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계곡 꽃사태… 섬진강이 노랗게 물들었습니다
# 지리산 아래 가장 '봄다운 꽃' 산수유의 꽃구름
따스한 봄볕이 내리쬐는 오후 나절.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하는 동요 '고향의 봄'이
절로 흥얼거려진다면 구례로 떠날 일이다. 전남 구례에서 만나는 이즈음의 봄꽃 정취가 동요의 가사와
꼭 같다.
↑ ‘봄의 강’이라 할 수 있는 섬진강의 구례 구간에서 성급한 젊은이들이 봄볕아래 래프팅을 즐기고 있다.
지리산 10경 중 마지막 절경을 섬진청류(蟾津淸流)라 이르는데, 봄날의 섬진강은 ‘청류(淸流)’란 이름에 걸맞게 맑고 푸르다.
이맘 때 구례에서 만나는 산수유꽃은 어찌 보면 가장 '봄다운 꽃'이다. 한꺼번에 폭죽처럼 피어나서 온통 꽃사태를 이루는 것도 그렇고, 사람 사는 마을의 돌담길에 어우러져 샛노란 꽃구름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일찍 피기로는 매화가 으뜸이고, 매화 역시 인근 섬진강변의 산자락을 가득 메우긴 하지만, 모름지기 매화의 진면목이란 오래된 고목의 가지에서 한 송이씩 꽃을 틔우는 데서 나오는 법. 심어 가꾼 농장의 매실나무에 다닥다닥 꽃이 열리는 모습은 화려할지언정, 그윽한 맛이나 풍류는 덜하다.
반면 산수유의 경우는 사람 사는 산골마을을 구름처럼 감싸며 흐드러지게 꽃사태를 이뤄야 제맛이다. 복사꽃과 살구꽃은 아직 이르지만 동요에서 등장하는 '꽃대궐'이 바로 이런 그림이리라.
구례에서 산수유 꽃구경의 대표적인 명소가 바로 산동면 상위마을이다. 근래 들어 상위마을 대신 인근의 현천마을이나 계척마을 등이 새로운 산수유 명소로 알려지고 있지만, 사실 이런 곳들은 '한적하다'는 이유로 이름을 알린 곳이다. 해마다 봄이면 산수유 꽃축제가 열리는 상위마을이 몰려든 인파들로 몸살을 앓으면서 비교적 발길이 뜸한 이런 곳들이 각광을 받았던 것이다.
지리산 아래 상위마을은 지금 아예 산수유 꽃속에 들어앉아 있다. 예년보다 꽃소식이 늦어져 지난 주말에 산수유꽃이 육할쯤 개화했으니 이번 주말이면 절정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상위마을이 산수유 꽃구경의 명소로 꼽히는 것은 꽃도 꽃이지만, 이런 척박한 비탈에서 도무지 무엇으로 연명했을지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오래된 집들과 이끼 낀 돌담길, 마을 한복판으로 졸졸 흘러내리는 개울과 부지런히 꽃 위를 나는 벌과 나비에서도 봄의 정취가 물씬 느껴지기 때문이다.
# 지리능선 만복대 아래 비밀스러운 공간
산수유꽃 흐드러지게 피어난 상위마을의 행정구역은 전남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다. '위안'이란 마을이름은 '계곡 위 가장 안쪽 마을'이란 뜻으로 붙여진 순우리말이다. 그 이름처럼 깊고 척박하다. 어찌 이런 곳까지 사람들이 찾아들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이곳에 사람들이 찾아든 것은 임진란의 난리통이었다고 했다. 난리와 우환을 피해 깊이 더 깊이 지리산으로 들었다가 이곳에 거처를 잡은 것이었다.
궁벽한 산촌에서 갈아 부칠 만한 땅 한 뙈기 변변치 않았으니 산수유나무를 심고 열매를 따서 내다 팔아 연명할 수밖에 없었겠고, 그 흔적이 지금까지 남아서 흐드러진 꽃대궐이 된 것이다. 그러니 이 마을에서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만 할 수 있을까.
