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어집주(論語集注) - 1 - 학이(學而) - ① |
1 |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 學之爲言效也. 人性皆善, 而覺有先後, 後覺者必效先覺之所爲, 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 習, 鳥數飛也. 學之不已, 如鳥數飛也. 說, 喜意也. 旣學而又時時習之, 則所學者熟, 而中心喜說, 其進自不能已矣. 程子曰: “習, 重習也. 時復思繹, 浹洽於中, 則說也.” 又曰: “學者, 將以行之也. 時習之, 則所學者在我, 故說.” 謝氏曰: “時習者, 無時而不習. 坐如尸, 坐時習也; 立如齊, 立時習也.” 배운다는 의미는 따라한다는 말이다. 사람의 본성은 모두 선하지만 깨닫는 것에는 선후가 있다. 나중에 깨닫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깨달은 사람의 소위를 따라 해야만 곧 선을 밝히고 그 처음을 회복할 수 있다. 익힌다는 것은 새가 자주 날갯짓을 한다는 말이다. 끊임없이 배우는 것은 마치 새가 자주 날갯짓을 하는 것과 같다. 說은 기쁘다는 의미다. 이미 배웠는데 다시 수시로 그것을 익히면, 곧 배운 것이 성숙되고 마음속에 희열이 생기니 그 나아감을 스스로도 그만 둘 수 없게 된다. 정자가 말하길, “習은 거듭하여 익히는 것이니, 수시로 거듭 생각하여 미루어서(繹), 마음에 충분히 배어들게(젖어들게) 되면, 곧 기뻐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또 말하길, “배우는 것은 장차 그것을 실행하고자 함이다. 수시로 그것을 익히면 곧 배운 것이 나에게 있게 남아 되니, 곧 기쁜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씨가 말하길, “時習이란 익히지 않는 때가 없다는 말이니, 시동처럼 앉는다는 것은 앉아있을 때에 익히는 것이고, 재계할 때처럼 선다는 것은 서있을 때에 익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學之一字 實兼致知力行而言 問學之爲言效也 效字所包甚廣 曰 正是如此 博學審問愼思明辨篤行 皆學之事 주자가 말하길, “學이라는 한 글자는 실제로 致知와 力行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묻기를, “學으로 말하자면 따라 한다(效)는 것인데, 效자가 포함하는 바가 너무 넓습니다.”라고 하였다. 대답하길,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널리 배우고, 잘 살펴 물으며, 신중하게 생각하고, 밝게 변별하며, 독실하게 행하는 것, 모두가 다 배움(學)의 일이다.”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集註言學 而或問以知與能並言 何也 曰 言人之效學於人 有此二者 先覺之人於天下之理 該洽貫通 而吾懵然未有所知也 於是日聽其議論而向之 未知者始有所知矣 先覺之人 於天下之事 躬行實踐 而吾倀然未有所能也 於是日觀其作爲而向之 未能者始能矣 大抵讀書窮理 要當盡聖賢之意 備事物之情 非吾好爲是詳復也 理當然也 世之學者 意念苟且思慮輕淺 得其一隅便以爲足 則其爲踈率也 亦甚矣 學者觀於此 亦足以得養心窮理之要矣 曰 若是 則學之爲言 固無所不學也 今集註於此 乃以爲人性皆善 必學而後能明善而復其初 何也 曰 學問之道 固多端矣 然其歸在於全其本性之善而已 明善謂明天下之理 復其初 則復其本然之善也 於論語之首章 首擧是以爲言 其提綱挈領而示人之意 深矣 면재황씨가 말하길, “집주에서 배움(學)을 말하였는데, 혹문에서는 아는 것과 능한 것으로써 나란히 물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사람이 남에게 본받아 배우는 것에는 이 두 가지가 있음을 말한 것이다. 먼저 깨달은 사람은 천하의 이치에 대하여 갖춰짐이 흡족하고 관통하고 있지만, 나는 멍청하여 아는 바가 없다. 이에 날마다 그 의논하는 바를 들어서 그쪽으로 향한다면, 알지 못하는 사람도 비로소 아는 바가 있게 되는 것이다. 먼저 깨달은 사람은 천하의 일에 대하여 몸소 행하여 실천하지만, 나는 갈팡질팡하며 능히 할 수 있는 바가 없다. 이에 날마다 그가 하는 바를 관찰하여 그쪽으로 향한다면, 잘하지 못하는 자도 비로소 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저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함에 있어, 마땅히 성현의 뜻을 다해야 하고, 사물의 情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지, 내가 좋아하는 바를 옳다고 여겨 상세히 반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이치상 당연한 것이다. 세상의 배우는 자에 있어서, 그 뜻하는 바가 구차하고 사려함이 가볍고 얕아서, 한 모서리를 터득하면 곧바로 족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가 성기고 경솔함이 또한 심할 것이다. 배우는 자가 이것에 대하여 살펴본다면, 또한 마음을 기르고 이치를 궁구하는 요점을 족히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말하길, “이와 같다면, 배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디 배우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인데, 지금 집주에서 이에 대하여 人性은 모두 善하니, 반드시 배운 다음에 능히 善을 밝혀서 그 처음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학문의 道는 본래 단서가 많은 것이다. 