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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남자의 비밀
삼숙의 뜻하지 않은 말에 남자가 홍조를 띄었다.
“고맙습니다 삼숙씨. 저 같은 놈에게 삼숙씨는 너무 과분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한번 본 삼숙씨를 지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솔직한 저의 심정입니다.”
삼숙은 남자의 고백에 얼굴이 붉어졌다.
세상에 나서 처음 받아 보는 남자의 고백에 왈칵 울어버리고 싶었다. 아마 사촌오빠가 끼어들지 않았으면 분명히 울었을 것이다.
두 사람을 이리저리 비교하듯 쳐다보던 사촌오빠가 말했다.
“역시 서로 인연이구나. 참 잘됐다.”
사촌오빠가 거의 입을 귀밑까지 찢으며 웃었다. 삼숙은 사촌오빠가 이렇게 웃는 모습을 본적이 없었다. 지난날의 앙금이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남자의 고백과 사촌오빠의 환하게 웃는 모습이 뒤엉켜 삼숙의 가슴속 앙금을 새롭게 정리했다. 사촌오빠에 대한 지금까지의 인식이 그릇된 건 아닐까?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화선지의 먹물처럼 사촌오빠에 대한 감정은 서서히 퇴색해 갔다.
사촌오빠의 말끝을 잡고 남자가 물었다.
“어느 학교 나왔어요? 오다 보니 길모퉁이에 여학교가 있던데.”
남자의 질문은 삼숙에게 치명적이었다.
학교 이야기에 삼숙의 두 눈이 치켜 올라갔다. 위로 치켜 진 두 눈이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그리고 커졌던 동공이 아주 작게 졸아 들었다. 삼숙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주 미세한 신음이 입안에서 파르르 떨었다.
남자는 자신의 실수를 금세 깨달았다. 급변하는 삼숙의 표정을 보고 남자가 입을 벌렸다. 뒷머리를 연신 긁적거리며 얼른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다.
“아, 제가 실수했네요. 죄송합니다.”
남자는 진심으로 미안해했다.
당황한 남자의 위기를 모면해 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혹시 모를 삼숙의 반격을 가로채려는 건지 사촌오빠가 황급히 말했다.
“공부야 우리 삼숙이 참 잘했지. 허지만 세상사는 게 공부가 다는 아니잖소? 학교는 졸업 못해도 우리 삼숙이 지식이나 인격은 대학생 못잖습니다.”
“아, 저 저, 그런 뜻이 아니구요. 저도 결함이 많은데 어찌 제가 학벌 따지겠습니까? 절대 그런 오해하지 마십시오. 삼숙씨, 정말 죄송합니다.”
남자의 말에 삼숙은 고개를 세 번 가로 저었다.
삼숙은 공부하고 싶었다.
대학은 몰라도 여고는 졸업하고 싶었다.
웨딩드레스는 안 입어도 하얀 교복은 입고 싶었다.
졸다가도 책만 보면 정신이 번쩍 드는 삼숙이었다.
그러나 삼숙은 진학하지 못했다.
지금 앞에 앉아 있는 사촌오빠 때문이었다.
9년 전.
무동력선에서 간신히 갈아탄 작은 동력선 하나로 생계를 꾸려가며 근근이 모은 돈과 대출을 받아 섬에서 40분 거리의 항구도시에, 방 3칸짜리 작은 집을 아버지가 샀다. 평생소원인 4.5톤 어선의 꿈을 접고 집을 산 것은 삼숙이 때문이었다.
삼숙이가 자라 고등학교를 가면 그 집에서 공부하고 학비 댈 요량으로 산 것이다. 문간방을 삼숙이가 쓰고 안채를 세놓으면 삼숙의 공부 밑천은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영특한 삼숙이의 공부는 어떻게 해서라도 마치고 싶었다. 고등학교뿐만 아니었다. 대학에 붙으면 그 집을 팔아서라도 등록금을 댈 각오였다. 운이 좋아 집값이라도 크게 오르고 장학생이라도 되면 미국유학도 보낼 거라고 다짐했다.
어차피 고등학교는 이 도시로 나와야 했다.
섬에 살던 사람들이 한집 두 집 떠나고, 삼숙이네만 남게 되자, 시에서 여러 번 이주를 유도해 오던 중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정권이 바뀌면서 정책도 바뀌었다.
이제까지 적자 운영하던 통학 선을 삼숙이의 중학교 졸업과 맞춰 끊겠다고 통보해 왔다.
작은 불이익에도 사사건건 정부와 맞서는 것이 일반적인데 아버지는 시에 진정이나 항의를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삼숙이 하나 때문에 통학선이 들어와 준 것만 해도 고마운데, 도 넘치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매일아침 통학 선을 타고 등교하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언제나 시장과 선장에게 미안했다.
