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로 대장에 올라 어깨에 별 넷을 단 백선엽 장군에게는 당시 진급식 장면을 찍은 사진이 없다. 공식 행사를 사진 기록으로 남기기에는 모든 것이 부족했던 대한민국의 사정 때문일 것이다. 대장 진급 1년 뒤 경무대의 행사에 참석한 백선엽 대장(앞줄 왼쪽)이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백선엽 장군 제공]
새해의 시작은 여러 가지로 바쁜 편이다. 여러 가지 업무를 구상하고 준비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전선의 상황은 엄동설한(嚴冬雪寒)의 날씨 속에서 커다란 변동 없이 그렇게 유지되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그런 추운 날씨 탓인지 적은 별다른 동향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구의 육군본부도 흔들림 없이 그런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1953년 새해의 첫 달이 막 지날 무렵이었다. 그저 그렇게 일상적인 업무에 파묻혀 있었다.
육군본부의 내 집무실은 따로 있었다. 참모총장이라는 자리의 비중 때문에 누군가와 함께 사무실을 쓸 수는 없었다. 내 방 옆으로는 참모들이 쓰는 방이 별도로 있었다. 그곳에서 참모차장을 비롯한 여러 명의 국장과 실장 등이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 참모총장 비서실장으로는 박진석 장군이 일을 하고 있었다. 내 하루 일과와 행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챙기는 직책이었다. 언뜻 바라본 박 비서실장은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왔다 갔다 하는 모양새가 이상해 보였다. 나는 열린 방문 사이로 박 비서실장이 마침내 무엇인가를 들고 지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언뜻 보니 별 넷이 달린 장군 계급장이었다. 나는 내가 해야 하는 일에는 많이 매달리는 성격이지만, 나와 관계가 없는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편이다. ‘저 사람이 왜 계급장을 들고 다니나’라는 생각도 해 봤을 법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는 아무런 기억이 남아 있지를 않다. 무심하게 넘어간 그 박 실장 손의 계급장은 사실 나를 위해 마련한 것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그해 1월 31일쯤으로 기억하는데, 부산의 경무대로부터 “대통령께서 부르시니 빨리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나는 대통령이 무슨 일로 부르는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그저 ‘또 다른 지시가 있겠지’ 하면서 부산으로 향했다.
경무대에는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도 와 있었다. 그는 곧 한국을 떠날 상황이었다. 오랫동안의 군인 생활을 마감하고 곧 미국으로 돌아가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갈 입장이었다. 대통령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대기실에서 나는 대통령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경무대 비서들의 움직임이 수상쩍었다. 그들은 분주히 경무대 안을 돌아다니면서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중 한 비서가 들고 있는 쟁반 비슷한 것을 봤는데, 아무래도 대구의 육군본부에서 박진석 비서실장이 들고다니던 별 넷의 대장 계급장인 것 같았다.
이어 나는 비서의 말에 따라 대기실에서 응접실로 들어섰다. 잠깐 기다리고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밴플리트 장군과 함께 나타났다. 나는 일어서서 거수경례로 대통령을 맞이했다. 그러자 응접실에 서 있던 비서 한 사람이 정중한 목소리로 “지금부터 백선엽 장군의 진급식을 시작하겠습니다”라고 말을 꺼냈다.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안이 벙벙했다. 별 셋을 달고 있던 내가 진급을 한다면 대장이라는 얘기였다. 순간적으로 나는 어떤 영문인지 몰랐다. 한국에서 대장이 나온다는 것은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어려웠다. 별 넷의 대장은 상징적인 자리였다. 아직 증강된 국군이 아니었다. 그저 10개 사단으로 어렵사리 미군의 지원을 얻어가면서 전선의 북한군과 중공군에 맞서는 처지에 불과했다.
백선엽 중장을 대장으로 승진시킨다는 임명장.
그런 상황에서 진급식이라니…. 더구나 나는 만 32세였고, 아울러 꼭 1년 전에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 사령관으로서 중장 계급장을 단 처지 아니었던가. 그러나 엄연한 현실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무런 말 없이 내 옆에 다가섰다.
이 대통령이 내 오른쪽에 섰고, 왼쪽에는 밴플리트 장군이 섰다. 이 대통령과 밴플리트 장군은 비서들이 건네는 별 넷의 대장 계급장을 오른쪽과 왼쪽의 내 옷깃에 달아줬다. 이어 이 대통령이 만면에 웃음을 띤 채 “백 총장, 자네가 우리나라 첫 대장이 되는 걸세. 옛날에는 말이야, 임금님만 됐던 거야. 그러나 지금은 리퍼블릭(공화국)이야. 자, 축하하네”라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더 믿기지 않았다. 1946년 국방경비대로 출범한 뒤 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을 거쳐, 북한군의 공세에 밀렸다가 겨우 자리를 잡은 국군이었다. 그런 형편에 내가 대한민국 최초의 대장 자리에 오른다는 것이었다. 감격에 겨운 면도 있었지만, 내 앞에서 전선을 막아내며 공산군의 침략을 저지하던 적지 않은 선배 군인들을 계급으로 뛰어넘는다는 것이 송구스럽기도 했다. 병력 20만 명에 한 사람꼴로 대장을 둔다는 미군에서도 별 넷의 대장은 손에 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육군참모총장과 각 통합군 사령관, 해군과 공군 참모총장, 해병대 사령관 등을 합쳐야 겨우 10여 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 미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병력과 화력이 빈약한 국군에서 내가 첫 대장 계급장을 단다는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대장 자리에 올랐다. 이 대통령이 “옛날에는 임금만 달았다”는 얘기는 원수(元首)를 일컬음이다. 모든 것을 통어(統御)하는 자리인 원수라는 직책은 과거 왕조 시대에 왕이나 할 수 있었던 자리라는 얘기였던 것이다. 송구한 마음도 없지 않았고, 자랑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책임만큼은 별 셋의 육군참모총장 때보다는 훨씬, 아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졌다는 생각이 앞섰다. 나는 그렇게 별 넷의 계급장을 달고 그날 오후에 있었던 밴플리트 장군의 학위 수여식에 참석했다.
대장 자리에 오른 내 첫 공식 행사였다. 밴플리트 장군은 은퇴를 앞두고 있었다. 전쟁으로 부산에 피란을 온 서울대학교가 이한(離韓)을 앞둔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는 자리였다.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한 여러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진급 신고식을 했다. 그러나 내가 진급했다는 사실보다는 한국의 최고 지원자였던 밴플리트 장군이 곧 한국을 떠난다는 사실이 머리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