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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의 기도
마 26:36-46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마 26:36-46 /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막14:32-42,눅22:39-46]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라는 동산으로 가셨다. 거기서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고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있으라' 하고 이르신 뒤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는 근심과 번민에 싸인 얼굴로 38) 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것 갈구나. 여기 머물러 있으라. 여기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 다오.' 39) 예수께서는 홀로 조금 앞으로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셨다. `아버지, 만일 하실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40) 그리고 세 제자에게 돌아오셔서 그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단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41) 깨어 기도하라. 그렇지 않으면 시험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은 간절하나 육신이 약하구나!' 42) 예수께서는 다시 그들을 떠나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만일 이 잔이 내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것이거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43) 예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오셨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들은 눈이 피곤하여 잠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44) 예수께서는 그들을 두고 세번째 되돌아가셔서 다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45) 그리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셨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그렇게도 피곤하더란 말이냐? 하지만 때가 왔다. 인자는 악한 자들의 손에 넘겨지게 될 것이다. 46)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넘겨 줄 자가 가까이 와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겟세마네(36-38)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기도하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기름을 짜는 틀이라는 겟세마네의 뜻처럼 주님은 곧 받게 될 십자가 고난에 심적으로 심히 짓눌린 상태였습니다. 무엇보다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게 될 것을 아셨기에 주님의 고뇌는 깊었습니다(마 27:46). 그때에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핵심 멤버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자신의 고뇌를 피력하셨고 자신과 함께 깨어 있기를 부탁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진 완전한 인간이기에 고난의 시간에 제자들이 함께 해 주기를 바라셨습니다(히 4:15). 고난의 시간에 함께 기도해 주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베풀 수 있는 따뜻한 사랑일 것입니다.
세 번의 기도(39-44)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완전한 기도의 모델을 발견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극한 고뇌 속에서 아버지께 기도드렸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법은 기도였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는 위기의 순간에 믿는 자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탈출구는 오직 기도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혼자 하는 기도보다 함께 하는 기도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십니다. 셋째,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자신의 소원을 아버지께 먼저 요청하셨지만 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자신의 소원을 철회합니다. 완전한 기도는 하나님을 자기 소원대로 조종하지 않으며, 도리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합니다. 넷째, 예수님은 반복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고난이 클수록 기도가 반복되어야 합니다. 반복기도는 중언부언과 다릅니다. 중언부언은 뜻 없이 미사여구를 길게 늘어놓는 것이지만, 반복기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반복적으로 요청하는 것입니다. 한편, 제자들은 깨어 기도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사탄의 시험을 받게 됩니다. 제자들의 첫 번째 실패는 바로 기도의 실패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중보기도로 그들은 실족했다가 다시 회복됩니다(눅 22:31-32). 기도는 시험을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기도 후(45) 완전한 기도를 드리신 예수님은 더 이상 고뇌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기고 십자가 고난을 맞이합니다. 기도는 고난 중에도 담대함을 가져다줍니다.
적 용 : 당신은 기도의 효력을 얼마나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기도의 모델에 자신의 기도를 비교해 보세요.
설교를 매우 잘하기로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매주 주일이면 몇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러 왔습니다. 단 한 번도 빠지지 않던 여인이, 어느 날 설교가 너무 길어 늦게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문을 잠그고 집 안에서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목사님 설교를 듣고 왔어요.” 남편은 ‘목사님 얼굴에 침을 뱉고 오기 전까진 집에 들어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 소문을 들은 목사님은 어느 날 그 여인을 불러 자신의 눈이 몹시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침을 바르면 약이 된다는데, 당신이 침을 좀 발라 주시오.” 여인은 할 수 없이 목사님의 눈에 침을 뱉었습니다. 여인이 돌아가자 목사님의 친구가 물었습니다. “무슨 연유로 그 여인에게 침을 뱉게 한 건가?” 그러자 목사님은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고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한 일이라도 해야 하는 걸세.”