그러나 그 귀결점은 그 본성의 선함을 온전하게 함에 있을 따름이다. 선을 밝힌다는 것은 천하의 이치를 밝히는 것을 말하고, 그 처음을 회복한다는 것은 그 본연의 선함을 회복하는 것이다. 논어의 첫 번째 장에서 처음에 이것을 들어서 말을 하였으니, 강령을 들고 이끌어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그 뜻이 아주 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人性皆善 天命之性也 覺有先後 氣質之性也 必效先覺之所爲 或以所爲爲所行 殊不知 汝爲周南召南 集註曰 爲猶學也 論語曰 爲之不厭 孟子記夫子之言曰 學不厭 是以學字代爲字 集註於十五志學下曰 念念在此而爲之不厭 是以爲字釋學字 此曰效先覺之所爲 猶曰學先覺之所學也 大學章句 釋明明德曰 學者當因其所發而遂明之 以復其初 此曰明善 而復其初 是包大學許多工夫說 物格知至卽是明善 意誠心正身修卽是復其初 운봉호씨가 말하길, “인성은 모두 선하다는 것은 천명의 성이고, 깨달음에 선후가 있다는 것은 기질의 성이다. 반드시 선각자의 所爲를 따라 해야 한다는 것에 있어, 혹자는 所爲를 所行으로 여기는데, 이는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다. ‘汝爲周南召南’ 장의 집주에서 말하길, 爲는 學과 같다고 하였고, 논어에서 爲之不厭(행함에 싫증내지 않음)이라 말하였는데, 맹자에서는 공자의 말을 기록하길, 學不厭(배움에 싫증내지 않음)이라고 말하였다. 이는 學이란 글자로 爲라는 글자를 대신한 것이다. 집주는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었다는 장 아래에서 말하길, ‘여기에 생각을 두어 잊지 않고 爲之不厭(행함에 싫증을 내지 않음)’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爲자로 學자로 풀이한 것이다. 여기서 선각자의 所爲를 따라한다고 말한 것은 선각자의 所學(배운 바)을 배운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학장구에서 明明德을 풀이하여 말하길, 배우는 자는 마땅히 그 드러난 바를 바탕으로 하여 마침내 그것을 밝혀서 그 처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선을 밝히는 것이다. 그 처음을 회복한다는 것은 대학의 허다한 공부를 포함하여 말한 것인데, 사물의 이치가 궁구되고 앎이 지극해지는 것은 곧바로 선을 밝히는 것이요, 뜻이 정성스러워지고 마음이 바르게 되며 몸이 닦여지는 것은 바로 그 처음을 회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此論語中第一箇學字 朱子挈要指以示人 後覺者必效先覺之所爲 所爲不過知行二者 效善覺之致知以知此理 又效先覺之力行以行此理 乃可以明善而復其初矣 明善者 明本然之善 以知言也 復其初者 復全本然之善 以行言也 學之道固多端 其要歸在復全本然之善而已 朱子所謂以己之未知而效夫知者以求其知 以己之未能而效夫能者以求其能 皆學之事也 能指行而言 知行皆從性分上用工 신안진씨가 말하길, “이것은 논어 안에서 첫 번째 學자인데, 주자는 요지를 잡아들고(挈: 설) 사람들에게 ‘나중에 깨달은 자는 반드시 선각자의 所爲를 따라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所爲는 知와 行 2가지에 불과한데, 선각자의 致知(앎을 지극히 함)를 따라함으로써 이 이치를 아는 것이고, 또 선각자의 力行(힘써 행함)을 따라함으로써 이 이치를 행하는 것이니, 곧 이로써 선을 밝히고 그 처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선을 밝힌다는 것은 본연의 선을 밝히는 것이니, 知로써 말한 것이고, 그 처음을 회복한다는 것은 본연의 선을 회복하여 온전하게 하는 것이니, 行으로서 말한 것이다. 배움의 道에는 본디 단서가 많지만, 그 요체는 본연의 선을 회복하여 온전하게 하는 것에 귀결될 따름이다. 주자가 말했던 ‘자신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 아는 자를 따라 함으로써 그 앎을 구하고, 자신이 능히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저 능히 행하는 자를 따라 함으로써 그 能함을 구하는 것은, 모두 배움(學)의 일이다.’ 라는 것에 있어서, 能은 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知와 行은 모두 천성의 분수에 따라 힘써야 할 것들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說文習字從羽從白 月令所謂鷹乃學習是也 주자가 말하길, “설문해자에 習자는 羽자와 白를 부수로 한다(從)고 하였는데, 월령이 말한 ‘鷹乃學習(매가 날기 위해 배워 익힌다)’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學是未理會得時便去學 習是已學了又去重學 非是學得了頓放在一處 却又去習也 只是一件事 如鳥數飛 只是飛了又飛 배움(學)이라는 것은 아직 이해하여 터득하지 못하였을 때 가서 배우는 것이다. 익힘(習)이라는 것은 이미 배웠지만, 또 다시 가서 거듭 배우는 것이다. 배워서 터득하였다고 한쪽에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가서 익히는 것이다. 단지 이 한 건의 일에 있어서, 마치 새가 자주 날개짓을 하는 것처럼 그저 날개짓을 하고 또 할 뿐이다.
