 얻어 다빈치를 천거하여 명작을 남길 기회를 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르네상스 삼총사들은 어떤 식으로든 브라만테와 인연이 있는 셈이다.
그림 속으로
작품에서 수염을 기른 율리오 2세가 의자에 앉아 있고, 그 앞에서 브라만테가 성 베드로 대성전 설계도를 들고 설명하고 있다. 브라만테 오른쪽에는 젊은 미켈란젤로가 있고, 왼쪽 설계도 앞에는 잘생긴 젊은 라파엘로가 자기가 그리던 ‘엘리오도로의 방’에 있는 ‘레오 대교황과 아틸라의 만남’ 스케치에 오른손을 얹고 있다. 그 밑에 의자와 왼쪽 끝에 등을 보이고 앉은 사람의 의자에 새겨진 교황 문장을 통해 지금 이 공간이 교황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입을 꾹 다물고 설계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브라만테의 설명을 경청하는 교황과 그런 교황의 태도에 주목하는 미켈란젤로의 표정이 눈길을 끈다. 율리오 2세의 성 베드로 대성전 신축은 결국 이 세 사람의 업적으로 이루어졌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8) 파울 투만의 ‘레오 10세 교황의 파문 교서를 불태우는 마르틴 루터’
베드로 대성전 건립 자금 뒷거래가 촉발한 종교 개혁의 바람
- 파울 투만, ‘레오 10세 교황의 파문 교서를 불태우는 마르틴 루터’, 1872년, 바르트부르크성 박물관, 독일 튀링겐.
율리오 2세 교황의 뒤를 이은 사람은 레오 10세(재위 1513~1521)였다. 메디치 가문 로렌조 마니피코의 셋째 아들 조반니가 제217대 교황이 된 것이다. 마니피코의 똑똑한 아들로 정평이 나 있던 조반니는 13살에 인노첸시오 8세 교황으로부터 부제급 추기경으로 선임되었으나, 부친이 사망한 이후 가문의 쇠퇴와 함께 로마를 떠나 유럽을 돌아다녔다. 힘든 시절을 견문을 넓히는 기회로 삼은 것이다.
1500년 5월 조반니는 로마로 돌아왔고, 알렉산데르 6세 교황은 그를 환대했다. 그러나 1503년 율리오 2세가 새 교황으로 즉위하면서 메디치가의 추기경들을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1508년부터 재개한 ‘캉브레 동맹 전쟁’ 중 1511년 8월 교황은 돌연 병에 걸렸고, 그때 자신의 사후 콘클라베(교황 선거)가 어떻게 진행될지를 예측하게 되었다. 건강은 회복한 율리오 2세는 1511년 10월 북부 이탈리아 로마냐 지방 특사로 조반니 추기경을 임명했다. 조반니는 교황군을 이끌어 로마냐 지방을 평정하고, 피렌체에서 권력을 회복했다. 메디치가는 다시 피렌체에 입성했고, 조반니는 율리오 2세의 뒤를 이어 레오 10세 교황이 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 사업과 비용 마련 고심
레오 10세는 율리오 2세가 시작한 많은 일을 그대로 떠안아야 했다. 캉브레 동맹을 종결하고, 제5차 라테란 공의회(1513~1517)를 열어 피사 공의회파 이단을 종식하며, 이제 막 시작한 성 베드로 대성전 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율리오 2세가 궁정에서 만났던 르네상스 예술가 세 명의 운명도 갈렸다. 라파엘로는 여전히 라파엘로의 방들을 그리고 있었고,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화 ‘천지 창조’를 완성하고 델라 로베레 가문과 율리오 2세 교황의 영묘 건설 두 번째, 세 번째 계획서를 제출하고 있었다.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이라는 엄청난 일을 시작하고, 율리오 2세에 이어 이듬해(1514년)에 그도 사망했다. ‘대성전을 훼손한 사람들에게 내린 하늘의 징벌’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이어갈 적임자를 찾고, 비용도 마련해야 했다. 사촌 율리오 추기경과 함께 추진하던 피렌체 성 로렌조 메디치가(家) 대성당의 정면 공사는 비용 문제로 일단 포기했다. 그리고 성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라파엘로에게 맡겼다. 미켈란젤로는 델라 로베레 가문과 합의를 못 보고 1516년 피렌체로 돌아갔다.
