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중국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虬)는 그의 시(詩) '소군원' (昭君怨)에서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
(춘래불사춘)(이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왔다고 하지만 봄 같지 않구나)" 라고 하며 흉노에게 시집간
궁녀 왕소군(王昭君)의 애달픈 마음을 대신 상상하여 읊음
* 소군원(昭君怨) : 왕소군(王昭君 : 왕자오쥔)의 怨恨이란 뜻으로 唐 詩人 동방규가 지은 詩 3 首가 알려지고 있음
1. 漢道方全盛(한도방전성) 朝庭足武臣(조정족무신) : 한나라는 바야흐로 국력이 흥성하고 조정에는 무신들이 넘쳐나는데
何須薄明妾(하수박명첩) 辛苦事和親(신고사화친) : 하필이면 복 없는 제가 수고롭고도 어려운 화친하는데 나서야 합니까?
2. 掩淚辭丹鳳(엄루사단봉) 含悲向白龍(함비행백룡) : 눈물을 감추고서 단봉성에 작별을 고하고 슬픔을 머금고 흉노땅으로 향하네
單于浪驚喜(선우랑경희) 無復舊時容(무부구시용) : 선우(흉노王)가 몹시 놀라며 기뻐하지만 다시는 예전 모습을 볼 수 없으리
3.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 여기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어서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구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 저절로 허리띠가 느슨해지나 이것은 몸매를 가꾸기 위함이 아닐세
이 詩는 중국 前漢시대(西漢) 11대 황제인 원제(元帝) 때, 왕소군(王昭君)이라는 궁녀의 이야기를 두고 쓴 것이다.
왕소군은 당대 절세의 미인이었지만 흉노와의 화친 정책에 따라 흉노 왕(선우 : 單于)에게 시집을 간 불운한 여인이었다.
왕소군에 얽힌 이야기는 이렇다.
당시 漢나라는 자국의 평안을 위해 북방의 오랑캐인 흉노족과 화친을 할 수 밖에 없었는데, 흉노족의 單于(왕 : 족장)인
호한야(呼韓邪)는 漢族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해 달라고 請하자 漢의 원제는 후궁 중 한 명을 택해서 시집 보내기로 했다.
많은 후궁을 거느린 원제는 화공(畵工 : 모연수)에게 후궁들의 화상을 그려 올리면 그것을 보고 흉노족에게 시집 보낼 후궁을
정하기로 했는데 당시 후궁들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고 그림을 잘 그려달라고 부탁하기도 했지만 절세 미녀였던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않았다. 이를 괘씸히 여긴 화공은 왕소군을 그저 평범하게 그렸으며(일설에는 얼굴에 점을 그려 넣었다고도 함) 이 그림을
본 황제는 왕소군을 흉노족 족장의 아내로 정했다. 그러나 왕소군을 직접 본 원제는 그녀의 뛰어난 용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며 황제를 속인 죄를 물어 화공은 바로 처형되었다. 왕소군은 혼례를 마치고 흉노족이 사는 북방으로 떠나야만 했으며,
고향을 떠나 춥고 황량한 오랑캐 땅에서 살다가 3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이야기이다.
(일설에는 72세까지 살았다고 하며 그녀의 무덤은 풀이 항상 시들지 않는다 해서 靑塚이라 부른다 함)
가장 정확하다고 볼 수 있는 漢書(後漢때 지은 역사서)에는 흉노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가 漢 원제에게 (공주와 결혼해서)
사위가 되길 원하자 당시 (B.C 33년) 궁녀였던 良家子(평민의 자식) 출신의 王藏(字 : 昭君)을 선발해서 시집보냈다는 사실만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왜 과거처럼 공주가 아닌 궁녀를 시집보냈는가에 대해 당시 흉노세력은 크게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으며
더욱이 당시에는 5개의 지파로 나누어져 서로 싸우고 있는 내분 상황이었므로 漢 나라의 사위가 되겠다고 자청한 흉노 선우
호한야(呼韓邪) 입장에서는 漢나라 왕실에서 지명해준 궁녀와 결혼하다고 해서 크게 문제 삼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봄.
* 흉노는 진시황제 이전 부터 중국 국경을 수차례 위협해 온 북방 유목 기마민족으로서 漢 고조 유방(B.C 200년경)은 흉노를 정벌하러 갔다가
백등산에서 포위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후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兄弟盟約을 맺고 매번 공주(일명 화번공주 : 왕소군 직전까지
총 14명)들을 결혼시겨 왔음. 그러나 7代 漢 武帝는 화친정책을 파기하고 흉노를 격멸하기 위해서 장기간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임으로써 이후
흉노족들의 기세는 크게 위축되었는데 11대 元帝(B.C 48~33년) 당시는 單于 호한야가 큰 형 등 다른 선우들과 패권을 놓고 싸우고 있어서 漢의
도움을 받기 위해 동맹 관계를 맺으려고 무척 애를 쓰고 있는 상황이었음. 그가 원제를 알현하고 한(漢)나라의 사위가 되겠다고 나선 것은 선제
(B.C 73~48년) 때인 B.C 51년에 이어 두번째 방문(B.C 33년) 으로서 이때 드디어 왕소군을 맞이하게 되는 것임
그러나 약 1000여년 후 송나라 때 기록했던 後漢書(琴操 편)에는 19살에 어렵게 궁에 들어온 왕소군이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한번도 황제를 보게 되지 못하자 액정령(궁녀들이 거처하는 곳을 통제하던 관리 직책)에게 "흉노에 시집가고 싶다"고 자청해서
떠나게 되었으며 결혼 2년 후 호한야 선우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에게 재가하게 되자 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족들에게는 비록 의붓아들이지만 계모가 아들에게 재가한다는 것은 극도의 혐오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에 35세의 쩖은 나이에
사망한 사실을 바탕으로 이를 비관, 자살한 것으로 기록하지 않았나 생각됨)
한편 후한때 지어진 西京雜記에는 앞에 기술된 바와 같이 왕소군이 궁정화가(畵工)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미움을 받아서
화첩에 추녀로 그려지게 되어 선발되었으며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았지만 어쩔수 없이 보내야 했던 황제인 원제는 화공은 처형
시켰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나 서경잡기에 기록된 대부분의 소재가 당시 시중에 떠도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모아 놓은 기록물
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漢書의 기록에 따르면 B.C 33년 흉노의 선우 호한야(당시 50대 후반 추정) 에게 시집간 왕소군(당시 약 24세 정도 추정되며
호한야 사이에 아들 1명을 낳음)은 2년 후 선우 호한야가 병으로 사망하게 되자 본국 漢나라에 연락해서 돌아가겠다고 간청을
했지만 원제의 후임 황제였던 성제(成帝)가 이를 거부하게 되자 흉노의 관습대로 호한야의 본처(大閼氏 : 2번째 부인) 아들인
복주류약제 선우에게 再嫁할 수 밖에 없었으며 거기서 딸 2명을 더 낳고 35세경 사망했다고 전해 짐
* 선우 호한야는 생전에 왕소군이 와서 흉노족을 평안하게 만들었다고 해서 寧胡閼氏(령호연지)라는 칭호를 내렸다고 기록됨.
여기서 閼氏(연지)는 흉노의 왕비 즉, 單于의 부인을 부를 때 쓰는 명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