問學是知習是行否 曰 知自有知底學 自有知底習 行自有行底學 自有行底習 如小兒寫字 知得字合恁地寫 這是學 便須將心思量安排 這是習 待將筆去寫成幾箇字 這是行底學 今日寫一紙 明日寫一紙 又明日寫一紙 這是行底習 人於知上不習 便要去行 如何得 人於知上不習 非獨是知得不分曉 終不能有諸己 누군가 묻기를, “배운다는 것은 아는 것이고, 익힌다는 것은 행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길, “아는 것에는 아는 것의 배움이 저절로 있고, 또 아는 것의 익힘도 저절로 있는 것이요, 행하는 것에도 행하는 것의 배움이 저절로 있고, 행하는 것의 익힘도 저절로 있는 것이다. 예컨대, 어린아이가 글자 베껴 씀에 있어, 글자를 알아서 그렇게 부합하게 쓰는 것, 이것은 배우는 것이고, 곧바로 모름지기 마음을 붙잡고 생각하고 헤아려 안배해야 하는데, 이것은 익히는 것이다. 붓을 잡기를 기다렸다가 가서 몇 개의 글자를 써서 완성하는 것, 이것은 행하는 것의 배움이고, 오늘 한 장을 쓰고, 내일 한 장을 쓰며, 또 그다음 날에 한 장을 쓰는 것, 이것은 행하는 것의 익힘이다. 사람이 앎에 있어 익히지 않고서 곧바로 가서 행한다면, 그것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사람이 앎에 있어서 익히지 않으면, 단지 지득함에 있어서도 분명하게 깨우칠 수 없을 뿐 아니라, 끝내 자기 안에 갖고 있을 수조차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學而時習之 此是論語第一句 句中五字 雖有輕重虛實之不同 然字字皆有意味 無一字無下落 學之爲言效也 以己有所未知未能而效夫知者能者以求其知能之謂也 而字承上起下之辭也 時者無時而不然也 習者重複溫習也 之者指其所知之理所能之事而言也 言人旣學矣而又時時溫習 其所知之理 所能之事也 聖言雖約而其指意曲折深密而無窮 蓋如此 聖人之學與俗學不同 聖人敎人讀書 只要知所以爲學之道 俗學讀書便只是讀書 更不理會爲學之道是如何 學而時習之, 이것은 논어의 첫 번째 구절인데, 구절 안의 5글자는 비록 경중과 허실이 같지 않음이 있지만, 그러나 글자마다 모두 의미를 갖고 있어서, 어떤 글자도 결말(下落)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배운다고 말하는 것은 따라 하는(效) 것인데, 자기가 미처 알지 못하고 능히 행하지 못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저 아는 자와 능히 행할 수 있는 자를 따라 함으로써 자신의 앎과 능함을 구하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而자는 위의 말을 이어서 아래를 일으켜주는 말이다. 時라는 것은 그렇지 않을 때가 없다는 말이다. 習이라는 것은 거듭 반복하여 익숙하게 익히는 것이다. 之라는 것은 자신이 아는 이치와 능한 일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는 사람이 이미 배웠으면서도 또 자신이 알고 있는 이치와 능한 일을 수시로 푹 익힌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성인의 말씀은 비록 요약되어 있지만, 그 가리키는 뜻은 곡절이 깊고 정밀하며 무궁함이 대체로 이와 같다. 성인의 배움은 속세의 배움과 같지 아니한데, 성인께서 사람들에게 책을 읽도록 하신 것은 단지 학문을 하는 道를 알도록 하기 위함이고, 속세의 배우는 자들이 책을 읽는 것은 곧 그저 책을 읽는 것이라서, 학문을 하는 道가 어떠한 것인지는 더이상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未知未能而求知求能之謂學 已知已能而行之不已之謂習 미처 알지 못하고 능하지 못하여 앎을 구하고 능함을 구하는 것을 일컬어 學이라고 말하고, 이미 알고 있고 이미 능하되 행함을 그치지 않는 것을 일컬어 習이라고 한다.
胡氏曰 學之不已者 學與習 非二事也 호씨가 말하길, “배우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니, 배움과 익힘은 두 가지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厚齋馮氏曰 習鳥雛欲離巢而學飛之稱 學謂學之於己 習謂習其所學 時時而習 恐其忘也 凡曰而者 上下二義 學一義也 習一義也 후재풍씨가 말하길, “習이란 새 새끼가 둥지를 떠나고자 날기를 배우는 것을 지칭한 것이다. 學이란 자신이 그것을 배우는 것을 말하고, 習이란 자신이 배운 것을 익히는 것을 말하는데, 수시로 익히는 것은 그것을 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무릇 ‘而’라고 말하는 것은 상하는 두 뜻이라는 것이니, 배우는 것도 하나의 뜻이요, 익히는 것도 역시 하나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學要時習 習到熟後 自然說喜 不能自已 今人所以便住了 只是不曾習 不見得好 此一句却係切己用功處 주자가 말하길, “배운 것은 수시로 익혀야만 한다. 익숙하게 익힌 후에는 자연스럽게 즐겁고 기뻐하게 되니,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곧바로 그치고 마는 것은 단지 일찍이 익힌 적이 없어서, 좋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일 뿐이다. 이 한 구절은 도리어 자신이 절실하게 힘써야 할 부분에 묶여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學矣而不習 則表裏扞(捍)格而無以致其學之之道 習矣而不時 則工夫間斷而無以成其習之之功 是其胸中雖欲勉焉以自進 亦且枯燥生澀而無可嗜之味 危殆杌隉而無可卽之安矣 故旣學矣又必以時習之 則其心與理相涵 而所知者益精 身與事相安 而所能者益同 從容於朝夕俯仰之中 凡其所學而知且能者 必有自得於心而不能以語人者 是其中心油然悅懌之味 雖芻豢之悅於口 不足以喩其美矣 此學之始也 배웠으되 익히지 않는다면, 表裏(겉과 속)가 서로 상충되어 자신의 배우는 道를 지극하게 할 수가 없고, 익히되 수시로 하지 않는다면, 공부가 중간에 끊어져서 익히는 功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자기 마음속으로 비록 열심히 노력하여 스스로 나아가고자 할지라도, 또한 무미건조하고 떫어져서 좋아할만한 맛이 없고, 위태롭고 불안하여 나아가 취할만한 편안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배웠어도 다시 반드시 수시로 익힌다면, 그 마음과 이치가 서로를 푹 적셔주어서 아는 것은 더욱 정밀해지고, 몸과 일은 서로 편안하게 해주어서 능한 것은 더욱 같아지니, 아침저녁으로 俯仰(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 굽어봄, 위로 임금이나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 백성이나 처자식을 부양함)하는 중에 여유롭게 될 것이다. 무릇 자신이 배워서 알고 또 능한 것에는 반드시 마음으로 스스로 터득하였지만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자기 中心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기쁨의 맛이니, 비록 芻豢(추환, 풀 먹여 키운 가축과 곡식 먹여 키운 가축)이 입에 즐겁다고 할지라도, 이로써 그 아름다움에 비유하기에는 부족하다. 이것이 바로 배움(學)의 시작이다.