레오 10세가 교황으로 있는 동안 로마는 여러 면에서 인문주의적 가치를 발휘했다. 학자, 예술가, 음악가와 시인들을 환영하고 그들에게 숙박을 제공해줌으로써 로마를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뿐 아니라,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미국인 철학자며 사학자인 윌 듀란트(Will Durant, 1885~1981)는 저서 「르네상스」에서 레오 10세 교황 재임 시 로마를 두고 “단지 문화의 양만 보더라도, 역사상 결코 이와 같은 시절은 없었다. 페리클레스 재위 시절 아테네도,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의 로마도 결코 이렇지는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메디치가의 교황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을 고루 살피며 혜택을 주었다. 노인과 환자들을 먼저 돌보고, 퇴역 군인과 순례자들을 대접하며, 사회 부적응자와 망명자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었다. 빈민들과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무상 교육도 시행했다.
대사 판매에 반발한 루터, 파문에도 굽히지 않아
하지만 그의 이런 모든 업적을 덮는 엄청난 사건이 그의 재임 기간에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 개혁’이었다. 레오 10세는 캉브레 전쟁 종결을 위한 프랑스와의 전쟁과 로마에서 진행 중인 성 베드로 대성전 건설에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 작센안할트주의 마그데부르크-할버쉬타트의 알브레히트 대주교와 계약을 맺었다. 마인츠대교구장직을 승계하도록 허락하는 조건으로, 1만 두카토(135억 원 상당)를 받기로 한 것이다.
알브레히트는 푸거 은행에서 돈을 대출받기로 했고, 교황은 그가 대출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보편 교회가 주는 ‘대사(Indulgentia)’를 6년간 그의 관할 교구에 한해 대주교가 줄 수 있다는 교서를 내려줬다. 알브레히트는 돈을 대출받아 절반은 로마에 보내고, 절반은 앞서 대출받은 대금을 상환했다.
알브레히트는 도미니코회 요한 테첼(Johann Tetzel) 수사에게 자기 교구 내에서 대사에 관한 설교를 부탁했다. 아우구스티누스회 마르틴 루터(Martin Lutero) 신부는 테첼의 설교에 거세게 반발했다. ‘대사 판매’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루터는 ‘대사 판매’와 함께 그간 로마 교회에 품었던 의구심을 95개 항목으로 정리하여 독일어로 번역한 뒤, 유럽 전역에 돌렸다. 그의 주장은 2주 만에 독일 전역으로, 두 달 후에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레오 10세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전통적으로 수도사들이 뭔가를 주장하면, 소속 수도회 측에서 소환 혹은 제명되기도 하고, 주장과 반론으로 서로 성장하기도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도미니코회와 아우구스티누스회 간, 수사들 간의 다툼으로 과소평가했다. 그 사이에 일부 신학생과 그간 교회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루터의 주장에 동조했고, 1517년 12월 루터는 자신이 강의하던 비텐베르크 대학교 ‘모든 성인 성당’ 정문에 논박문을 붙였다.
1518년 2월 교황은 아우구스티누스회 총대리에게 수사들의 입단속을 지시했고, 루터는 그해 5월 30일, 자신의 95개 반박문에 대한 설명을 레오 10세에게 제출했다. 1518년 10월 교황은 특사 가예타노(Thomas Cajetan) 추기경을 아우크스부르크로 보내는 등 여러 차례 루터에게 주장을 굽힐 것을 요구했고, 루터는 끝내 철회하지 않았다.
