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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rry Vale이 부르는 'Eternally'
[ 세기적인 천재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 ]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심정을 당신은 진심으로 아시나요? 웃음이 눈물이고, 눈물이 웃음이었던 절박한 생을 태산처럼 밀고 간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실망과 근심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탈출구는 철학이나 유머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세기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이 한 말입니다. 헐렁한 바지에 슬프도록 큰 낡은 구두를 신고 지팡이를 빙빙 돌리며 자박자박 걸어가는 짧은 콧수염의 찰리. 그의 희망은 오직 웃음이었습니다. 머리에 겨우 얹힌 중산모처럼 언제 어떻게 바닥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시간들을 그는 유머로 건너갔지요.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심정으로……. 그리고 그는 다시 말합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입니다.” 그래서 채플린은 모두에게 위대했습니다. 멀리 보면 다 희극이라는 그의 말이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소중한 생명이 되었습니다.
채플린의 유년은 ‘런던의 가난’ 그 자체였습니다. 한 때는 다재다능한 배우였지만 술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 찰스 채플린, 뮤직홀 배우였지만 목소리에 이상이 생겨 그만두고 결국에는 정신질환을 앓아야 했던 어머니 해너 채플린, 어머니가 중년 남자와 아프리카로 사랑의 도피를 벌여 낳은 이복형 시드니 그리고 참혹한 가난. 그것이 찰리의 유년이었습니다. 그 막막함에도 유일한 위안이 있었다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배우의 기질이었지요.
* <모던 타임즈>에서
아역배우로 일하면서 겨우 끼니를 이어가던 채플린은 다섯 살 때 첫 무대에 섰고, 열 살 때 극단에 들어가 연기 경험을 쌓았습니다. 열일곱 살 무렵 영국 최고의 인기 희극극단 프레드카노 극단 단원이 되었고, 1912년 미극 순회공연 중 영화제작자 M. 세네트의 초청을 받아 할리우드에 입성합니다. 절망을 절망하지 않았던 다섯 살 희극배우의 신산했던 삶의 문이 열리고 드디어 신세계를 향해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영화제작자 세네트가 찰리에게 말했습니다. “아무거나 좋으니 우스운 분장을 하고 나와 보게.” 그때 채플린은 부조화스러운 것을 생각했고, 그 결과가 우리가 채플린의 상징처럼 알고 있는 바로 그 모습입니다. 그것을 보고 포복절도하는 세네트에게 찰리는 인물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이 인물에 대해 설명드릴 것 같으면, 정말 다재다능한 사람입니다. 뜨내기 이면서 신사, 시인, 몽상가인가 하면 외톨이이기도 하죠. 항상 로맨스와 모험을 꿈꿉니다. 그리고 남이 자신을 과학자, 음악가, 공작, 폴로 선수로 알아주었으면 하지요. 그렇지만 겨우 한다는 짓이 담배꽁초나 주워 피우거나 아이들 코 묻은 사탕이나 뺏어 먹는 거예요. 그리고 가끔이기는 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면 부인의 궁둥이도 서슴지 않고 걷어찹니다.”
* <독재자>에서
위대한 찰리가 막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부조화의 절묘한 조화, 풍자와 해학의 정신이 깃든 쓸쓸한 ‘뜨내기’의 출현으로 우울과 절망에 빠져있던 전 세계가 열광을 하게 됐습니다. 이제 그는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말합니다. “내 이름은 찰리!”라고.
그 이후 찰리는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1914년 그의 첫 영화가 개봉된 뒤 수십 편의 영화를 스스로 제작합니다. 그 모든 성공에 대해 찰리는 “황홀하고도 쓸쓸한 인기”라고 했습니다.
찰리의 성공을 만들어주었던 미국은 돌연 그에게 공산주의자라는 오명을 씌었고, 그 비난을 견디다 못한 채플린은 미국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합니다. 그곳에서 자손들과 여생을 보내다가 1977년 12월 25일 수면 중에 사망합니다. 예수의 탄생과 찰리의 죽음.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도 기막힌 연기를 한 것 같습니다.