學到說時 已是進了一步 只說後便自住不得 배워서 기뻐함에 이르게 된 때는 이미 진일보한 것이다. 단지 기뻐한 후에야 곧 스스로를 억누르지(주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雙峯饒氏曰 習字訓重 故重險謂之習坎 쌍봉요씨가 말하길, “習자의 훈은 거듭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重險(거듭된 험난함)을 일컬어 習坎(습감: 반복되는 험난함)이라고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浹洽二字有深意 如浸物於水 水若未入 只是外面濕內面依前乾 必浸之久 則透裏皆濕 習而熟 熟而說 脈絡貫通 程子所謂浹洽 是也 주자가 말하길, “浹洽(협흡) 두 글자에는 깊은 뜻이 있다. 예컨대 물에 어떤 사물을 담글 경우, 물에 만약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저 겉만 젖고 내면은 여전히 건조할 것이다. 반드시 물에 담가서 오래되면, 속까지 모두 젖게 된다. 익혀서 익숙하게 되고, 익숙해서 기쁘게 되는 것과 맥락이 관통하는 것이다. 정자가 말한 이른바 浹洽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南軒張氏曰 學貴於時習 程子曰 時復思繹 言學者之於義理 當時紬繹其端緖而涵泳之也 남헌장씨가 말하길, “배움은 수시로 익히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정자가 말하길, 時復思繹(수시로 반복하고 생각하여 미루어감)은 배우는 자가 義理에 대하여 마땅히 수시로 그 단서를 뽑아서 풀어내어 그것을 涵泳(푹 젖게 함)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時復思繹 則習於心 將以行之 則習於身 운봉호씨가 말하길, “時復思繹은 마음에 익히는 것이고, 將以行之(받들어 행함함)는 몸에 익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上一條 以知言 此一條 以行言 采程子二說 以見學習當兼知行言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위의 한 조는 知로써 말한 것이고, 여기의 한 조는 行으로써 말한 것인데, 정자의 두 말씀을 채택함으로써 학습은 마땅히 지와 행을 겸해서 말해야 함을 보여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勿軒熊氏曰 坐如尸立如齊 出記曲禮 如尸 註曰 視貌正 如齊 註曰 磬且聽 謂祭祀時 물헌웅씨가 말하길, “坐如尸, 立如齊는 예기 곡례에 나오는 것인데, 如尸는 주석에서 말하길, 보이는 모습이 바른 것이라고 하였고, 如齊는 주석에서 말하길, 경쇠 치고 듣는 것인데, 제사 때를 말한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伊川之說 則專在思索而無力行之功 如上蔡之說 則專於力行而廢講究之義 似皆僞了 주자가 말하길, “정이천의 말은 오로지 사색만 하고 있을 뿐 힘써 행하는 공이 없고, 상채(사량좌)의 말 같은 경우는 오로지 힘써 행할 뿐 강구하는 뜻을 없애버렸으니, 모두 거짓된 것 같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程子二條說 學習兼知行言 謝氏此條 惟以時習於行言 亦姑以坐立起例 非止謂坐立時也 其言時字亦與時時之意異 朱子姑采以備一說耳 신안진씨가 말하길, “정자가 했던 두 條의 말씀에서, 학습이란 知와 行을 겸하여 말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씨의 이 條에서는 오직 行을 수시로 익히는 것으로 말한 것이니, 이 또한 앉고 서는 것으로써 잠시 예를 들었지만, 그저 앉고 서는 때를 말하는 것에 그친 것은 아니다. 그가 時자를 말한 것은 또한 ‘수시로’ 라는 뜻과 달랐기에, 주자가 잠시 이를 채택하여 또 하나의 말씀으로 갖추어 놓았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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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 朋, 同類也. 自遠方來, 則近者可知. 程子曰: “以善及人, 而信從者衆, 故可樂.” 又曰: “說在心, 樂主發散在外.” 벗이란 같은 부류의 사람이다. 먼 곳에서도 찾아온다고 하면, 가까이에 사는 사람은 (어떻게 할지) 가히 알 만하다. 정자가 말하길, “선으로써 남에게 미치면, 믿고 따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니, 그래서 즐거워할 만한 것이다.”고 하였다. 또 말하길, “기뻐함은 마음에 있고, 즐거움은 밖으로 발산됨을 위주로 한다.”고 하였다.
