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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3월 29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51분)
연구 범위: 출 20:1-17; 롬 6:1-3; 롬 7:7-12; 렘 31:31-34; 마 23:23, 24; 약 2:1-9
기억절: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동정심에 근거해서 결정할 수 없습니다” 교회 직원회가 문제가 있는 구성원에 대해 논의하는 동안 누군가 말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니? 이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사랑은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자세의 중심이 되어야 하며, 특히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대할 때는 더욱 그렇다. 자비는 사랑의 핵심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이다(롬 13:8).
사랑이 참으로 율법의 완성이라면, 우리는 율법을 사랑과 관계없는 다른 것으로 이해하거나 사랑과 율법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경에서 사랑과 율법은 함께한다. 거룩한 율법의 제정자는 사랑이시기에 하나님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엘렌 화잇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의 사본이다”(실물교훈, 305).
하나님의 율법은 추상적인 원칙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번영을 위해 주신 명령과 지침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사랑으로 제정하셨기에 율법은 그분의 사랑의 표현이며 사랑하는 것이 율법을 완성이다.
느끼기: 사랑의 법을 주신 것은 은혜이며 그분은 우리 마음에 그 율법을 새기기 원하신다.
행하기: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법조문을 어기지 않는 것 이상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TMI 위로
2.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어떤 약속을 주신 것입니까?(레 26:12)
3. 하나님이 직접 십계명을 돌판에 기록한 것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까?(출 31:18)
4.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이 은혜입니까? 왜 그렇습니까?(히 8:10)
5. 하나님의 율법을 성취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겠습니까?(사 58:6)
6. 우리가 잘못된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까?(약 2:8)
7.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 주신 그분의 약속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출 33:14)
결론: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모두의 궁극적인 유익을 위한 은혜이다. 율법과 은혜는 대립하지 않으며 사랑과 공의를 따라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에 사랑과 율법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율법의 제정자는 사랑이기에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며 폐할 수 없는 거룩한 법이다. 하나님께 신실한 것은 율법 조문을 어기지 않는 것 이상이며,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3월 23일(일) 사랑의 법
하나님의 법은 추상적인 원칙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십계명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사랑의 원칙이며 그 기본 원칙은 에덴동산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이 선포되고 이후 돌비에 새겨진 것은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를 위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신 후에 십계명이 기록되었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에 근거한 것이다(출 6:7, 8, 레 26:12 참조). 십계명의 두 부분을 보면 십계명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인간 서로 간의 관계의 번영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출애굽기 20:1-17을 읽어 보라. 십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두 가지 원칙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출20:1~17]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7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9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11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13 살인하지 말라 14 간음하지 말라 15 도둑질하지 말라 16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답: 1~4계명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위한 것이고 5~10계명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위한 것이다.
처음 네 계명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머지 여섯 계명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율법의 원칙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율법의 이 두 부분은 예수께서 가장 큰 두 계명이라고 밝히신 “네 마음을 다하 … 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신 6:5 비교)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9; 레 19:18 비교)라고 하신 말씀과 정확히 일치한다.
처음 네 계명은 우리가 온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우리가 서로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방법이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위대한 사랑의 계명이 율법에 내재되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0).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 전체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율법은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고,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듣는다. 왜 이런 생각은 말이 되지 않는가?
<교훈> 하나님의 법은 추상적인 원칙이 아니며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 서로의 관계의 번영을 위한 언약이다.