< 설 교 >
예수님의 눈물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천국 모습에 대해서 그림처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있지 않다.” 이 말로 천국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것이 없음에 대한 약속입니다.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마음이 움직였다는 일인데 몇 가지 종류가 다릅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보았을 때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데도 내 마음이 움직여서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TV 프로그램 가운데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왜 헤어졌는지, 엄마가 왜 나를 버리고 갔는지, 모든 사연을 솔직히 밝히고 다시 만나게 되는데 그 마지막 만나는 장면에서는 시청자들도 전부 울게 됩니다. 그 사람들과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감격해서 흐르는 눈물입니다. 저는 목회 시작할 때 교회 나오는 20세 된 청년 한명이 나를 찾아와 슬픈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한테 해주는 말은 자기가 두 살 때 엄마가 집을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는데 이제 와서 엄마를 꼭 찾고 싶지만 찾을 길이 없다고 이야기였습니다. 그때는 TV, 인터넷이 발달해서 지금 사회처럼 슬픈 사연이 있는 개인을 도와주는 문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우리 한번 엄마를 찾아 나서자.” 그래서 그때부터 그 청년과 함께 엄마 찾기 운동에 온갖 정보 수집을 다하고 온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며 찾고 찾아서 한 6개월 만에 마침내 그 청년의 엄마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기억이 안양으로 기억됩니다. 옛날에는 다방이라는 것이 많았기 때문에 안양 시내의 어떤 다방에서 엄마를 처음 만나서 보는데 엄마는 딸을 알아보는 겁니다. 그래서 둘이 얼싸안는데 나도 눈물이 북받쳐서 참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셋이서 다방에서 막 울게 되었는데 다방에 손님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 사람들이 와서 얼싸안고 울고 난리치니까 손님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설명을 했습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저는 교회 목사인데, 저희 교회 이 청년이 두 살 때 헤어진 어머니를 지금 만나는 순간이라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되었으니까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광고를 했더니 그 다방에 있는 사람들이 그냥 다 같이 박수를 쳐주고 거기 여자 손님들은 같이 울어주는 겁니다. 전에 그랬던 목회 경험이 있었습니다. 또, 우리가 너무 기쁠 때 종류가 다른 눈물이 흐릅니다. 여러분!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면 좋잖아요? 그런데 울지 않습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조국의 깃발이 그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올라갈 때 또 다른 종류의 마음을 움직이는 눈물이 흐르게 됩니다. 가족의 사별이나 아픈 이별이나 또 큰 실패가 왔을 때 또 다른 아픔의 눈물을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눈물이 날 때는 흘리라는 것입니다. 의학적으로 말하면 이 눈물이 나는 것은 뇌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뇌를 맑고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작업의 역할을 눈물이 한다고 합니다. 특별히 두통에 큰 효과가 있다고 의학적으로 밝혔습니다.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것은 하나도 해가 없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눈물을 흘려야 할 때 흘리지 않으면 개인이나 국가의 역사가 잘못 갈 수가 있습니다. 저는 8년 전에 교회에 부임할 때 한국에 여러 곳을 다니면서 볼 때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면 누구든지 화장실을 한번 씩 들리게 되잖아요? 그런데 가보니까 한국의 화장실 문화가 얼마나 깨끗하게 변했는지 놀랐습니다. ‘공중변소가 이렇게 깨끗하게 되다니 한국이 굉장히 발전했다.’ 아주 기뻐했는데 여자들은 모르는 이야기인데 남자 화장실은 앞에 문장이 하나 붙어있는데 그 말은 또 너무나 좋은 말이 붙어있습니다. 볼일을 보면서 보게 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누가 이런 아름다운 말을 여기에 붙여놓았을까?’ 그런데 휴게소마다 다 그렇게 해 놓았습니다. 아마 화장실 깨끗이 쓰자는 캠페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아름다운 말로는 캠페인이 안 되는가 봅니다. 요즘에는 약간의 험악한 말로 다 바뀌었습니다. “남자가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이 아닙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세 번 눈물을 흘리신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물은 세 번 다 똑같은 비애 눈물이었습니다. 슬픔 때문에 흘리신 눈물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 눈물의 뜻을 살펴보면 우리 눈물의 뜻도 알게 됩니다.