1520년 6월 15일 레오 10세는 교서 「주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를 통해 루터의 주장에서 41가지 오류를 열거하며, 60일간 말미를 줄 테니 주장들을 철회하고, 급진적인 주장을 담은 그의 서적들을 모두 불태우라고 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파문시키겠다고 했다. 루터가 파문 위협이 담긴 교서를 받아든 것은 그해 10월 10일이었다. 그로부터 유예 기간이 끝나는 12월 10일 루터는 비텐베르크성의 ‘엘스터 문’ 앞에서 교황 교서뿐 아니라, 스콜라 신학 서적과 교회법전을 모두 불 속에 던졌다.
독일 출신 삽화가이자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독일 출신의 삽화가며 화가, 파울 투만(Paul Thumann, 1834~1908)이 그린 ‘레오 10세 교황의 파문 교서를 불태우는 마르틴 루터’(1872)이다. 그림은 중세 튀링겐 지방 문화의 중심지며, 파문당한 루터가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Friedrich)의 보호 아래 숨어지내던 아이제나흐 바르트부르크(Wartburg)성에 있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투만이 그린 ‘마르틴 루터의 생애’ 연작 5개 중 하나다.
투만은 마을 학교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찌감치 능력을 알아본 아버지 덕분에 1854~1856년, 베를린의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다. 이후 몇 년간 드레스덴에서 일하다가 라이프치히에서 2년을 보낸 후, 바이마르의 그랜드 듀칼 색슨 미술학교(Saxon-Grand Ducal Art School)에서 공부했다. 1872년 드레스덴에서 교사, 1875년 베를린 아트 아카데미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헝가리,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 영국 등지를 여행했고, 1887~1891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살기도 했다. 1892년부터 괴테, 테니슨, 샤미소, 하이네 등의 유명 저서들에 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삽화는 우아한 디자인과 분별력 있는 진지함, 인물의 품격을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1908년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그림 속으로
1520년 12월 10일 오전 9시 루터는 동조하는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레오 10세 교황 교서와 로마 교회 관련 책들의 화형식을 거행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와 결별을 선언하는 장면이다. 나뒹구는 책과 둘러선 사람들 표정과 제스처가 모두 극적이다. 타오르는 장작의 연기에 가려진 희미한 배경이 이 사건을 시작으로 불어닥칠 유럽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는 것 같다.
이 사건이 있은 지 한 달이 채 안 된 이듬해, 1521년 1월 3일 레오 10세는 교서 「로마 교황의 선언(Decet Romanum Pontificem)」을 통해 루터를 공식 파문했다.
2017년 종교 개혁 500주년에 아우구스티누스수도회와 프란치스코 교황은 “종교 개혁은 기념이 아니라 현실”이라며, 루터가 던진 과제는 “개혁은 교회(와 그리스도인 각자)를 송두리째 쇄신하는 것이며, 그 근거는 언제나 성경”임을 강조했다.
[명작으로 보는 교회사 한 장면] (39) 요한네스 링겔바흐의 ‘1527년의 로마 약탈’
제후국의 로마 침략, 가톨릭 쇄신 운동의 단초가 되다
- 요한네스 링겔바흐, ‘1527년의 로마 약탈’, 개인 소장.
메디치 가문 출신의 레오 10세 교황에 이어 선출된 하드리아노 6세 교황(재위 1522~1523)은 루뱅대학교 출신의 네덜란드인이었다. 새 교황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카를 5세가 어렸을 때, 그의 개인 교수를 했고, 그가 정권을 잡았을 때 고문이자 법정 대리인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그는 교황이 된 지 1년 8개월 만에 사망했다.