朱子曰 理義人心所同 然非有我之得私也 吾獨得之 雖足以說矣 然告人而莫信 率人而莫從 是獨擅此理而人不得與 於吾心之所同也 如十人同食 一人獨飽而九人不下咽 吾之所說雖深 亦曷能達於外邪 今吾之學 足以及人而信從者又衆 則將皆有以得其心之所同然者 而吾之所得 不獨爲一己之私矣 吾之所知 彼亦知之 吾之所能 彼亦能之 則其懽欣宣暢 雖宮商相宣律呂諧和 何足以方其樂哉 此學之中也 又曰 近者旣至 遠者必來以學於吾之所學 而求以復其初 凡吾之所得而悅於心者 彼亦將有以得而悅之 則可以見夫性者萬物之一原 信乎其立必俱立 成不獨成矣 주자가 말하길, “理와 義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함께 하는 바이지만, 내가 사사로이 할 수 있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니다. 나 홀로 그것을 터득하는 것이, 비록 충분히 즐거워할만한 것이라 할지라도, 남에게 알려주어도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남을 이끌어도 따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나 홀로 이 이치를 마음대로 할 뿐, 다른 사람은 내 마음이 함께 하는 바에 관여할 수 없는 것이다. 예컨대 열 사람이 함께 밥을 먹는데, 나 혼자만 배가 부를 뿐 9명은 밥을 넘기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내가 기쁜 것이 비록 깊다 할지라도, 역시 어찌 밖에까지 미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나의 배움이 충분히 남에게 미쳐서 그것을 믿고 따르는 자가 또한 많다면, 그들은 장차 모두 그들의 마음이 똑같이 그러한 바를 터득할 수 있을 것이니, 내가 터득한 바가 단지 나 하나의 사사로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바를 저들도 역시 알고, 내가 능한 바를 저들도 역시 능히 할 줄 안다면, 그 기쁨은 크게 펼쳐질 것인데, 비록 宮商(五音)이 서로 펴지고 律呂(가락)가 조화롭다 할지라도, 어찌 그 즐거움과 비교하기(方)에 족하겠는가? 이는 배움의 중간이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가까이 있는 자는 이미 이르렀고, 멀리 있는 자도 반드시 와서, 이로써 내가 배운 바를 배워서 그 처음을 회복하는 것을 추구한다고 하였는데, 무릇 내가 터득하여 마음에 즐거운 바를 저들도 역시 장차 터득하여 그것을 즐거워한다면, 무릇 性이라는 것이 만물에게 있어 하나의 근원임을 알 수 있고, 그 세워짐에 있어 반드시 함께 서고, 그 이루어짐도 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善不是自家獨有 人皆有之 我習而自得 未能及人 雖悅未樂 善이란 나 혼자 홀로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모두 가지는 것이다. 내가 익혀서 스스로 터득했다고 해도 미처 남에게 미치지 못하면, 비록 기쁠지라도 아직 즐겁지 않은 것이다.
問以善及人而信從者衆 是樂其善之可以及人乎 是樂其信從者衆乎 曰 樂其信從者衆也 大抵私小底人或有所見 則不肯告人 持以自多 君子存心廣大 己有所得 足以及人 若己能之以敎諸人 而人不能 是多少可悶 今旣信從者自遠而至 其衆如是 安得不樂 누군가 묻기를, “善으로써 남에게 미쳐서 믿고 따르는 자가 많으면, 그 선함이 남에게 미칠 수 있음을 즐거워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 믿고 따르는 자가 많음을 즐거워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그 믿고 따르는 자가 많음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대저 작은 것을 사사롭게 하는 사람이라면, 간혹 본 바가 있더라도, 남에게 알려주려 하지 않고서 이를 홀로 붙들고서 스스로 훌륭하다고 여길 것이다. 군자라면 마음에 보전한 것이 광대하여, 자신이 얻은 것으로 남에게 미치기에 충분한 것이다. 만약 자신이 능한 것으로써 남에게 가르쳐주었으나 남이 잘하지 못하면, 이는 얼마나 답답해할만한 것인가? 지금 이미 믿고서 따르는 자가 먼 곳으로부터 오는 경우가 이와 같이 많으니,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信從者衆 足以驗己之有得 然己旣有得 何待人之信從 始爲可樂 須知己之有得 亦欲他人之皆得 然信從者 但一二 亦未能愜吾之意 至於信從者衆 則豈不可樂 믿고 따르는 자가 많으면, 내가 터득한 바가 있음을 족히 징험해준다. 그러나 내가 이미 터득한 바가 있다면, 어찌 남이 믿고 따르는 것을 기다린 후에야 비로소 즐거울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자신이 터득한 바가 있다면, 또한 타인도 모두 터득하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믿고 따르는 자가 그저 한두 명이라면, 또한 내 뜻을 만족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믿고 따르는 자가 많은 지경에 이른다면,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問朋來之樂 奈何 曰 惟以程子之言 求之然後 見夫可樂之實耳 且其以善及人而信從者衆之云 纔九字爾而無一字之虛設也 非見之明而驗之實 其孰能與於此 누군가 묻기를, “벗이 찾아오는 즐거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길, “오직 정자의 말로서 그것을 구한 연후에 저 즐거워할만한 실질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선으로써 남에게 미쳐서 믿고 따르는 자가 많다’는 그 말은 겨우 9글자에 불과하지만, 단 한 글자도 헛된 설정이 없으니, 보는 바가 밝고 징험하는 바가 실질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가 이것에 관여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南軒張氏曰 有朋自遠方來 則己之善 得以及人 而人之善有以資己講習 相資其樂 孰尙焉 樂比於說 爲發舒也 남헌장씨가 말하길,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온다면 곧 자기의 善이 남에게 미칠 수 있으며, 남의 善도 나의 익힘에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서로 그 즐거움에 도움이 되니, 어떤 것이 이보다 더하겠는가? 즐거워함은 기뻐함에 비한다면, 드러내어 펼친 것이 된다.” 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以善之善 則上一節 人性皆善 及明善之善 習說則善方成己 朋來則善方及人矣 신안진씨가 말하길, “善으로 남에게 미친다는 善은 곧 바로 윗 절의 ‘인성은 모두 善하다는 것과 善을 밝힌다는 것의 善인데, 익혀서 기쁘다는 것은 善이 바야흐로 자신을 완성한다는 것이고, 벗이 온다는 것은 善이 바야흐로 남에게 미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程子非以樂爲在外也 以爲積滿乎中而發越乎外耳 悅則方得於內而未能達於外也 주자가 말하길, “정자는 즐거워함을 밖에 있는 것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안에 쌓이고 가득 차서 밖으로 드러나 넘치는 것일 따름이라고 생각하였다. 기뻐함은 바야흐로 안에서 얻지만, 밖에까지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說是感於外而發於中 樂則充於中而溢於外 기뻐함은 밖에서 감화하여 가운데서 피어나는 것이고, 즐거움은 곧 가운데서 충만하여 밖으로 넘치는 것이다.