1. 먼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셨다고 누가복음 19장 41~42절에 나와 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는 숨겨졌도다.” 그러고 나서 아주 슬픈 탄식의 시를 남기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적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이런 시 한편을 남기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때 눈물은 무슨 뜻인가? 택한 백성의 심판을 슬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예루살렘이 자신을 영접하고 메시야 선언을 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 반대로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야를 십자가에 죽이는 일을 예루살렘이 하기로 지금 진행 중입니다. 예루살렘이나 유대나라, 유대 민족의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먼저 선택하신 이유는 너희들이 노력하여서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전하는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예수님의 애착이 많이 나옵니다.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 예루살렘이 예루살렘의 사명이 있다. 하나님이 이 성을 거룩한 도성으로 선택하신 이유가 있다. 여기에서 인간 구원이 온 세계로 확산되기를 바란다. 핍박이 심해도 떠나지 말고 여기 있으라. 아버지의 약속이 이곳에 올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를 명령하실 때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루살렘을 제일 먼저 복음화 하라.” 예루살렘이 예루살렘의 사명을 모르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죄인으로 선언해서 십자가에 무자비한 죽음을 행하게 하는 죄악의 도성이 되었음을 슬퍼하는 예수님의 눈물입니다. 우리 뜻이 있고 생각이 있는 성도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내가 몸을 담고 사는 이 국가가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뜻을 떠난 민족은 심판이 있다고 지금 예수님이 울고 계십니다. “보라!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그대로 되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아무리 훌륭하게 살고 아무리 성공하고 성취를 하였다 하여도 국가가 망하면 내 개인의 성취가 보장되겠습니까? 우리는 국가와 민족의 공동 운명체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나라가 건강하도록 기도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선교지 국가로 제사장의 백성으로 선택하여서 예루살렘을 기초로 하여서 온 세상에 구원의 빛을 비추라고 그렇게 그 민족과 그 나라와 특별히 예루살렘이 정 반대의 길을 가고 민족 사명의 뜻을 버린 것을 보시고 우신 겁니다. ‘어쩌다 예루살렘이 이 모양으로 되어 가는가?’
■ 연세가 90이 가까우신 집사님 한 분이 심방을 갔더니 재산 자랑을 하셨습니다. 캐비닛에서 문서를 이만큼 끄집어내시고 “목사님! 이거 보십시오. 이거 다 땅문서입니다. 여기 다 내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논이 6천 평이랍니다. 이 논이 다 내 것입니다. 모두 내 이름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거 보십시오. 밭도 만평도 넘습니다. 목사님! 이거 보십시오. 다 내 이름이잖아요? 땅도 많고 과수원이고 집이 세 채이고….” 정신없이 나한테 자랑하시는 겁니다. 목사들은 그런 때가 기회입니다. “집사님! 2~3년 있으면 90이십니다. 이렇게 많은 재산 다 뭐 하실 겁니까? 연세가 이쯤 되었으면 하나님이 이렇게 많이 주신 것을 반은 아니어도 그래도 일부 하나님께 바치시고 천국 가시는 게 좋잖아요? 자랑만 하면 뭡니까?” 목사들은 그런 때를 기회로 잡아서 ‘이때 아니면 안 된다.’ 합니다. 그랬더니 그분의 말씀은 “나 이거 다 바치겠습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바치고 싶습니다. 이거 가져서 뭐합니까? 하나님께 다 바치고 싶습니다.” “어? 그런데 왜 안 바치십니까? 그러면 오늘 내가 왔으니까 오늘 다 바칩시다. 