하드리아노 6세 교황의 뒤를 이어 레오 10세의 사촌 동생 줄리오가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라는 이름으로 교황직에 올랐다. 클레멘스 7세 교황은 유럽에서 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세상은 그의 꿈대로 돼 주지 않았다. 당시 유럽의 실세는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였다. 두 강대국은 스페인을 두고 싸우다가 결국 프랑스에 넘겨준 뒤, 이번엔 이탈리아 반도를 두고 대립하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스페인을 되찾아오는 것을 필두로 나폴리 왕국을 장악하고, 파비아 전투(1525년)에서 승리한 뒤, 점차 이탈리아 북부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부상했다. 이에 클레멘스 7세 교황은 1526년, 이탈리아에서 카를 5세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 프랑스까지 참여시켜, 코냑동맹(1526~1530)을 결성했다. 교황이 주도하고 밀라노 공작 프란체스코 2세(스포르차 가문)가 체결하고, 우르비노 공작이 동맹군의 총사령관을 맡았다.
신성로마제국군, 교황령 로마로 진격
이런 움직임에 분노한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를 보내 밀라노를 탈환하고, 북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황제는 곧장 로마로 진격을 명령했다. 지휘관 샤를은 제국군 2만 명을 이끌고 교황령의 수도 로마를 향해 진군했다. 당시 제국군에는 스페인 군사 6000명과 카를 5세가 고용한 란츠크네히트 용병 1만 4000명이 있었다.
당시 유럽에는 두 개의 큰 용병 부대가 있었는데 스위스 용병과 란츠크네히트 용병이었다. 스위스 용병이 주로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활동했다면, 란츠크네히트는 독일에서 주로 활동했다. 스위스 용병들이 신의를 중시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동포끼리는 싸우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이 있었던 반면에, 란츠크네히트 용병들은 돈만 주면 적(敵)에게도 고용되고, 동포끼리 싸우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전장에서는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이들은 북부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곧장 로마로 왔기 때문에 예상보다 길어진 전쟁에다 급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더욱이 이들 중에는 마르틴 루터의 반가톨릭 사상에 심취한 루터파 교도들도 많았다. 그들은 로마를 적그리스도의 본산지로 보고 반드시 점령해야 한다는 종교적인 신념까지 갖고 있었다.
클레멘스 7세 교황은 카를 5세 황제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점을 들어 설마 성도(聖都) 로마까지 군대를 투입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카를 5세는 종교적인 신념보다 자신의 권력 강화가 더 중요했고, 종교적인 신념은 역설적으로 그의 군이 갖고 있었다. 제국군이 로마 인근 도시 비테르보와 론칠리오네를 점령하고, 로마 성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교황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크게 당황했다.
무참히 짓밟힌 로마
하지만 로마를 지켜줄 군대는 제국군과 비교해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로마는 렌초 다 체리(Renzo da Ceri)가 이끄는 5000명의 군인과 교황의 스위스 근위대 189명이 전부였다. 제국군은 자니콜로와 바티쿠스 언덕 쪽 로마 성벽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고 바티칸을 포위하여 로마를 압박했다. 이 전투에서 제국군의 지휘관 샤를은 교황군을 이끌던 벤베누토 첼리니의 총을 맞고 전사했다.
용병들은 급료도 못 받은 상태에서 지휘관이 전사하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폭도로 변해버린 란츠크네히트 용병들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무너진 성벽 안으로 물밀 듯이 들어와 닥치는 대로 약탈과 살육, 파괴를 자행했다. 신념을 가지고 자행하는 폭력에는 아무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신부는 죽이고, 수녀는 강간하고, 성당은 파괴했다. 귀족들은 재물을 약탈당했고, 시민들은 붙잡혀 고문당했다. 사상자는 로마 시민만 4만 5000명에 이르렀다.