<부가설명> 교회에서 십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있는 말이 아니다. 성경에 계명이라는 말이 대단히 많이 있지만 십계명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에만 세 번 있다(출34:28, 신4:13, 10:4). 그러나 원문에는 십계명이라는 말이 없다. 이 세 구절에 십계명이라고 번역한 것은 히브리 원문에는 언약의 열 말씀이라고 되어 있다. 십계명은 율법이기 전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언약문서다. 그래서 두 돌판에 새긴 것이다. 언약서는 언약을 체결하는 쌍방이 하나씩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두벌이 필요하다. 하나는 하나님 것이고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것이다. 이 언약문서는 앞 뒤로 새겼다. 열 문장은 길지 않다. 이 언약문서를 새긴 돌판이 얼마나 컸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넣은 언약궤의 크기로 짐작할 수 있다. 언약궤는 길이가 두 규빗 반, 폭이 한 규빗 반, 높이가 한 규빗 반이다(출25:10). 성전 규빗은 한 규빗이 52cm가 조금 더 된다. “제단의 척수는 이러하니라 (한 자는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넓이가 더한 것이라) 제단 밑받침의 고가 일 척이요 그 사면 가장자리의 광이 일 척이며 그 가으로 둘린 턱의 광이 한 뼘이니 이는 제단 밑받침이요”(겔43:13). 한규빗은 54cm 인데 거기에 손바닥 넓이는 보탠 것이기 때문에 52cm쯤으로 본다. 그러면 언약궤는 길이가 1미터 30센티가 된다. 또 나비가 78, 높이도 78센티다. 물론 거기에는 두 돌비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만나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갔다. 금 항아리는 만나 한 오멜을 담는데 한 오멜은 2.2리터다. 그리 큰 항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지팡이는 언약궤 길이만하면 꽤 긴 편이다. 그러니 돌비는 꽤 컸다는 말이다. 그런 두 개의 돌비에 양면에 글자를 쓰셨는데 한 개에 언약의 열 말씀을 1~4는 철 돌판 양쪽, 다른 돌 판에는 5~10을 양쪽에 썼겠는가? 언약의 열 말씀이 두 돌판에 다 쓴 것이다. 그래서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것.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것이었다. 당시 이방 나라들의 관섭에 국가 간에 조약을 맺으면 그 조약문을 각각 자기 신전에 보관했다. 그처럼 하나님의 성소는 하나님이 거하는 곳이요 또 이스라엘의 성소다 그래서 언약궤 안에 둘을 다 넣은 것이다. 그것은 언약문서이다.
<영감의 교훈> 십계명은 사랑의 원칙 - “이 두 계명이 다 사랑의 원칙의 표현이다. 둘째 계명을 범하면서 첫째 계명을 지킬 수 없으며, 첫째 부분을 범하면서 둘째 부분을 지킬 수 없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보좌에 바른 자리를 차지하고 계실 때에 우리 이웃에게도 바른 자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처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할 때만 우리 이웃을 공평하게 사랑할 수 있다”(시대의 소망, 607).
<기도> 온전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법에서 멀리 떠나 있는 우리의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고 주님의 계명을 굳게 지키며 날마다 사랑으로 행하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3월 24일(월)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사랑은 하나님의 율법의 기초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실 때, 그분은 사랑을 지키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신 이유이며, 율법을 지키시면서 동시에 은혜를 베푸실 수 있었던 이유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실 수 있으시다(롬 3:25, 26).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표현인가! 율법은 구속의 과정을 통해 무효화 되지 않으며 오히려 더 확증된다.
로마서 6:1-3과 로마서 7:7-12을 읽되 특별히 7:12을 주의해서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율법, 특히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후의 율법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롬6:1~3]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2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롬7:7~1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답: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와 구원이 율법을 폐지한다고 믿지만, 바울은 은혜를 더하기 위해 죄 가운데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한다.
오히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침례”를 받았으므로 죄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산 것으로 여겨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은 악한 것이 아니며, 다른 무엇보다 죄와 우리의 죄된 본성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롬 7:12)라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그 어떤 것도 아닌 율법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과 구속에 대한 우리의 절실한 필요를 드러낸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지 않고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운다(롬 3:31).
그리스도는 율법을 없애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모든 것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 따라서 그분은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마 5:18)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함, 곧 사랑, 의, 선, 진리의 완전한 성품을 나타낸다(레 19:2; 시 19:7, 8; 시 119:142, 172).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십계명을 돌판에 기록하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출 31:18). 돌에 새겨진 이 율법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에 기초한 그분의 도덕적 통치에 대한 증거이며, 이것이 대쟁투의 중심 주제이다.