위안리에서는 꽃구경에만 정신 팔지 말고 고개를 들어 마을 뒤편의 지리능선을 올려다볼 일이다. 마을 뒤쪽으로는 해발 1500m를 오르내리는 백두대간과 지리산 서부능선 자락이 겹쳐진다. 능선에 우뚝 서있는 것이 지리의 10대 봉우리 가운데 하나라는 만복대다. 밤새 내린 눈이 쌓인 봉우리는 기암도 아니고, 그려내는 곡선도 별다를 것 없지만 우람한 그 품의 크기가 자못 당당하다.
위안리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저수지 위안제가 있다. 만복대에서 발원한 지리의 맑디맑은 물을 담고 있다. 인근 주민들이 그 물 그대로 식수로 쓰고 있어 철제 울타리로 닫아 걸고 물가로의 접근을 막고 있지만, 길 옆에서 건너다보는 풍광만으로도 감탄스럽다. 눈내린 이튿 날이어서 지리산은 눈에 덮여 있는데, 맑은 물빛과 아름드리 나무, 그리고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산수유꽃이 한데 어우러져 선경을 빚어내고 있다.
위안제의 담긴 물은 계곡을 따라 '서시천'으로 흘러 섬진강에 합류한다. 만복대에서 가지를 쳐서 내려온 봉우리는 '영제봉'이고, 마을이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산은 '지초봉'이다. 만복대와 서시천, 지초마을, 영제봉…. 두루 붙여진 삼상찮은 이름들을 짚다보니 아무 단서가 없긴 하지만, 진나라 시황의 명으로 불로초를 찾아 수천 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와 함께 이 땅을 찾았다는 서복에까지 생각이 가닿는다.
# 척박한 마을마다 봄꽃 피어나는 이유
위안리 쪽에서 올려다보자면 지리능선을 타넘는 고개들이 가늠된다. 왼쪽이 잘록한 능선을 넘는 것이 숙성치이고, 이쪽이 다름치, 여기는 벽소령…. '별(星)이 자고(宿) 넘는' 고개라는 서정적인 이름을 가진 숙성치 부근에서는 지리산에서의 마지막 곰사냥 이야기가 마치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위안리 인근 마을 노인들은 1963년 무렵 전북 군산 출신의 포수가 노고단을 넘는 곰을 추격해서 숙성치 인근에서 총을 쏘아 쓰러뜨렸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것이 지리산에서의 마지막 곰사냥이었단다.
다름재는 구례사람들이 남원의 운봉장을 가기 위해 콩이며 곡식자루를 지고 넘던 고갯길이었다. 동학혁명 당시에는 구례 동학군이 남원의 접주 김계남과 합류하기 위해 이 고개를 넘어갔다. 이 길을 넘어 김계남의 세력과 합세한 구례동학군은 여원치 싸움에서 대패했고, 그날 김계남은 죽었다.
패잔병들은 무너진 천지개벽의 꿈을 다독이며 이 고개를 넘어 되돌아왔으리라. 이런 수많은 이야기들이 잠겨있는 숙성치와 다름재 아래에는 달전마을이 있고, 그곳에도 어김없이 산수유가 꽃대궐을 이루고 있다.
어디 이들 고개뿐일까, 구례 땅에서는 어디서든 지리산 깊은 골로 방향을 잡는다면 매화며 산수유를 만날 수 있다. 상위마을과 마찬가지로 갈아 부칠 땅이 부족한 척박한 산자락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살자면 산수유를 심고 매실을 거둬야 했기 때문이다. 꽃놀이나 하자고 심은 것들은 아니지만 산간벽촌의 마을과 어우러진 봄꽃들은 나른한 산촌마을의 봄의 정취를 오롯이 전해준다.
화엄사의 아래 자락으로 드는 길에서도, 토지면에서 문수계곡을 따라 문수사로 드는 길에서도, 지리산 성삼재를 타고 넘는 길이 시작되는 천은사 부근에서도, 중기마을에서 연곡사로 향하는 길에서도 마을과 어우러져 피어난 봄꽃들을 마주할 수 있다. 일부러 가꾼 꽃밭보다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한 마을의 집들과, 초록이 더해가는 보리밭이나 차밭과 어우러져 그윽하다.