가족들이 반대합니까?” “자식들이 반대하다니요? 아닙니다.” “그러면 오늘 작업합시다.” 저는 그때 교회 돈도 모자랐는데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줄 알고 너무 좋았는데 그분 대답이 “이 땅이 북한이 있습니다. 6·25 동란 때 땅문서만 가지고 피난 왔습니다. 언제 통일 될까요?” 그분은 돌아가시고 아들이 지금 가지고 있습니다. 소망 중에 그래도 기다린다고 하십니다. 그분은 “피땀 흘려서 이렇게 모아둔 것을 하나님 위해 한 번도 써보지 못하고 공산당한테 다 빼앗기다니 지금 이게 뭡니까? 내 슬픔을 지금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남한에 땅 있는 분들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라가 망했는데 내 성취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면서 다 망할 것이다. 황폐하여 버린바 될 것이다. 그 욕심스러운 너희들의 그 모든 것이 뭐가 되겠느냐? 이렇게 귀하고 귀하게 쓰임 받을 예루살렘이 이게 뭐하는 짓이냐?” 슬퍼하시며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민족사랑은 성경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세금 받는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너희 선생은 왜 세금을 안내느냐?” 그랬더니 베드로가 “세금 내겠다.” 돈 가지러 집으로 들어가려 하니까 “베드로야, 이리 와라. 너 바다에 들어가서 낚시질해라. 먼저 오르는 고기의 입을 열면 동전 한 세겔이 나올 텐데 우리 성전 세금 반 세겔 씩 내도록 되어 있지 않느냐? 너와 나 둘을 위해서 그 한 세겔을 세금 내어라.” 이런 모습도 나오고 전도하실 때도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수로보니게 이방 여자가 와서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자기 딸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내가 지금 너보다도 더 급한 자녀의 문제를 위해서 가고 있는데 그 떡을 취해서 너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특권을 우선 인정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예루살렘이,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이 그 사명을 잊어버렸을 때 예수님은 그 민족을 향해서 슬퍼하시는 겁니다. 오늘이 8월 29일입니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나라 빼앗긴 국치일 그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살았으나 죽은 것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너희 나라는 나라도 지키지 못하고 남의 나라한테 빼앗겨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어제 조선일보에 서울대 교수 한분이 “대한제국 황실 풍비박산의 백년이라.” 이런 글을 게재해서 제가 읽어봤습니다. “나라가 망한 후 왕손들이 어떻게 되었나? 마지막 황태손 이군은 일본에서 객사했다. 마지막 공주 덕혜공주는 정신병자로 생활을 마쳤다. 영친왕은 약혼한 여인 민갑완을 강제로 버리게 했고 이방자 일본 여자와 결혼을 해서 불행하게 생을 살았다.” 나라가 망했는데 왕손이면 뭐합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이 눈물 흘리시는 겁니다. “이 망할 나라! 폐허가 될 예루살렘! 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잊어버렸는가?” 미국의 카터 대통령은 미국 사회에서 별명이 전도사입니다. 국가 원수가 다른 나라 국가 원수를 만나서 전도하는 것은 금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카터는 꼭 전도를 합니다. 그래서 그런 별명이 붙은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 만났을 때도 전도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통치자 한 사람의 신앙은 국민에게 큰 영향력이 있다는 것은 그가 너무나도 믿기 때문에 법을 어겨가면서 교회 다니라고 전도했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보면서도 울어야 할 때는 울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가 건강해 집니다. “이 나라가 갈 길이 어디인가? 방향을 잃은 국민이 아닌가?” 이렇게 우리가 울어야 합니다.
