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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근본
성경본문: 잠언 9: 7-12
7.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
8.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9.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11.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질 것이요 네 생명의 해가 더하리라
12.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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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수 목사
오래 전에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던 대중가요 하나가 생각이 납니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곡입니다. 그 가사 내용이 이렇습니다.
어느 날 난 낙엽 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그냥 덧없이 흘려버린 그런 세월을 느낀 거죠.
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그렇게 살아버린 내 인생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늦어버린 것이 아닐까
흘려버린 세월을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어느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다가 지나온 인생길을 뒤 돌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왔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 번 다른 길로 갈 수 있었는데 그 기회들을 놓쳐버렸다고 아쉬워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바보처럼 살았구나. 이 어리석은 바보야”라고 자책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크게 공감하는 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네 이야기고 내 이야기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목청 돋구어 합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이 노래를 히트 시켰던 가수 이종용이라는 분이 이 노래를 부른 후에 소리 없이 사라졌다가 오랜 세월 뒤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자기가 쓴 책 한 권을 들고서 말입니다. 그 책 제목이 노래 제목과 같은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입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자기가 이 노래 가사처럼 대중가수로 살면서 후회스런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신학을 하게 되었고, 목사가 되어 지금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코너스톤 교회를 목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은 이 책에서 자기가 왜 후회스런 삶을 살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 길에서 돌아서게 됐는지 자세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후회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올바로 인생을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뒤돌아보고 보람을 느끼고 가슴 뿌듯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비결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지혜입니다. 지혜롭게 살면 ‘바보처럼 살았다’고 후회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혜
사전을 찾아보면 지혜란 “사물의 도리나 선악 따위를 잘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이라고 정의해 놓았습니다. 세상 이치를 분별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올바른 길을 찾아내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혜는 인생의 방향 감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라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올바른 방향을 찾아내는 감각 그것이 지혜입니다. “무엇이 더 가치 있는 것인가”라는 선택에 직면했을 때 올바른 가치를 찾아내는 감각 그것이 지혜입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어떤 책을 읽어보니까 사람들이 하루에 적게는 이천 가지 많게는 만 오천 가지까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뭘 그렇게 많이 선택을 하나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씩 따지고 보니까 그렇겠구나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아침에 눈 뜰 때부터 선택은 시작됩니다. 지금 일어날 것인가 5분 뒤에 일어날 것인가? 반찬은 무엇부터 먹을 것인가? 넥타이는 무엇을 맬 것인가? 커피를 마실 것인가 녹차를 마실 것인가? 시험 볼 때도 1번을 고를 것인가 4번을 고를 것인가? 어찌 보면 하루 종일 우리는 선택하며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선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본질적 선택이고, 다른 하나는 부가적 선택입니다. 본질적 선택은 우리 인생행로의 큰 방향을 결정짓는 선택입니다. 예수를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직업을 택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사람과 결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부가적 선택은 정해진 인생행로를 걷는 중에 나타난 선택들입니다. 인생의 성패를 결정짓지는 않지만 인생을 아름답게 꾸미는 선택입니다.
사람들은 부가적 선택을 할 때 큰 고민하지 않습니다. 습관적으로 또는 자기의 취향대로 선택합니다. 그러나 본질적 선택을 할 때는 심각하게 고민합니다. 이 본질적 선택을 할 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아테네라는 지혜의 여신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아테네라는 여신은 부엉이를 가장 사랑했습니다. 왜 부엉이를 가장 사랑했을까요? 부엉이는 어두운 밤중에도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있고, 그래서 길을 정확하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정확하게 방향을 찾아내는 방향 감각 그것이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본질적인 선택을 할 때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지혜가 부족하면 방향 감각을 잃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가 있어야만 올바른 방향 감각으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뉴스를 보면 비만이 21세기의 흑사병이 될 것이라고 호들갑입니다. 자라나는 청소년 아동들이 비만 상태가 심각해서 부모 세대보다 수명이 짧고 각종 질병으로 시달리는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고 야단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사람들이 먹거리 선택을 잘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몸에 필요한 것을 먹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입이 당기는 것 자기가 먹고 싶은 것을 먹습니다. 올바른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혜가 부족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필요한 것을 찾아야 하는데 원하는 것을 찾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결혼 대상자를 선택할 때도 정말 자기에게 꼭 맞고 자기에게 꼭 필요한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눈에 끌리는 사람, 자기 욕심이 바라보게 하는 사람을 찾습니다. 올바른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지혜가 부족한 것입니다.
지혜의 근본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지혜의 근본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지혜의 근본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함을 강조해 줍니다.
그러면 지혜의 근본이라 할 때 근본이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영어 성경을 보니까 이렇게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the beginning of wisdom" 즉 지혜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이란 출발점이라는 뜻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방향을 정할 때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는 그 방향 설정의 출발점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나침반이라는 것이 있어서 항해 도중 어디에서나 어떤 상황 속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항해하던 뱃사공들은 방향 설정의 출발점을 이 나침반으로 삼았습니다.