교황이 고용한 각 나라의 용병들은 완전히 기울어진 전세에 싸우기는커녕 도망치기에 바빴다. 하지만 스위스 근위대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웠다.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들어가는 길목을 차단하고 목숨으로 맞서는 동안 교황은 무사히 성 베드로 대성전으로 피신했지만 189명 중 42명만 살아남았다. 교황은 남은 근위병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그러나 근위병들은 충성 서약을 깨뜨릴 수 없다며, 끝까지 교황을 위해 싸우겠다고 맹세했다. 근위병들은 계속해서 성 베드로 대성전 근처로 몰려드는 제국군에 맞서 싸웠고, 결국 모두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스위스 근위병들의 희생 덕분에 클레멘스 7세는 ‘천사의 성’으로 이어진 비밀 통로로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었다. 이때의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클레멘스 7세 교황은 후에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소성당의 제단화를 원래의 계획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으로 의뢰하고 사망했다.
이탈리아풍 지향한 네덜란드 화가
소개하는 작품은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요한네스 링겔바흐(Johannes Lingelbach, 1622~1674)가 그린 ‘1527년의 로마 약탈’(17세기)이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링겔바흐는 독일에서 태어나 12살에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여 네덜란드의 로마파 화가며 에칭 화가로 알려진 카렐 뒤자르댕(1622~1678)의 화방에서 교습생으로 그림을 공부했다. 1642년 프랑스를 거쳐, 1644년부터 6년 남짓 로마에서 살다가 암스테르담으로 귀환하여 사망할 때까지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했다.
링겔바흐는 이탈리아나이즌튼 회원이었다. 이는 17세기 북유럽에서 유행한 화가그룹으로 이탈리아를 다녀온 사람 중 이탈리아풍의 풍경화 양식과 기술을 접목한 네덜란드인 화가들을 일컬었다. 그들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혹은 이탈리아와 관련한 주제의 그림을 많이 그렸다. 당시 이 그룹에 속한 화가들은 이탈리아, 특히 로마를 동경했다. 링겔바흐는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 후 그림 속에 삽입된 건물들을 빛과 원근법으로 웅장하게 표현함으로써, 크고 과감한 구도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풍경화를 넘어 항구와 전쟁 장면도 이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마침표, 교회 개혁 시작
1527년 5월 6일, 로마는 신성로마제국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일부 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두고 ‘르네상스가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이 재임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날 이후 로마는 7개월간 갖은 수모를 당했다. 여기서 교황은 그간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유럽의 가톨릭 제후국가들이 품을 떠났다는 것을 인식해야 했다. 교황이 지배하던 가톨릭 국가들은 루터와 루터교에 자리를 내주었는데, 루터의 반박문이 비텐베르크에 붙은 지 정확하게 10년 만이다(1517년). 이 점에서 교회는 어떤 식으로든 응답해야 했고, 그것이 클레멘스 7세에 이어 즉위한 바오로 3세 교황 파르네세가 1545년에 개최한 트렌토 공의회였다. 가톨릭교회의 쇄신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로마가 약탈당할 때, 베로나의 주교 잔 마태오 기베르티도 로마에 있었다. 약탈자들은 그를 건물 안에 가두고 풀어줄 경우 주교관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맹세하도록 했다. 그는 베로나로 돌아와 맹세를 지키며 죽을 힘을 다해 교구 개혁을 단행했다. 훗날 밀라노의 대주교 성 가를로 보로메오의 교회 개혁의 모델이 되었다. 테아티니 수도회 설립자 잔 피에트로 카라파와 성 가에타노 디 티에네도 로마에 있다가 제국군에게 붙잡혀 수감, 고문당했으나 목숨만은 건졌다. 카라파는 훗날 바오로 4세 교황이 되어 역시 가톨릭교회 쇄신 운동을 이끌었다.
그림 속으로
배경 속 로마시는 짙은 안개에 싸여 있는 것 같다. 강 건너 멀리 성 베드로 대성전(당시에는 돔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이 강 동쪽의 막사 너머에 있는 피라미드보다 초라하게 보인다. 란츠크네히트 병사들의 막사 여기저기에는 약탈품이 나뒹굴고 병사들은 하나같이 빼앗아온 물건들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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