# 꽃구경 하며 누룩실재 고갯길을 넘다
구례에는 지리산을 마주하고 솟아있는 긴 능선의 산자락이 있다. 해발고도야 지리산에 어림도 없지만, 구례읍의 갈미봉에서 시작해 천왕봉과 형제봉, 깃대봉,천마산, 견두산, 밤재로 이어지는 능선은 제법 길다. 견두산 아래는 역시 산수유로 이름난 계척마을과 현천마을이 있고, 천왕봉 자락 아래는 '다무락마을'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계산리가 있다.
이 능선을 넘는 고갯길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그 중 이즈음에 찾아가볼 만한 곳이 바로 누룩실재다. 섬진강을 끼고 있는 유곡마을에서 해발 600m쯤 누룩실재를 넘으면 바로 구례읍내로 이어진다. 그러니 곡성 쪽의 마을주민들이 밭에서 거둔 것들을 이고지고 구례장을 보러 이 고개를 넘었다.
섬진강변의 구례에서 곡성 쪽으로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유곡리 마을회관에서 우회전해 마을로 들어서면 비탈진 밭 사이로 운치있는 산골마을의 집들이 이어진다. 마을의 비탈진 밭에도, 허물어져 가는 돌담에도 매화와 산수유가 온통 지천으로 피어 있다. 동요 '고향의 봄'의 가사가 그려내는 '울긋불긋 꽃대궐'이 바로 이런 풍경이리라.
시멘트포장과 비포장이 번갈아 나오는 누룩실재의 고갯길을 다 넘기에는 승용차로는 다소 버겁지만, 얌전히 포장된 유곡리 쪽 고갯길 끝의 상유마을까지만 차로 가서 고갯길 주변을 산책만 한대도 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으리라.
누룩실고개 정상에서 구례 쪽으로 살짝 내려가면 가히 구례를 내려다보는 전망대라 할 만한 곳이 있다. 소나무와 편백나무 숲 사이로 구례 시가지의 모습과 그 너머로 흘러가는 섬진강의 청류가 한눈에 다 담긴다. 봄날의 섬진강 물굽이가 이렇듯 병풍처럼 펼쳐지는 곳이 이곳 말고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구례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익산분기점에서 익산~포항 간 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완주분기점에서 다시 완주~순천 고속도로로 갈아탄다. 고속도로에서 구례 화엄사 나들목으로 나와 19번 국도를 타고 가다 산동교차로에서 산동·지리산온천 방면으로 향한다. 지리산온천에서 상위마을(산수유마을) 이정표가 잘돼 있다.
봄꽃을 보러 가는 여정이라면 남원 인월면에서 지리산을 관통해 성삼재를 넘어가는 길을 택하는 것을 추천한다. 지리산의 성성한 눈밭을 지나서 봄 분위기 완연한 구례 땅에 닿으면, 봄의 기운이 더 감격스럽기도 하고 마치 계절을 따라가는 기분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인월까지 가려면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함양갈림목에서 88고속도로로 갈아타고 지리산나들목에서 내리면 된다.
묵을 곳, 먹을거리
가족단위로 떠난다면 단연 화엄사 입구의 한화리조트 지리산(061-782-2171)이 최고다. 어찌 이런 곳에 리조트를 지을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들어선 자리가 빼어나다. 인근에 지리산 스위스관광호텔(061-783-0156)도 깔끔한 편이다. 구례에는 운치 있는 한옥 민박들이 많다.
한옥펜션 '쌍산재'(011-635-7115)가 단연 대표격이다. 인근에 '곡전재'(019-625-8444)도 있다. 맛집으로는 갈치조림을 내는 읍내 '영실봉식당'(061-782-2833)과 참게탕을 내놓는 신원리의 천수식당(061-782-7738), 전원가든(061-782-4733) 등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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