요즈음은 자동항법장치(navigation)이라는 것이 있어서 목적지까지 그 방향을 지속적으로 알려줍니다. 이 자동항법장치는 인공위성이 우리가 보지 못하는 앞의 상황을 다 내다보고 우리로 하여금 목적지를 향해 정확하고 가장 빠른 방향을 안내해 줍니다. 그래서 요즘 항해사들은 방향 설정의 출발점을 이 자동항법장치로 삼고 있습니다.
어느 날 공자가 제자들과 채나라로 가던 도중 양식이 떨어져 어느 마을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제자 안회가 쌀을 구해 와 밥을 짓고 있었습니다. 공자가 내다보니 안회가 밥솥의 뚜껑을 열고 밥을 한 움큼 집어 먹고 있었습니다. 평상시에 스승인 공자가 먼저 먹지 않은 음식에는 수저도 대지 않는 안회가 몰래 밥을 먹는 그를 보고 놀랐습니다. 공자는 "안회야, 내가 방금 꿈속에서 선친을 뵈었는데 밥이 되거든 먼저 조상에게 제사 지내라고 하더구나." 라고 말했습니다. 먼저 밥을 몰래 먹은 안회를 뉘우치게 하려는 의도이었습니다.
안회는 "스승님, 이 밥으로 제사를 지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뚜껑을 연 순간 천장에서 흙덩이가 떨어졌습니다. 스승님께 드리자니 더럽고, 버리자니 아까워 제가 그 부분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공자는 부끄러워하며 안회를 잠시나마 의심한 것을 후회하며 다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전에 나는 나의 눈을 믿었다. 그러나 나의 눈도 완전히 믿을 것이 못 되구나. 예전에 나는 나의 머리를 믿었다. 그러나 나의 머리도 역시 완전히 믿을 것이 못 되구나.“
그렇습니다. 천하의 공자, 인간 지혜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공자도 방향 감각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올바른 방향 감각을 가지고 올바로 판단할 때가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지혜롭게 판단하지만 또 어떤 때는 나름대로 지혜롭게 판단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어리석은 판단을 해서 후회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바로 지혜의 출발점을 바로 자신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혜의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지혜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이 명확하게 밝혀 줍니다.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할 때 그 출발점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에서부터 우리가 인생의 방향 설정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성경은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신뢰하는 것입니다.
공경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려움은 죄인이 자기를 찾아 벌을 주려는 경찰들에게서 느끼는 그런 두려움이 아닙니다. 노예가 그 매를 때리는 무서운 주인에게 느끼는 그런 두려움도 아닙니다.
눅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베드로와 어부들이 밤새 고기잡이를 마치고 그물을 씻으며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다가가셔서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를 썼지만 허탕을 쳤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대로 해 보니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다른 어부들을 불러서 잡은 고기를 배에 담을 때 배 두 척이 잠기게 될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예수님 무릎 아래 엎드려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깨닫게 되는 데서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분은 보통 분이 아니로구나! 어떻게 어부로 잔뼈가 굵은 우리가 밤새 고기의 행방을 알지 못해 허탕을 쳤는데 이분은 그것을 여기 뭍에 서서도 아셨을까?”
바로 이런 신뢰를 갖게 하는 두려움이 베드로의 인생 항로를 결정적으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11절을 보면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그가 새롭게 인생의 항로를 결정하고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설정할 때 먼저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철저하게 신뢰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선택의 과정을 시작할 때 우리는 올바른 방향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바로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방향 감각을 잃게 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둘, 사람들에게 선택을 잘했다고 평가받으려는 마음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셋, 상황이 돌아가는 대로 형편이 맞는 대로 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러서려 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길을 안내해 주실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면 먼저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한다는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지혜로운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전 12:1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도 유대교로 개종할 수 있게 허락했습니다. 이 때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일예를 행 19:2에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고넬료입니다.
그런데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철저하게 율법을 순종하고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에는 그 말씀을 철저히 지키고 순종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존경받는 랍비가 있었습니다. 늘 올바른 선택과 흔들림 없는 평안한 모습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늘 흔들림 없이 올바른 선택을 하실 수 있습니까? 어떻게 평안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선생님께는 사단의 유혹도 없고 죄의 미혹도 없습니까?”
그 때 빙그레 웃으면서 랍비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내게 그런 유혹이 없겠느냐? 나는 사단이 유혹할 때 이렇게 말한단다. 나는 지금 말씀에 순종하느라 네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렇습니다.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흔들립니다. 당장 눈앞의 이익이 미혹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넘어가면 올바른 방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우리 인생길을 섭리 가운데 계획해 놓으셨습니다. 그분만이 우리 인생길의 올바른 방향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지혜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나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어리석어 보입니다. 사람들의 의견이 더 그럴듯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전 1:25에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그렇습니다. 어리석어보여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지혜로운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