2. 두 번째는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울었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보고 “보라! 그가 나사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이 눈물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눈물입니다. 이웃은 나와 어떤 존재인가?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습니다. “율법이 613개나 되는데 그중에서 제일 큰 계명이 어떤 겁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요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다.” 우리가 분명히 경험하는 것이 있지요? 가장 큰 기쁨도 가장 큰 아픔도 이웃 관계에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다른 교회에서 하는 않는 헌금 순서가 하나 있지요? “착한 사마리아인 주일”을 지킵니다. 그러면 착한 사마리아인 예화 설교를 예수님이 하신 동기를 우리가 봅시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그래서 이웃을 가르쳐주려고 하신 설교가 이 설교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레위인도 제사장도 그냥 지나갔는데 어떤 사마리아인 사람이 정성껏 돌보아 주었으니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맞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게 하나 있습니다. 내가 강도 만난 자의 입장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 입장이 되라는 것입니다. 좋은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교도소 사역을 많이 하니까 교도소에서 저한테 편지가 많이 옵니다. 그 사람들 성경을 얼마나 잘 아는지 성경 말씀을 기록해서 저한테 요청을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강도 만난 사람 예수님이 설교하실 때 잘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돈 얼마를 며칠까지 어디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저는 그 사람에게 뭐라고 답변해야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성경을 거꾸로 해석하는 겁니다. “당신은 강도 만난 자가 아니라 강도가 아니었습니까? 누가복음 10장은 당신 같은 사람이 강도 만난 자를 돌보라는 말씀입니다. 왜 성경을 거꾸로 해석하십니까? 동정을 구하는 것은 좋지만 성경 말씀은 제대로 인용하십시오.”
■ 제가 옛날에 초등학교 다닐 때는 교과서 도덕 과목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욕심 많은 소년 한명이 혼자 생각하는 겁니다. 넓은 들을 바라보면서 ‘나 혼자 살면 저 땅이 다 내 것인데….’ 은행의 산더미 같은 돈뭉치를 바라보면서 ‘나 혼자 살면 저 돈도 다 내 것인데….’ 서울의 그 많은 빌딩, 백화점의 그 많은 물건 보면서 ‘나 혼자 살면 저거 다 내 것인데….’ 그리고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행복한 자기 삶을 설계하며 계산합니다. ‘밥을 먹으려면 농부는 있어야겠다. 농부는 살려주자.’ 그래서 “내가 밥 먹어야 되니까 농부는 살아라!” 어디 가려면 자동차도 필요합니다. ‘어? 자동차 만드는 사람도 필요하네?’ “그래, 자동차 만드는 사람도 살아라!” 옷을 입으려니까 ‘옷 만드는 사람도 필요하네?’ “옷 만드는 사람도 살아라!” 나중에 보니까 다 필요합니다. 그래서 “에이, 다 살아라!” 세상은 다 살아야 합니다. 어느 때가 되면 다 나를 도와주는 일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내 이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은 좋은 이웃이 없어지는 것에 대한 이웃의 고통을 눈물로 답해주는 겁니다. 이웃의 아픔에 동참해 주는 눈물이 있을 때 세상은 살기 좋아집니다.
3. 마지막 오늘 말씀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 눈물의 뜻이 뭡니까?
이 눈물은 자신의 사명을 놓고 우시는 겁니다. 인류를 위해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주님이 맡으셨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사명은 곧 눈물입니다. 눈물 중에 값진 눈물입니다. 우리 눈에서 이 값진 뜨거운 눈물이 흐를 때 사명은 완수되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울며 씨를 뿌리는 자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우리 몸에서 산출되는 세 가지 액체가 있습니다. 피와 땀과 눈물입니다. 이 세 가지를 값지게 흘리는데서 이 세상은 아름다워지고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흘렸던 그 세 가지의 눈물의 의미를 세상에 알리고 전하며 내가 거기에 동참하는 공동체입니다. 그것을 십자가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부터 끝까지 아픔과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눈물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명을 놓고 평가할 때 하나님의 일은 세상 기준으로 평가하면 안 해도 괜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을 사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명감을 깨달은 사람에 의해서 운영되는 공동체입니다. 레위인도 제사장도 강도 만난 자를 보고 그냥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냥 지나갔다고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와서 “여보세요. 당신들 왜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쳐 왔습니까?” 묻는 사람도 없고 “당신 그랬으니까 제사장 직분 그만 두시오.” 그러는 사람도 없습니다. 