慶源輔氏曰 說是自知自能而自悅 樂是人皆知皆能而我與人同樂
경원보씨가 말하길, “기뻐함은 스스로 알고 스스로 할 수 있어서 스스로 기뻐하는 것이고, 즐거워함은 사람들도 모두 알고 모두 할 수 있어서 나도 남들과 더불어 같이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說與樂 皆是在中底 今此樂字對上文說字而言 則是主發散在外言之 쌍봉요씨가 말하길, “기뻐함과 즐거워함은 모두 中에 있는 것인데, 지금 여기서 樂자는 윗글의 說자에 대비하여 말한 것이니, 이는 밖으로 발산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3 | 人不知而不慍이면 不亦君子乎아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 라고 하셨다.
○ 慍, 含怒意. 君子, 成德之名. 尹氏曰: “學在己, 知不知在人, 何慍之有.” 程子曰: “雖樂於及人, 不見是而無悶, 乃所謂君子.” 愚謂及人而樂者順而易, 不知而不慍者逆而難, 故惟成德者能之. 然德之所以成, 亦由學之正, 習之熟, 說之深, 而不已焉耳. 慍은 성낸다는 뜻을 품고 있다. 군자는 덕을 이룬 사람의 명칭이다. 윤씨가 말하길, 학문이란 자기에게 달려 있는 것이고, 알아주느냐 알아주지 않느냐는 남에게 달려 있는 것이니, 무슨 성낼 것이 있겠는가? 정자가 말하길, “비록 (나의 선함이) 남에게 미치는 것에 즐거워하지만, 옳다고 여김을 받지 못하고도 답답해함(번민함)이 없다면, 곧 이른바 군자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의 선함이) 남에게 미쳐서 즐거워하는 것은 순리이자 쉬운 일이고,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것은 이치를 거스르는 것이자 어려운 일이다. 그런 까닭에 오직 덕을 이룬 사람만이 그것을 해낼 수 있다. 그러나 덕을 이루는 방법은 또한 바르게 배우고 완전히 익히며 깊이 기뻐하되 중간에 그만두지 않음을 말미암을 따름이다.
朱子曰 有朋自遠方來而樂者 天下之公也 人不知而慍者 一己之私也 以善及人而信從者衆 則樂 不己知則不慍 樂慍在物 不在己 至公而不私也 주자가 말하길, “벗이 있어 먼 곳으로부터 오니 즐겁다는 것은 천하의 공정함이요, 남이 알아주지 않아서 성을 내는 것은 나 한 사람의 사사로움이다. 善으로써 남에게 미쳐서 믿고 따르는 자가 많다면, 곧 즐거워하고,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 즐거워함과 성냄이 외물에 달려 있지,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니, 지극히 공정할 뿐 사사롭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己誠有所學 人之知不知 何加損於己 朱子云 爲學是爲己當然之事 譬如喫飯乃是要自家飽 旣飽何必問外人 知不知 蓋與人初不相關也 尹氏解此一節正意 故居先
신안진씨가 말하길, “내가 진정으로 배운 바가 있다면, 남이 알아주거나 알아주지 않음이 나에게 무슨 보탬이나 뺌이 되겠는가? 주자가 이르길, 학문을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여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하였다. 비유하자면, 식사를 즐김에 있어 자기 스스로 배불러야 하는 것인데, 이미 배부르게 먹었다면, 어찌하여 반드시 외부사람에게 아는지 모르는지 물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대체로 남과는 처음부터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윤씨가 이 節의 올바른 뜻을 풀이하였기 때문에, 먼저 게재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朋是專主同類 人兼指衆人 上而君大夫 亦是 쌍봉요씨가 말하길, “벗(朋)이란 오로지 같은 부류에 주안점을 두지만, 남(人)이란 뭇사람을 다 겸하여 가리키는데, 윗사람이면서 임금이나 대부도 역시 이러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樂公而慍私 君子有公共之樂 無私己之慍 주자가 말하길, “즐거워함은 공정한 것이지만 성냄은 사사로운 것이다. 군자에게는 여럿을 공정하게 대하는 즐거움이 있으나, 자신을 사사롭게 하는 성냄은 없다.”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說之深 然後能樂 樂之深 然後能不慍 쌍봉요씨가 말하길, “기뻐함이 깊어진 연후에 능히 즐거워할 수 있고, 즐거움이 깊어진 연후에 능히 성내지 않을 수 있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說是喜意 慍是含怒意 喜怒樂三者 皆情也 皆性之發也 能復其性之善而情無不善 學習之功 大矣 운봉호씨가 말하길, “說(悅)은 기쁘다는 뜻이고, 慍은 화났다는 뜻을 품고 있다. 희노락 3자는 모두 情이요 모두 性이 발로한 것이다. 능히 자기 본성의 선함을 회복하여 情에 선하지 않음이 없게 할 수 있다면, 배워서 익힌 공이 큰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不見是而無悶 出易乾文言 不見是於人 而無悶於心 引此語解不知不慍 甚切 此條聯樂與不慍言 故居尹說之後 신안진씨가 말하길, “옳다고 여김을 받지 않더라도 답답해함이 없다는 것은 주역 건괘 문언의 ‘不見是於人而無悶於心’에서 나온 말인데, 이 말을 인용하여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다는 구절을 풀이한 것은 대단히 적절하였다. 이 구절은 즐거워함과 성내지 않음을 연결하여 말하였기 때문에, 윤씨의 말 뒤에 놓았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稍知爲己 則人知不知 自不相干 何以言逆而難 朱子曰 人待己平 平亦不覺 但被人做全不足比 數看待 心便不甘 便是慍 慍不是大 故忿怒只心有些不平 便是慍 便是裏面動了 누군가 묻기를, “(학문이란) 자기를 위하는 것임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남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저절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어째서 이치에 거스르고 어렵다고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남이 나를 공평하게 대우하면, 공평함도 역시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남으로부터 비교하기도 완전히 부족하다고 여겨서 자주 이런 대우를 당하면, 마음이 곧 달갑지 않게 되니, 이것이 바로 성냄이다. 성내는 것이 크지 않기 때문에, 분노는 그저 마음에 다소 불평이 있는 정도인데, 이것이 곧 慍이요, 곧 내면이 동요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人不見知 處之泰然 略無纖芥不平之意 非成德之君子 其孰能之 此學之終也 사람이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태연하게 대처하여, 솜털이나 지푸라기만한 불평의 뜻이 조금도 없는 것은 덕을 이룬 군자가 아니라면, 그 누가 해낼 수 있겠는가? 이는 배움의 끝이다.