* 영화 <키드>에서
[ 마지막 반려자, 우나 오닐과의 지극한 사랑 ]
한평생 남을 웃기면서 살아간 20세기 최고의 희극배우 이름이 찰리 채플린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는 남을 잘 웃기기만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스꽝스런 몸짓에는 슬픔이 숨어 있었고, 어색한 웃음에는 애수가 담겨 있었습니다. 채플린은 남을 웃기고 돌아서서 혼자 울었던 사람입니다. 우나 오닐과 결혼하기 전까지 명성과 돈이 따라다니긴 했지만 그 의 삶은 불행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채플린은 자신이 만든 영화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여배우 세 사람과 결혼했으나 모두 얼마 못 살고 헤어지고 맙니다. 화려한 생활을 추구할 뿐 가정의 화목은 뒷전에 두는 여배우들의 인생관을 채플린이 미처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혼할 때마다 엄청난 위자료를 주어야 했고, 언론은 입방아를 찧어대 배우로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생은 계속 꼬이기만 했던거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배우가 되겠다고 찾아온 조안 배리라는 여인에게 친절하게 대했던 채플린은 끔찍한 일을 겪습니다. 내가 당신 애를 가졌으니 위자료를 내놓으라고 연일 협박전화를 하던 그 여인은 채플린이 들어주지 않자 친자확인소송을 낸 것입니다. 신문에는 ‘아이를 배게 한 채플린, 경찰을 불러 여자를 집에서 내쫓다’, ‘채플린, 여자 돈을 다 빼앗고 내버리다’는 등 연일 악의적인 기사가 실립니다.
그가 언론의 화살을 집중적으로 맞은 이유는 사실 딴 데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출세한 채플린이 영국 국적을 고수하는 것이 못마땅한 탓도 있었지만 공산주의자로 몰렸기 때문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침략을 받은 러시아를 원조해 주자고 연설을 몇 번 하자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샀던 것입니다.
게다가 세무서에서는 미납세금을 납부하라고 난리였고, 정치가들은 채플린이 국가 전복을 기도하는 단체와 연계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여기다 아이 아버지가 당신이니까 책임을 지라며 배리라는 여인이 소송을 냈으니 사면초가였습니다.
이때 채플린 앞에 나타나 말벗이 된 시골 처녀가 있었습니다. 그 무렵, 당신의 무죄를 믿고 있으니 꿋꿋하게 대처하라고 말해 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우나 오닐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연령을 초월한 사랑이 무르익자 채플린이 청혼을 하고, 오닐이 ‘예스’라고 답합니다.
오닐은 18세의 처녀요 초혼이었지만 채플린은 네 번째 결혼이었습니다. 이 결혼에 세상의 비난이 쏟아진 것은 당시의 사회 관습으로 보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당대의 대극작가 유진 오닐은 자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린 딸이 늙은 희극배우와 결혼하자 의절해 버립니다.
“왜 당신은 결혼 전력이 세 번이나 있는, 나이가 세 곱절이나 많은 사람과 결혼할 생각을 했습니까?” 결혼식 날 기자들이 몰려와 이런 질문을 던지자 우나 오닐은 당당하게 말한다.
“그건 말하기 어려워요. 미묘한 문제이니까요.” 멋지게 둘러치는 말을 해 기자를 꼼짝 못하게 만들 만큼 오닐은 총명한 데가 있었습니다.
재판에서 채플린이 무죄 판결을 받았을 때 가장 기뻐한 이는 당연히 오닐이었습니다. 판결이 내려진 날 이후에는 또 <베르두 씨>라는 영화가 용공적이라며 재향군인회에서 들고일어나 갖은 고초를 다 겪습니다. 미국 정부는 영국으로 여행을 떠난 채플린 일가에게 귀국 금지령을 내립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채플린은 1953년에야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 정착하여 비로소 안식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 사이에 훗날 영화배우가 되는 딸 재럴딘(지바고에 등장하는 여배우)과 아들 마이클 존이 태어났습니다.
* 영화 <라임라이트>에 등장하는 오닐과의 사이에 난 3자녀
미국이 채플린을 인정해 준 것은 그로부터 20년 세월이 지나서였습니다. “영화를 20세기의 예술로 만든, 세계적인 천재 배우 채플린에게 특별상을 드립니다.” 1972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장에서 채플린은 특별상을 수상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채플린은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합니다. 늘 빈틈없고 헌신적인 아내, 우나 오닐 덕분이었습니다.
[ 대표작 소개, <라임 라이트> ]
人生은 누구에게나 전성기라는 게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한번 지나간 전성기는 영영 다시 오지 않는 것일까요?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그리고,또 다시 한 번을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인생의 황혼기에 재기를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 해보는 이 영화 속의 칼베로(찰리 채플린)에게 그러나 그 화려하였던 전성기는 끝내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20세기 초, 영화라는 획기적인 문명과 문화가 만들어낸 초특급 인기 연예인이었던 그에게도 환갑의 나이가 지난 1950년대는 영화 속의 칼베로와 같이 이미 전성기가 지나간 시절 이었을까요? 1914년의 첫 출연, 그리고 1916년의 첫 제작으로부터 벌써 50년째. 건강상으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활동은 현저하게 줄었습니다. 1950년대에 그는 이 영화와 단 두 편에만 출연하였습니다.