안 해도 괜찮은 일이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을 때 안 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나쁜 놈들이다.” 그렇게 평가는 안하셨습니다. “하고 싶지 않아서 안했을 뿐이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안 해도 되는 일을 했다.” 그래서 그것을 예수님이 잘했다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이번 목요일, 금요일 우리 교회에서 목사 될 사람들 면접하는 일을 제가 해야 합니다. 제가 늘 후배 목사들에게 묻습니다. “누가 당신들 보고 목사 되라고 했느냐?” “아닙니다. 나더러 목사 되라고 한 사람 없습니다.” “그런데 왜 되려고 하느냐?” 이것이 곧 사명입니다. 안 해도 되는 일을 누가 하라고 한 일도 아니고 안 해도 괜찮은 일을 사명으로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평생 교회에서 봉사하시죠? 누가 하라고 합니까? 내가 교회 봉사 안했다고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헌금 안했다고 국세청 직원이 야단칩니까?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저희 교회가 온 세상에 1,300명 선교비 보내기 위해 힘들게 쩔쩔 매는데 안하면 어떻습니까? 안한다고 “○○○교회 왜 선교비 안내?” 그럽니까? 순교 당하지 않으면 천국 못갑니까? 그런데 왜 목숨까지 잃어가면서 그렇게 비참하고 어려운 일을 하며 예수를 믿지요? 사명감이 있는 사람이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순교 당하는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명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기준으로 평가하면 바보들입니다. 교회는 바보들의 공동체입니다. 바보들의 대장이 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요즘 수요예배에서 제가 빌립보서를 강해하는데 지난 시간에 제가 3장 초반을 했습니다. 거기 뭐라고 합니까? 지독한 바보 한 사람이 소개 되잖아요?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것을 지금 다 갖고 소유했던 사람입니다. 8일 할례자요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 전공자요 바리새인이요 국가 최고기관의 출세한 자요 학문으로는 가말리엘 문하생이라.” 이 말은 “나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 나와 봐라.” 이겁니다.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그렇게 젊은 나이에 유명해 진 겁니다. 그런데 “그 좋은 것을 배설물, 똥과 같이 내가 여겼습니다. 그리고 뭘 얻었느냐?” 이런 것을 얻었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있지요?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러면 바울이 그 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 좋은 것들을 가지고 일평생 행복하게 살았다면 누가 뭐랍니까? 그런데 왜 버리고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을 선택했느냐 말입니다. 사명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사명감 있는 사람에 의해서, 바보들이 모여서 운영하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예수님의 마지막 고민입니다. 선택의 기회가 마지막으로 주어졌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버리고 말 것인가?’ 밤새도록 기도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최종 결단은 십자가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뭐가 이루어졌습니까? 인류 구원의 완성이 그곳에서 이루어진 거 아닙니까?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데 필요한 예수님이 지금 이 시대에 하셔야 될 그 일을 내가 맡아서 하는 사명감에서 사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나 고린도 교회가 이 시대에 있다면 그 교회들이 해야 되는 일을 우리 교회가 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가는 겁니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다 바보들이고 안 해도 되는 괜찮은 일을 놓고 무슨 고민을 하고 슬퍼하고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고 저렇게 야단인가? 바보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내가 어떤 나의 삶의 길을 갈 것인가 고민하고 슬퍼하며 최종 결단을 아버지의 뜻으로 내리는 삶의 방향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성경은 뭐라고 말하나? “세상에서는 너희를 바보로 취급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가장 지혜스러운 자들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패러독스 진리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사명을 놓고 심각한 고민을 해보고 눈물을 흘려봐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감을 삶의 기초로 해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고민과 슬픔과 눈물의 뜻이 무엇인가? 왜 나사로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또 우셨는가? 세 번 흘리신 예수님의 눈물의 뜻을 저희들이 조명하면서 저희들도 우리에게 주신 사명감을 가지고 그렇게 영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주어지게 하사 가장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최종의 결단을 내리는 지혜스러운, 이 세상에서는 바보이지만 하늘나라의 지혜로운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