<교훈> 하나님은 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이며,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과 사랑에 기초한 그분의 도덕적 통치에 대한 증거로서 율법을 돌에 새기셨다.
<부가설명> 일요일 부가설명에서 말한 대로 원어 구약에는 십계명이라는 말이 없다. 언약의 열 말씀이라고 계시했다. 율법과 언약에서 어느 것이 더 구속력(拘束力)이 강할까? 당연히 언약이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했다.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갈3:15). 율법은 법을 집행하는 자가 자비를 베풀면 범한 사람에게 관용할 수 있다. 관용을 베풀어서 용서했다고 그 법이 없어지지 않고 없앨 이유도 없다. 그러나 언약은 두 사이에 맺은 관계이므로 어느 쪽이든지 어기면 관용이 되지 않는다. 언긴 자가 언약에 포함된 벌칙을 이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언약은 파기된다. 만일 다시 언약을 맺으려면 새로 언약을 맺어야 한다. 내용이 똑같을지라도 새로 체결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새 언약이 된다. 폐기한 언약은 옛 언약이 된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은 언약은 사람이 언약에 머물러 있지 않아서 폐기되었다(히8:9). 그리고 새 언약을 맺는데 거기에는 언약을 어기지 않을 보증인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그것은 영원한 언약이고 예수께서 다 이루셨으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새 언약 안에 있게 되고 언약의 조문을 생활이 되고 생명이 된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우리가 십계명이라고 하는 것을 생명의 도(행7:38), 영생(요12:50, 킹제임스)이라고 한 것이다. 그것이 언약이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폐할 수 없다. 다 이루어야 한다. 예수께서 그것을 다 이루셨는데 언약을 어긴 아담에게 선고된 그 죽음을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을 다 이루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명이다(롬5:8). 우리는 그 언약 안에서 영생의 생명을 얻고 언약의 말씀이 생명의 도이고 영생이기 때문에 언약이 생활이 된다. 이 경험이 우리의 경험이 되도록 성령께서 능력으로 역사해 주시기 기도한다. 아멘.
<영감의 교훈> 율법의 특성들 - “여호와의 율법을 약화시키거나 강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는 과거에도 그러하였고 현재도 그러하다. 이는 항상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완전하였으며 또한 앞으로도 항상 그러할 것이다. 이는 폐지되거나 변할 수 없다. 이를 ‘존중’하거나, ‘모욕’하는 것은 다만 사람들의 말에 불과하다”(선지자와 왕, 625).
<기도> 선하고 거룩하며 의로운 율법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과 사랑에 감사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따르며 주의 율법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원하오니 악하고 불의한 종을 용서해 주시고 주의 말씀을 사랑하여 순종하도록 도와주옵소서.
3월 25일(화) 율법과 은혜
지금까지 살펴본 것같이 율법과 은혜는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그 대신 율법과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따라 각각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면 율법과 은혜의 현저한 대조를 당혹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한 표현으로 여겼다. 이스라엘 주변 국가의 '신들'은 변덕스럽고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신'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이 그들을 기쁘게 할지 알 수 없었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그분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매우 분명하게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바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의 궁극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거나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는 죄된 본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영적으로 새 마음을 받아야 한다.
예레미야 31:31-34을 읽어 보라. 이것은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이 구절을 요한복음 3:1-21에서 그리스도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에 관하여 하신 말씀과 비교해 보라(히 8:10 참조).
[렘31:31~3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32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3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
[히8: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답: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다. 그래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이 된다.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직접 돌판에 새겨 주셨지만(출 31:18),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에도 율법이 기록되어야 했다(시 37:30, 31). 하나님의 사랑의 법은 사람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격 자체에 내재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에 당신의 법을 새기실 수 있으며, 그분은 언약 백성을 위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히 8:10 참조).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이는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킨다.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있기 때문이며, 우리도 그와 같이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를 원한다(요 14:15 참조).