今人有一善 便欲人知 不知則便有不樂之意 不特此也 見人有善而人或不知之 初不干己事而亦爲不平 況其不知己乎 此不知不慍所以難也 지금 사람들은 善이 하나라도 있으면 곧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데, 알아주지 않으면 곧 즐거워하지 않는 뜻이 생긴다. 단지 이러할 뿐이 아니다. 남에게 善이 있음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혹시라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내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에도, 역시 불평을 하게 되는데, 하물며 나를 알아주지 않음에 있어서랴! 바로 이것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 것이 어려운 까닭이다.
問不慍之說 孰爲得 曰 程子得之 至論其所以然者 則尹氏爲尤切 使人之始學 卽知是說以立其心 則庶乎其無慕於外矣
누군가 묻기를, “성내지 않음에 관한 설은 누가 잘 터득하였는가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정자가 잘 터득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된 까닭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윤씨가 더욱 적절하게 하였다. 만약 사람이 처음 배울 적에 이 말을 알아서 그 마음을 세운다면, 거의 밖에서 바라는 바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覺軒蔡氏曰 程子謂不見是而無悶 乃所謂君子是不慍然後君子也 朱子謂惟成德者能之 則是君子然後不慍 以說樂兩句例之 則須如程子之說 朱子非正解本句 特統而論之耳 所以繼於尹氏程子之後 각헌채씨가 말하길, “정자는 옳다고 여김을 받지 않더라도 답답해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른바 ‘군자는 성내지 않은 연후에야 군자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주자는 오직 덕을 이룬 사람만이 해낼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곧 군자인 뒤에야 성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만약 說(기뻐함)과 樂(즐거워함) 두 구절로 예를 든다면, 모름지기 정자의 말처럼 해야 한다. 주자는 본 구절을 정면으로 풀이한 것이 아니라, 단지 통틀어 논했을 따름이다. 이 때문에 윤씨와 정자의 뒤에 이어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順謂理之順 逆謂理之逆 曰順曰逆 皆理也 但處其順者易 故及人而樂者 猶可及 處其逆者難 故不見是而無悶 非成德之士 安土樂天者 不能及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順이란 이치에 순응함을 말하고, 逆이란 이치를 거스르는 것을 말한다. 順을 말하고 逆을 말한 것은 모두 이치다. 그러나 순응하는 것에 대처하는 것은 쉽기 때문에, (자기 선으로써) 남에 미쳐서 즐거운 것은 그래도 이를 수 있다. 거스르는 것에 대처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옳다고 여김을 받지 못하더라도 답답해하지 않는 것은, 덕을 이룬 선비나 땅을 편안히 여기고 하늘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를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集註言君子而復歸於學之正習之熟說之深 何也 勉齋黃氏曰 學而至於成德 又豈有他道哉 其所自來者 亦不過是而已 非體之之實 孰能知之哉 누군가 묻기를, “집주에서 군자이면서도 배움이 바르고 익힘이 익숙하고 기뻐함이 깊은 경지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면재황씨가 말하길, “배워서 덕을 이루는 경지에 이르는 것에, 또 어찌 다른 길이 있겠는가? 그것이 말미암아 유래한 바는 역시 이런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체행하기를 실질적으로 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능히 그것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此章總言 始學始終三者之序 有淺深而無二道也 又慮夫敏者 躐等而進 怠者半途而止 昧者又或離析以求之 或失其正而陷於異端 故復發此義而使之正其始之所學 然後時習以熟之 則夫說之與樂 可以馴致 初不待外求而得也 又曰不極其至 則無以成其德 故又以此說終之 경원보씨가 말하길, “이 장에서는 처음으로 배우는 자가 시작하고 끝맺을 3가지의 순서를 총체적으로 말하였는데, 얕고 깊음은 있지만 두 가지 길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저 재빠른 자는 등급을 뛰어넘어 나아가고, 게으른 자는 중도에서 그만두며, 우매한 자는 또한 간혹 (正道에서) 떨어져 나와서 구하기도 하고, 간혹 그 올바름을 잃고서 이단에 빠질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에, 이 義(합당함)를 다시 드러냄으로써 그로 하여금 자기가 처음에 배운 바를 바르게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한 후에 수시로 익혀서 익숙하게 한다면, 저 기뻐함은 즐거워함과 더불어 그에 차차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니, 처음부터 밖에서 구하기를 기다려서 얻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길, “그 지극함에 이르지 못하면, 그 덕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에, 다시 이 설로써 끝맺음을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集註謂德之所以成 亦在乎學之正習之熟說之深而不已焉 此言極有意味 쌍봉요씨가 말하길, “집주에서 덕을 이루는 방도는 또한 ‘배움이 바르고 익힘이 익숙하며 기뻐함이 깊으면서 그만두지 않는 것에 있다.’고 말했는데, 이 말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라고 하였다.