전작인 <살인광 시대(1947)>이후, 무려 5년 만에 시끄러웠던 주위 환경(이른바 매카시 선풍으로 일컬어지는 좌익 사상 논쟁 등)을 극복하고 1950년대에 들어 처음 만든 작품이 바로 이 <라임 라이트,Limelight (1952)>였습니다.
따라서 본인이 직접 기획을 하여 만들어낸 이 영화의 주인공, 칼베로의 이야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채플린 자신의 자전적인 성격을 띤 이야기라고도 할 수가 있죠. 5년 만에 만든 장편 영화답게 채플린은 이 작품을 위해 자신이 가진 재능을 포함한 모든 것을 전부 쏟아 부었습니다.
원작에서부터 제작을 비롯하여 각본, 감독, 출연, 그리고 심지어 주제곡 작곡까지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한군데도 없을 정도의 화려한 그의 원맨쇼였습니다. 물론 네 번째 부인,우나 오닐을 포함한 가족들도 총동원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채플린으로서는 노장은 결코 죽지 않았다는 것을 과시 하듯, 또 마치 구시대의 유물인 Limelight(당시 조명등)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Spotlight 시대에 인생의 제2의 전성기를 다시 맞이한 듯, 전 세계적인 극찬과 좋은 평가들을 받게 됩니다. 비극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영화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 라고 할 수 있는 그 동안의 풍자 희극 스타일과는 엄청나게 차별이 되는 독특한 개성을 지닌 작품입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 감성적인 분위기에서 우리는 이런 스타일의 작품도 잘 만들 수 있다는 채플린의 인간적인 원숙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가지일들로 괴로웠던 미국에서의 시간들(좌익으로 몰렸던 일)이 그를 개인적으로도 확실히 성숙시킨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메리칸 필름으로서는 그의 생애의 마지막 작품인 이 영화가 계기가 되어 채플린은 이 1952년도에 그동안 미운 정 고운정이 다 들었던 미국을 떠나 스위스에서 영주를 시작합니다.
어쨌든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도 있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여러 면에서 인생이란 것에 대하여 다시한번, 思考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 줄거리]
20세기 초 런던. 왕년에 명성을 날렸던 코미디언 칼베로(찰리 채플린)는 런던의 뒷골목에서 가스 자살을 기도하는 젊은 발레리나 테리를 구하게 됩니다. 테리는 류머티즘 때문에 발레리나의 꿈이 좌절되어 절망한 나머지 삶의 의욕을 잃었던 것이죠.
“뭐가 그리 급한가?” 퇴락한 과거의 코미디 스타 칼베로는, 자살을 기도한 이웃 처녀인 테리의 목숨을 살려준 뒤 이렇게 묻습니다.
칼베로는 헌신적인 간호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데, 차비를 마련하려고 그가 가장 아끼던 바이올린을 저당 잡히기도 하고 자신의 이름을 속여 3류 무대에 서기도 합니다. 이런 칼베로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마침내는 테리가 다시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테리는 칼베로의 바이올린 반주에 맞춰 발레 공연을 가져 대단한 성공을 거둡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테리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테리는 발레리나로서 명성을 떨칠 꿈을 안고 어느 젊은 작곡가와 사랑에 빠지자, 칼베로는 그녀의 곁을 떠납니다. 세월은 흐르고, 테리를 잃은 칼베로는 허전한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술에 빠져 폐인이 되다시피 합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테리는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내어 은인을 위한 화려한 재기 무대를 꾸밀 계획을 갖습니다. 이윽고 '위대한 코미디언 칼베로' 재기 무대의 막이 오르고, 칼베로는 포복절도할 열연을 펼쳐 장내는 웃음 바다가 됩니다.
그러나 칼베로는 너무나 열연한 나머지 무대에서 오케스트라 박스로 굴러 떨어지면서 척추를 다치고 맙니다. 다음 순서는 테리의 발레, 라임라이트(照明登)속에서 테리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칼베로는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찰리 채플린의 절정에 달한 연기가 감동과 눈물을 자아냅니다.
첫댓글 블라디고 목소리 듣는지 오래 되었슴다....^^
이번 주말 도봉산에서 볼 수 있을런지...오랫만에 산동무들과...
지금 걷기만하고 모든 운동 올스톱.
무릎고장 기본이 3~4개월 지나야 완쾌 된다고하여 기다리고 있슴다.
즐거운 산행하시길.
아! 그렇구나...몸조리 잘하고 가을에 테니스장이나 산기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