미안하긴 삼숙이도 마찬가지였지만 젊은 아이와 아버지의 사고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삼숙의 사고는 의무에 앞선 국민의 권리였고 아버지의 사고는 의무나 권리 같은 국민적사고가 아니었다. 도덕과 이목이 앞선 양심이었다.
과한 것은 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사고는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이 분명했지만 아버지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어차피 이주하거나, 삼숙을 도시로 내보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 기로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협의 끝에 집을 사기로 했다. 꼭 삼숙이 때문만도 아니었다. 막상 이주라는 것을 생각하자 한 달은 몰라도 목숨 사그라들 때까지 도시에 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산다고? 우리가 태어나고 우리가 살아 온 이곳이 남은여생, 우리가 마음 편히 등 붙일 곳이다. 라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선언했다. 그리고 집을 샀다.
집을 사고 4개월 정도 됐을 때다.
내년이 졸업반이니까 삼숙이가 도시에 산 집으로 이사하려면 꼭 7개월 남은 때였다.
어느 날 새벽.
지난밤부터 몰아치는 파도를 무릅쓰고 사촌오빠가 찾아 왔다. 찾아온 이유는 황당했다. 아니 아버지를 몹시 난처하게 했다.
아버지에게 그 집을 담보로 대출보증 서줄 것을 요구했다.
처음엔 사정하는 것 같더니 며칠 후 술에 취해 다시 찾아 왔을 때는 당당한 요구로 변해있었다.
“작은아버지! 양심이 있으면 말해 보세요. 모두 작은아버지 때문이었잖아요. 이제 보증은 필요 없고, 우리 아버지나 찾아 주세요.”
첫댓글 학교 안다닌 삼숙의 마음이 순식간에 어둠이 내려앉고
몸둘바모른게 가슴아픈 일입니다.
갈수록 제미가 더해가는군요 소설 오늘도 즐감해봅니다.
행복 주일 가족과 나들이 안 가시고?
죄송...나 때문인거 같아요
삼숙을 위해 고생하시며 모처럼 집하나 장만했던 전제산이
조카놈 때문에 집담보로 날아가는듯한 느낌이군요.
섬사람의 애환을 듣는듯한 소설 오늘도 여러가지 생각을 해봅니다.
추운 날시 행복한 휴일 보내세요..
고맙습니다 젠틀맨님
편한 주일되십시오
*
오늘 즉 주일은 제가 쉬는데 부안 가족을 위해 휴일없이 연작하기로 했습니다
체력 떨어지면 젠틀맨님이 알아서 해 주세요....ㅋㅋㅋㅋ
삼숙이 좋게보았던 그남자 당혹스런 질문에 몸둘바 모르는 삼숙이의 심정 감히 짐작이 됩니다.
여자에게 가장 가슴 아픈 것이 정조상실, 그 다음이 학벌이라죠?
학교를 제대로 못다닌 삼숙이 에게 너무 가혹한 질문이엇네요.
가연 그남자의 정채는 무엇일까 걱정됩니다.
그러게요..그 놈 직일 놈이죠?
삼숙의 갈등이 날로 심화 되어가겠슴니다.
모든것이 순조롭지 안을듯 합니다.
갈수록 기막힌 사연 걱정됩니다...저도요...ㅎ
소설은 설명이 길면 지루해 집니다.
대물림의 회호리... 덫에 걸릴 것 같은 삼숙...
다음이 기대됩니다
정답. 채택. 감사
허지만. 구비구비 닥치는 파트클라이맥스로 가기 위해 약간 설명이 필요 할 때도 있더군요.
폭풍의 눈 같은 기법이죠?
저는 단편형식으로 장편을 쓰기 때문에 속도가 있고 잡표현을 가급적 자제하긴 합니다 만
오늘은 양념이 초과었었나요?
좀 더 함축해 보겠습니다...이런 충고가 탈고 때 제겐 큰 도움 됩니다
아현님의 직설적인 혹평 보내 주세요
제가 제일 듣고 싶은 것이 혹평입니다...허지만 욕은 하시지 말고요...ㅋㅋㅋㅋ
좋은날 행복한 주일되세요
삼숙이의 마음속이 착찹해옴을 느낍니다.일생 일대의 가장 중요한 결정판
갈등이 심화 될수밖에 업겠죠..
중대한 판단 일생을 좌우하는순간 숨막혀오네요...
모나리님
눈이오네요
모나리 사시는 곳은 어떤지 모르지만 눈이 오는 날은 왠지 쏘다니고 싶어집니다
허지만..겁나서 못나갑니다
모나리님도 즐거운 시간 가족과 함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