그와 동시에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약 1:22-25, 롬 3:20, 롬 7:7), 구속자가 필요한 것을 보여준다(갈 3:22-24). 율법은 우리를 가장 좋은 삶의 길로 인도하며,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교훈>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모두의 궁극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다. 율법과 은혜는 대립하지 않으며 사랑과 공의를 따라 각각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부가설명> 은혜는 예수님이라고 요1:14과 17에 말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다. 예수님이 진리이신 것처럼 예수님이 은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인간의 요청이 아니었다. 인간은 자기가 사망이 된 것도 모른다. 창조주께서 아담에게 주신 것은 영원한 생명이다(요일2:25). 그것은 죽지 않는 생명이다. 그런데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이 생명을 잃게 되니 사망이 되었다. 그래서 그의 후손은 자기도 모르게 사망의 존재로 출생한다. 오늘날 아담의 후손으로 출생하는 사람이 자지가 사망이 된 것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예수님을 믿을 때 그것을 깨닫게 된다. 사망이 되었으므로 생명만이 걸어가는 생명의 도인 언약의 열 말씀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없다(롬8:7). 이제 예수님을 믿어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면(요5:24), 그 생명이 그 사람을 생명의 길을 걷게 한다. 생명이기 때문에 생명의 길 외에 걸을 길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명을 영생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 분의 계명이 영생임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이르는 것이라.”고 하시더라”(한글킹, 요12:50). 우리가 심판의 때 소망이 있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생명을 가진 표징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생명과 사랑과 계명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다. 그것을 가지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다.
<영감의 교훈> 은혜의 언약 - “은혜의 언약은 에덴에서 처음으로 사람으로 더불어 맺어졌고 타락 후에,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다. 이 언약은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제공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하여 순종할 수 있도록 돕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공하였다. 그것은 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을 조건으로 그들에게 영생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족장들은 구원의 소망을 갖게 되었다”(부조와 선지자, 370).
<기도> 우리 안에 은혜의 율법을 새겨 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감사드립니다. 주의 말씀을 잊거나, 무감각해지기 쉬우니 영적으로 깨어 있도록 은혜를 주시고, 세상에 거하지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도와주옵소서.
3월 26일(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사랑과 율법의 관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실제로 성경은 사랑하는 것이 율법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루었”(롬 13:8)다 가르치며, 십계명의 마지막 여섯 계명을 나열한 후 이 모든 것이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다고 선언한다(롬 13:9).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롬 13:10)라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갈라디아서 5:14은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갈 5:14)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렇다면 율법을 이루는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그런 사랑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마태복음 23:23, 24을 읽어 보라. “율법의 더 중한" 문제는 어떤 것인가? 신명기 5:12-15과 이사야 58:13, 14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율법(특히 안식일 계명)과 정의와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보여 주는가?
[마23:23,24]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4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신5:12~15]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14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사58:13,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답: 율법의 더 중한 것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드러난다. 안식일은 이렇게 살아온 한 주일을 하나님께 크게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고 이것을 실천할 삶의 능력을 더 구하는 복된 생명의 날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더 중한 바”를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고 말씀하신다. 특히 안식일 계명과 관련하여, 우리는 성경에서 안식일 자체가 구원과 정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명기 5장에서 안식일 계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노예 상태에서 구원하신 것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것은 안식일이 창조의 기념일일 뿐만 아니라 노예 생활과 압제로부터의 구원을 기념하는 날인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신을 즐겁게 하는 일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안식일의 즐거움으로 삼으라는 말씀의 의미는(사 58:13, 14) 선을 행하고, 굶주린 자를 먹이며, 집 없이 떠도는 자에게 집을 제공하는 등의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과 정의의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사 58:3-10).
이 가르침과 성경에 주어진 많은 가르침을 고려할 때, 사랑을 통해 율법을 성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행하는 죄만 아니라 태만한 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율법을 이루는 사랑은 단순히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만 아니라, 정의와 자비를 성실히 증진시키는 사랑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포함한다. 하나님께 신실하다는 것은 단순히 율법 조문을 어기지 않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교훈> 하나님께 신실한 것은 단순히 율법 조문을 어기지 않는 것만 아니라, 정의와 자비를 성실히 증진하는 사랑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포함한다.