此章六句 其工夫只在第一句上 其餘五句 皆是效驗 이 장의 6구절 중에서 공부하는 것은 그저 첫 번째 구절 위에 있을 따름이고, 그 나머지 5구절은 모두 그 효험이다.
雲峯胡氏曰 此章重在第一節 而第一句時習二字 最重 故上文釋習字曰 學之不已 此曰 學之正習之熟說之深而 又曰不已焉 於此見 朱子喫緊敎人處 운봉호씨가 말하길, “이 장은 제1절에 중점이 있는데, 첫 번째 구절의 ‘時習’ 2글자가 제일 중요하다. 그러므로 윗 글에서 習자를 풀이하여 말하길, ‘배움을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고, 여기에서는 ‘배움이 바르고, 익힘이 익숙하며, 기뻐함이 깊다’고 말한 다음, 또 다시 말하길, ‘그침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주자가 긴요하게 사람들을 가르친 부분을 알아볼 수 있다.”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此推本 所以爲成德之由 不過自學習說中來 然學必貴乎正 習必貴乎熟 說必貴乎深 而又加以不已焉 學之時習以說 乃後二節之本 亦務本之意 신안진씨가 말하길, “이는 근본을 미루는(유추) 것으로서, 덕을 이루는 방도가 배우고 익히며 즐거워하는 가운데로부터 오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배움은 반드시 올바름을 귀하게 여기고, 익힘은 반드시 무르익음을 귀하게 여기며, 기뻐함은 반드시 깊음을 귀하게 여기는데, 다시 여기에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을 덧붙였으니, 배운 것을 수시로 익혀서 기뻐한다는 것이 바로 뒤 2절의 근본이니, 역시 근본에 힘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4 | ○ 程子曰 : “樂由說而後得, 非樂不足以語君子.” 정자가 말하길, “즐기는 것은 기쁨으로 말미암은 후에 얻는 것이니, 즐기는 경지가 아니라면, 군자라고 말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였다.
朱子曰 惟樂後方能進步 不樂則何道以爲君子 주자가 말하길, “오직 즐거워한 후에 바야흐로 능히 진보할 수 있으니,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어떤 길로써 군자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集註凡推說本章正意 外之餘意 必加一圈以間隔之 此又以三節下三句發明餘意也 必有成己之說 方可進於及人之樂 然非造於樂之地步 又不足以言成德君子也 夫學者所以學爲君子 學由說以進於樂而至於能爲君子 學之能事 畢矣 朱子云 論語首曰 學而時習之 至不亦君子乎 終曰 不知命無以爲君子 此深有意 蓋首篇首章末篇末章 皆拳拳以君子望學者 宜乎朱子以爲深有意焉 신안진씨가 말하길, “집주에서는 무릇 본장의 正意 밖의 나머지 뜻을 미루어 말한 경우에는, 반드시 동그라미 하나를 덧붙여서 간격을 두었다. 여기서는 또한 3절 아래의 3구절로써 나머지 뜻을 드러내어 밝힌 것이다. 반드시 자신을 완성하는 즐거움이 있어야만, 바야흐로 (자신의 善으로) 남에게 미치는 즐거움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즐기는 경지에까지 나아간 것이 아니라면, 또한 덕을 이룬 군자라고 말하기에 부족한 것이다. 무릇 배우는 자는 군자가 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배움이 기뻐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움에 나아가서 능히 군자가 되는 경지까지 이른다면, 이는 배움의 能事가 다 마쳐진 것이다. 주자가 말하길, 논어가 처음에 學而時習之(배워서 수시로 익히면)에서 不亦君子乎(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에 이르기까지 말하고, 마지막에 不知命無以爲君子(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를 말하였으니, 이는 깊은 뜻이 있다고 하였다. 대체로 첫 편의 첫 장과 마지막 편의 마지막 장에서, 모두 군자가 되라고 배우는 자들에게 간절하게 바랐으니, 주자가 여기에 깊은 뜻이 있었다고 생각한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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