<부가설명> 오래 전에 작고한 한국의 동화 작가 마해송 선생은 ‘토끼 삼형제’라는 장편 동화에서 원숭이들이 토끼 나라를 점령하고 토끼에게 원숭이 훈련시키는 내용을 썼다. 그래서 토끼에게 꼬리를 길게 만들어 붙이고 얼굴의 털을 다 밀고 붉은 칠을 하고 나무에 올라가는 훈련을 죽어라고 시킨다. 그렇다고 토끼를 원숭이가 되도록 할 수 있을까? 절대로 안 된다. 씨가 다르다. 부모 토끼가 훈련을 받아서 원숭이 모습이 되고 원숭이처럼 살게 되었다고 해도 새끼를 낳으면 토끼를 낳지 원숭이를 낳지 못한다. 토끼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재림교회가 이꼴이 아닌가 싶다. 거듭나지 않았는데, 거듭난 사람처럼 살라고 다그치는 것이 교회가 주는 교훈이 아닌가 싶다. 내가 지나치게 말하는가? 예수님은 나무 비유로 분명히 가르치셨다.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 맺을 수 없고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 맺을 수 없다(마7:16~18). 그런데 아직 좋은 나무가 안 되었는데 좋은 열매 맺는 훈련하면 좋은 열매가 맺는다고 가르친다면 거짓 선지자 아닐까?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의 씨(생명)로 나는 것이다. 이 씨로 나면 죄를 짓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고 성경이 약속했다(요일3:6~9). 이렇게 나면 좋은 나무, 곧 의(義)의 나무가 된다(사61:3). 그러면 의의 열매 맺지말라고 해도 의의 열매만 맺을 것이다. 좋은 나무, 의의 나무는 예수님이시다. 우리는 그분에에 접붙여진 가지들이다. 포도나무 비유가 이것을 가르친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절로 열매를 맺는다(요15:1~6).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해야 한다. 죽은 행실을 회개해야 한다(히6:1).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은 곧 생명 얻는 회개를 하는 것이다(행11:18). 이것이 오늘날 재림교회에 가장 시급한 문제다.
<영감의 교훈> 사랑은 율법의 완성 - “하나님의 율법은 바로 그 본질상으로 불변이다. 그것은 율법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의 뜻과 품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므로 그분의 율법도 사랑이다. 율법의 두 가지 큰 원칙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롬 13:10)다. 하나님의 품성은 의와 진리이며 그의 율법의 본질도 마찬가지이다. 시편 기자는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시 119:142)시니이다 라고 말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467).
<기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행복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주께서 채워주신 소중한 사랑을 우리의 삶 속에서 나타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주의 것을 닮기에 부족한 종에게 은혜를 주셔서 귀한 뜻이 주위에 나타나도록 도와주옵소서.
3월 27일(목) 무엇보다 서로 사랑하라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면, 단순히 잘못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는 온전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켰다고 할 수 없다. 성경에 충만하게 표현된 사랑의 율법은 우리에게 악을 행하지 말라고 명령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즉 다른 교인만이 아니라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온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행동하라고 촉구한다.
야고보서 2:1-9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이 우리에게 전하는 중요한 기별은 무엇인가?
[약2:1~9]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답: 선한 이웃이 되라는 기별이다. 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거짓 믿음이다. 의의 나무이면 의를 맺는다.
야고보는 사회의 불의를 강력하게 비난하며, 특히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과 일부 부유한 사람들이 자행하는 억압을 지적한다. 그런 다음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강조하며 이것을 행하면 “잘하는 것”(약 2:8)이라고 말한다.
엘렌 화잇은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을 향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영광의 왕께서 우리와 하나가 되신 것은 이 사랑을 우리에게 심고 우리로 한 가족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는 그리스도의 고별의 말씀이 성취될 때, 곧 그분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 때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사명이 성취된다. 우리 마음 속에 하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적합한 자가 된다”(시대의 소망, 641).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늘에 합당하게 된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얼마나 강력한 표현인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명령하신다. 그분은 또 이렇게 선포하신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요일 4:8, 16).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해야 한다(요일 3:11; 4:20, 21 비교).
따라서 베드로전서 4:8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히 10:24, 살전 3:12 참조).
<교훈>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면, 잘못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는 율법을 지켰다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증거가 필요한 세상을 향해 사랑을 나타내라고 요구하신다.
<부가설명> “우리 마음 속에 하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적합한 자가 된다”라는 표현이 바르게 표현된 말이다. ‘우리가 하늘에 적합한 자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면 마음에 하늘이 이루어진다’라고 한다면 거짓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공부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정말 거룩한 씨(사6:13)로 출생하는 경험을 하게 하시기를 간구한다. 성경은 생명을 얻으라고 가르친다. 착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얻으라고 한다. 그 생명은 예수님 안에서 자아가 죽을 때 가능하다. 그래서 침례는 죽고 장사되고 부활하는 것을 표상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이 생명을 얻으면 그 생명이 나를 살게 한다. 바울이 이 고백을 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그렇게 기도한다. 그래도 자아가 자꾸 튀어나온다. 성령님, 정말 이 종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자아가 죽고 장사되고 예수님의 생명을 부활하도록 날마나 역사해 주소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아멘.
<영감의 교훈> 새 계명 -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계명이 제자들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새로운 이념과 충동이 그들을 지배하여야 하였으며 새로운 원칙이 그들로 말미암이 실행되어야 하였으며 그분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그들이 사랑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여야 된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아셨다.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은 그리스도의 자아 희생의 빛 가운데서 한 새로운 의미를 가졌다”(시대의 소망, 677).
<기도> 무엇을 우선으로 생각해야 할지를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을 우선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면, 혹시 그것의 중요함을 놓치고 있다면 오늘 저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고,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신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3월 28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시대의 소망 70장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읽어 보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자들은 목자장의 섬김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생수를 마시며 만족할 것이다. 그들은 자극적인 오락이나 저희 생애에 어떤 색다른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가장 큰 흥미의 화제는 멸망하여 가는 영혼들을 어떻게 구원할 것인가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사교(社交)는 유익한 것이 될 것이다. 구주께 대한 사랑이 마음을 연합하게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역자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그분의 약속을 무관심하게 내뱉지 않을 것이다. 그분의 약속은 우리의 마음에서 불타오를 것이며 우리 입술에서 뜨겁게 발하여질 것이다. 모세가 무지하고 훈련되지 않았으며 반역하는 백성을 위해 봉사하도록 부름받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네게 평안을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고 약속하셨다(출 33:14, 3:12). 이와 같은 약속은 괴로움과 고통을 당하는 그분의 자녀들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어진 것이다"(시대의 소망, 641).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1. 고린도전서 13:4-8을 읽어 보라. 고린도전서 13장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가?
*답: 사랑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2. 마태복음 25:31-46의 말씀은 무엇으로 양과 염소의 무리를 구분하는가? 어떻게 하면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답: 사랑의 봉사 여부로 구분한다. 사랑이 된 사람은 그렇게 살게 된다.
3. “그분이 세상을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 때 우리에게 주신 그분의 사명이 성취된다. 우리 마음 속에 하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적합한 자가 된다.” 당신은 이 말씀을 어떤 의미라고 이해하는가? 이 말씀은 하나님의 본성과 천국의 본질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어떻게 하면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빛과 정의를 구현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더욱 천국의 시민답게 살 수 있겠는가?
*답: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생명, 곧 하나님의 씨로 나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다.
4. 사랑과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지역사회에 나타내기 위해서 당신의 지역 교회는 어떤 실질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겠는가? 당신의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어떤 것을 잘하고 있는가? 더욱 개선하고 집중해야 할 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에 관해 공부한 내용을 실천하기 위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가 어떤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겠는가?
*답: 각각 대답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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